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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야스의 출생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542년, 지금의 아이치 현(愛知縣) 지방인 미카와(三河)의 오카자키(岡崎) 성주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廣忠)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조상은 떠돌이 승려이던 도쿠아미(德阿彌)다. 15세기 초 도쿠아미는 마쓰다이라 마을에 들어와, 지방유지인 마쓰다이라 노부시게(信重)의 사위가 되어 정착했다. 이때 그는 이름을 마쓰다이라 다로사에몬 치카우지(太郞左衛門親氏)로 바꾸었다.
이 치카우지의 9세 손이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인데 이에야스의 아명은 다케치요(竹千代)였다.
- 인질로 출발한 생애
지방 토호로 출발한 마쓰다이라 가문은 전국의 풍운에 편승해 차차 인근 지방을 공략하여 영지를 넓혀갔다. 그러다 7대째인 기요야스(淸康) 대에 이르러 오카자키 성을 본거지로 하여 미카와 일대를 거의 장악하는 세력을 형성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확장은 불가능했다. 동쪽에 있는 이마가와(今川), 서쪽에 있는 오다(織田) 양대세력으로부터 잇따라 공격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존립마저 위협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히로타다 대에 이르러 마쓰다이라 가문은 이마가와 밑에 들어갔다. 히로타다는 영지 보존을 약속받는 대가로 그의 아들인 다케치요를 인질로 보내게 된다.
다케치요(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질 생활은 처음부터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다케치요를 호송하던 히로타다의 가신이 돈에 매수되어 다케치요를 오다 쪽에 넘기고 만 것이다.
오다 쪽에서는 히로타다에게 사자를 보내 이마가와와 관계를 끊지 않으면 다케치요를 살해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히로타다의 대답은 단호했다. 자식에 대한 애정 때문에 이마가와와 맺은 우의를 배신한다면, 미카와 무사로서 체면이 서지 않으니, 다케치요를 죽이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물론 이것은 진심이 아닐 것이다. 무사의 체면이란 표면적인 구실일 뿐, 사실은 아들의 생명을 잃는 두려움보다도 이마가와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다케치요는 아버지 히로타다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다.
다행히 오다 쪽은 다케치요를 죽이지 않고 연금했다. 그리고 2년 후 이마가와와 인질교환을 하여 그를 석방했다. 그러나 보름 후 다케치요는 다시 이마가와의 거성인 슨푸(駿府)로 끌려가야만 했다. 그 동안 다케치요는 아버지의 변사로 가문을 승계하였으나 성주 신분인 채 12년 동안 인질로 고초를 겪게 된다.
다케치요에게 일대 전환기가 찾아온 것은 19세 때다. 그때까지 그는 이마가와의 노예였다. 그와 그의 가신들은 전투가 있을 때마다 예외없이 가장 위험한 최일선에 투입되어 사투를 강요받았다. 요컨대 그들은 이마가와 군의 외인부대로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싸움터에서 그들은 용감했다. 비록 인질이기는 하나 가능한 한 자신의 강인함을 보여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2중 3중으로 묶인 속박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면 반드시 때가 온다고 믿었다. 그가 항상 용감하게 싸운 것은 이마가와 가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였다.
14년에 걸친 인질 생활은 그에게 놀라운 인내력과 언제나 합리적인 판단을 하게 하는 집념을 제2의 천성으로 심어주었다. 강인・용기・검소・침착・극기・결단・신의 등의 덕목을 겸비한 사람은 결코 많지 않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이 모든 것을 소년기의 인질생활을 통해 철저히 체득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절의 이에야스는 반드시 불운했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 같다.
- 나의 보배는 가신
다케치요가 슨푸에서 치욕스러운 인질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오카자키에 있는 가신들 역시 말할 수 없는 인종과 고통을 강요받고 있었다.
오카자키 성에서 산출되는 쌀은 이마가와에서 파견한 성주 대리가 모조리 슨푸로 실어갔다. 그러므로 주군이 없는 땅에 사는 오카자키의 가신들에게 녹봉이 지급될 리 없었다. 가신들은 신분이 다른 농민과 마찬가지로 괭이와 호미를 들고 땅을 파서 가족들을 부양해야 했다. 이들은 오카자키 성에 진주해 온 이마가와의 가신들로부터 갖은 멸시와 차별을 받고도 참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구나 이들은 이마가와가 외부와 싸움을 벌일 때마다 선봉에 나서도록 명령받았다. 여기에는 도쿠가와 가신들을 멸절(滅絶)시키려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에 신음하는 가신들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주군인 다케치요가 인질에서 풀려, 어엿한 영주로서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것이 실현된다면 그들은 곤궁과 비굴로부터 단번에 해방된다.
미카와의 가신들은 그때를 위해 와신상담하면서 끈기 있게 충성심을 연마했다. 이것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다음과 같은 일화다.
다케치요가 13세 때 성묘를 위해 잠시 자기 영지로 돌아온 적이 있다. 고향에서는 80이 넘은 노신 도리이 타다요시(鳥居忠吉)가 그를 맞았다. 어느 날 타다요시는 감시의 눈을 피해 다케치요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다케치요가 들어가니 거기에는 놀랍게도 돈과 식량, 무기가 가득 숨겨져 있었다. 고향의 가신들이 곤궁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잘 아는 다케치요는 깜짝 놀랐다. 이를 본 타다요시가 눈물을 흘리면서 설명했다.
“주군이 성장하셨을 때를 대비하여 적의 눈을 속여 가며 비축한 것입니다. 장차 이것을 기초로 재기하여 훌륭한 영주가 되십시오. 그것만이 이 노신의 희망입니다”
감격한 다케치요는 타다요시의 손을 잡고 울었다고 한다.
곤궁 속에서도 충성으로 일관하는 미카와 무사의 심정을 잘 말해 주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계속)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542년, 지금의 아이치 현(愛知縣) 지방인 미카와(三河)의 오카자키(岡崎) 성주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廣忠)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조상은 떠돌이 승려이던 도쿠아미(德阿彌)다. 15세기 초 도쿠아미는 마쓰다이라 마을에 들어와, 지방유지인 마쓰다이라 노부시게(信重)의 사위가 되어 정착했다. 이때 그는 이름을 마쓰다이라 다로사에몬 치카우지(太郞左衛門親氏)로 바꾸었다.
이 치카우지의 9세 손이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인데 이에야스의 아명은 다케치요(竹千代)였다.
- 인질로 출발한 생애
지방 토호로 출발한 마쓰다이라 가문은 전국의 풍운에 편승해 차차 인근 지방을 공략하여 영지를 넓혀갔다. 그러다 7대째인 기요야스(淸康) 대에 이르러 오카자키 성을 본거지로 하여 미카와 일대를 거의 장악하는 세력을 형성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확장은 불가능했다. 동쪽에 있는 이마가와(今川), 서쪽에 있는 오다(織田) 양대세력으로부터 잇따라 공격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존립마저 위협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히로타다 대에 이르러 마쓰다이라 가문은 이마가와 밑에 들어갔다. 히로타다는 영지 보존을 약속받는 대가로 그의 아들인 다케치요를 인질로 보내게 된다.
다케치요(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질 생활은 처음부터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다케치요를 호송하던 히로타다의 가신이 돈에 매수되어 다케치요를 오다 쪽에 넘기고 만 것이다.
오다 쪽에서는 히로타다에게 사자를 보내 이마가와와 관계를 끊지 않으면 다케치요를 살해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히로타다의 대답은 단호했다. 자식에 대한 애정 때문에 이마가와와 맺은 우의를 배신한다면, 미카와 무사로서 체면이 서지 않으니, 다케치요를 죽이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물론 이것은 진심이 아닐 것이다. 무사의 체면이란 표면적인 구실일 뿐, 사실은 아들의 생명을 잃는 두려움보다도 이마가와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다케치요는 아버지 히로타다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다.
다행히 오다 쪽은 다케치요를 죽이지 않고 연금했다. 그리고 2년 후 이마가와와 인질교환을 하여 그를 석방했다. 그러나 보름 후 다케치요는 다시 이마가와의 거성인 슨푸(駿府)로 끌려가야만 했다. 그 동안 다케치요는 아버지의 변사로 가문을 승계하였으나 성주 신분인 채 12년 동안 인질로 고초를 겪게 된다.
다케치요에게 일대 전환기가 찾아온 것은 19세 때다. 그때까지 그는 이마가와의 노예였다. 그와 그의 가신들은 전투가 있을 때마다 예외없이 가장 위험한 최일선에 투입되어 사투를 강요받았다. 요컨대 그들은 이마가와 군의 외인부대로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싸움터에서 그들은 용감했다. 비록 인질이기는 하나 가능한 한 자신의 강인함을 보여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2중 3중으로 묶인 속박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면 반드시 때가 온다고 믿었다. 그가 항상 용감하게 싸운 것은 이마가와 가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였다.
14년에 걸친 인질 생활은 그에게 놀라운 인내력과 언제나 합리적인 판단을 하게 하는 집념을 제2의 천성으로 심어주었다. 강인・용기・검소・침착・극기・결단・신의 등의 덕목을 겸비한 사람은 결코 많지 않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이 모든 것을 소년기의 인질생활을 통해 철저히 체득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절의 이에야스는 반드시 불운했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 같다.
- 나의 보배는 가신
다케치요가 슨푸에서 치욕스러운 인질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오카자키에 있는 가신들 역시 말할 수 없는 인종과 고통을 강요받고 있었다.
오카자키 성에서 산출되는 쌀은 이마가와에서 파견한 성주 대리가 모조리 슨푸로 실어갔다. 그러므로 주군이 없는 땅에 사는 오카자키의 가신들에게 녹봉이 지급될 리 없었다. 가신들은 신분이 다른 농민과 마찬가지로 괭이와 호미를 들고 땅을 파서 가족들을 부양해야 했다. 이들은 오카자키 성에 진주해 온 이마가와의 가신들로부터 갖은 멸시와 차별을 받고도 참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구나 이들은 이마가와가 외부와 싸움을 벌일 때마다 선봉에 나서도록 명령받았다. 여기에는 도쿠가와 가신들을 멸절(滅絶)시키려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에 신음하는 가신들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주군인 다케치요가 인질에서 풀려, 어엿한 영주로서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것이 실현된다면 그들은 곤궁과 비굴로부터 단번에 해방된다.
미카와의 가신들은 그때를 위해 와신상담하면서 끈기 있게 충성심을 연마했다. 이것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다음과 같은 일화다.
다케치요가 13세 때 성묘를 위해 잠시 자기 영지로 돌아온 적이 있다. 고향에서는 80이 넘은 노신 도리이 타다요시(鳥居忠吉)가 그를 맞았다. 어느 날 타다요시는 감시의 눈을 피해 다케치요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다케치요가 들어가니 거기에는 놀랍게도 돈과 식량, 무기가 가득 숨겨져 있었다. 고향의 가신들이 곤궁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잘 아는 다케치요는 깜짝 놀랐다. 이를 본 타다요시가 눈물을 흘리면서 설명했다.
“주군이 성장하셨을 때를 대비하여 적의 눈을 속여 가며 비축한 것입니다. 장차 이것을 기초로 재기하여 훌륭한 영주가 되십시오. 그것만이 이 노신의 희망입니다”
감격한 다케치요는 타다요시의 손을 잡고 울었다고 한다.
곤궁 속에서도 충성으로 일관하는 미카와 무사의 심정을 잘 말해 주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계속)
출처 : 日本戰國時代物語
글쓴이 : Shogun21c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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