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일본이야기

무장의 최후6-아사히나 야스토모

구름위 2013. 1. 4.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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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들의 최후

 

 

전국시대, 뜻하지 않는 때에 많은 무장들이 사라져갔다.
비명횡사, 무념의 죽음, 너무 빠른 죽음. 여러 종류의 명장들의 최후…

 

 

 

 

朝比奈泰朝[조비내태조](아사히나 야스토모)

 

 

주가와 함께···  향년 ???세

 

 

 

 

 

 

 

永錄 3년(1560) 5월,

교토를 목표로 상경중이던 今川義元(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오다 노부나가의 기습을 받고 오케하자마에서 죽었다.

 

 

이것을 기회로 松平元康(마츠다이라 모토야스)등의

三河(미카와)의 무장들은 이마가와가를 배반하고

오다가와 손잡아, 이마가와가의 융성은 땅에 땅에 떨어졌다.
거기에 더해 후계인 요시모토의 적남 氏眞(우지자네)는

도저히 당주의 그릇이 아니었다.
이 우지자네를 비호하며 이마가와가 마지막 때까지

행동을 함께 한 무장이 있었다.
그 무장이 아사히나 야스토모이다.

 

 

야스토모를 시작으로 하는 아사히나 일족은
그 이름이 빈번히 이마가와씨의 중신으로서 기록에 등장한다.
야스토모의 아버지 泰能(야스요시)는

이마가와가 중신의 필두이며
氏親(우지치카)로부터 요시모토까지 삼대를 섬긴 가신이었다.
小豆坂(아즈키자카) 전투에서는

太原雪齋(타이겐 셋사이)의 부장으로서 오다군을 격파했다.
弘治 3년(1557) 그 아버지의 죽음으로

야스토모는 이마가와가 중신의 책무를 계승했다.
오케하자마의 전투에서는 오다측의

鷲津砦(와시즈 진)을 설복시키지만
요시모토의 전사를 알고 퇴각했다.

 

 

이마가와 몰락 후에도 야스토모는 이마가와를 버리지 않고
반대로 배신 하려고 하는 이들을 처형했다.

永錄 5년(1562)에는, 우지자네의 명으로

내통하고 있다고 여겨진
井伊直親(이이 나오치카)를 토벌하고 제거했다.

 

 

그러나, 그런 야스토모의 진력에도 불구하고
구르기 시작한 凋落의 톱니바퀴는 안정되기는 커녕,

한층 더 그 도는 속도를 빨리해 갔다.
그리고 永錄 11년(1568) 12월, 한 때의 동지였던

다케다 신겐의 駿河(스루가) 침공을 맞이했다.
이마가와가는 대진했지만, 다케다군의 맹공으로 완패당해
스루가 이마가와관으로 퇴진하고 쫓는 신겐은

슨푸에 난입해 이마가와관을 다 태워버렸다.
우지자네는 이에 대항할 방법이 없어 야스토모가 지키는
遠江(도토우미) 掛川(가케가와)성으로 도망쳤다.

 

 

야스토모는 주군을 거성으로 맞아들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대군을 상대로 5개월에 걸쳐서

방어전을 펼치지만 결국은 개성하는것으로 몰린다.

永錄 12년(1569) 5월의 일이였다.
우지자네는 생명은 가까스로 보장되었지만,

이마가와가는 사실상 이것으로 멸망했다.

 

 

우지자네는 호죠가의 비호하에 들어가고

야스토모도 이에 따랐다.
우지자네는 호죠 멸망 후에도

오래 살아 77세에 그 생애를 마치지만
야스토모의 그 다음은 불명하다.

일설에는 호죠가를 섬겼다고도.

 

 

어쨌든 이마가와 멸망과 함께

야스토모도 역사의 정식 무대로부터 사라졌다.

 

 

멸망해 가는 명가를 충의로 끝까지 지지한 야스토모의 생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