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들의 최후
전국시대, 뜻하지 않는 때에 많은 무장들이 사라져갔다.
비명횡사, 무념의 죽음, 너무 빠른 죽음. 여러 종류의 명장들의 최후…
長宗我部盛親[장종아부성친](쵸소카베 모리치카)
凋落, 그리고 여름의 진 향년 41세
四國(시코쿠) 통일을 완수한 長宗我部元親(쵸소카베 모토치카)의 4남.
아명 千熊丸.
天正14년(1586)에 맏형 信親(노부치카)가
戶次川(토츠기강) 전투에서 전사하자 쵸소카베가의 계승자가 된다.
두 명의 형들은 모두 양자로 나와 있기도 했었지만,
모토치카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한것으로 생각된다.
노부치카와 한 배에서 태어난 모리치카가 의지를 이어 주었으면 했던 것일까.
慶長4년(1599), 5월 19일, 아버지 모토치카가
伏見(후시미)에서 죽자 도사 22만석을 잇는다.
때마침 토요토미 히데요시, 마에다 토시이에가 연달아 죽어,
시류가 단번에 이에야스로 기울고 있던 그 때였다.
그 천하의 정권을 두고 이에야스에
정면으로 직면한 것이, 이시다 미츠나리였다.
다음 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모리치카는 당초 동군이 유리하다고 간파하고
이에야스에게 밀사를 보내 동군을 뒤따르려고 했으나
밀사가 近江(오미) 水口(미나구치)에서
長束正家(나츠카 마사이에)의 관문에 걸려 도사로 귀환해 버린다.
모리, 시마즈를 시작으로 주위를 서군으로 둘러싸인 모리치카는
서군을 따르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덧붙여, 掛川(카케가와)의 山內一豊(야마노우치 가즈토요)의 밀사는
순조롭게 이에야스측에 도착해, 전후 도사 일국이 주어진다.
불가피하게 모리치카는 6천6백의 군사를 인솔해 세키가하라에 참전했으나
이미 이에야스에 내응 하여 싸우지 않을 것을 결정하고 있던
吉川廣家(깃카와 히로이에)의 방해로
전투가 시작되어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뒤처지는 것은 모리치카의 긍지가 허락하지 않아
동군으로 돌격하려했으나 모리, 깃카와에게 배후를 찔린다.
南宮山 위에서 단지 전황을 보며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승리는 이에야스의 것이 되었다.
모리치카는 싸우지 않고 패배한채 세키가하라를 떠났다.
처분은 도사 일국의 몰수.
가신 久武親直(히사타케 지카나오)가 해를 피하려 선수를 쳐서
형 津野親忠(츠노 지카타다)의 살해가 이에야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영지 몰수의 한 요인이 되었다.
영주로부터 일개 낭인으로 몰락한 모리치카는
쿄토로 쫓겨가 거기서 [大岩祐夢]이라고 칭하며 서당의 선생이 된다.
그리고 14년, 모리치카는 쵸소카베가 재흥의 기회를 엿보며,
시간은 단지 흘러만 갔다.
모리차카의 이름이 다시 등장한 것은, 오사카 겨울의 진이다.
토요토미 히데요리 로부터의 권유를 받은 오사카성 입성이었다.
만석을 취하는 것부터 사나다 유키무라등과 대등하게
오사카성 五人衆으로 불려졌다.
마지막 기회에 투지에 가득찬 모리치카 였지만,
적들과 칼날을 겨루기도 전에 히데요리는 이에야스와 강화.
예측대로 일을 진행한 이에야스는
오사카성의 바깥 해자를 모두 다 메워 버린다.
이것으로, 토요토미군은 야전으로 나갈 수 밖에 없어졌다.
오사카 여름의 진.
토요토미군은 군을 두 개로 나누어 토쿠가와군을 맞아 싸웠다.
元和원년(1615) 5월 6일 미명, 八尾(야오) 방면으로 출진한 모리치카는
미명에 적의 藤堂高虎(도도 다카토라)군과 만난다.
짙은 안개속에서 난전이 되어 총을 봉쇄당한 도도군에 대해
쵸소카베군은 전투를 유리하게 진행한다.
정오까지 격전을 펼친 모리치카는 도도군을 괴멸로 몰아넣는다.
이 때가, 모리치카의 1생1대의 싸움이며, 쵸소카베의 마지막 승리였다.
[一領具足]의 가신들은 모리치카에게서 선대 모토치카의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모처럼의 승리도 뒤가 없었기 때문에, 철퇴를 피할 수 없게 된다.
토요토미군의 패배가 결정되자 모리치카는 재기를 도모해 도망했다.
그러나, 5월 11일 쿄토 八幡(야와타) 근교의
芦原(아시하라)에 잠복하고 있는 것을
蜂須賀(하치스가)가의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잡힌다.
모리치카는 니죠성 문 밖의 형틀에 묶여졌다.
출가를 조건으로 목숨을 구걸하고 모든걸 단념하라 했으나
모리치카는 더욱더 재흥을 단념하지 않았다.
5월 15일, 모리치카는 加茂川(카모가와) 하류의
六條河原(로크죠가와라)에서 참수 된다.
다섯 명의 아이들도 모두 베어져 쵸소카베의 재흥은 무너졌다.
전국의 마지막과 함께, 쵸소카베의 이름도 또한 사라졌다.
이치료구소쿠(一領具足)
평시에는 농경에 종사하다가 전투시에는
무기를 갖고 달려가 참전하는 농병분리책.
일본 전국시대때 도사국의 쵸소카베가에서 행해진 농병제도이다.
이후에는 토사번 향사의 별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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