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일본이야기

무장의 최후1-사이토 도산

구름위 2013. 1. 4.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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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들의 최후

 

 

전국시대, 뜻하지 않는 때에 많은 무장들이 사라져갔다.
비명횡사, 무념의 죽음, 너무 빠른 죽음. 여러 종류의 명장들의 최후…

 

 

 

 

齋藤道三[재등도삼](사이토 도산)

 

 

長良川(나가라가와) 전투  향년 63세

 

 

 


 
 
 

天文11年(1542), 명문 土岐(도키)씨를 대신해 美濃(미노)의 국주가 된
사이토 도산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 義龍(요시타츠), 차남 孫四郞 義重(요시시게), 3남 喜平次(기헤이지)가 그들이었다.
도산은 상속자를 요시타츠에게 양보한다고 했지만,
아들중에서 제일 귀여워하고 있던 삼남 기헤이지에게 후계를 양보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것을 안 요시타츠는 弘治2年(1556) 稻葉山城(이나바 산성)에서
두명의 남동생을 참살함으로서 일족이 분열되어 싸우게 되었다.
미노국 군사의 대부분이 요시타츠를 따라, 그 수는 1만7천5백명이었고
이에 대한 도산의 군사는 천7백이 고작이었다.

 

 

도산은 土岐賴芸(도키 요리아키)를 섬기고 있었을 때,
요리아키의 애첩 深芳野(미요시노)를 받아 측실로 삼았다.
그때 이미 미요시노는 요리아키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이가 바로 장남 요시타츠이다.
그 후, 도산은 요리아키를 미노로 부터 추방하고 국주가 되지만
미노 지배는 결코 안정된 것이 아니었다.
거기서 도산은 요시타츠가 요리아키의 아들이라며 선전하며 국주로 자리잡게 된다.
그렇게 하면 미노 국민들의 자신에 대한 증오를 딴 데로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요시타츠는 수호대리가 되자 요리아키가 자신의 친아버지라고 믿게 되었다.
그리고 친 아버지를 추방한 도산에 대한 미움으로 도산에게 도전하게 된 것이다.
처음 시작된 것이 두 명의 남동생의 살해였다.
실제로 요시타츠가 요리아키의 아들이었는지 어떠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기민하고 재능이 넘치는 도산에 비해
신장 6척 4,5촌(180이 넘는)에 거한으로 얼간이 같은 외모를 한
요시타츠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자신의 아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 반대로 도산은 아래의 동생 두명을 몹시 사랑하였다.
그렇게 되자 두 동생들도 형을 경멸하게 되어 버렸다.
요시타츠의 모반은 비뚤어진 가족관계가 가져온 슬픈 모반이었다.

 

 

부모와 자식은 나가라가와에서 대결했다.
도산의 지휘를 하고 있다고는 해도, 병력의 차이는 어찌해 볼 수 없었다.
거기에 하물며 우둔할거라고 생각한 요시타츠의 지휘 솜씨는 비범한 것이었다.
미련한 풍모의 그림자 속에 요시타츠에게도 도산과 같은 장기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전투가 시작된지 이틀 후, 살모사라고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도산의 목은 떨어졌다.
도산의 목은 움켜쥐면 굴러 버릴 만큼 무거웠다고 한다.

 

 

노부나가는 政秀(마사히데)에 이어 또 한명, 자신의 이해자를 잃었다.
그 후, 요시타츠는 요절하고 그의 적자 龍興(타쓰오키)가 뒤를 잇지만
대장의 그릇은 아니어서 노부나가에게 굴복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