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응인(應仁)의 亂 - 전국시대의 개막 1 ]]
제7대장군 아시카가 요시마怜� 막부를 힘겹게 통치하던 무렵, 장군가를 포함한 명망있는 수호 가문 내부의 크고작은 집안문제가 일어났는데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4가지 사건이 있었다.
1) 장군 가(將軍 家)의 분열
< 아시카가 요시미(호소카와 가쓰모토) <-> 아시카가 요시히사(야마나 소젠) >
- 1465년 11월, 아들이 없던 요시마사가 그의 동생 요시미(義視)를 후계자로 정한지 3일후 부인 도미코(富子)가 요시히사(義尙)를 낳고는 후견인으로 야마나 소젠을 끌어들였다. 이때 요시미의 후견인이 호소카와 가쓰모토였기 때문에 두 가문의 대립이 극단화되었다.
2) 하타케야마 가(昌山 家)의 분열
< 하타케야마 마사나가(호소카와 가쓰모토) <-> 하타케야마 요시나리(야마나 소젠) >
- 3管에 속할 만큼 명망있는 가문인 하타케야마는 호소카와 가문을 도와 요시마사를 장군으로 추대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당시 가문의 당주(堂主)였던 하타케야마 모치쿠니(昌山持國)는 자식이 없었기에 동생의 아들 마사나가(政長)를 양자로 삼았으나, 장군가와 마찬가지로 이후에 아들 요시나리(義就)가 태어나는 바람에 분열을 초래했다. 고민 끝에 요시나리를 후계자로 정하였으나 모치쿠니가 죽은 후, 불만을 품은 反요시나리 파가 호소카와 가쓰모토의 도움을 얻어 요시나리를 추방시키고 마사나가를 당주의 자리에 앉혔다. 이때 쫓겨난 요시나리가 의탁한 곳이 바로 야마나 가문이었다.
3) 시바 가(斯波 家)의 분열
< 시바 요시토시(호소카와 가쓰모토) <-> 시부카와 요시카도(야마나 소젠) >
- 에치젠, 오와리, 토토우미에 걸친 영토를 가지고 있었던 시바 가문의 전성기는 바로 수호 시바 요시타케(斯波義健)에 의해 이룩되었다. 그런데 그가 1452년에 사망하기 이전, 후계자가 한번 교체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사후 상속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원래 첫번째 후계자는 시바 요시토시였으나 가문의 가풍에 어긋나는 행동을 많이 하였고 더욱이 막부의 권위를 무시하였기 때문에 추방당하였다. 여기서 막부의 약화를 몰래 꾀하던 호소카와 가문의 후원이 요시토시에게 있었으며, 이때 새로이 후계자에 자리에 올라 가문을 이은 시부카와 요시카도의 부인이 야마나 소젠의 딸이었다.
4) 호소카와 가(細川 家)의 상속문제
- 시바 모치쿠니가 세력을 강화할 무렵, 호소카와와 야마나 가문은 이를 공동의 적으로 인식하여 한때는 화합한 적이 있었다. 이때 소젠의 큰딸을 가쓰모토에게 시집보내고, 가쓰모토가 소젠의 막내아들인 야마나 도요히사를 양자로 삼아 호소카와 가문의 뒤를 잇게 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친아들 마사모토(政元)가 태어나자 가쓰모토는 약속을 파기하고 도요히사를 불문으로 출가시켜버렸다. 이 일은 이제까지의 4가지 사건 중 가장 앞선 것으로, 시바 가의 분열, 하타케야마의 분열을 거쳐 마침내 장군 가의 분열에 다달음으로써 양가의 대립은 불가피해졌다.
[[ 응인(應仁)의 亂 - 전국시대의 개막 2 ]]
'응인의 난'[1467.5]의 직♣岵� 촉발은 바로 4개월 전인 1467년 1월의 하타케야마 내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교토에서 벌어진 하타케야마 마사나가와 요시나리 간의 전투는 생각보다 쉽게 그치지 않았으며 양군 모두 다수의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장군 요시마사는 당시 수많은 수호대명의 쌍두마차이자 대립관계였던 호소카와 가문과 야마나 가문의 개입이 있을 경우 더욱더 큰 피해가 나올 것을 우려하여 하타케야마 가의 분쟁을 그들 스스로 해결하도록 통제하였다. 그러나 요시마사의 중립명령을 어기고 야마나 소젠이 요시나리를 몰래 응원함으로써 마사나가는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요시나리와 소젠이 이후 강력한 유대관계를 맺음으로써 더할나위없는 위세를 떨쳤으며 이들은 곧이어 호소카와 가문의 영지 침공을 모의하였다. 그러나 이 음모가 호소카와 가쓰모토에게 발각되면서 가쓰모토 역시 야마나 가문과의 일전을 위해 전투 준비에 총력을 기울인다. 소젠도 역시 마찬가지 였으며 이제 양가의 일전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2~3월에 걸쳐 양 가문과의 이해관계를 저울질한 각지의 수호대명 간의 소규모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교토의 조정은 천하의 평하를 기원하는 의미를 가진 '응인(應仁-오닌)'으로 연호를 바꾸는 우스운 선례를 남겼다.[1467.3.5]
교토의 조정은 무력했다. 평화를 희구하는 백성들과 조정의 노력도 더욱더 거세어진 양가의 대립, 그리고 그에따른 분쟁들로 무시당하였으며, 5월 말에 이르러 일본 전국의 수호대명들이 거의 호소카와 파(동군)와 야마나 파(서군)로 확실하게 양분됨으로써 전투는 시작되었다. 이때 동군 측의 병력이 총24국-16만[하타케야마 마사나가, 시바 요시토시, 아카마쓰 마사노리, 교코쿠 모치키요 등]이었고, 서군 측이 총20국-9만[하타케야마 요시나리, 시부카와 요시카도, 잇시키 요시나오, 롯카쿠 다카요리 등]으로 양군 도합 25만의 대규모 전투였다. 이에 놀란 장군 요시마사가 조정의 목적으로 동생 요시미를 양 진영으로 보내어 먼저 공격하는 쪽이 막부의 적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으나, 서군 측의 잇기키 요시나오가 선방공격을 함으로써 장군 가의 군기(軍旗)는 동군이 차지하게 되었다. 군기를 차지한 가쓰모토는 야마나 소젠과 그 일당을 역적으로 몰면서 1468년 11월까지 우세한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갑작스런 장군 요시마사의 사망은 양 진영 간에 또다른 파장을 몰고 왔으며, 양가 전투에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던 강력한 대명 야마나 마사히로(山名政弘)가 서군에 가담함에 따라 다시한번 동서 균형을 이루는 형세를 취했버렸던 것이다.
[[ 응인(應仁)의 난 - 전국시대의 개막 3 ]]
후반부에 개입했던 야마나 떻英湯罐� 포함하여 총45개국이 참전한 전투였다. 응인의 난은 겉잡을 수 없이 장기화 되어갔고 이 와중에 교토는 잿더미가 되었다. 교토에 상주하던 조정이나 관료저택마저 불타버리고 각 관료들은 각지의 유력한 대명이나 사원을 찾아 떠났다. 동군측, 서군측 모두 결정적인 승기를 잡지 못한 채 수년을 끌어오고 있었으며 폐허가 된 교토와 더불어 양군 모두 군비와 기강이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돌이킬 수 없는 대전투를 어떻게서든지 중지시키기 위해 오히려 양군의 총수인 가쓰모토가 삭발하고 소젠이 할복시도까지 해가며 휴전을 각자의 수호대명들에게 권유했으나 소용없었다. 계속되는 전란은 각지의 농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하였으며 이에따라 수많은 농민반란이 이어져 교토에서 전투하고 있던 각지의 수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러나 주동자였던 가쓰모토와 소젠이 1473년에 우연하게도 동시에 죽어버리자 1474년, 바로 응인의 난이 일어난지 7년째 되는 해에 가쓰모토의 아들 호소카와 마사모토(細川政元)와 소젠의 아들 야마나 마사토요(山名政豊)와의 강화가 마침내 성립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아직 장군 가의 내분에 따른 반목[요시미-요시히사]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라 응인의 난이 완전히 종식된 시기는 1477년이었다.
이 응인의 난이 일본에 몰고 온 파장은 엄청났다. 우선 무로마치 막부가 추구하던 체제유지적 질서와 권위가 무너짐에 따라 가문과 가문과의 대립이 막부의 중재를 무시한 채 수없이 일어났으며, 더욱더 충격적인 것은 일개 무명의 하층무사역시 실력만 있으면 자신의 주군을 폐하고 대명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혼란의 정치적 배경을 낳았다는 점이다. 특히 이런 하극상의 모반을 통해 대명의 지위에 오른 자들을 '전국대명(戰國大名-센고쿠다이묘)'이라 하여, 이들은 전국시대를 화려하게 장식하며 본격적인 전국시대를 열어 나갔다.
주류 역사학계는 이미 '응인의 난'부터 기존 질서가 무너져 혼란의 시대가 왔다고 파악하여 응인의 난이 끝난 때부터가 아닌, 1467년 개전당시에서부터 1568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교토에 입성하여 천하포무(天下布武)의 초석을 다진 시점까지의 100여년을 '전국시대(戰國時代-센고쿠시대)'로 정의하고 있다. 이는 전국시대가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무로마치 막부창설한 이래 1338년부터 1573년까지의 '무로마치(室町)시대'에 포함된 것으로, 제15대장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의 몰락까지 전국시대와 무로마치시대는 공존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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