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戰國時代의 開幕
[[ 무사(武士)들이 일본천하를 장악하기까지 1 ]]
12세기 중반[平安時代] 교토조정의 내분[스토쿠상황(崇德上皇)<->고시라카와덴뇨(後白河天皇)]을 둘러싸고 일어난 '보원(保元)의 난'과 미나모토씨(源氏)-다이라씨(平氏)간의 '평치(平治)의 난'은, 귀족들이 권력과 문화를 장악하고 있었던 헤이안 시대의 종결을 촉진하고 무사들의 권위를 진일보시켰다.(※'보원의 난'에서 귀족간의 정치다툼에 하수인으로 개입한 무사들이 이를통해 최초로 세상에 등장하여 '평치의 난'에 이르러 귀족의 세력을 압도하였다고 한다는 시각이 주류.) 이후 다이라씨의 전성기를 거쳐 마침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의 가마쿠라(鎌倉)막부의 설립에 이르러 소위 '무사정권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1192]
미나모토 가문이 비록 막부를 개설하고 쇼군(將軍)의 지위에 올랐다고 하나 최초엔 동국(東國)의 일개 지방정권에 불과하였으며, 천황과의 지속적인 마찰로 일어난 '승구(承久)의 난'[1221]과 요리토모의 미망인 '마사코(政子)'의 외척중용에 힘입어 호죠(北條) 가문이 막부의 실권을 장악하고 미나모토 가문은 3대째 멸망하였다. (※전국시대에 등장하는 호죠 쇼운의 호죠 가문과 구별하기 위해 '先北條'라고도 함.)
호죠 가문에 이르러 가마쿠라 막부의 전성기를 꽃피우게 되는데 이때 무사풍(武士風)의 문화가 정립되었다. 그러나 두차례의 몽고침공을 성공적으로 극복한 이후 막부의 권위는 상승하였으나, 지방 수호(守護-슈고)세력간의 영지다툼은 계속되었고 이를통해 세력을 확장한 일부 수호는 막부를 무시하였으며, 교토의 조정은 역시나 다이카쿠사(大覺寺) 파와 지묘원(持明院) 파로 양분되어 대립하고 있었던 혼란의 시대였다. 더군다나 다이카쿠사 파의 중추였던 고다이고천황이 호죠 가를 타도할 마음을 먹고있었으며 그의 지지세력인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와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 그리고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의 도움에 힘입어 결국 호죠 가를 궤멸하고 가마쿠라 막부를 폐하기 이른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 토벌에 참여한 무사들의 대부분이 막부 타도에 따른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귀족정치의 복귀와 헤이안 시대로의 회귀를 추구한 고다이고천황의 개혁[건무(建武)의 중흥(1333~1335)]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로인해 천황과 무사세력과의 마찰이 다시한번 생겨나면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무력으로 고다이고천황을 유폐시키고 고메이(光明)천황을 옹립하였다. 이는 더이상 귀족들이 가진 권력이 회복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 무사(武士)들이 일본천하를 장악하기까지 2 ]]
1338년 8월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한때 그의 동료이기도 하였던 닛타 요시사다를 '미나도와카강 전투(1336.7)'에서 꺾어버린 강력한 세력을 바탕으로 교토의 무로마치(室町)에 막부를 새로이 개설하고 제1대장군(征夷大將軍-세이이다이쇼군)에 취임함으로써 전국(戰國-센고쿠)시대의 배경이기도 한 '무로마치 막부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고다이고천황이 유배지에서 탈출하여 교토 근방의 요시노(吉野)에서 지지세력의 추대와 함께 또다른 세력을 창조하니 이것이 바로 역사상 '남조(南朝)'로 불리웠던 '요시노 정권'이었다.
요시노 정권의 수립으로 일본은 남북조로 갈라져 불안정한 정국상태를 유지하게 되며 이는 약60년동안의 분쟁로 이어져 교토-요시노 지역뿐만이 아닌 각 지방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각지의 수호와 무사들은 귀족/승려/대지주 등의 장원을 빼앗아 세력확장에 급급한 모습을 보였고 이들 중 강력한 세력은 대명(大名-다이묘)으로 부상했다. 장원의 붕괴는 지주에 속박되있던 농민들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으며, 이는 후일 '야마시로(山城)국의 봉기(1485)'를 일으킬 정도로 강력한 힘을 결집할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1392년 제3대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에 이르러 세력이 약해진 남조의 고카메야마천황이 교토로 올라가 북조의 고코마쓰천황에게 신기(神器)를 전함에 따라 남북조의 통일을 완수하였다. 요시미쓰는 통일에 그치지않고 막부의 명령을 우습게보는 수호대명을 완전히 척결하였고, 특히 1399년 11월에 벌어진 서국(西國)의 실력가 오우치 요시히로(大內義弘)와의 전투는 역사에서 [응영(應永)의 난]으로 불리워진 대규모 전투였다. 하여튼 이와같은 요시미쓰의 반(反)막부세력의 타도와 명나라에 의한 일본국왕으로의 책봉 등, 51세의 나이로 요시미쓰가 사망[1408]하기 전까지 막부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고 각지 수호대명의 독자적 세력이 위축되었다.
[[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동요 ]]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오우치 가�, 야마나(山名) 가문 등의 강대한 反막부계의 수호대명을 토벌했을 뿐만 아니라 막부의 체계적인 질서확립을 위해, 장군 이외의 실권자를 위한 '관령(管領)'직과 '시소(侍所)'직의 권력을 강화시켰다. 이는 안정적인 수호대명 관리를 통해 무로마치 막부의 장기집권을 꾀한 것이며, '관령'은 장군을 보좌하여 막부산하기관을 지도-감독하고 '시소'는 관령 다음가는 중요기관으로서 막부 호위와 교토시내의 치안을 담당했다고 한다. 14세기 후반(무로마치 중기)당시, 시바(斯波), 호소카와(細川), 하타케야마(昌山) 가문들이 이 '관령'직을 교대로 독식함에 따라 '3관(三管)', '시소'직은 아카마쓰(赤松), 잇시키(一色), 야마나, 교코쿠(京極) 가문들로 국한됨에 따라 '4직(四職)'이라 불리웠다.
한편 관동(關東)지방은 이미 깊이 뿌리내리고 있던 지방 토호들이 의외로 강성하여 막부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일찍이 다카우지가 자신의 동생 모토우지(基氏)를 '관동공방(關東公方): 쇼군의 특별한 변형으로 관동장군이라고도 불리움'으로 임명하여 별도로 관리하게 하였다. 이때 공방을 보좌한 '관동관령'이 바로 우에스기(上衫) 가문이었던 것이다. 이후 관동공방이 모토우지의 아들 우지미쓰(氏滿), 우지미쓰의 아들 미쓰카네(滿兼)를 거치면서 교토의 본(本)세력과 대등할 정도로 강성해진다.
이와같은 관동세력의 확장 속에서 1408년 요시미쓰가 사망하고, 그당시 제4대장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모치(義持)의 동생 요시쓰구의 모반[1416]으로 막부는 본격적으로 동요하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10년뒤 제5대로 취임한 요시노리(義敎)는 동요된 막부를 다시 요시미츠代의 전성기로 회복시키기 위해 관동공방 막부를 완전히 멸망시키는 등[1439],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 장군의 지나친 권력확대를 두려워한 당시 하리마, 비젠, 미마사카의 수호였던 아카마쓰 가문의 음모로 뜻밖의 참살을 당한다.[1441]
이때 4職의 필두였던 야마나 가문의 야마나 소젠(産名宗全)이 요시노리의 아들 요시카쓰(義勝)를 장군으로 옹립하고 1개월만에 아카마쓰 가(家)를 완전 궤멸시킴으로써 당시 3管의 필두인 강력한 수호대명 호소카와 가문과 맞먹을 정도의 수준으로 가문의 세력을 상승시켰다. 요시카쓰가 8개월만에 급사하고 제7대장군으로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가 취임할 때 즈음엔 이미 야마나 가문과 호소카와 가문의 대립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으며, 더군다나 이후에 일어난 다음 4가지의 사건들이 전국시대의 개막을 알릴 야마나-호소카와 간의 [응인(應仁-오닌)의 난]을 촉발시킬 계기를 마련해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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