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일본이야기

무로마치 막부의 몰락 (1)

구름위 2013. 1. 4.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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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室町幕府(무로마치 막부)의 몰락

[[ 막부의 실권을 다시 장악한 호소카와 가(細川家) ]]

하滿瓚� 난무하는 戰國時代의 개막은 당연히 무로마치 막부의 몰락을 초래했는데 이는 이미 '응인의 난'의 중반시점부터 시작되었다. 요시미(義視)의 뒤를 이은 제9대장군 아시카가 요시히사(足利義尙)는 응인의 난이 중반부에 이르렀을 무렵, 서군의 핵심세력 중 하나였던 오미(近江)국의 수호대명 롯가쿠 다카요리(六角高賴)에게 화해를 위한 교섭사자로 임명하지만 거부당하고 만다. 이를 막부의 절대적인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요시히사는 직접 토벌에 나서지만 롯가쿠 가에게 대패하고 전장에서 25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이때부터 막부의 권위는 급속도로 추락하며, 앞으로의 장군들은 심심찮게 수호대명에 의해 추방되거나 심지어 암살될 처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첫번째 하극상의 추방을 당한 것이 제10대장군 아시카가 요시타네(足利義稙)로, 전란 이후 호소카와(細川) 가문에 의해 두번이나 아와지(淡路)섬으로 축출되어 비참한 일생을 살았다. 비록 응인의 난이 전쟁에 참여했던 수많은 수호대명의 세력을 약화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이 호소카와 가만은 당시 셋쓰(攝津), 이즈미(和泉), 단바(丹波), 아와(阿波), 사누키(贊岐), 빗츄(備中) 총6국을 지배하는 강력한 수호대명임엔 변함없었다. 그러나 같은 3管領家였던 시바(斯波) 가문과 하타케야마(昌山) 가문은 지난 글에서 알리다시피 내부분열로 찢어지고 또다시 그 내부에서 당파싸움을 벌이는 등 참전 수호대명중 세력이 가장 약화되었다. 4職家 또한 마찬가지여서 필두세력인 야마나(山名) 가는 타지마(但馬)와 이나바(因幡) 2국으로 세력이 축소되었고 아카마쓰(赤松), 잇시키(一色), 교코쿠(京極) 가문역시 혼란상태였다. 이 와중에 종가(宗家)를 중심으로 확고한 단결력을 보여주었던 호소카와 가문만이 용케 살아남았다해도 무방할 것이다.

호소카와 가문 위세의 절정은 응인의 난의 주범인 호소카와 가쓰모토의 아들이자, 야마나 가문과의 강화협정[1474]을 맺은 마사모토(政元)가 1493년 요시타네를 추방하고 요시즈미(義澄)를 제11대장군으로 옹립한 데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후 요시즈미의 섭정이 되어 비록 짧은 세월이지만 당시 막부 제일의 권력을 누렸다

 

[[ 호소카와(細川)에서 미요시(三好)로 1 ]]

어김없이 등장하는 후계자 문제로 인한 내부분열은 호소카와 가문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사모토는 친자식이 없어 구죠(九條) 가와 방계 호소카와 가에서 양자를 한명씩 두었는데, 마사모토 사후 이 두명의 후계자를 중심으로 가문은 양분된다. 구죠 가문으로부터의 양자였던 호소카와 스미모토(細川澄元)는 자신의 친아버지가 암살당하고 구죠 가문이 탄압받는 와중에서도 힘겹게 재기하여 또다른 방계 후계자인 호소카와 스미유키(細川澄之)와 그 추종세력을 타파한다.

서쪽의 수호대명 오우치(大內) 가문은 응인의 난 이후, 아키(安藝), 빈고(偏後), 부젠(豊前), 치쿠젠(筑前), 이와미(石見), 스오(周防), 나가토(長門)에 걸쳐 착착 세력을 쌓아 호소카와 내분이 발생할 무렵 절정에 이른다. 당시 오우치 가문의 당주 오우치 요시오키(大內義與)는 오우치 가와의 적대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스미모토의 호소카와 가문을 또다시 내분시켜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또다른 방계인 호소카와 다카쿠니(細川高國)를 몰래 후원하여 마침내 스미모토를 실각시킨다. 곧이어 다카쿠니는 요시오키와의 연합을 통해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마사모토에 의해 옹립된 아시카가 요시즈미를 끌어내었으며 제12대장군으로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義晴)를 추대하면서 제1의 관령(管領)이 되어 권세를 휘두른다.

[[ 호소카와(細川)에서 미요시(三好)로 2 ]]

비록 호소카와 다카쿠니의 독재라고 하나, 스미모토를 추종하는 호소카와 가신들도 일부 존재하였다. 아와(阿波)지방의 실력자였던 미요시 모토나가(三好元長)도 그중 하나였다. 스미모토가 실각하여 호소카와 산하의 아와로 가신단을 이끌고 피신하던 중 병사(病死)하자, 그의 아들 하루모토(晴元)가 뒤를 잇는다. 하루모토는 아와에 도착하여 모토나가와 손잡은 뒤, 아와지방의 다카쿠니 잔여세력을 토벌하였으며 나아가 토사(土佐), 이요(伊予), 시누키(贊岐) 3국을 평정함으로써 시코쿠(四國)일대를 통일하였다.

호소카와 하루모토의 가신단 중 미요시 모토나가는 그의 아들인 쵸우게이(長慶-※ 일본역사서에서 '나가요시'가 아닌 '쵸우게이'로 기록되어있음.)와 함께 시코쿠 통일에 큰 역할을 함으로써 하루모토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하루모토의 급부상은 다카쿠니에게 두려움을 안겨다 주었으며, 자신의 입지에 도움을 주었던 오우치(大內) 가문의 도움을 빌리려하나 그당시 아마고(尼子) 가문과의 대립으로 오우치 가의 개입 여력이 부족하였다. 빈틈을 노린 하루모토-모토나가 연합의 침공으로 다카쿠니 군은 패하고 다카쿠니는 자결한다.[1531]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반무렵, 중부지방(中國-四國)이 호소카와 가의 내분공방(다카쿠니-하루모토)으로 거의 양분된 형세를 취했다면, 서부지방(中國의 서쪽부분)은 오우치[스오(周防), 나가토(長門)의 수호(守護-슈고)]와 숙적 아마고[이즈모(出雲),호키(隱岐)의 수호] 양가(兩家)의 천하였다. 오우치와 아마고 가문의 대립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는 오우치 요시타카(大內義陸)와 아마고 쓰네히사(尼子經久)가 각 가문의 당주로 있었을 때로, 쿠슈(九州)지방의 신흥세력 오토모(大友) 가문에게 위협을 받으며 일부 영토를 빼앗긴 오우치 가문이 이를 만회하기 위한 상대로 아마고를 택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세 하에서 오우치-아마고 가문의 영토 가운데 조그맣게 끼여있었던 아키(安藝)국의 소영주인 모리(毛利) 가문의 당주,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가 등장한다.

[[ 호소카와(細川)에서 미요시(三好)로 3 ]]

모리 모토나�(毛利元就)는 아키(安藝)의 일부만을 지배하는 소영주였으나 오우치와 아마고 간의 반목을 조장하면서 아키 전토를 장악한다. 모토나리의 이간책은 치밀했으며 아마고 가의 당주 쓰네히사의 손자인 아마고 하루히사(晴久)와 의형제를 맺고, 오우치 가에게 자신의 큰아들인 다카모토(陸元)를 인질로 바치는 등 교묘하게 자신의 안전을 꾀했다. 이후 급부상한 모리 세력이 마침내 오우치-아마고 양국을 삼켜버리는 과정은 따로 다루기로 하겠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호소카와 가문을 장악한 하루모토는 자신의 오른팔격인 중신 미요시 모토나가의 권유로 다카쿠니의 끄나풀이던 장군(將軍-쇼군) 요시하루를 오미(近江)의 사카모토(坂本)라는 작은 마을로 유배보내고,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를 제13대장군으로 추대했다. 호소카와 가문의 정식 후계자로서, 그리고 일본 전토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하고 있는 수호대명으로서 모토나가와 함께 권력을 누렸다.

수년이 흐른 후, 모토나가가 죽은 뒤 미요시 종가(宗家)를 이어받은 아들 미요시 쵸우게이(三好長慶)는 비록 종가를 이어 받았다고하나 가문 내에서 실권을 장악한 자는 마쓰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라는 가신이었다. 히사히데는 하루모토가 호소카와 가문을 유지할만한 인물이 아님을 쵸우게이에게 설득하여 호소카와의 영속을 위한 모반을 일으킨다. 하루모토가 장군을 찾아뵙기 위해 무로마치 막부로 떠났을 무렵, 미요시 일가 수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즈미(和泉)의 본성을 공격-점령하고 나머지 하루모토 가신단을 흡수한다. 하루모토는 막부에서 뜻밖의 소식을 접하고 목숨을 구하기위해 아시카가 장군가(將軍家)가 자리잡고 있었던 야마시로(山城)국으로 도망쳐버리니 이때가 1549년의 일이었다. (※하루모토는 이후 다카쿠니를 몰아낸 과거의 일을 상기하며 복수전의 준비를 꾀했으나 다시는 복권되지 않았다.)

 

[[ 미요시 가(三好家)와 마쓰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 그 이후 ]]

1549년 교토를 중심으로 대영토를 자랑하던 중앙권력인 호소카와 가문을 무력으로 장악한 미요시 쵸우게이는 그의 가신 마쓰나가 히사히데의 조언아래 강력한 군대를 뒷받침하던 미요시 3인방(미요시 나가유키-미요시 마사야스-이와나리 토모미치)의 도움으로 호소카와 가문을 문제없이 상속한다. 가문의 방계였던 호소카와 후지다카(細川藤孝)가 자신의 가신단을 이끌고 떠나버린 것도 이때였다.

호소카와 가문을 장악한지 1년도 채 안되어 쵸우게이와 히사히데는 미요시 가문의 깃발을 본성에 휘날리며 호소카와의 씨를 말렸다. 또한 하루모토와 함께 적극적으로 미요시 세력과 대항했던 막부의 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무로마치 막부를 직접 공격하여 완전궤멸시키고 요시테루를 전사시켰다. 이 전투에 참여하였던 막부군쪽의 하루모토는 종적을 감추었고, 요시테루의 동생 요시아키(義昭)는 생포되었으나 추방당하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이후 쵸우게이의 뒤를 이은 요시오키(義興)가 미요시 가문을 이끌무렵 실권자 히사히데가 아와 지방에서 데려온 아시카가 요시즈미의 적손을 장군으로 삼을 것을 권유하니, 그가 바로 제14대장군 아시카가 요시히데(足利義榮)이다.[1567]

미요시 쵸우게이는 1564년 사망할 때까지 무려 15년간 교토의 조정과 막부의 장군을 자의로 조종하며 권세를 누렸으나, 그의 아들 요시오키 대(代)에는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미요시3인방의 손으로 가문이 넘어간거나 마찬가지로 되어버렸다. 특히 히사히데의 경우, 장군가의 일족인 요시히데를 바이신(幕臣: 다이묘 가문의 종속된 부하신분의 가문)의 입장에서 장군으로 추대한 하극상의 일면을 보여준 전국시대의 일례였다. 그가 추대한 요시히데는 비록 장군에 자리에 오른지 1년도 채 안되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세력에 의해 끌어내려지고, 히사히데 또한 거의 궤멸당하는 상태에 이르지만 어떻게보면 마쓰나가는 쵸우게이보다도 오랫동안 권력을 누렸던 자였다.

南오와리 기요스성(淸州城)의 성주 노부나가는 5천의 병사로 그의 영지에 침공한 2만여명의 이마가와(今川) 가문을 격파하고 당주인 요시모토(義元)를 전사시킨 1560년 5월의 오케자하마(桶狹間)전투를 기점으로, 사이토(齋藤) 가문의 미노(美濃)국, 시바(斯波) 가문의 오와리(尾張)국 등을 먹어치우더니 1568년 꿈에 그리던 교토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추방당하여 비참한 일생을 살고 있었던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제15대장군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조정을 통괄하는 최고의 기관인 다이조칸(太政官)의 우다이진(右大臣:종2위,다이조칸의 장관)에 올랐다.

이후 요시아키는 오다 가문의 권위를 상장하는데 줄곧 이용되었으며, 위기감을 느끼고 막부 권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 아사이(淺井), 아사쿠라(朝倉) 가문과 함께 노부나가를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발각되어 재추방되었다.(※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거두어줌으로써 그의 부하가 된다.) 이처럼 무로막치 막부는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초대장군이 된 이래로 제3대 요시미쓰 때에 전성기를 이루고, 요시미쓰 사후 제7대 요시마사에 이르며 동요하더니, 마침내 '응인의 난'과 '전국시대'를 거쳐 제15대 요시아키에 이르러 파멸하였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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