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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 ‘후다이’
전국시대의 무사는 거취의 자유, 주군을 택할 권리를 폭넓게 가지고 있었다. 도쿠가와(다케치요)의 가신들도 전국의 무사니만큼 궁핍과 굴욕을 참지 못해 새로운 주군을 찾아나설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결속하여 주군의 가문을 부흥시키기 위해 충절을 다했다. 바로 이 점에 미카와 무사의 특이성이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천하를 손에 넣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각지의 영주들을 후시미(伏見)로 불러 주연을 베풀 때의 일이다. 히데요시는 수집한 서화와 골동품 등을 자랑하면서 영주들에게 어떤 보물을 소장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자기 차례가 왔을 때 이에야스는, “저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미카와의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진귀한 서화나 골동품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저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충용무쌍한 가신이 500명 정도 있습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가장 큰 보물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에 히데요시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과연 그대는 행복한 사람이오. 나도 그런 보배를 갖고 싶소” 라며 부러워했다.
이에야스의 충용무쌍한 가신이란 미카와의 ‘후다이(譜代)’, 즉 대를 이어 도쿠가와 가문을 섬겨온 가신을 말한다. 그들은 전국시대를 통틀어 유례가 없을 만큼 결집력과 충성심이 강했다. 그들이 없었다면 이에야스도 결코 패자(覇者)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그러한 후다이가 없었기 때문에 정권을 유지하고 운영하는 데 큰 고초를 겪었다.
미카와 후다이의 결집력과 충성심은 난국을 살아오는 동안에 배양된 것이다. 어린 주군 이에야스가 인질이 되고 도쿠가와의 영지와 가신이 독립성을 잃고, 이마가와의 지배를 받은 상황이 그들의 분발을 촉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성묘를 끝내고 슨푸로 돌아온 다케치요는 이듬해 1월 관례(冠禮・결혼)를 올리는 것과 동시에 ‘모토야스(元康)’로 이름을 바꾸었다. 모토야스는 슨푸의 영주인 이마가와 요시모토(義元)의 조카딸과 혼인했다. 이 결혼에는 요시모토의 속셈이 깊이 작용했다.
즉 모토야스(이에야스)를 일족의 여자와 결혼시킴으로써 마쓰다이라 가문을 이마가와 가문에 동화시키려 한 것이다. 이대로 갔다면 모토야스는 이마가와 가문의 한 무장으로 생애를 마쳤을 것이다.
그러나 1560년 운명은 그를 전혀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다.
이 해 5월 요시모토는 숙원이던 패권 장악을 위해 수도인 교토를 향해 대군을 동원했다. 이때 그는 그 길목인 오와리(尾張)에 있는 오다 군을 공격하기로 하고 이에야스를 불렀고, 모토야스(이에야스)에게는 당연히 위험한 선봉을 맡겼다. 모토야스가 오다의 영내 깊숙이 진입하여 마루네(丸根) 성채를 함락한 것은 19일 아침. 이어 그날 중으로 가까이 있는 오타카(大高) 성에 들어가 요시모토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다음 명령이 도착하지 않았다.
구쓰카케(沓掛)에서 오타카로 향하던 이마가와 군단의 주력부대가 갑자기 진로를 바꾸어 오케하자마(桶狹間)의 산속에 접어들었을 때 오다 노부나가 군대가 기습공격을 해 요시모토를 죽였던 것이다.
불과 4000의 병력으로 1만 5000의 대군에 쾌승을 거둔 이 역사적인 전투로 27세의 노부나가는 순식간에 그 명성을 전국에 떨치게 되었다.
-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넌다
이 전투를 발판으로 하여 오다 노부나가는 패권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말하자면 이 전투가 노부나가에게는 운명의 싸움이었다.
그런데 이 전투를 전환기로 삼아 자신의 운명에 도전한 또 다른 사나이가 바로 19세의 청년 이에야스였다.
이에야스에게 요시모토 군이 대패했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은 이튿날 저녁이었다. 이에야스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더욱 당황한 것은 가신들이었다. 가신들은 이러한 의견을 올렸다.
“머뭇거리고 있으면 이 성도 위험합니다. 속히 군사를 정비하여 오카자키로 돌아가야 합니다. 패전이 확실한 이상 이런 전초 기지를 지킨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고개를 저었다.
“경솔하게 판단하면 안 된다. 싸움터에는 유언비어가 따르기 마련, 이것은 혹시 적의 모략인지도 모른다. 교란전술에 휘말려 성을 버리고 도망한다면 후세에까지 웃음거리가 된다”
이때 숙부인 미즈노 노부모토(水野信元)가 사람을 보내 역시 요시모토의 패배를 알려왔다. 숙부는 노부나가의 압력으로 마지못해 이번 전투에 이에야스의 적이 되어 참가했으나 이에야스를 미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조카의 안전을 위해 속히 철수하라고 권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그것도 일축했다.
“여기는 싸움터, 숙부라도 믿을 수는 없다”
세 번째로 오타카 성에 달려온 것은 그의 중신 도리이 타다요시(鳥居忠吉)가 보낸 부하였다. 타다요시는 서신을 통해 전투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즉각 철수하라고 권했다. 이때서야 이에야스는 마음을 결정했다.
그의 조심성은 오카자키에 돌아와서도 이어졌다. 그는 성에 들어가지 않고 근처의 다이주(大樹) 사에 진을 쳤다. 놀란 것은 성안에 있는 이마가와의 군사였다. 총대장이 전사한 이상 적진과 가까운 곳에 머물러 있으면 위험하다. 속히 본거지인 슨푸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입성하지 않았다.
“우지사네(氏眞) 공의 지시가 없는 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이것이 그 이유였다. 우지사네는 요시모토의 아들이다. ‘의리를 지킨다’ 이것은 이에야스의 긴 생애를 통해 일관된 하나의 특징이고 처세 방법이었다.
오카자키의 장병들은 초조감을 감추지 못하고 그만 성을 비우고 슬그머니 도주하고 말았다. 그제야 이에야스는 입성했다.
“버린 성이니 주울 수밖에”
19세 청년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노련함이고 조심성이었다. (계속)
전국시대의 무사는 거취의 자유, 주군을 택할 권리를 폭넓게 가지고 있었다. 도쿠가와(다케치요)의 가신들도 전국의 무사니만큼 궁핍과 굴욕을 참지 못해 새로운 주군을 찾아나설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결속하여 주군의 가문을 부흥시키기 위해 충절을 다했다. 바로 이 점에 미카와 무사의 특이성이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천하를 손에 넣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각지의 영주들을 후시미(伏見)로 불러 주연을 베풀 때의 일이다. 히데요시는 수집한 서화와 골동품 등을 자랑하면서 영주들에게 어떤 보물을 소장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자기 차례가 왔을 때 이에야스는, “저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미카와의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진귀한 서화나 골동품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저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충용무쌍한 가신이 500명 정도 있습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가장 큰 보물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에 히데요시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과연 그대는 행복한 사람이오. 나도 그런 보배를 갖고 싶소” 라며 부러워했다.
이에야스의 충용무쌍한 가신이란 미카와의 ‘후다이(譜代)’, 즉 대를 이어 도쿠가와 가문을 섬겨온 가신을 말한다. 그들은 전국시대를 통틀어 유례가 없을 만큼 결집력과 충성심이 강했다. 그들이 없었다면 이에야스도 결코 패자(覇者)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그러한 후다이가 없었기 때문에 정권을 유지하고 운영하는 데 큰 고초를 겪었다.
미카와 후다이의 결집력과 충성심은 난국을 살아오는 동안에 배양된 것이다. 어린 주군 이에야스가 인질이 되고 도쿠가와의 영지와 가신이 독립성을 잃고, 이마가와의 지배를 받은 상황이 그들의 분발을 촉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성묘를 끝내고 슨푸로 돌아온 다케치요는 이듬해 1월 관례(冠禮・결혼)를 올리는 것과 동시에 ‘모토야스(元康)’로 이름을 바꾸었다. 모토야스는 슨푸의 영주인 이마가와 요시모토(義元)의 조카딸과 혼인했다. 이 결혼에는 요시모토의 속셈이 깊이 작용했다.
즉 모토야스(이에야스)를 일족의 여자와 결혼시킴으로써 마쓰다이라 가문을 이마가와 가문에 동화시키려 한 것이다. 이대로 갔다면 모토야스는 이마가와 가문의 한 무장으로 생애를 마쳤을 것이다.
그러나 1560년 운명은 그를 전혀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다.
이 해 5월 요시모토는 숙원이던 패권 장악을 위해 수도인 교토를 향해 대군을 동원했다. 이때 그는 그 길목인 오와리(尾張)에 있는 오다 군을 공격하기로 하고 이에야스를 불렀고, 모토야스(이에야스)에게는 당연히 위험한 선봉을 맡겼다. 모토야스가 오다의 영내 깊숙이 진입하여 마루네(丸根) 성채를 함락한 것은 19일 아침. 이어 그날 중으로 가까이 있는 오타카(大高) 성에 들어가 요시모토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다음 명령이 도착하지 않았다.
구쓰카케(沓掛)에서 오타카로 향하던 이마가와 군단의 주력부대가 갑자기 진로를 바꾸어 오케하자마(桶狹間)의 산속에 접어들었을 때 오다 노부나가 군대가 기습공격을 해 요시모토를 죽였던 것이다.
불과 4000의 병력으로 1만 5000의 대군에 쾌승을 거둔 이 역사적인 전투로 27세의 노부나가는 순식간에 그 명성을 전국에 떨치게 되었다.
-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넌다
이 전투를 발판으로 하여 오다 노부나가는 패권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말하자면 이 전투가 노부나가에게는 운명의 싸움이었다.
그런데 이 전투를 전환기로 삼아 자신의 운명에 도전한 또 다른 사나이가 바로 19세의 청년 이에야스였다.
이에야스에게 요시모토 군이 대패했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은 이튿날 저녁이었다. 이에야스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더욱 당황한 것은 가신들이었다. 가신들은 이러한 의견을 올렸다.
“머뭇거리고 있으면 이 성도 위험합니다. 속히 군사를 정비하여 오카자키로 돌아가야 합니다. 패전이 확실한 이상 이런 전초 기지를 지킨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고개를 저었다.
“경솔하게 판단하면 안 된다. 싸움터에는 유언비어가 따르기 마련, 이것은 혹시 적의 모략인지도 모른다. 교란전술에 휘말려 성을 버리고 도망한다면 후세에까지 웃음거리가 된다”
이때 숙부인 미즈노 노부모토(水野信元)가 사람을 보내 역시 요시모토의 패배를 알려왔다. 숙부는 노부나가의 압력으로 마지못해 이번 전투에 이에야스의 적이 되어 참가했으나 이에야스를 미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조카의 안전을 위해 속히 철수하라고 권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그것도 일축했다.
“여기는 싸움터, 숙부라도 믿을 수는 없다”
세 번째로 오타카 성에 달려온 것은 그의 중신 도리이 타다요시(鳥居忠吉)가 보낸 부하였다. 타다요시는 서신을 통해 전투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즉각 철수하라고 권했다. 이때서야 이에야스는 마음을 결정했다.
그의 조심성은 오카자키에 돌아와서도 이어졌다. 그는 성에 들어가지 않고 근처의 다이주(大樹) 사에 진을 쳤다. 놀란 것은 성안에 있는 이마가와의 군사였다. 총대장이 전사한 이상 적진과 가까운 곳에 머물러 있으면 위험하다. 속히 본거지인 슨푸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입성하지 않았다.
“우지사네(氏眞) 공의 지시가 없는 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이것이 그 이유였다. 우지사네는 요시모토의 아들이다. ‘의리를 지킨다’ 이것은 이에야스의 긴 생애를 통해 일관된 하나의 특징이고 처세 방법이었다.
오카자키의 장병들은 초조감을 감추지 못하고 그만 성을 비우고 슬그머니 도주하고 말았다. 그제야 이에야스는 입성했다.
“버린 성이니 주울 수밖에”
19세 청년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노련함이고 조심성이었다. (계속)
출처 : 日本戰國時代物語
글쓴이 : Shogun21c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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