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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分의 승리가 최선”
이해 12월에 신겐은 4만 3000의 대군을 이끌고 도토우미에 침공하여 후다마타(二) 성과 요시노 성을 함락하고 하마마쓰 북쪽의 미카타가하라(三方原)에 진을 쳤다.
이때 하마마쓰에는 노부나가의 원병 3000이 도착해 있었으나 이들을 합해도 이에야스는 군은 8000에 불과했다. 작전회의에서 장수들은 이러한 전력의 차이를 이유로 성에 들어가 농성하자고 주장했다. 원군으로 온 오다의 장수들도, ‘신겐이 비록 싸움을 도발한다고 해도 결코 대응해서는 안 된다’는 노부나가의 의향을 전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신중하던 평소의 태도와는 달리 강경히 출격을 명했다. 지금까지 패배한 적이 없는 30세 청년의 혈기였다. 이에야스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 학익진(鶴翼陣)을 펼치고 겐신의 공격을 기다렸다. 이것은 병력을 횡렬로 전개시키는 대형으로 원래는 적보다 몇 배나 우세할 때 적을 포위하여 섬멸하는 진형이다. 다케다 신겐은 이에야스의 포진을 보고 웃었다. 그리고 어린진(魚鱗陣)을 펼쳤다. 이것은 물고기 비늘을 겹친 것 같은 종대로, 진형 중앙부가 삼각형의 꼭지점처럼 돌출해 있다. 공교롭게도 이 대형은 소수의 병력으로 대군에 맞서 결사적인 돌격을 감행할 때 쓰는 전법이다.
22일 오후 드디어 전투가 벌어졌다. 먼저 처음부터 전의를 상실하고 있던 우익의 원군(이에야스를 지원하러 온 노부나가의 군)이 무너졌다. 이것을 본 신겐은 제2선, 제3선의 병력을 중앙과 측면에서 투입했다. 신겐의 전법은 노도와 같은 인해전술로 시작된다. 창과 칼로 무장한 보병대가 공격을 감행한 뒤 기마대가 돌격하여 적을 짓밟는 것이다.
결과는 이에야스 군의 처참한 패배였다. 이 싸움에서 이에야스 군은 1200의 사상자를 냈고 그 자신도 구사일생으로 하마마쓰 성으로 퇴각했다. 이 패배는 이에야스의 전생애를 통해 유일한 패배였다.
성으로 돌아온 그는 사방에 횃불을 밝히고 성문을 활짝 열어놓게 했다. 패주해 오는 아군을 맞이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으나, 추격하던 적은 무슨 계략이 있는 줄 알고, 부근에 불만 지르고 그대로 돌아갔다.
이에야스는 대패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날 밤 소총대를 조직해 신겐의 진지에 기습공격을 가했다.
‘패배한 채 군사를 거두면 적은 기세가 올라 또 다시 공격해올 것이다. 반드시 일격을 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여기에도 집요한 이에야스의 진면목이 잘 나타나 있다.
- 새로운 책략과 전법
다케다 신겐은 평소 ‘병법의 극치는 5부(分)의 승리를 최상으로 하고 7부를 중(中)으로 하며 10부를 최하’로 한다. 5부는 탄력을 낳고 7부는 게으름을 낳으며 10부는 오만을 낳는다고 말했다. 그가 하마마쓰 성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이러한 생각 때문이었다.
이 전투가 끝난 뒤 신겐은,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의 멸망은 목전에 있다고 장담했지만 이듬해 4월 병을 얻어 진중에서 사망한다. 그의 죽음은 천명이었으나 노부나가나 이에야스에게는 그 이상의 행운이 없었다. 그들은 지금이 기회라는 판단하에 다케다 가문을 향해 전면적인 재공략을 계획했고, 이에야스는 신겐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가쓰요리(勝賴)와 본격적으로 대결했다. 이 싸움은 우선 쌍방 포섭작전으로 시작됐다. 신겐이 죽은 뒤 이에야스는 신겐의 전법을 본떠 계속 스루가를 공격하는 한편, 그 가신들을 포섭하여 내응을 얻어, 다케다 군의 중요 거점인 나가시노(長篠) 성을 함락했다.
이에 맞서 가쓰요리도 이에야스의 진영 깊숙이 첩자를 들여보냈다. 이에야스의 중신인 오가 요시로(大賀彌四郞)를 매수하여 이에야스의 정실 쓰키야마(築山) 부인과 밀통하게 하고, 전투가 벌어졌을 때 내응하도록 했다. 쓰키야마는 이에야스가 이마가와의 인질로 있을 때 혼인한 요시모토의 조카딸로, 그녀는 삼촌을 죽인 노부나가와 가문을 멸망시킨 이에야스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음모는 미연에 발각되어 요시로는 극형을 당했다.
가쓰요리가 1만 5000의 군사를 거느리고 미카와에 침입한 것은 1575년 4월이었다. 그는 요시로의 처형을 알고 이를 갈며 500의 병력밖에 없는 나가시노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함락 직전에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 3만 8000이 달려와 성의 서남쪽 시타라가하라(設樂原)에 포진했다.
가쓰요리 군의 장수들은 우선 나가시노 성을 점령하고 여기서 지구전을 벌이자고 헌책했으나, 가쓰요리는 일축했다. 마카타가하라 전투 때의 이에야스처럼 주력끼리 맞붙어 대번에 적을 섬멸하려고 했다. 가쓰요리는 나가시노 성을 포위하기 위해 약간의 군사만 남기고, 시타라가하라에 전군을 진출시켰다. 가쓰요리 군의 전법은 여전히 인해전술이었다. 이에 대해 도쿠가와와 오다의 연합군은 지난번 패배를 거울 삼아 새로운 전법을 개발해 놓았었다. 즉 진지 전면에 호를 파고 2중 3중으로 대나무 울타리를 세워 기마대의 공격을 차단하며, 보병에 대해서는 총포대로 맞선다는 새로운 전법이었다.
21일 새벽 가쓰요리 군은 총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연합군의 눈앞에까지 몰려온 돌격대가 울타리에 막혀 우왕좌왕할 때 이번에는 기다리고 있던 연합군의 3000 총포대가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했다. 이에 당황하여 도주하는 가쓰요리 군은 연합군의 기마대가 유린했다. 그 결과 가쓰요리 군은 신겐 이래의 용장을 거의 잃고, 내리막길을 걷다가 마침내 멸망하게 된다.
이 전투에 등장한 방책과 총포대를 이용한 새로운 전법은 노부나가가 창안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앞서 뼈아픈 패전을 경험한 이에야스가 노부나가에게 강력히 헌책하여 실행에 옮겨진 것이다. 과거의 실패를 거울 삼아 똑같은 실패는 되풀이하지 않는 이에야스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 것이 나가시노 전투였다. 이 전투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총포가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 놀라운 결단과 인내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의 동맹은 20년 가까이 유지되었다. 쌍방이 서로를 완전히 신뢰했기 때문에 유지된 것은 아니다. 이용가치가 있었을 뿐, 그런 요소가 없어지면 이 동맹은 무의미해진다.
나가시노 전투를 통해 일본의 전술을 일변시킨 노부나가의 명성은 세상을 놀라게 하고 패자(覇者)라는 지위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에야스도 나날이 관록을 더해 ‘천하 제일의 명장’이라는 평판까지 듣게 되었다.
하지만 천하의 주인은 두 사람일 수 없었다. 여기서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의 충성도를 시험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이에야스의 장남 노부야스(信康)에게 출가시킨 자기 딸 도쿠히메(德姬)가 보낸 서신을 이용했다. 즉 ‘쓰키야마 부인이 우리 부부를 이간하고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것을 이유로 남편 노부야스에게 소실을 들이게 했다. 마님 자신은 다케다 쪽의 첩자와 정을 통하고 모반을 꾀하고 있으며, 여기에 노부야스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또 노부야스는 황음(荒淫)을 일삼고 내가 데려온 시녀의 입을 찢어 죽였다’는 등등…. 노부나가는 이런 죄상을 이에야스에게 통보하고 모자의 처형을 명했다.
이에야스는 노부야스에게 씐 혐의만큼은 결코 믿지 않았다. 지금까지 함께 싸움터를 누비며 무장으로서 역량을 발휘해온 아들 노부야스를 냉철히 평가하고 앞으로 도쿠가와 가문을 계승할 수 있는 기량을 지녔다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노부나가가 들이댄 문제는 노부야스의 기량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요컨대 노부나가를 택하느냐 노부야스를 택하느냐의 문제다. 다른 방법을 택할 여지는 없었다.
‘어쩌면 모자를 구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자를 구해낸다고 해도 지금까지와 같은 이에야스와 노부나가의 굳은 결속은 보장받을 수 없다. 노부나가는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틀림없이 동맹자로서 이에야스에게 한계를 느끼고 이반을 획책할 것이다.’
이에야스 생애 중에서 이때처럼 고뇌하고 고민한 적은 없었다. 그는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생각하고 생각했다. 생각한다는 것이 무의미한 줄 알면서도 또 생각했다.
사흘이 지난 후 그는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노부나가는 지금 내게 불신감을 품고 있다. 그래서 동맹의 앞날을 점치기 위해 큰 희생을 요구한 것이다. 내가 이 희생을 치르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는 태도를 결정할 것이다. 노부나가와 우리의 동맹은 가문의 존망을 좌우한다. 그러니 나는 노부나가를 택하고 노부야스를 버릴 수밖에 없다’
이에야스는 비정한 길을 선택했다. 결국 쓰키야마 부인을 1579년 8월29일에 처형하고, 며칠 후 노부야스에게는 할복을 명했던 것이었다. (계속)
이해 12월에 신겐은 4만 3000의 대군을 이끌고 도토우미에 침공하여 후다마타(二) 성과 요시노 성을 함락하고 하마마쓰 북쪽의 미카타가하라(三方原)에 진을 쳤다.
이때 하마마쓰에는 노부나가의 원병 3000이 도착해 있었으나 이들을 합해도 이에야스는 군은 8000에 불과했다. 작전회의에서 장수들은 이러한 전력의 차이를 이유로 성에 들어가 농성하자고 주장했다. 원군으로 온 오다의 장수들도, ‘신겐이 비록 싸움을 도발한다고 해도 결코 대응해서는 안 된다’는 노부나가의 의향을 전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신중하던 평소의 태도와는 달리 강경히 출격을 명했다. 지금까지 패배한 적이 없는 30세 청년의 혈기였다. 이에야스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 학익진(鶴翼陣)을 펼치고 겐신의 공격을 기다렸다. 이것은 병력을 횡렬로 전개시키는 대형으로 원래는 적보다 몇 배나 우세할 때 적을 포위하여 섬멸하는 진형이다. 다케다 신겐은 이에야스의 포진을 보고 웃었다. 그리고 어린진(魚鱗陣)을 펼쳤다. 이것은 물고기 비늘을 겹친 것 같은 종대로, 진형 중앙부가 삼각형의 꼭지점처럼 돌출해 있다. 공교롭게도 이 대형은 소수의 병력으로 대군에 맞서 결사적인 돌격을 감행할 때 쓰는 전법이다.
22일 오후 드디어 전투가 벌어졌다. 먼저 처음부터 전의를 상실하고 있던 우익의 원군(이에야스를 지원하러 온 노부나가의 군)이 무너졌다. 이것을 본 신겐은 제2선, 제3선의 병력을 중앙과 측면에서 투입했다. 신겐의 전법은 노도와 같은 인해전술로 시작된다. 창과 칼로 무장한 보병대가 공격을 감행한 뒤 기마대가 돌격하여 적을 짓밟는 것이다.
결과는 이에야스 군의 처참한 패배였다. 이 싸움에서 이에야스 군은 1200의 사상자를 냈고 그 자신도 구사일생으로 하마마쓰 성으로 퇴각했다. 이 패배는 이에야스의 전생애를 통해 유일한 패배였다.
성으로 돌아온 그는 사방에 횃불을 밝히고 성문을 활짝 열어놓게 했다. 패주해 오는 아군을 맞이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으나, 추격하던 적은 무슨 계략이 있는 줄 알고, 부근에 불만 지르고 그대로 돌아갔다.
이에야스는 대패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날 밤 소총대를 조직해 신겐의 진지에 기습공격을 가했다.
‘패배한 채 군사를 거두면 적은 기세가 올라 또 다시 공격해올 것이다. 반드시 일격을 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여기에도 집요한 이에야스의 진면목이 잘 나타나 있다.
- 새로운 책략과 전법
다케다 신겐은 평소 ‘병법의 극치는 5부(分)의 승리를 최상으로 하고 7부를 중(中)으로 하며 10부를 최하’로 한다. 5부는 탄력을 낳고 7부는 게으름을 낳으며 10부는 오만을 낳는다고 말했다. 그가 하마마쓰 성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이러한 생각 때문이었다.
이 전투가 끝난 뒤 신겐은,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의 멸망은 목전에 있다고 장담했지만 이듬해 4월 병을 얻어 진중에서 사망한다. 그의 죽음은 천명이었으나 노부나가나 이에야스에게는 그 이상의 행운이 없었다. 그들은 지금이 기회라는 판단하에 다케다 가문을 향해 전면적인 재공략을 계획했고, 이에야스는 신겐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가쓰요리(勝賴)와 본격적으로 대결했다. 이 싸움은 우선 쌍방 포섭작전으로 시작됐다. 신겐이 죽은 뒤 이에야스는 신겐의 전법을 본떠 계속 스루가를 공격하는 한편, 그 가신들을 포섭하여 내응을 얻어, 다케다 군의 중요 거점인 나가시노(長篠) 성을 함락했다.
이에 맞서 가쓰요리도 이에야스의 진영 깊숙이 첩자를 들여보냈다. 이에야스의 중신인 오가 요시로(大賀彌四郞)를 매수하여 이에야스의 정실 쓰키야마(築山) 부인과 밀통하게 하고, 전투가 벌어졌을 때 내응하도록 했다. 쓰키야마는 이에야스가 이마가와의 인질로 있을 때 혼인한 요시모토의 조카딸로, 그녀는 삼촌을 죽인 노부나가와 가문을 멸망시킨 이에야스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음모는 미연에 발각되어 요시로는 극형을 당했다.
가쓰요리가 1만 5000의 군사를 거느리고 미카와에 침입한 것은 1575년 4월이었다. 그는 요시로의 처형을 알고 이를 갈며 500의 병력밖에 없는 나가시노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함락 직전에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 3만 8000이 달려와 성의 서남쪽 시타라가하라(設樂原)에 포진했다.
가쓰요리 군의 장수들은 우선 나가시노 성을 점령하고 여기서 지구전을 벌이자고 헌책했으나, 가쓰요리는 일축했다. 마카타가하라 전투 때의 이에야스처럼 주력끼리 맞붙어 대번에 적을 섬멸하려고 했다. 가쓰요리는 나가시노 성을 포위하기 위해 약간의 군사만 남기고, 시타라가하라에 전군을 진출시켰다. 가쓰요리 군의 전법은 여전히 인해전술이었다. 이에 대해 도쿠가와와 오다의 연합군은 지난번 패배를 거울 삼아 새로운 전법을 개발해 놓았었다. 즉 진지 전면에 호를 파고 2중 3중으로 대나무 울타리를 세워 기마대의 공격을 차단하며, 보병에 대해서는 총포대로 맞선다는 새로운 전법이었다.
21일 새벽 가쓰요리 군은 총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연합군의 눈앞에까지 몰려온 돌격대가 울타리에 막혀 우왕좌왕할 때 이번에는 기다리고 있던 연합군의 3000 총포대가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했다. 이에 당황하여 도주하는 가쓰요리 군은 연합군의 기마대가 유린했다. 그 결과 가쓰요리 군은 신겐 이래의 용장을 거의 잃고, 내리막길을 걷다가 마침내 멸망하게 된다.
이 전투에 등장한 방책과 총포대를 이용한 새로운 전법은 노부나가가 창안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앞서 뼈아픈 패전을 경험한 이에야스가 노부나가에게 강력히 헌책하여 실행에 옮겨진 것이다. 과거의 실패를 거울 삼아 똑같은 실패는 되풀이하지 않는 이에야스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 것이 나가시노 전투였다. 이 전투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총포가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 놀라운 결단과 인내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의 동맹은 20년 가까이 유지되었다. 쌍방이 서로를 완전히 신뢰했기 때문에 유지된 것은 아니다. 이용가치가 있었을 뿐, 그런 요소가 없어지면 이 동맹은 무의미해진다.
나가시노 전투를 통해 일본의 전술을 일변시킨 노부나가의 명성은 세상을 놀라게 하고 패자(覇者)라는 지위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에야스도 나날이 관록을 더해 ‘천하 제일의 명장’이라는 평판까지 듣게 되었다.
하지만 천하의 주인은 두 사람일 수 없었다. 여기서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의 충성도를 시험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이에야스의 장남 노부야스(信康)에게 출가시킨 자기 딸 도쿠히메(德姬)가 보낸 서신을 이용했다. 즉 ‘쓰키야마 부인이 우리 부부를 이간하고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것을 이유로 남편 노부야스에게 소실을 들이게 했다. 마님 자신은 다케다 쪽의 첩자와 정을 통하고 모반을 꾀하고 있으며, 여기에 노부야스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또 노부야스는 황음(荒淫)을 일삼고 내가 데려온 시녀의 입을 찢어 죽였다’는 등등…. 노부나가는 이런 죄상을 이에야스에게 통보하고 모자의 처형을 명했다.
이에야스는 노부야스에게 씐 혐의만큼은 결코 믿지 않았다. 지금까지 함께 싸움터를 누비며 무장으로서 역량을 발휘해온 아들 노부야스를 냉철히 평가하고 앞으로 도쿠가와 가문을 계승할 수 있는 기량을 지녔다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노부나가가 들이댄 문제는 노부야스의 기량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요컨대 노부나가를 택하느냐 노부야스를 택하느냐의 문제다. 다른 방법을 택할 여지는 없었다.
‘어쩌면 모자를 구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자를 구해낸다고 해도 지금까지와 같은 이에야스와 노부나가의 굳은 결속은 보장받을 수 없다. 노부나가는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틀림없이 동맹자로서 이에야스에게 한계를 느끼고 이반을 획책할 것이다.’
이에야스 생애 중에서 이때처럼 고뇌하고 고민한 적은 없었다. 그는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생각하고 생각했다. 생각한다는 것이 무의미한 줄 알면서도 또 생각했다.
사흘이 지난 후 그는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노부나가는 지금 내게 불신감을 품고 있다. 그래서 동맹의 앞날을 점치기 위해 큰 희생을 요구한 것이다. 내가 이 희생을 치르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는 태도를 결정할 것이다. 노부나가와 우리의 동맹은 가문의 존망을 좌우한다. 그러니 나는 노부나가를 택하고 노부야스를 버릴 수밖에 없다’
이에야스는 비정한 길을 선택했다. 결국 쓰키야마 부인을 1579년 8월29일에 처형하고, 며칠 후 노부야스에게는 할복을 명했던 것이었다. (계속)
출처 : 日本戰國時代物語
글쓴이 : Shogun21c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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