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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묘한 가신의 배치
신상필벌을 분명하게 하는 동시에 조선과의 전쟁 이래 도요토미 가문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었던 그들에 대해, 이를 보충하고도 남는 보너스를 주었던 것이다. 도사마 다이묘들이 이에야스에게 더욱 신뢰를 보냈을 것은 당연하다.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을 의식하고 일부러 이런 선심을 썼던 것이다. 천하 제패를 목전에 둔 이에야스의 회유정책이 한층 더 노련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도사마 다이묘들의 새 영지는 모두 주코쿠와 시코쿠 등 동북지방에 국한되고 요충지에는 한 사람도 배치하지 않았다.
후다이 다이묘들은 비록 녹봉은 적었으나 막료에 포함되어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하여 도사마 다이묘는 녹봉은 많았지만 중앙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종가를 중앙정부로 하고 그 밑에 일족-후다이 다이묘-도사마 다이묘 등 지방 정치기관을 가진 강력한 중앙 집권적 권력구조를 구축해 나갔다.
다음으로 직할지 정책에 힘을 기울였다. 이에야스가 직할지로 삼은 것은 금은이 산출되는 가이·사도(佐渡)·이즈(伊豆)와 건설자재의 보고인 신슈(信州)를 비롯하여 교토·후시미·사카이·나가사키 등 주요 도시와 항만, 전국 각지의 군사적 거점, 정치 경제적 중심지, 교통상의 요지 등으로 약 250만 석에 이르렀다. 특히 금은 산지의 직접 재배는 이에야스의 오랜 염원이었는데, 그것이 실현됨으로써 1602년 이후 금은의 생산량은 몇 배로 늘어났다.
이때의 다이묘가 전국시대의 다이묘와 크게 다른 점은 중앙정권에 의해 그 영지가 이동되었다는 점이다. 전국시대의 다이묘는 설사 멸망하는 경우는 있어도 다른 곳으로 영지가 옮겨지는 일은 없었다. 따라서 이때의 다이묘는 전국시대의 다이묘에 비해 영지와의 결합이 약했다. 다시 말하면 중앙정권의 힘이 전국의 토지와 백성에게 침투한 것이 된다.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수많은 다이묘의 영지를 몰수하고 이를 재분배할 수 있게 된 것은, 그가 중앙정권의 군사 통수권을 장악한 것만이 아니라 이미 중앙정권에서 주권자의 지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즉 그때까지 이에야스도 비록 그 영지는 압도적으로 넓었지만 다른 다이묘와 동질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다른 다이묘들과는 질적으로 판이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 도쿠가와 바쿠후의 출범
중앙정권의 주권자로 군림하게 된 이에야스는 1603년 2월 천황으로부터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의 칙명을 받아 군권과 정권을 동시에 장악하고, 도쿠가와 바쿠후(幕府)를 개설했다. 이때 그의 나이 62세였다.
바쿠후를 개설한 그는 에도에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여 시가를 확장하고 새로 성을 쌓기 시작했다. 원래 이 공사는 1590년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에 의해 간토로 이봉되었을 때부터 계획한 일이었다. 그러나 호화로운 성보다는 영지의 기반부터 다져야 한다는, 그의 실리적인 정신에 따라 연기되고 그후 10여 년 동안은 축성할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이이다이쇼군이 되자 그 위광을 과시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대대적인 공사를 벌였다.
에도 성 축성은 1604년에 시작되었다. 먼저 석재를 운반하기 위한 배부터 건조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3000척의 배가 완성되고, 이 배가 100명이 겨우 움직일 수 있는 거대한 돌을 두 개씩 실어 이즈로 운반했다. 목재도 간토를 비롯하여 스루가, 도토우미, 미카와의 산지에서 벌채했다. 성벽에 바를 석회는 에도 서쪽의 오소키(小曾木)와 나리키(成木) 등 두 마을에 명하여 석회암을 태워 만들게 했다.
본격적인 공사는 1606년에 가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기본적인 설계는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가 담당하고 여기에 이에야스가 수정을 가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12년 후 드디어 일본에서 최고라고 평가되는 덴슈가쿠(天守閣)를 위시한 본성과 제2, 제3의 성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성은 1657년 정월의 큰 화재로 거의 불타고, 덴슈가쿠는 끝내 재건되지 못했다. 이 미증유의 대공사는 모두 다이묘, 그 중에서도 주로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가자된 70명에 달하는 도사마 다이묘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이들 다이묘는 자기 영지에서 1000석당 1명의 비율로 농민을 징발하여 에도에 데려왔다. 그로 인해 다이묘들은 만성적이고 과중한 부역을 할당받아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이 때문에 영지의 재정이 핍박하여 사카이나 교토의 상인들로부터 빚을 지는 자도 속출했다.
‘죽지 않게, 그러나 살 수 없도록’이란 이에야스의 정책이 이처럼 과도한 부담의 강요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에도 성 공사와 함께 슨푸와 나고야 성의 축성도 병행하여 다이묘들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다. 나고야 성 공사 때의 일화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공을 인정받아 무려 30만 석이나 가자된 마사노리가 거듭되는 부담에 비명을 지르며, “이러다가는 재정이 파탄나겠다. 에도 성이라면 몰라도 하찮은 나고야 성에까지 우리를 동원하다니 말도 안 된다”고 푸념을 했다. 그것을 듣고 같은 도사마 다이묘인 기요마사가 말했다. “부역이 싫거든 영지로 돌아가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마사노리가 대답을 않고 있자 기요마사는 웃으면서, “그렇다면 아무 불평도 말고 부지런히 일하여 어서 공사를 끝내고 쉬도록 하세”라고 말하며 인부들에게 갔다고 한다. 아무리 부역이 고통스러워도 기요마사나 마사노리 같은, 히데요시가 키운 맹장들조차도 감히 반항할 수 없던 저간의 사정을 여실히 말해 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 오고쇼(大御所)와 쇼군
이에야스는 1605년 4월 세이이다이쇼군 직을 셋째 아들 히데타다(秀忠)에게 물려주고 정치 일선에서 은퇴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가 세이이다이쇼군에 재직한 기간은 겨우 2년 4개월이었다. 히데요시라면 어마어마한 지위에 크게 기뻐했겠지만 이에야스는 그렇지 않았다. 명예보다도 실리, 즉 그로서는 도쿠가와 정권의 강화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가 1선에서 물러난 의미는 대단히 크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도 도요토미 쪽에서는 이에야스가 쇼군이 된 것은 히데요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의 잠정적인 조치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관측 자체가 잘못된 것이지만 히데요리 주변, 특히 생모인 요도(淀) 부인 일파는 이렇게 믿고 있었다. 이에야스가 쇼군에 취임한 직후 손녀인 센히메(千姬)를 히데요리에 출가시킨 것이 그 근거였다. 그들은 이것이 차기 쇼군의 자리를 히데요리에게 물려주기 위한 사전준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도사마 다이묘와 도요토미 가문을 안심시키기 위한 작전이었다. 이런 상황에 갑자기 쇼군이 교체되었으니 그들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
‘히데요리에게는 더 이상 정권이 돌아올 희망이 없다. 정권은 대대로 도쿠가와 가문이 이어받을 것이다.’
히데타다의 쇼군 승계는 이런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요도 부인은 분노했으나 히데타다의 제2대 쇼군 취임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때부터 도요토미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의 지방 다이묘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쇼군 교체 후 1607년에 이에야스는 슨푸로 옮겨 ‘오고쇼(大御所)’라 불리게 되었으나, 앞서도 말했듯이 이것은 은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히데타다를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은 뒤에서 리모컨으로 정치를 조종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때부터 정치적인 실권자인 오고쇼와 중앙정권의 법적 주권자인 쇼군에 의한 이원정치(二元政治)가 행해지게 되었다. (계속)
신상필벌을 분명하게 하는 동시에 조선과의 전쟁 이래 도요토미 가문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었던 그들에 대해, 이를 보충하고도 남는 보너스를 주었던 것이다. 도사마 다이묘들이 이에야스에게 더욱 신뢰를 보냈을 것은 당연하다.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을 의식하고 일부러 이런 선심을 썼던 것이다. 천하 제패를 목전에 둔 이에야스의 회유정책이 한층 더 노련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도사마 다이묘들의 새 영지는 모두 주코쿠와 시코쿠 등 동북지방에 국한되고 요충지에는 한 사람도 배치하지 않았다.
후다이 다이묘들은 비록 녹봉은 적었으나 막료에 포함되어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하여 도사마 다이묘는 녹봉은 많았지만 중앙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종가를 중앙정부로 하고 그 밑에 일족-후다이 다이묘-도사마 다이묘 등 지방 정치기관을 가진 강력한 중앙 집권적 권력구조를 구축해 나갔다.
다음으로 직할지 정책에 힘을 기울였다. 이에야스가 직할지로 삼은 것은 금은이 산출되는 가이·사도(佐渡)·이즈(伊豆)와 건설자재의 보고인 신슈(信州)를 비롯하여 교토·후시미·사카이·나가사키 등 주요 도시와 항만, 전국 각지의 군사적 거점, 정치 경제적 중심지, 교통상의 요지 등으로 약 250만 석에 이르렀다. 특히 금은 산지의 직접 재배는 이에야스의 오랜 염원이었는데, 그것이 실현됨으로써 1602년 이후 금은의 생산량은 몇 배로 늘어났다.
이때의 다이묘가 전국시대의 다이묘와 크게 다른 점은 중앙정권에 의해 그 영지가 이동되었다는 점이다. 전국시대의 다이묘는 설사 멸망하는 경우는 있어도 다른 곳으로 영지가 옮겨지는 일은 없었다. 따라서 이때의 다이묘는 전국시대의 다이묘에 비해 영지와의 결합이 약했다. 다시 말하면 중앙정권의 힘이 전국의 토지와 백성에게 침투한 것이 된다.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수많은 다이묘의 영지를 몰수하고 이를 재분배할 수 있게 된 것은, 그가 중앙정권의 군사 통수권을 장악한 것만이 아니라 이미 중앙정권에서 주권자의 지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즉 그때까지 이에야스도 비록 그 영지는 압도적으로 넓었지만 다른 다이묘와 동질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다른 다이묘들과는 질적으로 판이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 도쿠가와 바쿠후의 출범
중앙정권의 주권자로 군림하게 된 이에야스는 1603년 2월 천황으로부터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의 칙명을 받아 군권과 정권을 동시에 장악하고, 도쿠가와 바쿠후(幕府)를 개설했다. 이때 그의 나이 62세였다.
바쿠후를 개설한 그는 에도에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여 시가를 확장하고 새로 성을 쌓기 시작했다. 원래 이 공사는 1590년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에 의해 간토로 이봉되었을 때부터 계획한 일이었다. 그러나 호화로운 성보다는 영지의 기반부터 다져야 한다는, 그의 실리적인 정신에 따라 연기되고 그후 10여 년 동안은 축성할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이이다이쇼군이 되자 그 위광을 과시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대대적인 공사를 벌였다.
에도 성 축성은 1604년에 시작되었다. 먼저 석재를 운반하기 위한 배부터 건조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3000척의 배가 완성되고, 이 배가 100명이 겨우 움직일 수 있는 거대한 돌을 두 개씩 실어 이즈로 운반했다. 목재도 간토를 비롯하여 스루가, 도토우미, 미카와의 산지에서 벌채했다. 성벽에 바를 석회는 에도 서쪽의 오소키(小曾木)와 나리키(成木) 등 두 마을에 명하여 석회암을 태워 만들게 했다.
본격적인 공사는 1606년에 가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기본적인 설계는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가 담당하고 여기에 이에야스가 수정을 가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12년 후 드디어 일본에서 최고라고 평가되는 덴슈가쿠(天守閣)를 위시한 본성과 제2, 제3의 성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성은 1657년 정월의 큰 화재로 거의 불타고, 덴슈가쿠는 끝내 재건되지 못했다. 이 미증유의 대공사는 모두 다이묘, 그 중에서도 주로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가자된 70명에 달하는 도사마 다이묘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이들 다이묘는 자기 영지에서 1000석당 1명의 비율로 농민을 징발하여 에도에 데려왔다. 그로 인해 다이묘들은 만성적이고 과중한 부역을 할당받아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이 때문에 영지의 재정이 핍박하여 사카이나 교토의 상인들로부터 빚을 지는 자도 속출했다.
‘죽지 않게, 그러나 살 수 없도록’이란 이에야스의 정책이 이처럼 과도한 부담의 강요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에도 성 공사와 함께 슨푸와 나고야 성의 축성도 병행하여 다이묘들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다. 나고야 성 공사 때의 일화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공을 인정받아 무려 30만 석이나 가자된 마사노리가 거듭되는 부담에 비명을 지르며, “이러다가는 재정이 파탄나겠다. 에도 성이라면 몰라도 하찮은 나고야 성에까지 우리를 동원하다니 말도 안 된다”고 푸념을 했다. 그것을 듣고 같은 도사마 다이묘인 기요마사가 말했다. “부역이 싫거든 영지로 돌아가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마사노리가 대답을 않고 있자 기요마사는 웃으면서, “그렇다면 아무 불평도 말고 부지런히 일하여 어서 공사를 끝내고 쉬도록 하세”라고 말하며 인부들에게 갔다고 한다. 아무리 부역이 고통스러워도 기요마사나 마사노리 같은, 히데요시가 키운 맹장들조차도 감히 반항할 수 없던 저간의 사정을 여실히 말해 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 오고쇼(大御所)와 쇼군
이에야스는 1605년 4월 세이이다이쇼군 직을 셋째 아들 히데타다(秀忠)에게 물려주고 정치 일선에서 은퇴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가 세이이다이쇼군에 재직한 기간은 겨우 2년 4개월이었다. 히데요시라면 어마어마한 지위에 크게 기뻐했겠지만 이에야스는 그렇지 않았다. 명예보다도 실리, 즉 그로서는 도쿠가와 정권의 강화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가 1선에서 물러난 의미는 대단히 크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도 도요토미 쪽에서는 이에야스가 쇼군이 된 것은 히데요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의 잠정적인 조치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관측 자체가 잘못된 것이지만 히데요리 주변, 특히 생모인 요도(淀) 부인 일파는 이렇게 믿고 있었다. 이에야스가 쇼군에 취임한 직후 손녀인 센히메(千姬)를 히데요리에 출가시킨 것이 그 근거였다. 그들은 이것이 차기 쇼군의 자리를 히데요리에게 물려주기 위한 사전준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도사마 다이묘와 도요토미 가문을 안심시키기 위한 작전이었다. 이런 상황에 갑자기 쇼군이 교체되었으니 그들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
‘히데요리에게는 더 이상 정권이 돌아올 희망이 없다. 정권은 대대로 도쿠가와 가문이 이어받을 것이다.’
히데타다의 쇼군 승계는 이런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요도 부인은 분노했으나 히데타다의 제2대 쇼군 취임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때부터 도요토미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의 지방 다이묘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쇼군 교체 후 1607년에 이에야스는 슨푸로 옮겨 ‘오고쇼(大御所)’라 불리게 되었으나, 앞서도 말했듯이 이것은 은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히데타다를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은 뒤에서 리모컨으로 정치를 조종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때부터 정치적인 실권자인 오고쇼와 중앙정권의 법적 주권자인 쇼군에 의한 이원정치(二元政治)가 행해지게 되었다. (계속)
출처 : 日本戰國時代物語
글쓴이 : Shogun21c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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