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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후의 명연기
용마루에 도편수의 이름을 넣지 않는 것은 고금의 관례이고, 종명도 글자 그대로 새겨 읽으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의도를 간파한 측근의 학자 그룹 중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왜곡하여 해석하는 자가 있었다.
“국가안강은 이에야스(家康)라는 이름을 둘로 갈라놓은 것으로 무서운 악의가 숨어 있습니다”
“군신풍락 자손은창은 도요토미 가문을 주군으로 삼아 자손의 번창을 즐긴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이렇게 해석한 이는 다름 아닌 하야시 라산, 수덴(崇傳) 등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이에야스는 매일같이 학자를 불러 특강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 정도의 간단한 글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그는 학자들의 해석을 받아들였다.
여기서 이에야스는 73세의 생애를 통해 터득한 노회함을 연기해 보였다. 그는 크게 노하여, 아니 사실은 회심의 미소를 띠고 사자를 오사카로 보내 힐문했다. 그리고 수습책으로 히데요리와 요도 부인은 에도로 옮겨올 것, 오사카 성을 비우고 영지를 교체하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것은 최후통첩이었다.
오사카 쪽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조건의 수락은 곧 도요토미 가문의 멸절을 의미하기 때문에 강경하게 맞섰다. 이에 히데요리 측은 도요토미 가문의 최고 원로로 그 동안 바쿠후와의 관계를 조율하고 있던 가타기리 가쓰모도(片桐且元)를 살해하려 했으나, 그는 이를 알아차리고 성에서 탈출했다. 그러자 히데요리는 그의 영지를 빼앗고 이 사실을 에도와 슨푸에 통고했다. 이것은 사실상의 선전포고였다.
나날이 사태가 긴박해지는 것을 보고, 노부나가에게 추방된 후 각지를 전전하며 갖은 고초를 겪던 오다 노부카쓰도 교토의 류안(龍安) 사로 은퇴하고 말았다. 히데요리의 고문격이던 그도 오사카에 남아 있으면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이어서 무장의 하나인 이시카와 사타마사(石川貞政)도 물러가고 남은 것은 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 등 강경파 무장들뿐이었다. 히데요리와 요도 부인을 정점으로 하는 주전파는 전투를 결의하고 사방으로 지원을 청하는 서신과 사자를 보냈다.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에게는 아끼던 명검을 보냈으나 그대로 돌아왔고, 마사나리는 사자를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이에마사는 한 마디로 거절했다. 도요토미 가문의 구신들은 한 사람도 동조하지 않았다. 오사카 쪽에 가담한 것은 통제의 강화와 궁지에 몰린 실직 무사들뿐이었다. 따라서 서군의 병력은 총 10만이라고 하지만 히데요리 직속의 가신단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오합지중에 불과했다.
1614년 10월, 히데요리가 군사를 출동시켰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이에야스는 마침 병상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그는 벌떡 일어나, “오사카 토벌은 나의 숙원이었다!”고 외치며 칼을 뽑아 허공을 갈랐다. 이에야스와 히데타다의 군사는 모두 20만. 그들은 일제히 오사카 성을 포위했다. 하지만 마사나리, 나가마사 등 도요토미 가문 출신 장수는 포함되지 않았다. 여전히 신중한 이에야스였다.
직접적인 전투는 11월19일에 시작되어 약 1개월 동안 계속됐다. 그러나 주위 수십 리에 걸쳐 방대한 해자를 둘러친 이 천하 제일의 오사카 성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초조감을 느낀 동군 일부는 성곽 밖의 작은 성을 공격했지만 수많은 병사가 해자에 빠지는 등 사상자가 속출했다. 그런데도 젊은 히데타다는 억지로 공격을 감행하려고 했다.
이에야스는 그를 제지했다. 포위전의 1인자로 알려진 히데요시도 30만의 대군으로 오다와라 성을 포위한 채 속수무책이던 적이 있다. 결국 그가 마지막으로 동원한 것은 총포나 활이 아니라 내응과 유인 등 모략전이었다.
- 마지막 승자, 이에야스
예전에 히데요시가 오사카 성 준공 때 의기양양하게 내뱉은 말이 있었다.
“이 성을 함락할 수 있는 방법은 장기적인 포위전 외에 외곽의 해자를 메우는 일밖에는 없다”
이에야스의 뇌리에 문득 떠오른 것은 그 말이었다.
‘그렇다, 일단 강화를 맺고 나서 싸우기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는 곧 화평 교섭을 시작했다. 적의 급소는 요도 부인과 하루나가였다. 화평 공작은 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처음에는 기세가 등등하던 요도 부인도 네덜란드제 대포로 덴슈가쿠를 공격당해 시녀 몇 명을 잃은 뒤부터는 갑자가 사기가 떨어져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이에야스는 탐지했다. 마침 성안에는 요도 부인의 동생으로 미망인이 된 조코인(常高院)이 있고 동군에는 그녀의 아들 교코쿠 다다타카(京極忠高)가 있었다. 이에 조코인을 다다타카의 진지로 불러내고 이에야스 쪽에서는 그의 소실 아챠(阿茶) 부인에게 혼다 마사스미를 딸려 교섭에 임하게 했다. 이리하여 오사카 성은 본성만 남기고 모두 철거한다, 하루나가 쪽에서 에도에 인질을 보낸다는 조건하에 앞서의 요구사항을 모두 철회하고 강화를 성립시켰다.
그런데 이 밖에 명문화하지 않은 희망 조항이 있었다. 그것은 도요토미 쪽과 강화 교섭에 나섰던 마사스미가, “오고쇼님의 출전 기념으로 하다못해 성 외곽의 해자라도 제거하고 싶다”고 제안한 일이었다. 도요토미 쪽에서는 그 정도의 일이라면 굳이 거부할 필요가 없다고 안일하게 생각한 나머지 승락하고 말았다. 해자 제거작업은 12월 21일부터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동원된 인부는 수만에 이르는 다이묘들의 병사였다. 성을 포위했던 군사들이 대번에 인부로 변했다. 순식간에 셋째 성의 해자가 메워지고, 내친 김에 둘째 성과 본성의 해자까지 메우고 말았다. 이것은 공사의 착오가 아니라 처음부터 그런 지시가 내려져 있었던 것이다. 현장의 총감독은 마사스미, 그 뒤에는 이에야스가 있었다.
도요토미 쪽은 나중에야 이 사실을 거세게 항의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마사즈미는 “현장의 인부들이 착각한 모양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계속 사과만 할 뿐이었다. 하루나가는 마사스미를 상대해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교토로 올라가 이에야스에게 면담을 청했다. 이에야스 곁에는 마사스미의 아버지 마사노부가 있었다. 그는 하루나가의 항의를 받고, “아들 녀석이 어이없는 실수를 했군요. 반드시 할복을 명하는 것으로 사과를 드리겠소”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해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도요토미 쪽에서는 이때서야 비로소 이에야스의 계략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듬해 4월, 이에야스는 서둘러 전쟁준비를 시작한 도요토미 쪽을 비난하면서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오사카 성을 공격했다. 이때 서군은 10여 만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겨울과는 완전히 양상이 달랐다. 주위에 해자가 없는 성은 민가와 다를 바 없었다. 서군은 농성도 할 수 없게 되어 전병력을 동원하여 공격해 나왔다. 이에야스가 뜻했던 대로 그들을 야전에 끌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더구나 서군은 지휘계통도 확립되지 않은 혼성부대였다. 드디어 열흘 만에 서군은 2만의 사상자를 내고 대패했다. 5월8일 아침이었다. 히데요리와 요도 부인은 불탄 덴슈카쿠 밑에 숨었다가 자결하고, 오노 하루나가는 전사했다. 이로써 도요토미 가문은 2대로 막을 내렸다.
이리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인내와 집념으로 명실상부하게 천하의 패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었다. 그가 설립한 에도막부 체제는 이후 메이지 유신 직전까지 무려 200여년간이나 일본을 안정적으로 지배해온 일본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지속적인 통치력을 보여주었다. 완벽하게 천하통일을 완수한 이에야스는 오사카 전투 그 이듬해인 1616년 4월17일 슨푸에서 75세의 삶을 마감한다. (계속)
용마루에 도편수의 이름을 넣지 않는 것은 고금의 관례이고, 종명도 글자 그대로 새겨 읽으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의도를 간파한 측근의 학자 그룹 중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왜곡하여 해석하는 자가 있었다.
“국가안강은 이에야스(家康)라는 이름을 둘로 갈라놓은 것으로 무서운 악의가 숨어 있습니다”
“군신풍락 자손은창은 도요토미 가문을 주군으로 삼아 자손의 번창을 즐긴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이렇게 해석한 이는 다름 아닌 하야시 라산, 수덴(崇傳) 등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이에야스는 매일같이 학자를 불러 특강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 정도의 간단한 글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그는 학자들의 해석을 받아들였다.
여기서 이에야스는 73세의 생애를 통해 터득한 노회함을 연기해 보였다. 그는 크게 노하여, 아니 사실은 회심의 미소를 띠고 사자를 오사카로 보내 힐문했다. 그리고 수습책으로 히데요리와 요도 부인은 에도로 옮겨올 것, 오사카 성을 비우고 영지를 교체하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것은 최후통첩이었다.
오사카 쪽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조건의 수락은 곧 도요토미 가문의 멸절을 의미하기 때문에 강경하게 맞섰다. 이에 히데요리 측은 도요토미 가문의 최고 원로로 그 동안 바쿠후와의 관계를 조율하고 있던 가타기리 가쓰모도(片桐且元)를 살해하려 했으나, 그는 이를 알아차리고 성에서 탈출했다. 그러자 히데요리는 그의 영지를 빼앗고 이 사실을 에도와 슨푸에 통고했다. 이것은 사실상의 선전포고였다.
나날이 사태가 긴박해지는 것을 보고, 노부나가에게 추방된 후 각지를 전전하며 갖은 고초를 겪던 오다 노부카쓰도 교토의 류안(龍安) 사로 은퇴하고 말았다. 히데요리의 고문격이던 그도 오사카에 남아 있으면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이어서 무장의 하나인 이시카와 사타마사(石川貞政)도 물러가고 남은 것은 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 등 강경파 무장들뿐이었다. 히데요리와 요도 부인을 정점으로 하는 주전파는 전투를 결의하고 사방으로 지원을 청하는 서신과 사자를 보냈다.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에게는 아끼던 명검을 보냈으나 그대로 돌아왔고, 마사나리는 사자를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이에마사는 한 마디로 거절했다. 도요토미 가문의 구신들은 한 사람도 동조하지 않았다. 오사카 쪽에 가담한 것은 통제의 강화와 궁지에 몰린 실직 무사들뿐이었다. 따라서 서군의 병력은 총 10만이라고 하지만 히데요리 직속의 가신단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오합지중에 불과했다.
1614년 10월, 히데요리가 군사를 출동시켰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이에야스는 마침 병상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그는 벌떡 일어나, “오사카 토벌은 나의 숙원이었다!”고 외치며 칼을 뽑아 허공을 갈랐다. 이에야스와 히데타다의 군사는 모두 20만. 그들은 일제히 오사카 성을 포위했다. 하지만 마사나리, 나가마사 등 도요토미 가문 출신 장수는 포함되지 않았다. 여전히 신중한 이에야스였다.
직접적인 전투는 11월19일에 시작되어 약 1개월 동안 계속됐다. 그러나 주위 수십 리에 걸쳐 방대한 해자를 둘러친 이 천하 제일의 오사카 성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초조감을 느낀 동군 일부는 성곽 밖의 작은 성을 공격했지만 수많은 병사가 해자에 빠지는 등 사상자가 속출했다. 그런데도 젊은 히데타다는 억지로 공격을 감행하려고 했다.
이에야스는 그를 제지했다. 포위전의 1인자로 알려진 히데요시도 30만의 대군으로 오다와라 성을 포위한 채 속수무책이던 적이 있다. 결국 그가 마지막으로 동원한 것은 총포나 활이 아니라 내응과 유인 등 모략전이었다.
- 마지막 승자, 이에야스
예전에 히데요시가 오사카 성 준공 때 의기양양하게 내뱉은 말이 있었다.
“이 성을 함락할 수 있는 방법은 장기적인 포위전 외에 외곽의 해자를 메우는 일밖에는 없다”
이에야스의 뇌리에 문득 떠오른 것은 그 말이었다.
‘그렇다, 일단 강화를 맺고 나서 싸우기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는 곧 화평 교섭을 시작했다. 적의 급소는 요도 부인과 하루나가였다. 화평 공작은 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처음에는 기세가 등등하던 요도 부인도 네덜란드제 대포로 덴슈가쿠를 공격당해 시녀 몇 명을 잃은 뒤부터는 갑자가 사기가 떨어져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이에야스는 탐지했다. 마침 성안에는 요도 부인의 동생으로 미망인이 된 조코인(常高院)이 있고 동군에는 그녀의 아들 교코쿠 다다타카(京極忠高)가 있었다. 이에 조코인을 다다타카의 진지로 불러내고 이에야스 쪽에서는 그의 소실 아챠(阿茶) 부인에게 혼다 마사스미를 딸려 교섭에 임하게 했다. 이리하여 오사카 성은 본성만 남기고 모두 철거한다, 하루나가 쪽에서 에도에 인질을 보낸다는 조건하에 앞서의 요구사항을 모두 철회하고 강화를 성립시켰다.
그런데 이 밖에 명문화하지 않은 희망 조항이 있었다. 그것은 도요토미 쪽과 강화 교섭에 나섰던 마사스미가, “오고쇼님의 출전 기념으로 하다못해 성 외곽의 해자라도 제거하고 싶다”고 제안한 일이었다. 도요토미 쪽에서는 그 정도의 일이라면 굳이 거부할 필요가 없다고 안일하게 생각한 나머지 승락하고 말았다. 해자 제거작업은 12월 21일부터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동원된 인부는 수만에 이르는 다이묘들의 병사였다. 성을 포위했던 군사들이 대번에 인부로 변했다. 순식간에 셋째 성의 해자가 메워지고, 내친 김에 둘째 성과 본성의 해자까지 메우고 말았다. 이것은 공사의 착오가 아니라 처음부터 그런 지시가 내려져 있었던 것이다. 현장의 총감독은 마사스미, 그 뒤에는 이에야스가 있었다.
도요토미 쪽은 나중에야 이 사실을 거세게 항의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마사즈미는 “현장의 인부들이 착각한 모양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계속 사과만 할 뿐이었다. 하루나가는 마사스미를 상대해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교토로 올라가 이에야스에게 면담을 청했다. 이에야스 곁에는 마사스미의 아버지 마사노부가 있었다. 그는 하루나가의 항의를 받고, “아들 녀석이 어이없는 실수를 했군요. 반드시 할복을 명하는 것으로 사과를 드리겠소”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해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도요토미 쪽에서는 이때서야 비로소 이에야스의 계략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듬해 4월, 이에야스는 서둘러 전쟁준비를 시작한 도요토미 쪽을 비난하면서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오사카 성을 공격했다. 이때 서군은 10여 만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겨울과는 완전히 양상이 달랐다. 주위에 해자가 없는 성은 민가와 다를 바 없었다. 서군은 농성도 할 수 없게 되어 전병력을 동원하여 공격해 나왔다. 이에야스가 뜻했던 대로 그들을 야전에 끌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더구나 서군은 지휘계통도 확립되지 않은 혼성부대였다. 드디어 열흘 만에 서군은 2만의 사상자를 내고 대패했다. 5월8일 아침이었다. 히데요리와 요도 부인은 불탄 덴슈카쿠 밑에 숨었다가 자결하고, 오노 하루나가는 전사했다. 이로써 도요토미 가문은 2대로 막을 내렸다.
이리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인내와 집념으로 명실상부하게 천하의 패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었다. 그가 설립한 에도막부 체제는 이후 메이지 유신 직전까지 무려 200여년간이나 일본을 안정적으로 지배해온 일본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지속적인 통치력을 보여주었다. 완벽하게 천하통일을 완수한 이에야스는 오사카 전투 그 이듬해인 1616년 4월17일 슨푸에서 75세의 삶을 마감한다. (계속)
출처 : 日本戰國時代物語
글쓴이 : Shogun21c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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