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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재]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 - 제11회

구름위 2013. 1. 4.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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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元 정치 체제

이에 따라 도사마 다이묘는 에도의 히데타다와 슨푸의 이에야스로부터 2중으로 체크당하게 된다. 사실 그들은 경쟁적으로 히데타다에게 충성을 보이려 했다. 다이묘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에도로 올라와 처자와 중신들을 인질로 바쳤다. 토목공사의 적극적 참여도 바로 그 엄중한 체크로부터 벗어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히데타다가 쇼군이 되면서 미카와 시대부터 세키가하라 전투에 이르기까지 군사와 정치 양면에서 중요한 일을 했던 사카이 다다쓰구, 사카키바라 야스마사(原康政), 이이 나오마사, 혼다 다다카쓰 등 이른바 이에야스의 4천왕은 정치의 중추에서 물러가고, 그 대신 오카자키 시대 이래 후다이의 노신으로서 고난을 같이한 오쿠보 다다치카(忠隣)가 노신의 필두가 되었다. 사카이 다다쓰구와 성은 같으나 역시 오래 전부터 중신이던 사카이 다다요(忠世)와 그의 숙부 다다토시(忠利)도 각각 노신의 반열에 올랐다. 이와 함께 히데타다의 유년시절부터 후견인이던 도이 도시카쓰(土井利勝), 안도 시게노부(安藤重信), 아오야마 다다나리(靑山忠成) 등도 노신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다다쓰구나 다다치카에 비하면 훨씬 나중에 등용된 다이묘다. 이와 같이 이에야스 시대의 막료 상층부가 교체되고 일찍부터 히데타다 측근에 있던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2대 쇼군의 막료가 구성되었다. 여기에 이에야스는 가장 신임하는 수완가 마사노부를 가담시켰다. 마사노부는 리모트 컨트롤로서 쇼군을 조정하며 이원정치의 요체가 되었던 것이다.

쇼군 휘하의 인적 구성이 이상과 같은데 비해 슨푸는 어떠했을까.

우선 미카와 이래의 원로는 한 사람도 없었고 가장 핵심 인물은 혼다 마사노부의 아들 마사스미이고 그 밑에 나루세 마사나리(成瀨正成), 안도 나오쓰구(安藤直次), 다케코시 마사노부(竹腰正信) 등이 있었다. 그들은 후에 요시나오(義直), 요리노부(賴宣) 등 이에야스의 아들 밑에서 중신이 되었다. 이에야스는 에도를 마음대로 통어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아들의 영지에도 자신의 지시가 반영되도록 자기가 키운 정치가를 투입했던 것이다. 그 밖에도 이에야스 주변에는 다양한 인물이 있었다. 즉 승려로는 덴카이(天海), 유학자로는 하야시 라잔(林羅山), 재무관료로는 오쿠보 나가야스(長安), 그리고 차야 시로지로(茶屋四郞次郞)와 영국인인 윌리엄 애덤스 등이 있었다. 이들이 모두 슨푸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에야스의 측근 그룹으로 활약했다.

이에야스는 경험을 통해 이원정치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1591년에 간파구 직을 조카인 히데쓰구(秀次)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다이코(太閤)로 실권을 쥐고 이원정치를 행했다. 그러나 1595년 히데쓰구는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로 자결을 명령받아 그와 처첩·자식 등 30여 명이 무참히 처형되는 결과를 낳았던 점을 상기했던 것이다.


- 후계자로 3男을 택한 이유

이에야스가 쇼군 직에서 물러난 것은 그 사건이 일어난 지 꼭 10년이 되는 해였다. 그동안 히데요시의 죽음, 세키가하라 전투, 도쿠카와 바쿠후의 성립 등 대사건이 있었다고는 하나 이 사건의 기억이 이에야스의 머리에서 사라졌을 리 없다. 그가 이러한 비극을 목격했으면서도 굳이 이원정치를 감행한 것은 절대로 히데요시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히데요시와 히데쓰구는 숙질간이므로, 나중에 히데요시에게서 친아들 히데요리가 태어났다는 것이 히데쓰구의 파멸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히데타다는 이에야스의 친아들이므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부자간이라고 해서 반드시 원만할 수 없다는 것은 전국시대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특히 이에야스는 맏아들인 노부히데를 자결시키는 통한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에야스가 히데타다를 후계자로 정한 데는 친아들이란 점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후계자로 물망에 오른 것은 차남인 유키 히데야스, 3남인 히데타다, 4남인 다다요시 세 사람이었다. 중신들과 상의한 결과 다다요시는 후보에서 제외되고 남은 두 사람 중에서 택하기로 했다. 히데야스를 지지하는 쪽의 의견은, 그는 무용이 뛰어나고 결단성이 강하므로 쇼군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히데타다를 지지하는 쪽은, ‘지금은 무(武)로써 천하를 위압하기보다는 문(文)을 장려하고 덕으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 히데타다 공은 효심이 깊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므로 그가 차기 쇼군으로 적당하다’고 주장했다.

히데야스의 결단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일화가 전한다. 어느 날 그가 후시미 성에서 승마를 하고 있을 때 항상 그를 수행하던 말구종이 따라와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 이것을 본 히데야스는 불끈 성을 내고, 하천한 자가 무엄한 짓을 한다며 그 자리에서 베어버렸다. 히데야스를 지지하는 쪽은 그 일을 예시하면서 히데야스 공이야말로 용기와 결단성이 있는 재목이라고 추천했다. 이때 이에야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만일 히데타다였다면 어떻게 했겠느냐고 물었다. 중신들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에야스가 다시 말했다.

“히데타다라면 아마 그를 죽이기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두 마디 주의를 주고 돌려보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처럼 두 아들의 성격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결국 히데타다를 후계자로 정했던 것이다. 히데야스의 과격하고 기민한 성격은 이에야스가 행하려는 이원정치에는 방해가 된다. 히데야스는 결코 이에야스의 노선을 충실히 이행할 인물이 아니다. 당연히 두 사람 사이에는 의견충돌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10년 전에 있었던 히데쓰구의 비극을 되풀이하게 될 뿐이다. 이에야스가 히데쓰구에게 쇼군 직을 물려준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 바쿠후(幕府)의 고자세

지배와 통치의 요체는 치외법권적인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 데에 있다. 앞서 미카와 시대에 이에야스가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잇코슈의 거점을 소탕한 것도 결국은 신도들이 그의 통제에 불복하고 외적과 결탁하여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에야스는 바쿠후를 개설함에 있어 모든 세력, 즉 다이묘, 사찰과 신사, 조정, 공경 등의 행동에 법적인 제한을 가하고 이를 탄압했다.

이에야스가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조정에 대한 간섭이었다. 당시 조정은 비록 실권은 없이 유명무실한 것이었으나 국민에게 작용하는 그 상징적 의미는 매우 컸다. 그러므로 바쿠후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조정에 대한 간섭이 불가피했다. 그 첫 시도가 1611년에 공포한 3개조의 법령이다. 이것은 도쿠가와 바쿠후가 무인정치의 전통을 계승한 정권이란 점을 조정으로 하여금 인정케 하는 아주 우회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다가 1613년에 이르러 새로 5개조에 이르는 ‘공가제법도(公家諸法度)’를 마련하여 본격적인 간섭을 강화했다. 즉 조정에 출사하는 자로서 법도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자는 유형에 처한다, 주야의 근무를 게을리 하거나 공연히 거리를 배회하고 도박을 하는 등 행실이 나쁜 자는 유형에 처하며, 바쿠후가 집행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 조정의 기강이 문란해져 이러한 금령(禁令)이 나온 것이지만, 이에야스는 이를 구실로 조정에 대한 압력을 행사했다.

이어서 1615년에는 ‘궁전 및 공가제법도’를 공표하여 천황과 조정의 생활 전반에 대해 법적인 규제를 가했다. 우선 제1조에 천황은 모든 일에 앞서 학문을 제일로 삼아야 한다며 우회적으로 천황의 행동을 법령으로 규제했다. 그리고 섭정이나 대신은 적임자에 한하여 임명하며 이 적임자는 노년이 되어도 사임시키지 않는다고 했는데, 여기에는 그 적임자를 바쿠후가 판단한다는 함축성이 개입되어 있다. 그로 인해 이후 고관의 임명에는 바쿠후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바쿠후는 조정의 권한에 속하는 사항을 일일이 규제하게 되었는데, 실제로는 그 조문에 나타나 있는 것 이상으로 간섭하였다. 천황과 조정의 자유의사를 극도로 속박함으로써 바쿠후의 권한을 강화해 나갔다.

다이묘에 관한 법령으로는 1611년 바쿠후가 다이묘들에게 내린 ‘무가(武家) 제법도’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바쿠후와 다이묘의 관계에서 기본이 되는 영지·군역·공납에 대해서는 거의 규정하지 않고, 대부분이 다이묘와 그 가신들의 질서 파괴 행동을 엄단하는 금지 조항이 많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법도를 어기는 자는 영지 안에 두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가신 중에 반역자나 살인자로 지목된 자가 있으면 추방해야 한다. 성을 보수할 때는 반드시 신고하고 신축은 엄히 금지한다. 이웃 영지에서 도당을 결성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보고해야 한다. 사사로이 혼인하는 것을 금지한다 등이다. 사찰에 대해 노부나가는 무력을 행사하여 철저히 파괴하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반면, 히데요시는 불당을 짓고 탑을 세우는 등 부흥시켜 가면서 한편으로는 토지조사와 무기 회수 등을 펼쳐 무력화시키는 정책을 썼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확립한 정치권력과 사찰의 관계를 법률과 제도를 통해 굳혀 나갔다.

도쿠가와 바쿠후가 사원에 관한 일반적인 규칙을 발표한 것은 1665년이었으나 이에 앞서 1615년에 각 종파에 대해 개별적으로 법령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이 법령을 통해 바쿠후가 강조한 것은 대체로 다음 세 가지였다.

첫째 승려에 대한 학문의 장려였다. 학문 수행을 소홀히 하는 자는 사찰에 있지 못하게 할 것, 주지나 고위 승직자는 학덕이 높은 자에 국한할 것 등을 규정했다. 이는 승려의 관심을 학문에 집중시켜 사찰의 세속적인 세력확대를 방지하려는 의도였다.

둘째 본사와 말사의 제도 확립이었다. 즉 불교의 각 종파 모두가 본사를 정하고 다른 사원은 여기에 종속된 말사로서 본사의 명에 따라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하면 바쿠후는 본사만 확실히 장악하면 그 종파 전체를 통제할 수 있다.

셋째는 승직 임명에 있어서 조정의 권한을 제한한 일이다. 이러한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후에 천황이 발한 칙령을 바쿠후가 무효화하는 일이 많아 천황이 분노하여 양위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 다시 14년간의 인내

철저한 지배와 통치를 지향하는 이에야스에게 가장 큰 장애는 65만 석의 큰 영지를 가지고 나라 한가운데에 버티고 있는 히데요리였다. 도요토미 가문은 사실상 지방의 한 다이묘로 전락했으나 영향력은 상실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기요마사, 마사노리 등 앞서 히데요시에게 직속되었던 무장들은 슨푸나 에도로 올 때마다 은밀히 오사카에 들러 히데요리에게 인사하기를 잊지 않았다.

이에야스로서는 묵과할 수 없는 일로 도요토미 가문과 유력한 도사마 다이묘가 연계되어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세키가하라 패전 이후 실직한 무사들을 도요토미 가문이 암암리에 도와주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패전으로 실직한 무사는 전국에 걸쳐 수십 만, 대부분은 취업의 길이 막혀 있으므로 다시 난세가 오기를 바라는 반사회적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전국의 실직 무사를 위시하여 현상에 불만은 품은 자들은 심리적으로 도요토미 가문 쪽으로 기울어졌다. 만약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동정적인 세력과 반항세력이 하나가 되어 폭발한다면, 창설기에 있는 도쿠가와 정권은 토대가 흔들려 붕괴할 위험성이 크다. 따라서 정권의 영구화를 꾀하는 이에야스로서는 반란의 진원지를 그냥 방치할 수 없었다. 그는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두르지는 않았다. 서서히, 그러나 착실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무려 14년이나 기다리다가 오사카 쪽에 손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야스의 압박작전은 1605년 쇼군 직을 히데타다에게 물려주었을 때 행동으로 옮겨졌다. 이때 그는 히데요리에게, 상경하여 새로운 쇼군에게 복종하는 예를 드리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오사카 쪽이 거부하자 일단 후퇴했다가 2년 후 슨푸 성 수축공사 때 다시 지시를 내렸다. 인근의 다이묘들과 똑같이 그에게도 부역하기를 요구한 것이다. 바쿠후의 통치권이 전국에 골고루 미치고 있으므로 예외를 인정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오사카 쪽에서는 크게 노하여 5대 원로의 하나인 도시나가에게 부역의 철회를 주선하도록 의뢰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은퇴했다. 결국 도요토미 가문은 이에야스의 요구에 응하고 말았다.

이에야스의 끈질긴 압박작전은 그 뒤에도 계속됐다. 1611년 3월, 고미즈노오(後水尾) 천황의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한 이에야스는 히데요리를 니조(二條) 성으로 불렀다. 이때도 오사카 쪽에서는 분개하며 응하지 않으려 했으나 기요마사, 요시나가 등이 중간에 나서 ‘거듭되는 항명은 이에야스에게 처벌의 구실을 준다’고 충고해 겨우 히데요리의 상경이 이루어졌다. 니조 성의 회견으로 히데요리를 형식적으로나마 복종시킨 이에야스는 상경한 다이묘들에게 3개 조항으로 된 서약서에 서명하게 했다. 여기에는 통제를 강화하여 도요토미 가문을 압박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이 후에 확대되어 앞서 말한 ‘무가 제법도’라는 법령이 되었다.

한편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의 재정을 고갈시키는 작전을 폈다. 당시 오사카 성에는 막대한 양의 금괴와 금화가 비축되어 있었다. 난공불락의 성이라 일컫는 오사카 성이 그 엄청난 금을 가지고 저항한다면, 이쪽의 손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게 권하여 각지의 사찰을 재건·수축하여 죽은 아버지의 명복을 빌라고 설득했다. 그 제의에는 지금까지 무슨 일에나 반대하던 요도 부인도 선뜻 응했다. 그녀는 신앙심이 깊다기보다는 미신에 빠져 있었다. 이리하여 오사카 쪽에서는 세쓰(攝津)의 덴노(天王) 사를 비롯하여 무려 20개가 넘는 사찰과 신사에 시주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요토미 가문은 호코(方廣) 사에 거대한 대불(大佛)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대불 건조는 돌아가신 타이코 전하의 숙원입니다. 반드시 이룩하십시오. 나도 미흡하나마 협력을 아끼지 않겠습니다”라고 히데요리 모자를 격려한 것은 이에야스였다.

대불의 건조는 1602년부터 착수하여 10년 후인 1612년에 끝났다. 그동안 오사카 성의 금은은 고갈되어, 친동생인 히데타다 부인에게 협조를 부탁하게 되었다. 한편 그동안에 도요토미 가문이 키운 기요마사를 비롯하여 요시나가, 나가마사, 요시하루, 토시나가 등 유력한 다이묘들이 병으로 쓰러졌다. 오사카 쪽으로서는 팔다리가 잘린 상태가 되었다.

호코 사의 대불전과 대불 및 범종의 낙성식은 1614년 8월에 거행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행사를 며칠 앞두고 별안간 에도에서 낙성식 연기 명령이 내려왔다. 용마루에 도편수의 이름이 들어 있지 않고 종명(鐘銘)에 새겨진 ‘군신풍락(君臣豊樂), 자손은창(子孫殷昌)’ 이라는 여덟 자와 ‘국가안강(國家安康)’이라는 넉 자가 무엄하다는 이유였다. (계속)







출처 : 日本戰國時代物語
글쓴이 : Shogun21c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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