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의 중심적 인물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
Ⅰ. 서론
사이고 다카모리는 일본 개화기의 정치가였으며, 메이지 유신의 지도자 중 한명으로서 가장 중심적 인물이었다. 도쿠가와 바쿠후 시대를 종결시키고 천황 중심의 왕정복고를 성공시키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으며, 정한론 주창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귀향하고 중앙정부와 대립이 격화되어 세이난 전쟁을 일으킨 인물이다. 2003년 개봉했던 ‘라스트 사무라이‘의 배경이기도 했던 세이난 전쟁. 그 중심에 서 있었던 사이고 다카모리에 흥미가 생겨 그의 생업을 조사해보기로 하였다.
Ⅱ. 본론
Ⅱ-1. 사이고 다카모리의 탄생과 성장
사이고 다카모리는 1827년 12월 7일 일본 규슈 남부 끝에 위치한 사츠마번의 가고시마에서 하급무사 사이고 기치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낮았지만 명예로운 무사 집안으로 대대로 봉건영주인 다이묘[大名]의 근위(近衛)역을 담당해왔다. 그가 태어난 시모카지야 마을은 하급무사들이 살던 마을이었다. 시모카지야는 소규모 촌락이었으나, 이 마을은 오쿠보, 러일전쟁의 육군 영웅 오야마, 해군 영웅 도고 등 메이지유신의 여러 공신들을 배출한 곳이다. 사츠마번은 향중 교육제도를 두어 무사의 자제들을 교육시켰는데, 엄격한 규율 통제로 유명했다. 행동이 불량하거나 나태한 자에게는 당사자는 물론 형제들까지도 그 지방에서 추방했던 것이다. 이 교육제도가 특히 강조했던 것은 사츠마번에 대한 충성심이었으며, 사이고 다카모리도 이러한 교육환경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소년시절의 그는 이렇다할 만큼 눈에 띄는 점은 없었다. 그러나 어른이 되자 키가 거의 180㎝, 몸무게는 90㎏이나 되었다. 게다가 크고 날카로운 눈매와 짙은 눈썹으로 인해 첫인상은 무섭게 보였지만 자상하고 소탈한 사람이었다. 또한 용기, 관용, 뛰어난 검술 등 사무라이가 지녀야 할 덕목을 갖추고 있어 주위에는 항상 동료와 추종자들이 몰려들었다. 자질구레한 사항에 신경쓰는 것을 질색했으며 결정은 신속하게 내렸고 논쟁보다는 실제로 행동하기를 더 좋아했다. 이러한 기질은 그가 받은 교육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한 중국 철학자 왕양명(王陽明)의 사상과 함께 선종(禪宗)을 공부했고 경천애인(敬天愛人)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무사교육을 착실하게 받았고 1844년 그가 18살 때 사츠마번의 농정을 담당하는 관리로 등용돼 27살까지 그 직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의 성실함이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사이고다카모리가 번의 농정을 맡아 일하고 있을 때, 사츠마번에서는 번주가 나리아키라로 바뀌게 되어 이로써 사츠마번은 개혁의 길을 걷게 되고, 이러한 개혁정책은 일본 전체의 개혁을 주도해나가게 된다.
Ⅱ-2. 막부 타도를 위한 그의 활동
-사이고 다카모리의 출세
1853년 6월,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페리제독이 군함을 이끌고 우라가 항에 들어와 일본의 개항을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벌이자, 일본 전국이 대혼란을 겪었다. 이듬해 3월 초 막부와 페리 사이에 미일 화친조약이 체결되었다. 에도에 올라온 나리아키라는 제후들의 힘을 결집해 이 위기에 대처할 수 있도록 막부 중심의 강력한 지배체제를 구축해야 할 것으로 판단했다. 이를 위해 우선 자신의 뜻을 받들어 막부의 관리들이나 가번의 수뇌부와 교섭하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자신을 적극 보필해줄 일꾼이 필요했다. 이에 사이고 다카모리가 그의 개인 비서직에 해당하는 니와카타 (번주가 내리는 밀령을 받아 그때그때 보고하거나 중요한 정보를 알리는 직책) 직에 발탁되었다. 일본의 개항을 둘러싼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출세는 시작됐으며 그것은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나리아키라는 사이고 다카모리에 대해 ‘사츠마 제일의 보배’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앙 정계에 진출시키려고 노력했으며, 이 때문에 그는 수많은 지배층 인물들과 폭넓게 교제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인 견문과 인식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나리아키라의 신뢰는 더욱 커져갔고, 그도 나리아키라의 명을 받들어 개명 제후들의 결속과 요시노부 옹립 운동을 도왔다. 1857년 10월에는 나리아키라의 명령을 받아 12월부터 에도에 다시 올라가 근무하게 되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주된 역할은 요시노부 옹립을 위해 나리아키라의 비책을 수행하는 것으로, 교토 조정을 움직여 차기 장군을 요시노부로 정하라는 밀칙을 막부에 하달케 하는 공작이었다. 따라서 그는 에도와 교토를 왕복하면서 이러한 공작을 성사시키는 데 주력했다.
-쿠데타의 실패와 유배
교토 조정에 대한 공작이 막부에 발각되어, 당시 히코네 번주 이이가 반대 공작을 시행함으로써 요시노부 옹립 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요시토미 옹립공작에 성공한 이이는 막부의 최고관직인 다이로에 앉게되고, 막부는 소수 보수파 세력들에 의해 놀아나게 되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가고시마에 돌아가 공작 실패 소식을 나리아키라에게 알리고, 시국 타개를 위해 조정을 주축으로 막부체제를 일신하자는 뜻을 개진했다. 궁궐을 수비한다는 명목으로 사츠마 군대를 이끌고 교토에 상경하려고 한 것이다. 조정을 업고 막부 보수파들을 제거하려는 쿠데타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사이고 디카모리를 먼저 상경시켜 뜻을 같이하는 세력들에게 서신을 전달케 함으로써 쿠데타 준비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사이고 다카모리가 오사카의 사츠마 번저에 닿기도 전에 쇼군 이에사다가 병사한다. 1855년 7월 5일의 일이다. 이이는 쇼군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쇼군의 명력이라고 하며 각 지방의 개혁파 지도자들에게 근신 명령을 내렸다. 사이고 다카모리에 대한 막부측의 감시도 삼엄해졌다. 이러던 중 사츠마의 나리아키라가 무더위 속에 군사훈련을 강행하다가 병을 얻어 사망한다. 주군의 사망의 비보를 접한 사이고 다카모리는 비통한 심정으로 즉시 귀향해 주군의 묘전에서 자결하려고 마음먹고 고향인 사츠마로 돌아갔다. 한편 막부의 탄압에 쫓겨 사츠마로 도피해온 동지 겟쇼오를 사이고가 보호하려고 한 데 대해 번청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번청은 급기야 겟쇼오를 번외로 추방할 것을 결정하고 사실상 겟쇼오를 참살할 것을 통고해왔다. 사이고는 비장한 마음으로 동반자살을 시도했다. 뱃사람들이 이들을 건져냈을 때 겟쇼오는 이미 죽어 있었고 사이고는 혼수상태로 이틀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막부와 번의 명령에 불복하고 자살을 기도한 그를 번청으로서는 처벌해야 마땅했지만, 전 번주의 심복인 데다 번 내에 그의 처벌을 반대하는 세력이 많아 그를 죽이지는 못했다. 궁여지책으로 번청에서는 막부에게 사이고 다카모리가 익사했다고 보고하고 그의 이름을 기쿠치로 바꾸어 남쪽 바다의 오시마에 무기한 귀양살이를 보냈다. 1859년 1월부터 사이고 다카모리가 약 3년간 오시마에서 남긴 행적은 전설화 되어 오시마 각지에 전해졌다. 사츠마 주민들 중에는 그를 숭배하는 자들이 속출했으며, 그는 섬 주민들로부터 어진 정치가로 추앙받게 되었다. 히사미츠에게 발탁된 오쿠보의 알선으로 사이고는 유배생활을 마치고 가고시마로 돌아와 도시마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히사미츠와는 뜻이 맞지 않았고 그의 행동이 오해를 받아 1862년 6월 오시마 유배를 끝낸지 4개월 만에 전보다 더 먼 도쿠시마로 다시 유배를 당했다. 그는 곧 이어 중죄인만을 유배시키는 오키노에부시마에 보내져 감옥살이와 다름없는 생활을 강요당했다.
-‘패권 추구의 목적‘ 아래의 재기
사이고 다카모리가 유배가 있던 기간에 중앙의 정세는 급변하고 사츠마에도 존왕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1862년에 히사미츠가 공무합체론에 기초한 막부 개선책을 건의해 어느 정도 성공했으나, 히사미츠의 생각과는 달리 조슈번을 중심으로 일어난 급진적 존왕양이 세력들이 교토조정을 장악해 즉각 외세를 배척하라는 칙령을 내리게 했다. 이에 편승한 막부는 외세배척 결행의 포고를 내렸다. 이는 대세의 흐름에 역행하는 과잉 반응으로, 도리어 서구 열강의 무력 개입을 자초했다. 교토 조정은 공무합체를 명목으로 안정되는 듯했지만, 사실상 막부와 각 번들이 서로 얽혀 세력 각축을 벌이고 서로 견제하는 마당이었다. 즉 쇼군의 후견인 미도번의 요시노부는 다른 제후들을 제치고 조정을 독점하려 했고, 에도의 막부 주류들은 이러한 요시노부를 쇼군의 지위를 노리는 자로 배척했으며,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히사미츠에 대해서는 막부와 다른 번들이 경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공무합체론에 입각해 조정과 막부의 융합을 주도하려고 했던 히사미츠와 우쿠보의 노선은 제대로 적동하지 않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정계에서 사츠마번의 고립을 자초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사츠마에서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넓은 인간관계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히사미츠의 사이고 다카모리에 대한 개인적인 미움이 변한 것은 아니지만, 패권 추구의 목적 아래 사이고와 타협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다시 풀려났다. 그는 1864년 2월 가고시마에 돌아오자마자 제대로 쉴 틈도 없이 곧바로 교토로 올라가야 했다. 그는 히사미츠를 알현하고 번의 국방대신이라 할 수 있는 직책을 받았다. 이날 히사미츠와 오쿠보는 뒷일을 그에게 밭기고 사츠마로 돌아갔다. 이로써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치의 중심지 교토에서 일거에 사츠마번의 최고대표자가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38살, 드디어 이제까지의 그의 시련이 결실을 맺게 되었다. 실제로 이때부터 메이지 원년(1868년)에도 입성하기까지 4년 동안 그는 사상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뛰어난 통찰력, 조직력, 결단력은 장기간 군림해온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는 데 큰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대단원의 막을 내린 막부통치
1866년 12월에는 조정에서 친막부파의 중심이었던 고메이 천황이 죽자 17살의 메이지가 그 뒤를 계승했고, 이에 따라 천황을 내세운 막부타도 운동은 더욱 진전되었다. 사이고는 웅번 제후들의 합의체로 막부를 대체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자, 이제 평화적인 정국 변동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무력에 의한 막부타도를 결단하게 되었다. 우선 조슈와 도사와의 군사동맹을 튼튼히 하는 한편, 천황으로부터 왕정복고와 막부타도의 비밀 칙서를 얻어냈다. 바로 이때 새 쇼군 요시노부는 국정의 형식적 결정권을 종래의 막부에서 조정으로 옮기고 실질적 결정권은 제후들의 회의에 넘김으로써 막부타도의 명분을 봉쇄하려고 1867년 10월 14일 정권이양 조치인 ‘대정봉환’을 단행했다. 이런 막부측과 토막군(관군)의 전투가 벌어졌고, 이 전투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는 관군의 총사령부 참모로 전투의 총지휘를 맡아 혁혁한 전과를 올림으로써 그의 명성을 일본 전역에 떨쳤다. 관군 대표 사이고와 막부군 대표 가츠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지고 이로써 신정부는 실질적으로 일본을 통치하게 되었다. 이어 이듬해 5월까지 전개된 동북지방의 막부지지 잔존세력과의 내전을 종식함으로써 막부 통치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Ⅱ-3. 메이지 유신에서의 역할
-유신정부의 참여와 정한론(征韓論)
사이고 다카모리가 국민적 영웅이 된 것은 쇼군의 사퇴 이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 때문이었다. 쇼군의 사퇴로 행정적 공백이 생기게 되자 이에 불만을 느낀 천황 지지파들은 쿠데타를 음모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나중에 메이지 유신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1868년 1월 3일 새벽 사이고 휘하의 군대는 황궁을 장악했으며 이어 소집된 귀족회의에서 젊은 메이지 천황은 일본에 새로운 시대가 개막되었음을 알리는 조칙(詔勅)을 내렸다. 이로 인해 쇼군 정부와 황군(皇軍) 간에 내전이 벌어졌으나 곧 끝이 났는데, 이때 황군은 주로 사쓰마와 조슈의 두 한[藩]이 동원한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1868년 5월 황군의 참모장 자격으로 바쿠후가 있던 에도[江戶:지금의 도쿄]로 가서 함락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어 그해 11월까지 일본 북부 지방의 쇼군 정부 지지세력에 대한 토벌작전을 계속해서 수행했다. 그는 마침내 일본 전역에 천황의 절대 권위를 확립시키는 목표를 완수했지만 그뒤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힘겨운 일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일본 국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것으로 만족하고 덧없이 세월을 보내지도 않았다. 그는 고향인 사쓰마로 은퇴했다. 1871년 사이고 다카모리는 마침내 여러 차례 설득을 당한 끝에 새로운 정부에 참여하게 되었고 1872년 여름 육군대장으로 승진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징병제의 도입을 둘러싸고 심각한 의견대립이 벌어졌다. 정부의 일부 각료들의 유럽의 군대조직에서 영향을 받아 국민개병제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한 것에 반해 다른 각료들은 사무라이 계급이 전통적으로 갖고 있던 (軍) 점유권을 빼앗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이같은 논쟁이 가열되는 동안 군부의 원로격인 사이고 다카모리는 자신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하지 않았다. 그는 개인적으로 국민개병제를 지지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만약 그의 협조가 없었더라면 신정부는 국민개병제를 채택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 통설(通說)이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징병제도에 대하여 분명한 태도를 취할 수 없었던 것은 그 자신이 깊은 심리적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는 표시일 수도 있다. 일본이 사무라이 정신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의구심을 느낀 그는 분명 돌이킬 수 없는 일련의 과정을 추진한 자기 자신의 역할을 후회하기 시작했으며 이 같은 후회는 1873년 여름 조선 문제와 관련하여 표면화하게 된다. '은자의 왕국' 조선은 공식적으로 메이지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사절단을 3번씩이나 물리쳤다. 다른 여러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역시 조선의 태도가 모욕적이라고 느꼈고 조선을 응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자신의 관점에서 볼 때 조선과의 전쟁은 사무라이 계급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사실 대다수의 사무라이들은 왕정복고가 초래한 근대화 추세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여기거나 반발하고 있었고 징병제도로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사무라이 계급의 활성화라는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사이고 다카모리는 태정관에서 기발한 제안을 내놓았다. 그 자신이 조선과의 현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사 자격으로 조선을 방문한 뒤 일부러 무례한 행동을 하여 조선인에 의해 피살되도록 함으로써 이를 계기로 조선에 선전포고를 할 수 있는 정당한 구실을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조선의 국교거부 태도를 무례하다고 느낀 사이고 등의 유수정부는 이번 기회에 조선 진출을 단행하고자 정한론을 제창한 것이었다. 이 제안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그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라고 강조함으로써 반대의견을 모두 물리쳤다. 여러 번에 걸친 간곡한 탄원 끝에 그의 제안은 1873년 8월 18일 천황의 재가를 받게 되어 자신이 대사가 되어 조선에 건너갈 공작을 폈다. 그 직후 이와쿠라[岩倉] 사절단 일행이 오랜 해외 여행 끝에 돌아오게 되는데 이들은 그 결정에 한을 근본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국내의 힘을 축적하여 전력이 충분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다. 지금은 시기상조다.” 라고 주장하여 사이고 다카모리의 즉시 정한의 제안을 취소시켰다. 이 같은 사태 반전에 격노한 사이고는 참의직(參議職)과 근위도독직을 사임하고 다시 가고시마로 돌아갔으며 다른 몇몇 고관들도 사직원을 제출했고 하급직에서는 100여 명 이상의 근위군 장교들이 사이고 다카모리의 뜻을 따라 사퇴했다. 사태가 이렇게 진전되자 일본의 지도층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양분되고 말았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그러한 과격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깊은 심리적 타격을 받았는가를 잘 보여준다.
-세이란 전쟁과 그의 생 마감
정한론에서 패배한 사이고 다카모리는 그를 따르는 가고시마의 사족들과 함께 가고시마로 돌아간 뒤 몇 개월 후에 군사학과 신체단련을 집중 교육하는 사설 학교를 설립했다. 이에 일본 각지의 사무라이들이 몰려들어 1877년에는 학생수가 2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이 학교는 공직에 뜻이 있는 젊은이들을 교육시키는 사설 학교에 불과했지만 도쿄의 신정부는 이를 두려워했다. 가고시마 현에서는 현지사를 비롯하여 그 아래의 직급까지 모두 사이고 지지자들이 장악했고 빈 자리가 생기면 사이고 학교의 졸업생들이 우선적으로 채용되었다. 1876년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 사무라이의 반란이 산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감안한다면 가고시마가 대규모 반란의 중심지가 될지도 모른다고 정부가 우려한 것은 일리가 있는 것이었다. 정부는 권위를 확립할 목적으로 몇 가지 경솔한 조치를 취했는데, 이것이 이미 긴장되어 있는 분위기에 불을 지르는 격이 되었다. 이에 따라 1877년 1월 29일 일단의 사이고 다카모리의 제자들이 가고시마 무기고와 해군 공창을 공격하게 되었다. 천황 정부에 대한 반란 사태가 이같이 전개되자 산중으로 수렵여행을 떠났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황급히 돌아왔다. 그가 가고시마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그의 지지자들이 병기창을 자체 운영하면서 추가 군사행동을 벌이기 위해 군수품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그는 마지못해 반란의 지도자가 되기로 했다. 자신들의 불만사항을 정부에 제출하겠다는 막연한 생각만을 가지고 도쿄로 진군하려는 계획이 수립되었고 이에 따라 사이고 다카모리의 군대는 2월 15일 도쿄를 향해 출발했다. 정부군은 사이고군의 진군을 구마모토[熊本]에서 봉쇄했고 그 후 6개월에 걸쳐 전면전이 벌어졌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오랜 친구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1838~1922]가 당시 육군 대장이 되어 토벌군 총사령관으로서 정부군을 지휘했다. 1877년 5월이 되자 사이고 다카모리의 군대는 수세에 몰렸고 여름 내내 여러 번에 걸쳐 비참한 패배를 거듭하다가 9월에 전황은 결정적인 위기를 맞았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수하의 수백 명만을 데리고 가고시마로 돌아와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다. 1877년 9월 24일 정부군은 마지막 공격을 개시했다. 이 전투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는 치명상을 입었고 사전에 약속된 대로 충직한 부관이 그의 목을 쳐줌으로써 사이고 다카모리는 자결했다. 그의 휘하에 있던 4만 명의 병력 중 약 200명만이 살아남아 그해 2월에 투항했으며 양측의 사상자는 사망 1만 2,000명, 부상 2만 명으로 추산된다. 세이난 전쟁의 종결 이후 사족의 반란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이로써 오랫동안 이어오던 반정부세력의 반란은 이 세이난 전쟁을 끝으로 종식됨으로써 신정부는 안정을 찾게 되었다.
Ⅲ. 결론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한론’을 주장했다는 것만을 본다면 그에 대해 거부감이 밀려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정한론은 일본 교과서 역사 왜곡 논란에서도 자주 지적되는 내용으로써, 많은 일본 교과서에서 정한론을 배경으로 조선 정부의 무례함을 들었다. 심지어 사이고 다카모리를 무사도 정신에서 조선을 개방시키려는 사람으로 미화해놓기도 했다. 이러한 점은 그 당시 상황을 보아 객관적인 평가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반드시 고쳐져야 할 부분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사이고 다카모리‘라는 인물만을 평가해 본다면 그는 상당히 뚝심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메이지 유신을 성공하고도 자신의 이상을 좆아 반란을 일으켰으며 끝내 죽음에 이르렀다. 자신이 이루고자 한 바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점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에서 비운의 영웅으로 오늘날까지 사랑받고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탐탁치 않은 그이지만, 일본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가 없었더라면 유신은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초상화와 우에노 공원에 있는 그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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