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의 충신-시마 사콘島左近의 수수께끼
(사콘은 노부나가의 사촌형제였다?!)
'미츠나리三成에게 과분한 것 두 개가 있으니, 가모嶋의 사콘左近과
사와야마佐和山의 성' (三成にすぎたるもの二つあり 嶋の左近と佐和山の城)
...라 할 정도로, 시마 사콘 가츠타케島左近勝猛는, 개성파가 많은 미츠나리
의 가신단 중에서도 특히 돋보입니다. 특히 최근에는, 하라 데츠오原哲夫씨
의 만화「影武者德川家康」「SAKON」으로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내친 김에, 위의 '미츠나리에게 과분한 것...'이라는 글귀는, 쿄오보오享保
시대에 엮어진 [聞書集]에, '세키가하라 싸움 2, 3년 전부터 나왔던
이야기이다'라는 소개가 있습니다만, 오리지날은
'가모嶋의 사콘과 백 간의 다리'(「嶋の左近と百間の橋」)라고 되어있습니다.
백 간(180m)의 다리는 비와琵琶호의 내해에 미츠나리가 만든 것으로, 지금은
매립지여서 흔적도 없지만, 당시로는 획기적인 것이었던 것 같더군요.)
...조금 이야기가 샜습니다만.
미츠나리의 충신으로 이름 높은 시마 사콘입니다만,
그 출생, 생애에는 수수께끼인 부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여기서는, 이 시마 사콘에 대해서 고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시마 사콘의 약력
흔히들 알고 있는 시마 사콘의 약력을 써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시마 사콘 가츠타케島左近勝猛
무장. 츠시마對馬 출신. 기요오키淸興, 도모유키友之,
기요타네淸胤라고도 불리웠다.
처음에는 츠츠이 쥰케이筒井順慶를 섬겨, 중신 마츠쿠라 우콘松倉右近과
함께 츠츠이의 [우콘사콘右近左近]으로 불리며, 이가伊賀 우에노上野성을
맡고 있었다. 쥰케이가 죽은 뒤, 그 아들 사다츠구定次와 의견이 맞지
않아 낭인이 되어, 오우미近江 강남의 다카미야高宮에 은거했다.
당시(텐쇼오天正 11년=1583년 경) 고가甲賀 미즈구치水口 4만석의 성주가
된 직후의 미츠나리三成가 이를 알고, 높은 봉록을 주고 맞이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關ヶ原軍記大成]이나 [常山紀談]에 유명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히데요시 '이번에 봉록을 올려주었는데, 몇 명 정도 고용했는가?'
미츠나리 '한 명 뿐이오니다'
히데요시 '한 명 뿐이라고! 대체, 누구를 고용한 건가?'
미츠나리 '시마 사콘이라 하는 자이오니다'
히데요시 '시마 사콘이라면, 이름 높은 자. 그대 정도를 섬길 리가 없지.
지행을 얼마나 주었기에?'
미츠나리 '그래서 소인의 지행 4만석 중, 2만석을 주었습니다'
이를 듣고, 히데요시는 '군신간이 같은 지행을 받는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라 웃으며 미츠나리를 칭찬하고, 시마 사콘에 대해서도 손수 하오리
를 주며, '미츠나리와 마음을 합해, 천하의 일에도 마음을 쓰도록'이라
말하여, 사콘의 면목도 크게 세워주었다는 일이 있다.
단, 여기에는 물론 이론이 있어, 미츠나리가 미즈구치 성주가 되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설도 있으며, 에도시대의 야마시카 시로유키山鹿素行가 쓴
[武家事紀]에 있듯이 사콘이 미츠나리를 섬긴 것은, 츠츠이筒井가를 떠나
하시바 히데나가羽柴秀長, 히데야스秀保 부자를 섬긴 뒤의 일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어쨌든 덴쇼오天正 20년(1592) 미츠나리가 사와야마佐和山성에 있을
무렵에, 사콘이 중신으로서 섬기고 있었던 일은 [多聞院日記] 등, 동시대
의 다른 사료에도 나와 있으므로 의심할 여지는 없습니다.
사콘이 미츠나리를 섬긴 이후의 이야기로는, 예를 들어 '미츠나리에게 도
쿠가와 이에야스의 암살을 권했다' 등의 일화도 남아 있으나, 무엇보다도
활약한 기록이 많은 것은 세키가하라의 싸움입니다.
세키가하라의 전초전이었던 코오세가와杭瀨川의 싸움에서는, 동군의 나카
무라中村 부대를 농락하여, 서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습니다. 또한 세키
가하라의 싸움에서는, 미츠나리 부대의 선봉으로서 최전선에서 싸워, 그
용맹함은 [黑田家譜] 등 많은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싸움의 중반에,
구로다黑田 부대의 철포병 간로쿠노스케管六之介 등의 총에 맞아 부상을
입고 퇴각, 그 후에는 죽었다고도, 살아서 숨어 지냈다고도 합니다.
(2) 시마 사콘, 출생의 수수께끼
- 사콘은 노부나가信長의 사촌형제였다!?
시마 사콘의 약력은 위와 같지만, 실은 사콘의 출생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츠츠이가의 중신이 되기 전의 시마 사콘에 관해서는, 사
료가 거의 없지요.
일반적으로, 사콘은 츠시마對馬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이것도
확인된 것은 아닙니다.
잘 알려진 것은 기나이畿內 출신설로, 이는 [常山紀談]에 '사콘의 부친,
무로마치 장군가를 섬겨...'「左近がもと父, 室町將軍家に仕え...」라는,
막부의 신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常山紀談]은, 실은 사실로 믿기에는 부적당한 책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시마 사콘이 야마토大和 출신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平群村史]에 의하면, 사콘은 고오후쿠지興福寺 이치죠인一條院령의
장관(莊官)인 가모嶋씨의 피를 이은 자라고 합니다.
더욱 놀랄 만한 것은, '사콘=노부나가의 사촌형제'설입니다. 이것은
Nifty-serve의 역사 포럼의 회원(ID:마하라쟈)이 사료에서 발견해서
화제가 된 설입니다. 출전은 [寬政重修諸家譜], 에도시대에 정리된
유명한 족보집으로, [常山紀談]보다야 조금이라도 더 믿을 수 있는
자료입니다.
그에 따르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부친 노부히데信秀의 동생으로
노부마사信正라는 자가 있어, 이 자가 마노美濃국 가모嶋마을에 살면서
가모嶋씨라 칭하였는데, [寬政重修諸家譜]에서는, 그 가모 노부마사嶋信正
의 셋째 아들로 關ヶ原에서 미츠나리편으로 싸우다 죽은 사콘左近이라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친 김에 말하면, 가모嶋가는, 그 후, 장남이
계승하여 1600석의 하타모토旗本로서 이어집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시마 사콘은 실은 노부나가의 사촌형제였다!'는 것이 됩니다만......
단지, 이 사료를 발견한 회원님 본인이, '하지만, 이것은 하타모토인
가모嶋씨가 조상을 꾸미기 위해 한 일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고 있습니다
만, 무엇보다도 매력적인 설이로군요.
필자의 경우에는, 사콘은 오우미近江 출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직접적인 근거는 없습니다만, 사콘이 잠시, 오우미近江 다카미야高宮에서
은거한 것(인간은 필시 은퇴하면 고향 근처로 돌아가기에) 등이,
그런 생각이 들게 합니다.
당시, 오우미에는 가모嶋씨라 칭하는 국인國人이 다수 존재했고,
그 중에서도 사카다坂田군 飯마을의 가모 일족은 아사이淺井씨의 신하로서
사와야마佐和山성 공방전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저는 갑자기, 시마 사콘은 이 가모嶋 일족의 지류 출신이고,
그래서 사와야마의 미츠나리의 초청에 응한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만...
사카다坂田군 飯마을과 미츠나리의 출생지인 이시다石田향은 그리 멀지
않아, 만일 사콘이 오우미의 가모 일족 출신이라고 한다면,
사콘과 미츠나리는, 주종관계를 맺기 전부터 알고 지냈을 가능성도
생깁니다만, 이건 뭐 소설가 같은 발상일지도 모릅니다...
자, 사콘의 출생에 대해서......
「츠시마對馬설」「기나이畿內설」「야마토大和설」
「미노美濃설(노부나가信長의 사촌형제)」「오우미近江설」
...등이 나왔습니다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3) 세키가하라 전투 후의 수수께끼
- 사콘은 죽지 않았다!
세키가하라에서 장렬히 전사했다는 시마 사콘입니다만,
실은 세키가하라 싸움에서 시마 사콘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는 설은
다수 존재하며, 또 사료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關ヶ原町史通史編], [石田三成の生涯(新人物往來社)]에는, 이 당시의
기록이 상세히 씌여 있는데, 그에 따르면 사콘은 세키가하라 싸움 후,
교토에 숨어 지냈다 합니다.
기록을 몇 가지 발췌해보면......
- 게이쵸오慶長 8년의 합전도合戰圖 중 치쿠부시마竹生島에
'(전투 다음날)16일 밤 시마 사콘 묵다'
(「(合戰の翌日)十六日夜島左近宿す」)라는 기록이 있다.
- 교토시 니치렌日蓮종 교오호오인敎法院에 시마 사콘의 過去帳,
묘비가 있는데, 사망년도는 간에이寬永 9년(1632, 세키가하라 싸움의
32년 뒤)으로 되어 있다.
... 등의 사료가 있습니다.
또한, 토호쿠東北지방으로 도망쳤다는 설도 있고, 무츠陸奧국으로 가서
하마다 간베에浜田甚兵衛라 칭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것도 Nifty-serve의 회원님의 소개입니다만.
현재, 이와테岩手현 리쿠젠다카다陸前高田시의 세이토오지淨土寺의
過去帳 중 쇼오보오正保 5년의 사망자 중에
「香譽淨林 八月晦日 浜田甚兵衛」
라 기록되어 있고, 그 옆에 嶋村左近이라 덧붙여져 있는데,
향년 86세였다고 합니다.
토후쿠설은 그렇다 치고, 교토로 도망쳤다는 설은 꽤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투 후의 落ち武者狩り(* 야무사나 농민이, 전투에서
지고 도망치는 무사를 현상금을 목적으로 사냥하는 것)는 삼엄했을
것입니다만, 사콘의 경우에는, 야마토大和 야규우柳生가와 왕래도
있어, 그 보호를 받지 않았을까요.
(4) 시마 사콘과 야규우柳生 일족과의 관계
마지막으로 시마 사콘과, 장군가의 검술사범역인 야규우 일족의 관계를
다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관계는 상당히 강했던 것 같은 것이, 사콘의 딸이 야규우가에 시집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콘의 딸이 시집을 간 것은, 야규우 효고노가시라 도시요시
柳生兵庫頭利嚴으로서, 나중에 오와리尾張 야규우柳生의 시조가 되는
인물입니다.
유명한 야규우 렌야사이柳生連也齊(야규 주베에柳生十兵衛라 불리는 넘)
는, 사콘의 손자뻘 되는 것입니다.
사콘과 야규우가의 관계는, 아마도 사콘이 츠츠이가에 살 때 쯤에는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콘이 세키가하라 싸움 이후에도
살아있었다고 한다면, 이 야규우가와의 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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