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간도협약(3) - 한국은 1900년부터 간도에서 실질적 지배권을 유지했다

구름위 2012. 12. 31.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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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감계회담 이후 을사조약까지
전편에서 다루었듯이 감계회담이 결국 무위로 끝나자, 청나라는 국경 문제에 있어서 이런 입장을 내세웁니다.

"길림-조선의 경계 문제가 조정되지 못하고 있는 곳은 전에 양자의 합동조사에 의하여 결정을 짓지 못한 무산에서부터 삼급포(三級泡)까지의 200여 리에 걸친 도문강 발원처이며 무산으로부터 도문강 이하의 큰 흐름에 이르러서는 천연의 경계가 만들어져 있어 강 남쪽은 조선의 땅이고 강 북쪽은 길림 지방이다."

이에 따라 청나라는 두만강 이북의 "간도" 지방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지방관을 배치, 각종 시설을 설치합니다. 한편 간도에 정착한 조선인을 대상으로 치발역복(변발을 하고 중국옷을 입으라, 즉 중국에 귀화하라)는 지시를 강요하여 거부하는 자는 소유지를 몰수하고 두만강 건너로 추방하였습니다. 이에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은 어쩔 수 없이 가구당 1명을 골라서 귀화를 가장하고 그 사람 명의로 토지를 소유하는 편법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조치를 거부하다가 몰수된 토지는 청나라 사람이나 "귀화한" 조선인들이 분배받아 세금을 치르고 소유했습니다.

청나라 정부의 조선인에 대한 압박은 날로 심해져서 1894년(고종 31)에는 간도 전역을 4대보로 나누어 39사를 두고, 각 사에 장을 두어 간섭을 강화합니다. 이 사를 통해 호구조사를 한 결과 간도의 조선인 호구는 4,308호에 20,899명이었다고 하죠. 다만 이 사 자체는 청나라가 설치한 것이 아니고 건너간 한국인들이 자체적으로 설치한 것이라고 하는군요.

그런데 이때 조선에 기회가 옵니다. 바로 청일전쟁이죠.


 

청일전쟁을 묘사한 일본 측의 그림.
(사진출처 : http://www.vandaprints.com/lowres/39/main/1/12694.jpg)



청일전쟁의 패배는 조선에서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청나라 세력의 심각한 쇠퇴를 불러왔습니다. 나름 양무운동으로 국력을 다졌다고 생각되던 청나라가 서양열강(에게 졌다면 당연하지만)도 아닌 X만한 일본에게 패해버렸으니까요. 그것도 제대로 치열하게 싸우다가 아깝게 지거나 한 것도 아니고 완전히 물에 쓸려나가듯 참패.

하지만 조선도 곧바로 그 기회를 잡지는 못했습니다. 청일전쟁을 전후해서 조선의 국내 정치상황도 꽤나 혼란스러웠거든요. 전쟁 자체가 상당부분 조선 영토 안에서 치러진 데다, 일본군의 경복궁 범궐-갑오개혁-을미개혁-을미사변-을미의병-아관파천으로 이어지는 연이은 정치적 격변은 청이 약해졌다고 해서 조선이 곧바로 간도에 손을 뻗치는 것을 막았습니다. 때문에 조선이 간도를 들여다볼 여유가 생긴 것은 대한제국이 수립된 1897년이 되고서의 일이었습니다.

1897년, 함경북도 관찰사 조존우는 백두산 정계비 및 분수령, 간도 감계 문제 등을 철저하게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현지의 지도를 수정, 작성한 후 다음과 같은 항목에 대해 "담판오조"라는 보고서를 제출합니다. 그중에서 거주민의 정황에 대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한민 이주자는 이미 수만호가 되고 모두 청인의 압제를 받고 있으며 청인은 한인의 백분지 일에 불과하다. 또 치발역복자는 백분의 일에 불과하고, 그들이 처음에는 우리나라의 땅인 줄 알고 개간하였으나 저들의 땅이라고 함에 부득이 일시 생활의 계책상 그러한 것일 뿐 조상의 분묘가 이곳에 있고 부모와 처자, 그리고 형제가 양쪽으로 갈려 사는 자가 많아 옛 땅(필자 주 : 여기서 옛 땅이라 하는 단어의 원문은 "故土"인데, 이는 "민족의 옛 땅"이라는 의미로서의 만주를 가라키는 것이 아니라 이주민들 자신이 살고 있던 조선땅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함) 을 잊지 못하여 속히 정계되기만 갈망하고 있다.



지나간 부분에선 "호당 1명"이 치발역복했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백분지 일이라고 하는군요. 하지만 이게 별로 모순되지는 않습니다. 조사중에 상세한 호구조사를 하지 않은 이상 필시 저 "백분의 일"이라 함은 절대적 소수를 뜻하는 수사적인 표현일 것이 분명하고, 압수당할 토지를 가지지 않은 빈곤한 한인들(당연히 이쪽이 절대다수였습니다)은 조선 복식을 고수했을 가능성이 크니까요.

하지만 여기서 중점적으로 볼 부분은 그쪽보다는 이겁니다.

한민 이주자는 모두 청인의 압제를 받고 있으며

이는 간도의 인구는 한인이 대다수일지라도 그 행정력은 청나라에 있어 청나라 당국이 간도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실질적으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제가 왜 이 부분을 지적하는가 하면 테일즈오브베스페리아님이 알려주신 이 뉴스 때문입니다.

“간도는 우리땅”…청나라 문서 발견

이 뉴스는 청나라가 간도협약 이전까지 전혀 실효적으로 간도를 지배하고 있지 않았다는 내용입니다. 중요한 부분만 한번 보죠.

1908년 9월, 당시 동북3성의 총독은 백두산 일대에 대한 행정기관 설치를 황제에게 건의했고 최고 의결 기구인 내각회의정무처는 지방 조직 신설을 검토합니다.
<인터뷰>김우준(연세대 동서문화연구원 교수) : "당시 간도에 청의 군대와 상권, 촌락이 전혀 형성돼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에 청이 간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지 않았다."
1년 뒤 간도협약이 체결된 직후 '장백부'가 신설됐고, 이어 두 개의 현이 추가로 설치됩니다.
'장백부'가 관할하는 지역은 두만강,송화강 등을 포함한 현재의 연변 지역으로, 간도협약을 기점으로 청나라는 비로소 이 지역을 장악합니다.
반면 조선은 이미 1900년부터 세금을 거두고 치안을 유지하는 등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위쪽에서 이미 보셨듯이, 청나라 관리들은 이미 1890년대 이전에 간도 지역에서 세금을 거두고 치안을 관리하며 간도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위 뉴스에서는 두만강-송화강 등을 포함하는 연변 지역을 그때까지 중국이 제대로 통치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데 그랬다면 조선인들에게 귀화를 강요하고 세금을 걷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리고 지나간 1편, 2편에서도 보셨겠지만 감계회담의 청나라 대표는 동북 일원의 지방관원이었고 그들의 직책은 "혼춘부도통", "길림파원"등이었습니다. 혼춘과 길림이 어디 있는지 확인해야 할까요? 길림은 아마 아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그런데 혼춘은 별로 멀지 않아요.


 

<현대한국사>에 게제된 지도. 혼춘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지도를 보실 때는 동서폭이 많이 축소되었다는 점을 감안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 뉴스에서는 "백두산 일대에 새로 행정기관을 설치"하자고 했으므로 그 이전에는 간도 전체에 행정기구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던 것처럼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명백히 기존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과 배치되는 주장입니다. 위에서 밝혔듯 청나라는 이 지역에 적극적으로 행정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이는 적어도 1883년까지는 거슬러올라갈 수 있습니다. 원 포스팅(어째 올해가 2009년인데 이 떡밥이 안 나온다 했어.
)에서도 밝혔지만 이해에 청나라에서는 월경경작하는 조선 농민들에게 "청나라에 귀화하거나 아니면 두만강을 건너 돌아가라"고 고시했거든요. 이때 조선 조정이 협상에 나서 조치를 지연시키자 약 2년 정도 고시의 실행이 지연되기는 했습니다만, 1885년부터 고압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청나라 관헌들이 월경 농민들의 집을 불태우고 이들을 강제로 축출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9월에 비로소 제1차 감계회담이 열렸던 거죠.

자 그럼 1897년의 시점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조존우의 보고서가 들어온 후, 이번에는 민간인들이 보낸 상소문이 올라옵니다. 1898년 종성에 사는 민간인 오삼갑 등이 정계비의 내용, 두만강 분계 문제, 월경민의 호적 상실 문제 등에 대해 상소하자 내부대신 이건하가 함경북도 관찰사 이종관(조존우는 그새 잘렸습니다)에게 조사토록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이종관이 올린 보고서가 이런 거였죠.

토문강 상류로부터 하류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 이동의 지역은 위 영토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나라가 이를 멋대로 자기 땅이라 하여 러시아에 할양해 준 것부터가 잘못이며 불법이다. "정계토문"이라는 면에서 보면 이는 용인할 수 없으며 이로 인해 민생이 고통을 받고 또한 변계 문제도 늘어가므로 한-청-러 3국이 회동, 조사하여 각국 현행의 국제법규에 따라서 공평히 타결해야 할 것이다.



제일 첫 포스팅에서도 소개했었죠? 이 보고서.

쓴웃음만 나올 뿐입니다. 연해주까지 다 원래 우리 땅인데 주인도 아닌 놈이 마음대로 처분했으니 재협상하자고요? 결국 내거니까 내놓으라는 소리잖아요? 그게 가능한 소리에요?-_-

당연히 이 문제는 외교적인 논란거리가 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조선, 아니 대한제국에 또 한 번의 기회가 오죠. 바로 의화단 사건이었습니다-_-


 

의화단 사건 당시 의화단과 외국군의 전투를 묘사한 그림.
(사진출처 :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1/10/Boxer_Rebellion.jpg)



의화단 사건(1900)이 일어나자 외국 자본의 침입을 증오하는 중국인들이 러시아가 건설한 동청철도(만주에 있음)를 파괴했고, 이에 러시아는 군대를 동원하여 만주 일원을 점령했습니다. 이때 만주 일대는 러시아군과 그에 대항하는 의화단과 민간 의용군이 벌인 싸움으로 혼란에 빠졌고, 청나라 관헌의 행정력은 제대로 발휘될 수 없었습니다. 특히 거주자 중 한국인의 비율이 절대적으로 높은데다 러시아 영토에 가까운 간도 지역의 청나라 행정권은 일시적으로 붕괴했다고 보아도 이상할 게 없겠죠? 위 기사에서 언급한 1900년은 바로 그런 해였습니다.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러시아 군대는 의화단의 난이 종결된 뒤에도 만주에서 철수하지 않았습니다. 러시아가 부분적으로나마 철수에 동의한 것은 1902년의 일이고, 그나마 요서에서 먼저 물러섰을 뿐 요동-길림-흑룡강 등지는 계속 틀어쥐고 있었죠. 대한제국이 이범윤을 파견,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에 살고 있는 백성을 위무"하게 한 것은 바로 만주의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던 1902년이었습니다.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의 호수와 인구를 조사하고, 80세 이상의 은자(恩資) 대상자를 조사하는 것이 이범윤의 임무였죠.

마침내 대한제국 정부는 다음해에는 이범윤을 "북변간도관리"로 임명하여 간도에 주재시키게 되는데, 이때 조정에서 이범윤을 간도로 보내면서 오간 이야기를 실록에서 찾아보면 이렇습니다. 좀 길지만 일단 전문을 올립니다.

고종 43권, 40년(1903 계묘 / 대한 광무(光武) 7년) 8월 11일(양력) 1번째기사
이범윤을 특별히 관리로 임명하여 북간도에 주재시키다

내부 대신 임시 서리 의정부 참정(內部大臣臨時署理議政府參政) 김규홍(金奎弘)이 아뢰기를,

“북간도(北間島)는 바로 우리나라와 청(淸) 나라의 경계 지대인데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비어 있었습니다. 수십 년 전부터 북쪽 변경의 연변의 각 고을 백성들로서 그 지역에 이주하여 경작하여 지어먹고 살고 있는 사람이 이제는 수만 호에 십 여만 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청인(淸人)들의 침어(侵漁)를 혹심하게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에 신의 부(部)에서 시찰관(視察官) 이범윤(李範允)을 파견하여 황제(皇帝)의 교화를 선포하고 호구를 조사하게 하였습니다.

이번에 해당 시찰관(視察官) 이범윤의 보고를 접하니, ‘우리 백성들에 대한 청인들의 학대가 낱낱이 진달하기 어려우니, 특별히 굽어 살펴 즉시 외부(外部)에 이조(移照)하여 청나라 공사와 담판을 해서 청나라 관원들의 학대를 막고, 또한 관청을 세우고 군사를 두어 많은 백성을 위로하여 교화에 감화되어 생을 즐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우선 호적(戶籍)을 만들어 수보(修報)한 것이 1만 3,000여 호(戶)입니다.

이 사보(査報)에 의하면, 우리나라 백성들이 이 땅에서 살아 온 것은 이미 수십 년이나 되는 오랜 세월인데 아직 관청을 설치하여 보호하지 못하였으니 허다한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한결같이 청나라 관원들의 학대에 내맡기니 먼 곳을 편안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 소홀함을 면치 못합니다. 우선 외부(外部)에서 청나라 공사와 상판(商辦)한 후에 해당 지방 부근의 관원(官員)에게 공문을 보내어 마구 재물을 수탈하거나 법에 어긋나게 학대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나라의 경계에 대해 논하는데 이르러서는, 전에 분수령(分水嶺) 정계비(定界碑) 아래 토문강(土門江) 이남의 구역은 물론 우리나라 경계로 확정되었으니 결수(結數)에 따라 세(稅)를 정해야 할 것인데, 수백 년 동안 비어 두었던 땅에 갑자기 온당하게 작정하는 것은 매우 크게 벌이려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우선 보호할 관리를 특별히 두고 또한 해당 간도 백성들의 청원대로 시찰관(視察官) 이범윤(李範允)을 그대로 관리로 특별히 차임하여 해당 간도(間島)에 주재시켜 전적으로 사무를 관장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게 하여 조정에서 간도 백성들을 보살펴 주는 뜻을 보여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 원본 47책 43권 32장 B면, 영인본 3책 291면




어떻습니까? 내부대신서리 김규홍의 발언은 "간도는 우리 땅"이라는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세목을 보면 "현재(1903년) 간도에서 행정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청나라 관헌"이라는 점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굵은 글씨로 표시한 부분만 보아도 그건 자명한 일이죠. 보시다시피 실록의 이 기록은 "조선은 이미 1900년부터 이 지역에서 세금을 거두고 치안을 유지하는 등 실질적인 치안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KBS의 보도를 완전히 부정하고 있습니다. 아, "일제가 편찬한" 고종실록은 역사 기록으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하신다면 할말 없습니다^^

또한 이때 조선 조정의 태도가 웃긴 점은 1887년 감계회담에서 스스로가 그토록 강하게 주장했던 홍토수 국경론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편에서도 보았지만 1887년 회담이 결국 결렬된 것은 조선측 대표로 나간 이중하가 홍토수를 국경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거든요? 이중하는 "홍토수가 옛 국경"이라고 주장했지 토문강이 말 그대로의 경계선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비현실성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구한말 작성된 백두산 일대의 지도. 가운데에 이중하가 국경으로 주장한 두만강의 지류 홍토수가 있다.



1887년의 회담에서 1903년의 이범윤 파견까지 16년이 흐르는 시간 동안 뭐가 바뀌었을까요?

간단합니다. 청나라가 약해졌습니다.



1887년의 회담 당시에 청나라는 조선의 절대적인 종주국이었습니다. 하지만 16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청일전쟁에 패하고 의화단 사건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제 코가 석자, 조선에게 제대로 압력도 가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각지에 외국군이 들어왔고 엄청난 액수의 배상금은 수십 년을 상환해도 다 갚지 못할 판이었죠. 게다가 만주는 그 전체가 러시아의 군사적 지배하에 들어갔습니다. 이런 판국에 조선, 아니 대한제국 정부는 이범윤을 북변간도관리로 임명하고 이를 서울 주재 청나라 공사에게 "통보"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15년 전에 자기가 원래 주장하던 홍토수 선을 무시한 조선이나, 170년 전에 자기네가 세운 정계비를 무시한 청나라나 다를 게 뭔가요?

이런 판국으로 사태가 돌아갔으니 "감계회담이 결렬된" 것이 조선에게 기회를 준 셈이 된 거죠. 만약 1887년 회담에서, 청나라가 조선의 홍토수 주장을 받아들여 홍토수를 국경선으로 정하고 회담이 타결되었다면 어떤 결과가 빚어졌을까요? 그랬다면 조선으로서는 그 이후 간도에 대한 영토권 주장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2차 감계회담이 합의를 보지 못하고 결렬되었기 때문에 그 이후 청나라가 약해졌을 때, 본래 주장하던 것 이상의 큰 몫을 주장하고 나설 수 있었던 겁니다. 확실히 국경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핑계삼아서 말이죠.

주차북간도관리(駐箚北間島管理)에 임명되어 간도에 도착한 이범윤의 활동은 많이들 아시는 대로입니다. 간도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세금을 걷어서 사포병(私砲兵, 이는 대포를 쏘는 포병이 아니라 총을 사용하는 총잡이를 가리킵니다)을 양성, 치안을 잡도록 하고 행정권을 확립해 나갑니다. 하지만 이는 당연하게도 청나라 측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청나라 정부는 대한제국 정부에 항의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한(1903.12.2)을 보냅니다.

- 한국이 압록강 너머로 관리(서상무)를 보내 관청을 설치하여 한민을 관리하려는 것은 조약위반이다.
- 한국이 간도에 관리(이범윤)을 보내 한민을 관리하게 하는 것은 조약위반이다.
- 한국의 병사와 민간인이 국경을 넘어 봉천성 및 길주성 연변에서 수차 소요를 일으킨 바, 차후 한병이 다시는 국경을 넘지 못하게 할 것을 요청한다.(주 : 여기서 병사라 함은 이범윤의 사포병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측됨)
- 추후 한국의 관원이 병사 또는 민간인을 이끌고 강을 건너 소란을 일으킬 경우 비도(匪徒)와 동일하게 처분할 것이다.



어떤가요? 아까의 실록 기사와 이 서한을 보면 간도에 청나라 행정조직이 없는 것이 아니었고 부명히 존재하고 있으면서 이범윤과 충돌하고 있었다는 정황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만약 청나라가 의화단 사건으로 인한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청나라가 엄연히 행정권을 행사하고 있는 간도에 한국이 관리를 보낸다면 바로 쫓겨날 것이고 기껏해야 둘러보고 오는 이상의 활동은 할 수 없겠죠. 이범윤이 설치한 것과 같이 군대를 끌고 간다고 해도 청나라 군대와 전투가 벌어질 뿐입니다. 하지만 1902년, 3년 당시 만주는 군사적으로 러시아의 점령하에 있었고 청나라 관군은 무장해제, 힘을 쓰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만주의 다른 지역이라면 한족 인구가 많으므로 의화단이나 자위단과의 전투도 염두에 두어야겠지만 간도에서는 그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죠. 사실상 이범윤에게 두려운 것은 청나라 관군 - 지금은 러시아군에게 눌려 있는 - 하나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간도 문제가 본격적으로 외교분쟁으로 발전하려는 시점에 또 하나의 사건이 터집니다. 바로 러일전쟁이죠.


 

러일전쟁을 묘사한 일본 측의 그림.
(사진출처 : http://ocw.mit.edu/ans7870/21f/21f.027/throwing_off_asia_01/image/2000_458_l.jpg)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청나라 정부는 전쟁통에 국경 문제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우려, 대한제국을 향해서 일단 이범윤을 해임, 소환하고 간도에 있는 한국측 병력을 철수시킨 상태에서 양국간 협의로 국경을 확실히 감정하자는 제안을 해옵니다. 대한제국으로서도 이 제안을 일단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일본이 청나라 편에서 압력을 넣고 있었거든요. 일본으로서는 러시아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청나라의 협조가 필요했으므로 전쟁이 계속되는 중에 청나라 측의 비위를 거스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본공사의 "권유"를 받은 대한제국 정부는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끝낼 때까지 경계와 관련된 다툼을 멈추기로 합의합니다. 다만 이범윤은 소환되지 않고 러일전쟁 중 러시아에 협조하다가 전쟁이 끝나자 러시아령으로 망명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