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간도협약(2) - 제2차 감계회담, 1887년

구름위 2012. 12. 31.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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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887년 감계회담.
1편에서 이야기한 이중하의 상소 즈음, 청나라로부터 제2차 감계회담을 하자는 공문이 조선 조정에 도착했습니다.


길림과 조선의 계지는 무산 이동 녹둔도에 이르기까지는 도문강(두만강)이라는 천연의 계한이 있어 이것을 경계로 긋는 데는 추호도 의심할 뜻이 없으나, 무산부터 서쪽의 분수령상의 입비처(비를 세운 곳)까지는 분명치 않으므로 위원을 파견하여 입회 조사하겠으니 무산에서 회합할 것인지 회령에서 회담할 것인지 회답하기 바란다.
- 천진 총리각국사무아문, 1887년 4월 7일



이에 조선측에서는 청나라 측의 주장을 부인하는 내용의 답신을 보냅니다(4월 8일).

1. 정계를 홍단수의 수원으로 정하고자 함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2. 홍단수는 소백산 이남에 속하며 조선의 내지이다.
3. 두만과 도문은 일수(一水)이고 이류(二流)가 아니므로 목극등이 비를 세운대로 토문강으로 정계의 본의를 삼아야 한다.
4. 청측이 주장하는 이른바 서두수가 어윤하이고 홍단수는 홍단하삼지라고 함은 명목이 부합되지 않고 또 신빙할 수도 없으며 이 또한 조선의 내지에 있어 정계비와는 하등 관계가 없다.


이 답신을 받은 청나라 측에서는 정식 조회문을 보내 왔습니다. 그 핵심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목극등이 세운 비는 변경을 살핀 내용을 적은 비이지 경계를 나누는 비가 아님은 의심할 바가 없다. "서위압록 동위도문(토문이 아니라 도문으로 적어서 보냄)"이라 한 비문 중에 분계(分界)라는 글자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는 당시에 비를 세울 적에 분계처에 세운 것이 아님이 더욱 명백하다.

보시다시피 청나라는 정계비가 갖는 국경 확정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무시하려고 들었습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비를 세울 당시 목극등이 보냈던 문건들을 제출하며 "이거 읽으면 정계비가 경계를 정하기 위한 것임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음"하는 서한을 보냈(4월 15일)고, 이에 청나라 측에서는 국경을 정할 관원을 보내겠다는 연락을 해왔습니다. 청나라 측의 대표는 1885년 회담에 나왔던 바로 그 관원들이었지요. 조선도 이중화를 다시 파견하여 청나라 측 대표들과 논의토록 하고, 그 전에 반박문을 다시 보냅니다.


 

앞 포스팅에서 사용한 두만강의 수원지 일대의 지도.
출처는 앞 포스팅에 적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



조선 측은 청나라의 <황조일통도지>가 홍단수를 "대도문"이라고 명기하고 있는데 대해서 이것이 맞는지를 가부간에 확답해달라고 요구했고, 청나라 측은 강희제 당시의 문헌을 다시 조사한 결과 그 비는 분계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변계를 조사하는 비가 분명하다는 답장을 보내옵니다. 그리고 비문 자체에 "분계"라는 글자가 없다는 것도 새삼 강조하죠. 하지만 조선 측에서는 "변계를 살펴 비를 세우는 거나 국경을 정하여 비를 세우는 거나 다 같은 뜻"이라고 반론하고, 비문에 분계라는 글자가 없음은 경계를 그날 처음 정한 게 아니라 원래 그전부터 있던 옛 경계를 비로 표지했을 뿐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국 양측의 서한을 통한 논쟁은 열매를 맺지 못했고, 두 나라 대표단은 재차 회담을 실시하게 됩니다. 2년 전 만났던 이중하와 청나라 관리들은 이해 4월 22일, 무산에서 다시 한 번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때는 청나라가 조선에서 가장 세력이 강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청나라 군대는 1882년의 임오군란과 1884년의 갑신정변을 진압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서울에 주둔한 청나라 군대를 배경으로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대신 원세개가 한참 위세를 부리던 시절이었죠. 그래도 조선에서는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크게 노력했던 셈입니다. 청나라가 상당히 강압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어쨌든, 두 나라 대표단은 2년 전 회담과 마찬가지로 4월 22일에 무산에서 다시 만납니다. 하지만 어느 강을 탐사할 것인가를 두고 또 싸움이 벌어져 결말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이중하는 정계비에 가장 가까운 홍토수를, 청나라 대표들은 서두수를 조사하자고 했거든요. 그래서 격론이 벌어진 끝에 양측은 일부 타협, 중간에 있는 홍단수를 살피고 장파로 다시 돌아와서 그 뒤에 다시 어느 쪽을 탐사할지 정하기로 합니다. 이래서야 문제를 해결한 게 아니라 뒤로 미룬 것 뿐이지만, 아직 4월이니까 시간은 충분한 편이었죠.

1차적으로 시행한 홍단수의 탐사가 완료된 것은 윤4월 2일, 장파로 돌아온 것은 윤4월 6일이었습니다만 돌아오자마자 미뤄두었던 문제가 다시 터졌습니다. 청나라 측은 계속해서 서두수를 조사하자고 했고 조선 측은 절대반대했기 때문이죠. 결국 홍토수부터 조사하기로 결정하고 윤4월 23일부터 조사를 시작하려는데 1주일 전인 16일에 열린 회담에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여기부터 아래의 대화는 전부 그날의 회견에서 양측 대표단 사이에 오간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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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 홍토수는 비퇴와 서로 접하고 있는가.

한 : 비퇴가 홍토수에 접한다면 무엇 때문에 경계조사의 분규가 있겠는가.

청 : 귀국에서는 복류(물이 땅밑으로 숨어서 흐르는 것) 40리라고 하는데, 동붕수를 조사한 바 과연 홍토수에 접하는가.

한 : 접하지 않는다.

청 : 홍토수는 비퇴에서 멀고 동붕수는 홍토수에 접하지 않으니 귀관의 뜻은 어떠한가.

한 : 비퇴는 홍토수에서 먼 까닭에 표석을 그 사이에 증설하려고 논한 것이다.

청 : 비가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이 비가 본래 어디에 있었고 누가 옮겼다는 것은 차마 말할 수 없어 안한다.

한 : 만일 참으로 비를 옮겼다는 것을 귀관이 알 것 같으면 공문을 보내어 명백히 하라. 이것은 대사건이니 내가 마땅히 우리나라 조정에 보고하여 강구 병론하겠다.

청 : 차마 말할 수 없다.

한 : 명백히 공언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째서 공언하지 않는가.

청 : (대답을 못 함)

한 : 비는 옮길 수 잇더라도 퇴(둔덕)도 또한 옮길 수 있겠는가. 퇴 위에는 수목이 나서 아름드리의 늙은 나무들이 많다.

청 : (황급히 대답하기를) 퇴는 우리나라 조정에서 장백산(백두산)에 기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길의 표지이다.

한 : 목극등이 비를 세울 때 내왕한 옛날의 문안이 있다. 이 어찌 말이 되느냐.

청 : 귀관은 다만 홍토수 이외의 물은 상의 언론치 않으려 함은 무엇 때문이냐.

한 : 귀관은 늘 조선의 내지를 줄여서 변하게 하려고만 하니 내가 어찌 그 땅을 줄이는 데 상의하겠는가.

청 : 이젠 이미 모든 물줄기(수원의 맥)를 조사하였으니 청컨대 귀관은 공평히 말하라.

한 : 공평히 말하면 곧 홍토수.

청 : (노기를 띠고 위원들 모두가 함께) 이것이 과연 공평한 말인가.

한 : 우리나라 기백년의 옛 한계를 구하고자 함인데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사리가 당연하다. 어째서 심히 노하는가.


<현대한국사>에 기재된 간도 일대의 지도(누르면 커짐). 지도상에서 홍토수라는 강 이름이 명확하지는 않으나 백두산, 무산, 서두수의 위치를 위에 올린 간략한 지도와 비교하면 용정, 연길 등 대부분의 유명한 "간도"지방 도시와 촌락들이 홍토수 이북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단 이 지도는 지면의 한계 때문에 동서간의 길이가 매우 압축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간도 지방의 면적이 실제보다 매우 좁아보일 수 있다.


청 : (또 크게 노하면서) 그렇다면 다시 의논할 필요 없이 홍단수로써 결정하겠다.

한 : 홍단수는 조선의 내지이다. 귀관이 스스로 정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정할 수가 없다.

청 : 이것은 길림의 땅이다. 어째서 조선의 땅이냐.

한 : 귀국의 <황조일통여도>에 대도문의 요한이 있다.

청 : 이 지도는 황제 소사의 것이라는둥 총서(總書, 총리사무아문)가 보낸 것이라는둥 하여 증거가 되지 못한다.

한 : 총서 주의(奏議)에는 항상 이 지도를 인증한다. 이것이 증거가 못 되면 무엇이 증거가 되겠는가.

청 : (또 크게 노하여) 총서의 공문을 보고자 하는가. 그 뜻은 홍단수를 경계로 하는 데 있다.

한 : 구관의 전년의 감계품보 중에 처음부터 홍토수의 말은 한마디도 없는바 총서에서는 처음부터 이 강이 있는 줄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청 : 귀국은 누누이 북양대신과 총서에 홍토수의 일을 청하였다. 그러나 총서는 이것을 허락하려고 하지 않으므로 홍단하로서 정계하려는 것이다.

한 : 총서의 주의(奏議) 중에 수원 지형은 논리가 심상하다. 홍토수가 대도문임이 역시 분명하다.

청 : 총서도 상세히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들의 품의 보고의 여하에 있다.

한 : 이번에 상세히 제도하여 봉정하면 결정될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쟁론할 필요가 무엇이냐. 이 일은 옛 경계를 알려 밝히는데 있는 바 귀관은 새 경계를 정하려고 한다. 대소국 300년 이래 각각 자기의 옛 경계가 있다. 어째서 오늘 다른 견계를 정하겠는가.

청 : 옛 경계를 누가 아느냐. 귀관이 이를 알고 있는가.

한 : 홍토수가 옛 경계이다.

청 : 귀관은 홍토수의 흐름이 비퇴에 접하지 않고 그 수원이 비와 접하지 않음을 보고도 홍토수로 주장하니 오늘 결정하지 않고는 하산할 수가 없다. 귀관은 이를 밝혀 말하여라.(3인이 함께 소리를 지르고 강박함)

한 : (꾸짖는 소리로) 내 모가지는 자를 수 있으나 우리 강역은 축소할 수 없다. 여기에 국가의 옛 기록이 있다. 어찌 이리 협박하느냐.

청 : 홍토수 외에는 주장할 수 없다고 하는바 귀국의 명의(命意)가 본시 이러한가.

한 : 우리나라 조정에서 나를 파견할 때에는 다만 홍토수의 옛 경계에 경계를 정함을 알 뿐 홍단수, 서두수의 설은 우리나라 정부의 생각 밖의 일이다.

청 : 귀국의 뜻은 다만 홍토수에만 있는가.

한 : 그렇다.

청 : 귀관이 정계를 세우지 못한다면 귀관을 파견한 것은 무슨 일을 주관시키려 함이었던가.

한 : 구계를 가리켜 증명하기 위해서 파견한 것이다.

청 : 구계를 가히 증거할만한 것이 있는가.

한 : 우리 조선의 도지(圖誌)가 있다. 명백히 싣고 있다. 우리나라의 도지는 귀관이 반드시 믿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다만 귀국의 도지로만 증거를 하였던 것이다.

청 : (모두 심히 노한 눈초리로)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서로 조회하겠다.

한 : 마땅히 그렇게 하겠다.


위 회견에서 중요한 내용을 발췌,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조선은 회담 내내 정계비에 근거하여 홍토수가 "옛날부터의 원래 국경"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청나라는 정계비의 가치 자체를 무시하려 했다.
2. 홍토수가 올바른 국경이라는 논리는 감계회담이 이루어지기 전부터 조선 조정이 청나라 조정에 꾸준히 제기한 것이다.
3. 그러나 청나라는 홍토수보다 더 남쪽으로 국경을 내리기를 원했기 때문에 조선의 주장을 거부하고 감계회담을 요구한 것이다(받아들이면 회담을 할 필요가 없다).
4. 조선은 홍토수가 국경이라는 근거로 목극등의 기록, 청나라 지도, 조선 지도를 제출했다.



자, 앞쪽 포스팅에서 이야기한 1885년 회담에서 조선 대표단이 내놓은 주장과 비교하면 어떨까요?

1885년의 회담에서, 이중하를 비롯한 조선 대표단은 "국경은 두만강이 아니라 토문강"이라는 주장을 일관되게 제기했으나 2년이 지난 이번 회담에서는 분명히 두만강의 지류 중 하나인 홍토수가 "옛 경계선"이라는 주장을 내놓고 굽히지 않습니다. 한없이 북쪽으로 흘러 송화강, 흑룡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토문강을 국경으로 주장할 수는 없다는 걸 조선 정부 스스로도 잘 알았기 때문이죠.


 

토문강 일대를 나타낸 보다 사실적인 구한말의 지도. 출처를 까먹었음F--



이 지도를 다시 한 번 확인하시면 그 점에 대해서 확실히 깨달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중간에 올린 두 번째 지도와 비교하시면 감계회담에서 분쟁의 대상이 된 토지의 면적이 "얼마나 넓은지"에 대해서 실감하실 수 있을 거예요. 조선이 주장한 홍토수와 청나라가 주장한 홍단수 사이의 땅, 그 면적이 과연 만주의 1/3이나 될까요? 요즘 인터넷 일부에서 나도는 것처럼 이중하가 "광대한 간도"를 지키기 위해 감계회담에서 죽을 각오로 싸웠다면, 왜 고작 홍토수를 국경이라고 주장한 걸까요?

결국 감계회담은 또 벽에 부딪혔습니다. 당연히 예정된 답사고 뭐고 다 취소되었고 두 대표단은 언쟁을 계속했죠. 청나라는 조선의 홍토수 주장을 거부했고 조선은 청나라의 홍단수(또는 서두수) 주장을 거부했으니까요. 양국은 서로 "그 강은 우리 내륙이야!"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청나라 대표단은 이중하에게 갖은 협박을 가했으나 이중하는 굴하지 않았고, 5월 15일과 16일 이틀에 걸쳐 청나라 대표단의 숙소를 방문, 홍토수를 경계로 해야 한다고 끈질기게 주장합니다. 15일에는 단호하게 거절했던 청나라 대표들도 다음날인 16일에는 약간 타협적인 태도를 보여, 석을수(위 지도에서 위치 확인 가능)를 경계로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죠.
위 지도에도 나오지만 석을수는 홍토수에서 또 갈라져 나가는 지류로, 그 발원지는 백두산이 아닌 소백산 기슭입니다. 소백산 동남 30여 리에서 발원하며 홍토수와의 거리는 수십 리 정도. 이 제안을 받은 이중하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거절합니다.

1. 강의 큰 근원을 버리고 작은 흐름을 찾아 국경으로 하는 것은 부당하다.
2. 석을수는 <황조일통여도>에 명기된 대도문강의 계와 부합되지 않으므로 부당하다.
3. 백두산 동쪽 기슭의 강물을 버리고 소백산 동쪽 기슭의 강물을 구한다는 것은 당치도 않다.



청나라 대표단의 최종제안이라고 할 수 있었던 석을수 안을 이중하가 거절하자 결국 1887년의 감계회담도 성과 없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청나라 대표단은 이중화의 거절 통보를 받은 직후인 5월 18일에 장파를 떠나 회령을 거쳐 길림으로 돌아갑니다. 그 직후 청나라 측은 국경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3차 감계회담을 열고자 하였으나 양국간의 합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3차 회담은 열리지 않았죠.
한편 조선 조정에서도 당연히 1887년의 감계회담을 최종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서울에 있는 원세개를 통하여 감계를 다시 열자고 청했으나 북경의 이홍장은 "백두산 감계의 건에 조선이 다른 의견이 있으면 총리사무아문에 자(咨)하여 처리할 것이다."라고 회답할 뿐, 조선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 상태로 두 나라는 10년 이상을 끌게 되지요.

양측이 다 감계회담을 원했음에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양국의 태도에 그 기반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조선은 중앙정부에서 왕이 직접 임명한 관리를 파견했지만 청나라 쪽의 대표들은 북경에 있는 중앙정부가 아니라 혼춘, 길림 등지에 주재하는 지방관원들이었거든요. 때문에 2차 회담 중에도 청나라 대표단은 "과거 청나라 중앙정부가 승인했다"는 조선측의 주장에 대해 "우린 그런 거 모른다. 단지 국경을 확실히 정하라는 명을 받았을 뿐이다"와 같은 태도를 취하곤 했습니다. 위 회의록에서 그런 대목을 읽어내실 수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3차 감계회담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회담 상대자의 격과 관련된 때문이었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지방정부 관리인 상대방과 교섭하는데 지친 조선 조정이 북경의 청나라 조정과 직접 협상함으로써 새로운 출로를 뚫어보고자 했을 수 있다는 거죠. 때문에 길림에서의 회담 요청은 거절하고, 원세개를 통해 청나라 중앙정부 - 곧 이홍장 - 에 교섭 제안을 넣었던 겁니다. 하지만 이홍장의 입장에서야 "안 그래도 시급한 일이 넘쳐나는데" 그깟 땅쪼가리 약간과 관련된 문제로 뇌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겠죠. 그 뒤로 어떤 이유에서건 청과 조선 사이의 감계회담은 두번 다시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후 청나라는 자기들 임의대로 두만강 북쪽에 사는 조선인들에게 강압적인 조치를 가해 나가지만, 청의 압력을 강하게 받고 있던 이 시기의 조선으로서는 그냥 쳐다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감계회담이 결렬된 것이 훗날 조선에게 한 가지 기회를 주게 되지요.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