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간도협약(1) - 제1차 감계회담, 1885년

구름위 2012. 12. 31.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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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85년 감계회담.
청과 조선 사이의 간도 국경을 둘러싼 1차 감계회담이 회령에서 열린 것은 1885년 9월 30일이었습니다. 이때 우리 측의 대표는 안변부사 이중하가 감계사, 외아문주사 조창식이 종사관이었으며 청나라 측 대표단인 감계위원은 혼춘 부도통 덕옥, 척간사무 가원계, 길림파원 진영 등 9명이었습니다. 이때 양측의 기본적인 태도는 조선은 "정계비를 자세히 조사"하여 감계하자는 것이고, 청나라 측의 주장은 "토문강 = 도문강 = 두만강"이라는 기본 전제하에 두만강의 지류 중 어느 것 하나를 본류로 정하여 그 줄기를 국경으로 정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회의장에서 1차적으로 오간 이야기의 대략적인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청 : 정계비의 진위를 자세히 조사하려면 먼저 도문강(두만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 원류를 찾아보고, 만일 그 비가 도문강의 서쪽에 있으면 소위 '동위토문 서위압록'의 증거가 될 것이다. 우리들이 파견되어 부사와 함께 감계하게 된 것도 도문강의 변계를 조사, 결정하려는 것이지 비를 조사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

한 : 우리나라 북도에 해마다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두만강변의 옛날 우리 금지를 개간하였는데, 혼춘의 파병들이 우리 농민의 집을 불사르고 몰아내니 강희제 때 세운 백두산의 정계비로 보아 여기는 우리 농민이 내쫓길 곳이 아니다. 아마 혼춘의 대인(청나라 사람)들이 비를 보지 않아 오해를 한 것 같다. 우리는 영토를 확장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비의 진위를 가리기 어렵다고 함은 그저 놀랄 따름이니 확실히 의심나는 일이 있으면 명백히 말하라.

청 : 비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이 비가 위물(가짜)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이를 증거할만한 기록이 없다. 우리는 토문감계사이지 토문감비사(비를 감정하는 사자)가 아니다.

한 : 이번에 산에 올라가서 조사할 때 두만강의 원류가 만일 분수령 비퇴에 접하여 흐르면 앞서 말한 우리측 말이 풀리는 것이고 만일 접류하지 않고 고개를 넘어서 100여리를 격해 있고 그 반면에 바로 아래의 수원이 다른 강이 되어 강벽이 문과 같은 형상을 한 것이 있으면 우리측 말에 근거가 서게 될 것이다.

청 : 도문의 두 자는 만주어로서 그 음이 근사하기 때문에 취한 것에 불과하다.

한 : 토문과 도문의 글자 모양이 현격히 다른데 어찌하여 항상 혼칭하는가.


트랙백한 원 포스팅에서도 이야기했듯, 1885년의 1차 감계회담은 "토문"이 두만강이냐 도문강이냐의 문제를 놓고 싸움이 계속되다가 끝을 맺지 못했습니다. 다음날인 10월 1일의 회담에서도 청나라 측 대표단은 "토문강은 곧 두만강"이라고 전제하고 "우리는 강을 조사하기 위해 왔으므로", 조선측의 주장에 따라 강과 비를 모두 조사하도록 하기는 하겠으나 비를 조사하라는 명령은 받지 않았으니 일단 강부터 조사해야겠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양국 대표들은 회령을 출발하여 무산을 거쳐 수원지로 가는 도중에도 계속 싸웠고, 무엇을 먼저 조사할지 합의를 짓지 못한채로 10월 11일 삼하강구(三下江口), 즉 세 지류가 갈라지기 시작하는 곳에 이르릅니다. 그런데 이때 청나라 대표가 서두수부터 가자고 하는 바람에 문제가 생기죠.


 

고등학교 지리부도, 서찬기 외 4인, 금성교과서(주), 1994, 48p



위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서두수는 가장 남쪽 지류고 아예 조선 내륙으로 흐르는 강이라 국경과는 아무 상관도 없었거든요. 이에 대한 청나라 측의 논리는 "100근 밖에 안 되는 비 따위 얼마든지 인력으로 옮길 수 있고, 분수령을 따라 쌓은 흙두덩이나 목책도 모두 인력으로 만들 수 있으니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두만강의 모든 지류"를 확인하고서야 국경을 제대로 정할 수 있다는 거였죠. 하지만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주장이었습니다. 벌써 10월(음력) 중순인데 어느 세월에 그 짓을?;;; 실제로, 양측 대표단은 10일 동안 겨우 200리(약 80km)의 서두수 강변을 답사했을 뿐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조선측에서는 이와 같은 반론을 제기합니다.

수천리 어명을 받들고 와서 한 번도 비면을 보지 못하고 감강에만 날을 하송하게 될 뿐이니 봄철 같으면 몰라도 지금은 서두수 감강에 따를 수가 없다. 비를 조사하지 않고 강원을 조사하려 함은 그 근본을 헤아리지 않고 끝만을 헤아리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강을 조사하기 위하여 시일만을 보내고 감비는 여사로 돌리니 이것은 비를 조사하기를 꺼리는 것이다. 만일 비를 조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경계를 조사한 것이 못 된다. 귀관은 귀관의 사명이 감계이지 감비가 아니라고 하나 원래 비를 세우지 않았더라면 어찌 정계를 논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감계하려면 반드시 감비를 먼저 하여야 함은 바꿀 수 없는 이치이다. 토문은 어디까지나 토문이다.

결국 비를 보자는 의견과 강을 보자는 의견으로 나뉘어 싸우던 양측은 "동시에 보자"는 쪽으로 합의를 보고, 양측 대표단의 인원을 뒤섞어 혼성팀 3개를 구성해서 하나는 홍단수, 하나는 서두수, 하나는 홍토수를 따라 상류로 가보기로 합니다. 이들의 출발은 10월 15일.


 

홍토수, 홍단수, 서두수의 대략적인 위치.
(사진출처 : http://blogimg.ohmynews.com/attach/691/1400545489.jpg)



여기서 2팀인 서두수 팀은 험한 길과 쌓이는 눈 때문에 중도에 답사를 중단합니다. 그러나 3팀인 홍토수 팀은 이중하 본인이 속해 있기도 했던 탓에 궂은 날씨와 험한 산길도 무릅쓰고 홍토수를 따라 백두산 정계비가 있는 곳까지 도달했고, 당지에서 비문을 탁본합니다. 또한 동서의 수원을 상세히 조사하고 경계선을 표시하기 위해 흙과 돌로 쌓은 퇴(堆)의 모양도 자세히 그려서 귀환하요. 이제 각자 담당한 구역의 조사를 마친 3팀의 양측 대표단은 10월 27일자로 다시 무산에 모입니다. 그리고 다시 싸움(...)을 시작하죠.

여기서 청나라 측은 여전히 "기본적인 국경선이 두만강임은 분명하다"는 기존의 대전제를 유지합니다. 또한 이번 답사를 통해 정계비의 동쪽 계곡, 즉 조선 측이 주장하는 "이른바 토문강의 발원지"는 송화강의 상류로 흘러가는 것이 확실히 입증되었으므로 비문상의 "동위토문"은 실제 국경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죠. 즉, "정계비 문안이 잘못 작성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조선 측은 "토문강 하류가 송화강으로 흐르는 것은 사실"이나, 정계비 및 다른 문헌의 기록이 모두 틀림없이 토문강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적확하며 두만강의 세 상류는 어느 것이나 정계비에서 백 수십리 이상 떨어져 있으므로 정계비상의 토문강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소위 두만강 상류"는 국경선 획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반박합니다. 청나라 측의 주장이 "정황상 계약서 문안이 잘못된 게 분명하니 계약서를 수정하자"는 것이었다면, 조선 측의 주장은 "계약은 계약이다, 따라서 글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겠죠.

실제 답사 결과를 보면 홍단수의 발원지는 정계비에서 동남쪽으로 130리, 서두수는 4~5백리에 달해서 도저히 정계의 기본으로 삼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여기에 청나라 측이 제출한 지리서/전문서(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문서)를 바탕으로 한 두만강의 수원에 대한 지도가 실제와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도 입증되면서 조선 측은 감계 건에서는 일부 승리를 거둔 셈이 되었으나, 여기서 본질적인 문제 하나가 드러나게 됩니다. 토문강이 송화강 상류로 흘러들어가는 것도 이 조사를 통해 분명히 입증되어버렸기 때문에 생긴 문제죠.


토문강이 국경이라면,
도대체 조선 영토의 을 어디로 보아야 할까요?



게다가 조선 측에서는 정계비가 건립될 당시 조선의 지리라면 몰라도 만주 방면의 지리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했으므로 그 경계에 대해 뭐라고 할 수 있는 말이 없었습니다. 이에 서로를 설득할만할 의견을 내지 못한 양국 대표들은 회담을 종료하고 조선 대표단은 11월 30일, 청나라 대표단은 12월 3일에 각자 귀국합니다.

돌아온 이중하는 국경에서 보고 들은 일들을 기록한 문서와 함께 정계비 탁본, 현장에서 그린 그림첩 하나, 청나라 대표단과 주고받은 회담 기록 초본과 함께 고종에게 보고서를 제출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부분을 일부 발췌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전략) 두만강 상류의 여러 수원 중에서 봉퇴에 가장 가까운 것은 토문 수원이고 횡으로 만파를 격하여 거리가 40~50리쯤 됩니다. 토문강의 상하 형편으로 말하면 비의 동쪽은 말라 있는 건천이고, 동으로 100리를 가서 비로소 발원하여 동북으로 흘러 돌아 북으로 송화강에 들어갑니다. 송화강은 곧 흑룡강 상원의 일파이며 길림/영고 등지가 모두 그 안에 속해 있습니다. (중략) 신의 생각으로는 하류는 비록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간다고 하더라도 표한인 비퇴와 토문의 형편으로 보아 두만강 상류와는 접하지 아니하오니 우리나라 사람은 다만 토문 경계를 인정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조금도 속이거나 숨김이 없이 극력 변론하였으나 저쪽은 오로지 도문강을 그 원천이 바른 경계라고 주장하고 있어 신은 다만 비퇴의 계(界)로 증거하였습니다. (중략) 홍단수의 형편을 보면 서쪽은 압록의 지류와 75리 되는 거리에 있고 비를 세운 곳에서도 130리나 떨어져 있습니다. 서두수의 정류도 길림 지방에 이르러 입비처와는 4~5백리나 떨어져 있으므로 비문의 동위토문과는 처음부터 상관이 없습니다.(하략)



 


 

혹시 압록강이 그렇게 두만강에서 가깝냐고 하시는 분이 계실까봐 지도 한 컷.
출처는 위와 같은 지리부도.




보시다시피, 1885년의 감계회담은 결론을 내지 못한 상태에서 끝났습니다. 이중하는 실제 답사를 통해 두만강의 여러 지류 중 어느 하나도 문헌에 기록된 토문강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했으나, 진짜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으로 흐른다는 사실 역시 입증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래서는 국경을 정하기 힘들어지죠. 우리나라 역사를 이용해서 지어낸 가상의 예화를 하나 들어보자면 이런 거라고 할 수 있지 싶습니다.


고구려왕 : "우리 한강을 국경으로 하자."
백제왕 : "좋다. 그런데 여의도는 누구 거라고 할까?"
고구려왕 : "너희 강변에 가까우니 너희가 가져."
백제왕 : "좋아, 두말하기 없다."

50년 후.

고구려왕 : "야, 양평은 우리 땅이야. 어딜 감히 들어와?"
백제왕 : "양평은 한강 남쪽에 있으니까 우리 땅이지."
고구려왕 : "웃기지 마. 양평은 한강 북쪽이야. 양평에서 여주 사이에 흐르는 강 안 보여?"
백제왕 : "한강의 본류는 북한강이야. 그쪽 강물이 더 크니까 당연히 본류인 북한강을 기준으로 잡아야지. 여의도도 우리 강변에 가까우니까 우리 거라며?"
고구려왕 : "산 속을 흐르는 강 따위가 어떻게 국경이 되냐? 산맥이면 몰라도, 산속 강은 국경으로의 가치가 없어. 마땅히 평야를 흐르는 강이 국경의 기준이지. 그리고 여의도랑 영등포 사이를 흐르는 강줄기 따위를 남한강에 비하냐? 돌았니?""
백제왕 : "즐하셔. 분명히 양평이랑 여주는 한강 남쪽이니까 내 땅이야. 이미 집짓고 농사짓고 다 해놓은 땅에 고개 들이밀지 말고 빨리 북쪽으로 꺼지셈."
고구려왕 : "경고한다. 분명히 여기 땅 한강 북쪽이거든? 그러니까 곱게 얘기할 때 다 놓고 가라. 지금 가면 목숨은 살려주마."
백제왕 : "웃기고 있네. 공갈치면 내가 넘어갈 것 같냐? 그딴 공갈은 저기 말갈한테나 쳐 봐라. 우리한텐 택도 읎다."
고구려왕 : "좋다, 전쟁이다!"


- 그리고 드디어 광개토대왕의 철갑기마대가 남진하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사실성 0%의 완전한 창작이며, 편의상 현재 지명을 사용함)




간도 문제도 위 예화와 마찬가집니다. shaind님 포스팅에도 나오다시피, 근본적으로 처음 잡을때 경계를 확실히 하지 않고 대충 잡았기 때문에 고종 때 와서 저 문제가 생긴 거거든요?

또한 웹에서 극찬하는 이중하의 회담에서의 발언도 봅시다. 이중하는 정계비에서 제시한 "토문강"의 출발점이 두만강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입증했지만 그 끝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설득력 있는 의견을 내놓지 못합니다. 때문에 기본적인 국경선이 두만강이라는 청나라 측의 논리를 완전히 무너뜨리지도 못했죠. 만약 청나라 대표단이 이중하의 논리에 따라 토문강이 국경선이라는 점을 인정해버리면, 토문강-송화강-흑룡강 이동에 해당하는 동북만주의 1/3과 러시아령 연해주까지 졸지에 조선 영토가 되어버립니다. 청나라 대표단이 제정신이라면 그 논리에 승복하겠습니까?

이중하는 이때의 미완의 회담에 대해 많은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던지, 1887년의 제2차 감계회담에 재차 파견되기 전에 고종에게 이런 내용의 상소를 올립니다.


고종 24권, 24년(1887 정해 / 청 광서(光緖) 13년) 3월 4일(임진) 1번째기사
덕원 부사 이중하가 상소를 올려 경계 문제를 보고하다

(전략) 오늘날 경계를 확인하는 일은 지난 시기에 비할 것이 못 됩니다. 옛날의 경계를 다시 밝히고 유민들을 찾아다 안착시키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옛날의 경계로 말한다면 수원(水源)이 일치하지 않고 목책(木柵)도 다 썩어서 실제의 장소가 옛 문헌과 맞지 않기 때문에 옳게 확인하기가 오늘날에는 난처합니다. 유민들로 말한다면 강에 대한 단속이 오랫동안 해이해져 넘어간 사람들이 아주 많은데 쇄환할 길이 없으며 그렇다고 내버려둘 수도 없습니다.
(중략) 옛날의 경계에 대해서는 도지(圖誌)를 살펴 고증하고 유민들에 대해서는 사리를 잘 헤아려 표획(標劃)할 곳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이고, 안착시킬 곳은 이쪽 땅인가 저쪽 땅인가 하는 것을 충분히 토의하고 확정하여 다시 참작하여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감당할 만한 사람을 새로 차하(差下)하여 다시 분명히 통지하면 나라의 체면도 정중하게 되고 사리에도 합당하게 될 것입니다.(후략)


여기서 국경선과 관련해서 주요한 부분을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수원이 일치하지 않는다 : 조선과 청나라의 실제 국경은 두만강이나,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은 두만강으로 흘러들어가지 않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2. 목책이 다 썩었다 : 숙종조에 국경을 표시하기 위해 세운 목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는 이야기죠.
3. 강에 대한 단속이 해이해져 넘어간 사람들이 아주 많다 : 본래 강을 넘어가서는 안 되는데 넘어간 사람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4. 표획할 곳은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충분히 토의하고 확정하여 다시 참작해야 : 국경에 대해서는 우리가 일방적으로 주장할 수 없고, 내부적(묘당)으로 충분한 토의가 필요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경계가 명확하다면 그런 고려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중하는 이런 상소문을 올린 후 제2차 감계회담의 조선측 대표로 나가게 됩니다. 시간도 늦었고 지금 포스팅도 너무 길어졌으니, 제2차 감계회담에 대해서는 다음 포스팅에서 후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