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간도 문제 - 정계비는 왜 생겼을까?

구름위 2012. 12. 31.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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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도는 것 중에는 그래도 꽤 "합리적"인 간도 지도.
(사진출처 : http://www.gando.or.kr/technote/board/c7_pdata/upimg/1124758347.jpg)



미리 드리는 양해의 말씀.
* 당 포스팅에 기재된 각종 문서의 번역 및 자료 인용은 별도로 표기하지 않은 경우 <현대한국사 vol.3 - 민족의 저항(1905~1910), 편집부, 신구문화사, 1973>에 실린 내용에 의합니다. 예전에는 1969년판이었는데 교체했습니다만, 내용은 같습니다.
* 당 포스팅에 실린 각종 번역문은 작성 당시에 한문으로 작성된 원본 그대로의 내용이 아닐 수 있습니다. 전재 원본인 현대한국사 본문에서 "추려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고 적은 부분이 있으므로 그 점 감안해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 본문에서 인용한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은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에서 제공하는 것입니다.
* 색깔 및 일부 굵은 글씨로 강조한 부분은 본 필자의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
* 간도 문제에 대한 필자의 다른 포스팅을 읽으실 분은 포스팅 하단 태그의 "간도"를 눌러주세요.




쓰면서 생각해 보니 그동안 작성해온 포스팅의 시간대별 순서가 좀 거꾸로 되었습니다. 간도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마땅히 봉금지대의 설치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텐데, 전체를 한번 다룬 다음에는 엉뚱한 이야기를 좀 하고 새치기(...)로 감계회담부터 해버렸군요. 그리고 그 뒤에 대한제국 시절의 국경분쟁 이야기를 하고...이제라도 글 내용은 좀 부실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앞에서부터" 이야기를 조금 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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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간도 문제에 대해 주로 관심이 되는 화제 중 하나는 "언제부터 조선인들이 간도로 건너갔는가"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되는 지역도 주로 두만강 대안의 만주와 연해주예요. 하지만 간도의 범위를 그렇게 넓게 잡지 않았던 60년대까지, 간도는 그렇게 넓지 않았습니다. 현재까지 제 포스팅에서 많이 참고하고 있는 <현대한국사>의 "일반적으로 알려진 간도의 범위"에 대한 서술을 옮겨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간도의 위치 : 길림성 동남부.
북간도 또는 동간도 : 노야령산맥/흑산령 산맥으로 둘러싸인 포이합통하/해란하/알아하 유역의 분지. 혼춘-왕청-연길-화룡의 네 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면적은 약 21,000㎢로 함경북도와 비슷하다. 보다 넓게는 서쪽의 혼동강(송화강과 같은 흐름)과 모란령 산맥 사이의 지역을 합하기도 함.
서간도 : 압록강 및 송화강 상류지역의 장백산 일대.



 



<현대한국사>에 의하면 조선인의 본격적인 이주는 철종 말년부터였습니다. 일부 간도영유론자분들의 주장에서는 한국인의 만주 거주가 무려 고려시대, 조선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시던데...그건 큰 의미가 없다고 봐요. 왜냐하면 원나라 지배기에 이주했거나 조선 초기에 이주해간 사람들의 수도 적지는 않았지만, 그 이주자들은 결국 현지인에 동화되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끝까지 살아남거나 하지는 못했지요.

그리고 말해두지만, 서간도의 영유에 있어서도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엄청난 떡밥이 있습니다. 많은 경우 "서간도의 범위" 하면 이렇게 알려져 있죠.

동간도의 범위는 비교적 작게 잡고 있습니다마는...
(사진출처 : http://hdic.kr/wiki1/images/8/86/간도.jpg)



하지만 실제 "서간도"의 범위는 저 지도에서 채색된 범위의 절반 이하입니다. 간도를 조선이 영유했다고 하는 주장의 주요한 근거 중 하나가 "관리를 보내서 관리를 했다"는 것인데, 실제 서간도에 조선이 향약을 설치하고 평안도 관찰사의 관리하에 28면을 설치(1871년. 1889년에 24면으로 재정리)하고 평안북도의 4개 군에 나누어 맡겨 관리를 시도한 건 사실이거든요. 게다가 서변계 관리사인 서상무는 1903년의 이윤범보다도 무려 6년이나 빠른 1897년(당시 서간도의 한국인 인구는 37,000명 가량이었다고 함)에 임명받아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뭐가 문제냐"고 하실 분들이 분명히 계실 겁니다. 면을 설치하고(중앙에서 면장을 임명했는지, 자율에 맡겼는지, 평안도에 있는 군수가 관리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추가조사 필요할 것 같기는 한데, 아마 군수가 관리했겠죠.) 군수가 관리했으면 당연히 서간도 전체를 관할한 게 아니냐고 하시겠지요. 하지만 문제는, 그 4개 군이 압록강에 면한 평안북도 전체가 아니라는 겁니다. 문제의 4개 군은 바로 평안북도 동쪽 끝에 위치한 강계, 초산, 후창, 자성군의 4개였거든요.


 

서간도 24개 면의 관리를 맡은 4개 군.
지도는 1895년의 행정개편 이후의 것으로, 1880년대 당시에는 위원군과 희창군은 강계에 속해 있었다.



기록대로라면, 압록강 하류 대안은 그 일부라도 조선이 관리한 적이 없었죠. 만약 안동에 이르는 압록강 하구 쪽 대안도 조선인들이 이주하고 조선 정부의 관리가 이루어졌다면, 마땅히 벽동군, 창성군, 삭주군, 의주군 등도 담당구역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의주에서 강 건너에 있는 땅을 의주군이 아니고 초산군이 관리한다면 좀 많이 웃긴 일 아니에요?^___^

하여간, 서간도 쪽 역시 북간도에서처럼 청나라와 대한제국 사이에 꽤 많은 충돌이 있었습니다만 서간도에서는 감계회담조차 한 번 열리지 않았습니다. "압록강"은 너무도 분명한 국경선으로 인정되어 있었으니까요. 토문강처럼 이론의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때문에 청나라에서는 계속해서 서상무의 철수와 국경 침범 방지를 요구했고, 대한제국 정부에서도 외교문제 및 "대민피해 유발(공문의 상세한 내용은 아직 번역하지 못함)" 문제로 인해 서상무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 문제에서도 이범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부처간 불협화음의 존재로 인하여 실제 체포, 소환되지는 않은 듯 합니다....만, 이거 또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새나갔군요^^;;

<현대한국사>의 서술을 참고하면 청나라가 봉금지대를 설치하고 출입자를 통제하기 시작한 것은 1638년입니다. 이후 1677년(숙종 3년)에는 봉금지대의 범위가 백두산 좌우 1천리까지 확장되며, 이 지역의 개간/산삼 채취/진주 채취/담비 사냥/벌목 등을 금지시킵니다. 당연히 조선인의 월경도 금지되었으나, 변방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은 그 이전부터 강 건너편 역시 생활권으로 삼아 벌목/사냥/산삼 채취 등을 행하고 있었으므로 갑자기 "국경이니까" 넘어가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해서 실행할 수가 없었죠. 당연히 생업을 유지하기 위하여 몰래 강을 건너는 자가 줄을 지었고, 관청에서 도저히 단속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불법적인 월강자의 문제는 인조 이래 한청간의 외교문제에서 중요 현안이었고, 숙종조에 이르면 그 수가 대폭 증가합니다. 여기서 결정타를 가한 사건이 1710년(숙종 36년)에 봉금지대 내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이죠. 실록의 기록을 바탕으로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해 보면, '이만지'라는 조선인 일당(이만건(李萬建)·이만성(李萬成)·이만지(李萬枝)·이지군(李枝軍)·이선의(李先儀)·이준건(李浚建)·이준원(李浚元)·송흥준(宋興準)·윤만신(尹萬信)으로, 이들은 위원(渭原, 현재의 위원군)에 거주하는 자들임)이 서간도 지방에서 다섯 명의 청나라 사람을 쳐 죽이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산삼(어쩌면 인삼?)짐을 강탈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이 비밀에 묻히지 않았던 것은 이만지 일당이 우연히 청나라 사람 하나를 놓쳤던 탓입니다. 이 한 명이 죽은 동료들의 시체와 20여 명의 살아있는 동료들을 몰고 와 위원 성문 앞에서 난리를 쳤거든요. 이들은 범인을 인도하라고 요구(단 이들은 이만건·이만성·이만지·이선의·이준원의 5명만 알고 있었고, 나머지는 조선 측의 수사 과정에서 추가로 밝혀짐)하며 조선 순라장을 인질로 잡고(크게 다치지는 않고 나중에 탈출) 성문 앞에서 9일간을 농성합니다만, "늙고 겁이 많은" 군수는 청인들에게 실컷 술을 먹이고 은과 비단, 소와 쌀을 뇌물로 주어 사태를 무마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를 감사에게 보고하지 않고 뭉개버리지요. 문책을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만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정은 분노했고, 사실은폐를 시도했던 군수 이후열은 후에 파직되고 유배시키라는 청원도 들어갔는데 그 결과는 실록에 나오지 않는군요.

한편 조정에서는 청나라가 먼저 항의하기 전에 먼저 서한을 보내 설명을 시도합니다. 사실 이런 사건이 처음이 아니었거든요. 이미 1704년에도 김예진(金禮進) 등 5명의 월경자(3명은 살해 주범, 2명은 종범)가 강을 건너가 3명의 청나라 사람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다룬 1704년 7월 20일자 실록의 기사를 보면 월경해서 저지른 살인강도죄에 대한 처벌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어요.


이여(李畬, 당시의 좌의정)가 말하기를,

“범죄가 3등(等)으로 나누어집니다. 전후에 국경을 넘어 변을 일으킨 일로 조사 하는 사신(使臣)이 세 차례 나왔는데, 손수 살해한 범죄자는 입참(立斬)하고 재산을 적몰(籍沒)하며 그 처자(妻子)를 종으로 삼고, 따라간 자는 단지 참(斬)에 처하였을 뿐인데, 을축년(*) 에는 저들의 회자(回咨)로 따라간 자는 감사(減死)하였고, 신미년(*) 에는 율(律)에 준(准)하게 하였습니다. 지금은 이미 조사하는 사신을 보내 오지 않고 곧바로 우리 나라에서 감률(勘律)하게 하였으니, 최후의 신미년 예를 써서 중한 데 따라 감단(勘斷)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여가 또 말하기를,

“정범(正犯) 이외에 다른 죄인은 자문(咨文) 가운데에 말을 넣어 회자(回咨)를 기다려 처리함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상고(商賈)는 감사(減死)하여 정배(定配)하라.”

하고, 또 명하기를,

“그 때의 감사(監司) 이진휴(李震休)와 병사(兵使) 이홍술(李弘述)은 모두 파직(罷職)하고, 지방관도 아울러 파직하여 유(流) 3천리에 처하며, 죄인의 원적관(原籍官)은 5자급(資級)을 강등하고, 지방관으로 기미를 알고 포착(捕捉)한 자는 단지 파직만 하며, 깨달아 살피지 못한 자는 극변(極邊)에 충군(充軍)하라.”


어때요, 처벌이 상당히 엄중하죠?

1710년의 이 사건 이외에, 위 기사에 언급된 을축년(1685, 숙종 11년), 신미년(1691, 숙종 17년)에도 역시 범월인의 살상범죄사건이 실록에 나와있습니다. 을축년에는 25명이 국경을 넘어가 불법으로 인삼을 채취하였을 뿐 아니라 조총을 들고 청나라 관헌 및 민간인을 상하게 한 죄로 체포되었습니다. 이에 청나라 사자가 직접 조선에 와서 재판을 참관했고, 상해에 주도적으로 나선 6명은 처형되었으나 나머지 죄인들은 감형을 받아 제주도-거제도-남해도 등지로 분산 유배됩니다.

신미년에는 '임인'이라는 자가 함경도 경흥 쪽에서 역시 7,8명의 패거리와 함께 깨진 구유를 타고 강을 건너 청나라땅에 들어갔다가 청인들이 쳐놓은 장막을 발견하고 조총을 쏘았는데, 총을 쏜 후 접근해 보니 말 네 필이 죽어 있었습니다. 임인 일행은 장막 안에 있던 인삼과 옷가지를 거둬서 물러났는데 뜻밖에 다음날 몽둥이를 든 10여 명의 청나라 사람들에게 습격을 당했습니다. 한 명은 기습당해 몽둥이를 맞고 즉사했으며, 나머지 인원들도 급히 도망치느라 강탈한 인삼과 옷가지는 물론 자신들이 가지고 갔던 옷-갓-놋그릇-조총 등을 모두 버리고 도망칩니다. 낮에는 숨고 밤을 틈타 걸으면서 겨우 두만강까지 도망했지만, 타고 갔던 구유가 떠내려가 버렸으므로 마른 버들가지로 뗏목을 만들어 겨우 돌아옵니다. 이들 역시 죄가 밝혀져 체포, 6명은 처형되고 2명은 정배형에 처해집니다. 당시 임금인 숙종은 이들을 가련히 여겨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상은 통분할 만하더라도 변방의 백성이 금령(禁令)을 범하는 것은 실로 살길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정상이 가엾다."

그래서 이 죄인들을 위해 특별한 명령을 내리지요. 다들 예상하시듯 특사...면 좋겠습니다만, 숙종임금은 그 가족에게

장사지낼 도구를 지급해 줄 것



을 특별히 호조에 명해 주지요^^ 국경을 넘어 외국인을 상대로 강도살인을 저질렀는데, 불쌍하다고 사면해주는 일 따위는 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 외에 1690년(숙종 16년)에도 함경도 쪽에서 10여 명의 백성들이 두만강을 넘어가 인삼을 캐는 청나라 사람을 쏴 죽이고 캐놓은 인삼을 강탈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제가 실록에서 찾은 것만 이 정도니, 필히 단 3건은 아니겠지요? 증거인멸에 성공하여 처벌을 면한 사례는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현장을 목격당하지 않고, 숲속에 시체를 던져두기만 하면 늑대나 곰, 호랑이나 표범 같은 산짐승들이 말끔하게 흔적을 없애줍니다. 관리의 곤란을 이유로 폐지되었던 4군(세종대왕 때 최윤덕이 개척한 여연(閭延)·자성(慈城)·무창(茂昌)·우예(虞芮)의 4개 군), 즉 폐사군(廢四郡)이 부활(지도에서 보시듯, 그 이름 그대로는 아닙니다)된 것도 이런 월경범죄 방지를 위한 필요성이 큰 몫을 차지했습니다.

물론 이런 범죄의 모든 책임을 변경민 개개인에게 돌릴 수는 없습니다. 체포 후 범인들을 심문한 결과를 보면, 부패한 지방관들이 주민들의 불법행위를 적극적으로 단속하지 않을 뿐더러, 월경민들로부터 상납금을 받는 대신 범월을 눈감아준 정황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방관들이 주민들에게 과도한 진상물(인삼, 산삼, 호피, 초피 등)을 강요하고, 이로 인해서 주민들이 원하지 않더라도 국경을 넘어 사냥과 채집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을 공산도 큽니다.

하지만 그런 배경이 본질적인 문제를 정당화시키지는 않지요. 바로 한양에 있는 조선 조정에서는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나가는 월경을 명백한 범죄로 취급했다는 것 말입니다. 두만강을 건너 강도살인을 저지른 범인이 살인죄와 강도죄 외에 범월죄까지 적용받았다는 것, 이것은 조선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선으로 인식했다는 명백한 증거 아닙니까?^^

이런 식의 사건이 잇따르니 청나라 쪽에서는 "이 참에 경계를 명확히" 할 필요성을 느끼고 오라총관 목극등(명성 자자한)을 파견하여 조선과의 경계를 명확히 하도록 합니다. 이때 세워진 것이 "동위토문 서위압록"이라는 비문으로 유명해진 백두산 정계비죠. 이 정계비의 건립 과정과, 이 비문을 "대충 작성한" 과정 및 그 결과에 대한 숙종조 당시의 논의는 링크한 shaind님의 포스팅을 참고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이만하면 정계비가 "왜" 세워졌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대충 한 셈이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