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간도협약(4) - 을사조약 이후 간도의 향방, 그리고 간도협약

구름위 2012. 12. 31.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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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을사조약에서 간도협약까지

자, 이제 전쟁은 끝났고 국경과 관련된 분쟁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만 청나라의 상대는 처음처럼 조선이 아니라 일본이었습니다. 을사보호조약은 조선이 주체적으로 외교권을 행사할 수 없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간도에 대한 협상도 일본이 담당하고 있었지요.

* 여기서 다루는 이 문제의 "본질"은 을사조약이 무효라는 점보다는 "어쨌건 그 조약으로 인하여"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졌다고 조선이 바로 간도를 건드리지 않았듯이, 일본도 보호조약 체결 직후부터 간도에 바로 손을 대지는 않았습니다. 을사의병도 진압해야 하고 이런저런 내정도 손봐야 하고 할일이 많았거든요. 그러던 중 참정대신 박제순이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간도 주재 한국인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를 요청(1906.11)"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일본도 간도에 신경을 쓰기 시작합니다. 우선 간도의 실정을 확인하기 위하여 두 사람의 일본인 요원을 변장시켜 파견(1907.4)했고, 이들의 보고를 통해 간도의 실정을 파악합니다. 한편 이해 7월 30일, 제1차 러일협약의 체결로 한반도 및 남만주의 이권을 러시아로부터 인정받았으므로 일본으로서는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고 간도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입장이었지요.

러시아와의 합의로 행동의 자유를 얻은 일본은 조약이 체결되자마자 곧바로 통감부 파출소 설치를 위한 구체적 행동에 들어갑니다. 이때 통감부가 청나라 정부에 대하여 보낸 조회문 내용을 한번 볼까요? <현대한국사>에 의하면 그 대략적인 내용은 이랬습니다.

간도에 거주하는 10만여의 한국군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통감부에서 관리를 파견하는 바, 청국 관헌에게 적당한 훈령을 발하여 착오 없게 하기 바란다



질문입니다.

간도에 대한제국의 기존 행정망이 이미 설치되어 실질적인 지배력이 완전히 행사되고 있었다면, 현지에 왜 "훈령을 받아야 하는" 청나라 관리가 있을까요? 이미 설치되어 있는 대한제국의 행정망을 통감부가 인계받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제 머리로는 그렇게밖에 생각이 안 되는군요.

청나라 정부에 조회를 보낸 통감부가 실제로 간도에 파출소를 개설한 것은 8월 23일, 용정촌부터입니다.


 

<한국현대사>에 게제된 지도. 용정촌은 쉽게 확인 가능하다(클릭하면 커짐).




또한 통감부는 "한국인의 생명 재산과 복리 증진을 위하여 그 직책을 다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아래와 같은 훈령을 내립니다.
(오오, 한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고 행복하게 해주겠다 고시했으니 통감부는 좋은 조직이구나!!)

1. 통감부 파출소는 앞으로 간도를 한국 영토로 간주하고 활동할 것.
2. 한국인은 청국의 재판에 복종치 말 것.
3. 청국 관헌이 징수하는 일체의 조세는 통감부 파출소에서는 승인하지 않으며 청국 관헌의 압박에 의하여 한국인이 부득이 납입한 것으로 인정할 것.
4. 청국 관헌에서 발포하는 일체의 법령을 통감부 파출소는 승인하지 말 것.
5. 청국 관헌이 명한 도향약, 향약 등에 대해서는 일반 한국인과 동이랗게 취급할 것.



이것이 간도 통치를 위한 일본의 기본 방침이었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물리력으로 헌병 분견소가 설치됩니다. 신흥평, 국자가, 두도구, 호천포, 우적동, 조양천, 복사평 등 14개 소의 헌병 분견소에는 일본 헌병 뿐 아니라 한국인 경찰관도 배속되어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실제 비슷한 시기에 군대가 해산될 때도 해산장병 중 희망자에 대해 "간도에서 둔전병 또는 경찰관으로" 재취업을 지원하는 지원사항이 있었지요.

그런데 위 훈령에서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하나 보이지 않으십니까?

청국 관헌이 징수하는 일체의 조세
청국 관헌이 발포하는 일체의 법령



이건 통감부 파출소가 설치되던 그때, 간도의 실질적 행정권은 청나라가 행사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1903년에 대한제국 정부가 파견한 이범윤은 러일전쟁의 종결과 함께 러시아로 망명했고, 그 후임자가 없는 상황에서 간도에 대한 대한제국의 영향력 행사가 제대로 이루어질 리 만무한 거죠. 따라서 러일전쟁 종전 이후 통감부 파출소의 설치까지, 한국측에 의한 간도에서의 세금 징수나 치안 유지 활동은 최소 2년간은 실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일본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 청나라 측이 무력으로 대응할 수도 없는 것이, 러일전쟁의 와중에 만주 일대는 쑥대밭이 되었고 평안도-함경도 일대에는 1만에 가까운 일본 정규군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일본군에게 말 그대로 "처발린" 것이 12년 전이고, 7년 전에는 일본 외에 다른 서구 열강에게도 신나게 짓밟힌 청나라로서는 섣불리 무력행사를 생각할 수 없었죠. 대신 청나라는 간도 현지의 한국인들과 손을 잡는 쪽을 택합니다.

사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국인들은 일본의 간도 통치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조국을 빼앗아간 일본이 간도를 "한국의 영토" 운운하는 건 간도까지 먹으려고 하는 의도에서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고, 많은 한국인들은 "니놈 주느니 버리고 말지"라는 심리로 되어 청나라 관헌에 의지하여 일본인으로부터의 보호를 청하곤 했습니다. 청나라로서는 뜻밖의 우군이 생긴 셈이었죠. 하지만 일본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간도 영유에 필요한 기반을 다져나갑니다. 경계선 확정의 근거로 쓰기 위해 여러 분야에 걸친 조사와 연구를 시행할 뿐 아니라 간도를 한국 영토로 간주하는 시각에서 모든 시정을 처리했고, 여기에 자극받은 청나라 측은 길림 변공소를 설치하고 다수의 관리와 군인을 파견하여 대립각을 더욱 세워나가면서 일본과 맞서게 되죠.

하지만 이때 일본에게는 간도 말고도 만주와 관련된 몇 가지 골칫거리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안봉선 개축 문제. - 안봉탕과는 무관함
안동에서 봉천으로 가는 이 철도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병력 수송을 위해 급히 건설한 경편철도(선로폭 2피트 6인치)로, 가벼운 열차만 다닐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청나라의 원조를 얻어 이 선로를 보다 견고하게 다시 부설, 일반 열차가 통행할 수 있게 만들고 싶었죠. 이 철도는 전쟁통을 틈타 중국 영토에 일본이 무단으로 건설한 것이므로, 그 유지를 위해서는 중국의 동의를 통한 법적 정당화가 필요했습니다. 때문에 일본은 "중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회사를 설립하여 이 노선을 경영하자고 제안합니다만, 중국측의 답변은 거절이었습니다.

1905년에 있었던 1차 회담에서 중국측은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획득한 남만주 철도에 대해서는 같은 조건으로 행해진 일본측의 제안을 대체로 수락했으나 안봉철도에 대해서는 5년간만 그렇게 경영하고 5년 뒤에는 철거하거나 중국에 매각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런 조건은 일본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으므로 수차례에 걸쳐 협상이 계속된 결과 일본군 철병에 1년, 개축에 2년, 조차 연한에 15년 총계 18년으로 최종합의(1905년 말)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측 내부에서 안봉선 철도의 노선 변경 문제(탄광 채굴권을 획득하기 위한)로 격한 논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1908년 말까지로 되어 있던 개축 기한을 넘겨버렸다는 점입니다. 일본은 1909년 1월에야 개축을 위한 측량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지만, 중국측은 시한을 넘겼다는 이유로 자기네 측량기사를 파견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일본측은 "전체 조차 기간을 변경하지 않겠다(공사를 핑계로 15년의 조차기간을 늘이지 않겠다는 뜻)"고 약속했고, 갈등은 일시 봉합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본측의 노선 변경이 문제가 됩니다. 중국측은 어디까지나 그 자리에서의 "개축"만 허용했지 "노선 변경"은 허락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며, 일본군이 철도수비대를 배치한다는 계획에도 반발해서 협조를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철도 경비는 청나라가 철도경찰대를 설치해서 하겠다는 거였죠.


둘째, 무순 탄광 및 연대 탄광의 반환 요구.
이 탄광은 만철 경영에 꼭 필요한 석탄을 산출했으며 본래 러시아의 동청철도에 속했습니다. 따라서 포츠머스 조약으로 일본에 귀속되도록 되어 있었으나, 청나라 정부는 이것이 "자국의 개인의 권리"이므로 일본에 넘길 수 없다고 하고 있었습니다.


셋째, 영구지선 철퇴의 요구.
영구(營口, 잉커우)는 지선은 발해만 북쪽 끝 요동반도의 뿌리께에 해당하는 도시로, 여기에는 러시아가 동청철도를 건설할 때 그 재료를 나르기 위해 지은 철도지선이 있었습니다. 포츠머스 조약에 따르면 동청철도의 모든 "부속 영조물"은 일본의 몫이 되어야 했으나 청나라는 "그 이름이 명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구지선의 대일본 양여를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한반도의 모든 부속도서는 한국령이다"라고 하는데 "다케시마는 그 이름이 명시되지 않았으므로 예외다"라고 주장하는 어느 나라가 생각남...)


넷째, 관외철도의 법구문 연장 문제.
한자로 된 이름이 좀 복잡한데 쉽게 말하자면 일본이 보유한 만주철도 바로 옆에 병행선을 깔겠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만일 청나라가 그 위협을 정말 실행에 옮긴다면 만철의 이익은 크게 줄어들 것이 분명했죠.


일본 입장에서는 특히 첫번째의 안봉선 개축 문제가 시급했습니다. 때문에 청나라의 비협조에 화가 난 일본이 1909년 8월 6일자로 자기들 마음대로 개축하겠다는 의사를 청나라 측에 통고했고, 이에 청나라는 간도 문제에 있어서 일본이 양보하면 안봉선 문제는 물론 다른 현안에 있어서도 일본측 의향을 존중하겠다는 의사표시를 보내옵니다. 이에 양자간의 합의가 이루어져 안봉선 개축에 대한 협정이 8월 9일, 그리고 간도의 지위에 대한 협약이 9월 4일에 각각 체결됩니다. 간도협약 전문은 이미 첫번째 포스팅에서 한 번 소개했지만 한 번만 더 올리겠습니다.


<간도에 관한 협약>

대일본국(大日本國) 정부와 대청국(大淸國) 정부는 선린(善隣) 관계와 상호 우의에 비추어 도문강(圖們江)이 청국과 한국 양국의 국경으로 된 것을 서로 확인하고 아울러 타협의 정신으로, 일체 처리법을 상정(商定)하여 청국과 한국의 변방 백성들에게 영원히 치안의 행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의 조관(條款)을 정립(訂立)한다.

제1조
일 청 양국 정부는 도문강을 청국과 한국의 국경으로 하고 강 원천지에 있는 정계비(定界碑)를 기점으로 하여 석을수(石乙水)를 두 나라의 경계로 함을 성명한다.

제2조
청국 정부는 본 협약이 조인된 뒤에 되도록 빨리 다음의 각지를 외국인의 거주 및 무역을 위하여 개방해야 한다. 일본국 정부는 이 지방에 영사관(領事館) 혹은 영사관 분관(領事館分管)을 설치할 수 있으나 개방하는 날짜는 별도로 정한다. 용정촌(龍井村), 국자가(局子街), 두도구(頭道溝), 백초구(百草溝)

제3조
청국 정부는 이전과 같이 도문강 이북의 개간지에 한국 국민이 거주하는 것을 승인한다. 그 지역의 경계는 별도로 이를 표시한다.

제4조
도문강 이북 지방의 잡거 구역(雜居區域) 안에 있는 개간지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국민은 청국의 법적 권한에 복종하고 청국 지방관의 관할 재판에 귀속한다. 청국의 관헌은 이상의 한국 국민을 청국 국민과 똑같이 대우하여야 하며 납세(納稅) 그 밖의 일체 행정상의 처분도 청국 국민들과 똑같이 하여야 한다.

이상의 한국 국민에 관계되는 민사와 형사 등 일체 소송 사건은 청국 관헌이 청국 법률에 따라서 공평하게 재판하여야 한다. 일본국 영사관 또는 그 위임을 받은 관리는 자유로이 법정에 입회할 수 있으며, 단, 인명에 관한 중요 사안에 대하여는 반드시 사전에 일본국 영사관에 통지하는 것으로 한다. 일본국 영사관은 만약 법률에 따라서 판결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고 인정될 때에는 공정한 재판을 하도록 하기 위하여 따로 관리를 파견해서 다시 심리할 것을 청국에 청구할 수 있다.

제5조
도문강 이북의 잡거 구역 안에 있는 한국 국민 소유의 토지와 가옥은 청국 정부로부터 청국 국민들의 재산과 똑같이 완전히 보호하여야 한다. 또한 당해 도문강 연안에는 장소를 선택하여 나룻배를 놓고 두 나라 국민들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하여야 한다. 단, 병기를 휴대한 사람은 공문이나 또는 여권이 없이는 국경을 넘을 수 없다. 잡거 구역 안에서 나는 곡식을 한국 국민이 가져다 파는 것을 허락하되 심한 흉년이 들었을 때에는 금지할 수 있으며 땔나무는 이전대로 장만할 수 있다.

제6조
청국 정부는 앞으로 길장 철도(吉長鐵道)를 연길(延吉) 이남으로 연장하여 한국의 회령(會寧)에서 한국의 철도와 연결할 수 있다. 그 일체의 처리법은 길장 철도와 똑같이 하며 공사를 시작하는 시기는 청국 정부에서 형편을 참작하여 일본국 정부와 상의한 뒤 정한다.

제7조
본 협약은 조인한 뒤 즉시 효력을 지닌다. 통감부 파출소(統監府派出所)와 문무(文武) 각 관리들은 되도록 빨리 철거하기 시작하여 2개월 동안에 끝내야 하며 일본국 정부는 2개월 이내로 제2조에 열거한 통상지(通商地)에 영사관(領事館)을 개설하여야 한다.

이상을 증거로 하여 아래에 이름을 쓴 사람은 각각 본국 정부로부터 해당한 위임을 받고 일문(日文)과 한문(漢文)으로 작성한 각 2도(度)의 본 협약에 기명(記名)하고 조인한다.

명치(明治) 42년 9월 4일
대일본국(大日本國)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 이슈잉 히코요시〔伊集院彦吉〕

선통(宣統) 원년 7월 20일
대청국 흠명 외무부 상서회판대신(大淸國欽命外務部尙書會辦大臣) 양돈언(梁敦彦)

원본 4책 3권 29장 B면, 영인본 3책 538면



결국 조선과 만주의 국경은 1887년 회담에서 청나라가 주장했던 대로 석을수가 되었고(2편 또는 아래 지도 참조), 간도를 비롯한 만주는 중국의 영토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근 10여 년에 걸친 대한제국의 "간도 프로젝트"는 이로써 실패를 맛보게 된 거죠.

여기서 또 하나 생각해 볼 게 있습니다. 종종 보면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자기 땅이면 중국이 왜 철도까지 주면서 일본에게 달라고 하나?"



여기에서 생각해 보실 것이 있습니다.

1. 일본이 "개축"하려고 하는 안봉선은 본래 일본이 건설한 철도노선입니다. 개축해서 유지하는데 중국의 동의가 필요했을 뿐입니다.
2. 포츠머스 조약에 의해 일본에 넘겨지는 탄광, 철도노선들은 대부분 러시아가 건설, 유지해온 것이었습니다.
3. 일본의 남만주철도에 대한 중국의 병행선 건설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은 "위협"에 불과했습니다. 중국이 건설에 필요한 자본을 제대로 조달할 수 있었을지, 무사히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분들이 신경쓰지 않는 진짜 본질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건 바로 일본이 건설, 또는 러시아로부터 빼앗아 경영할 철도는

조차 기한이 끝나면 의무적으로 중국 정부에 매각



하게 되어 있었다는 거죠-_-

청나라 입장에서 생각해보죠. 앞으로 15년 동안 일본이 철도를 운영하게 해 주면 간도를 청나라 영토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철도를 건설, 운영하는 비용은 모두 일본인들이 스스로 부담하며, 중국은 토지만 제공하면 되는데 15년 뒤에는 철도 자체가 중국의 소유가 됩니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야 단 2년 뒤에 청나라가 붕괴했지만 그걸 알면 담당 관리가 신이고-_-

쉽게 말하자면 청나라 정부의 결정이 생각만큼 손해보는 게 아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홍콩도 99년만에 받아내는 중국이 15년 정도 세월이 뭐 대단하게 보였겠습니까? 게다가 중국 천지에 외국 자본이 들어와 건설한 철도와 공장이 사방에 널려 있는데 일본이 선로 하나 더 깐다고 새삼 손해 볼 것도 없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이홍장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철도, 공장, 저택, 얼마든지 지어라.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갈 수 없는 이상,
그대들은 어차피 그것들을 중국에 두고 가게 되어 있다."

(출처는 불분명)




(추가부분 : 19:18)
그리고, 여기서 3편에서 언급한 KBS의 보도를 추가로 비판해 보겠습니다. 그 기사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죠?

1908년 9월, 당시 동북3성의 총독은 백두산 일대에 대한 행정기관 설치를 황제에게 건의했고 최고 의결 기구인 내각회의정무처는 지방 조직 신설을 검토합니다.
<인터뷰>김우준(연세대 동서문화연구원 교수) : "당시 간도에 청의 군대와 상권, 촌락이 전혀 형성돼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에 청이 간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지 않았다."
1년 뒤 간도협약이 체결된 직후 '장백부'가 신설됐고, 이어 두 개의 현이 추가로 설치됩니다.
'장백부'가 관할하는 지역은 두만강,송화강 등을 포함한 현재의 연변 지역으로, 간도협약을 기점으로 청나라는 비로소 이 지역을 장악합니다.



어디어디에 행정기구를 설치했다는 것이, 그 이전에는 행정 공백 상태에 있었다는 의미라고 해석하는 것은 과대해석입니다. 인구의 증가 또는 중요도의 변화 등에 의하여 얼마든지 새로 행정구역이 생길 수 있고 나누어 갈라질 수도 있습니다. 저 기사에서 언급한 청나라의 행정개편은 "보다 효율적인" 행정관리를 위한 것이지, 절대 그 이전에는 담당 관청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1881년 7월, 청나라 정부에서는 "간도 지방의 조선인에 대한 호적 사무는 혼춘현과 돈화현이 나누어 관리하고, 재판사무는 길림성 당국이 처리"한다는 지침을 세워놓고 있었습니다. 거리상의 문제로 인해 효율이 충분히 높지는 못했을지언정 김우준 교수의 주장처럼 "완전한 공백 상태"는 전혀 아니었다는 이야기죠.


5. 최후의 에필로그.
간단하게, 간도협약 이후 간도와 만한 국경이 어떻게 되었나 정리하는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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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삼아 말하자면 현재의 중국-북한 국경은 홍토수를 따라 그어져 있습니다. 1962년 체결된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은 백두산 천지의 절반 및 간도 전체를 중국의 영토로 인정했으나 만한국경 자체는 간도협약에서 규정한 기존의 석을수가 아니라 홍토수를 따른다고 규정했죠.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볼 때, 결국 1887년 이중하의 주장에 따라 경계선이 그어진 셈입니다. 이것도 나름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다만 백두산 천지의 영유권은 이중하 때 어떻게 별도로 논란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는데, 아마 백두산 자체는 양국 모두 공유하는 성지의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제 추론이지만.


이제까지의 길게 늘어진 내용에 대한 간단요약 :
1. 간도는 분쟁지역이었던 것 맞다.
2. 그러나 간도가 본격적으로 분쟁지역이 된 것은 1903년 이후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우리 내부 논의에 불과했다.
3. 현재의 조중변계조약에 의한 국경이 이중하가 주장한 바로 그 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