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구한말 관군의 한 단면 - 동학농민운동과 그 진압

구름위 2012. 12. 31.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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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http://www.greatopen.net/magazine01/res/200603/200603_6601.jpg)


, 2천 명의 동학농민군은 첫 번째 대규모 전투(*)인 황토치 전투에서 전주감영이 파견한 감영군 2천(2천이라고 해야 정규 병졸은 절반, 나머지 절반은 보부상)을 격파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감영군의 행동을 보면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어요(이하 날짜들은 음력임).

* 황토치 전투 이틀 전(음력 4월 4일) 있었던 백산 전투가 최초의 전투입니다만, 이 전투에서는 관군이 기습을 당해 궤멸, 산산이 흩어져 도주하는 바람에 도리어 사상자는 더 적었습니다.

일단 전라감사 김문현의 명을 받은 관군이 고부를 출발한 것은 전투가 벌어진 날, 4월 6일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병력이 황토치에 도착한 건 무려 해가 뉘엿뉘엿한 저녁 무렵;; 1960년대에 동학농민운동 자료를 수집하러 현장에 갔던 이규태 씨 이야기로는 자기 걸음으로 1시간 걸렸다고 하던데, 도로사정 문제와 대군이 행군할 경우의 속도 차이를 감안해도 이건 좀 심하지 않나 싶기는 해요. 1시간 걸었으면 겨우 4km 정도란 이야긴데, 이걸 아침부터 저녁까지 걸었다니....

그런데 사실 길이 안 좋기는 했다고 합니다. 비가 온 직후인 탓에 워낙 도로사정이 안 좋아서 군량을 실은 소달구지가 움직일 수 없었고, 그래서 동네 사람들을 끌어다 운반을 시켰다고 하네요. 동네 사람들 외에 군인으로 동원된 보부상들도 짐이 잔뜩 든 고리짝을 메고 갔고, 관군 병사들은 소풍이라도 가듯 유유자적 룰루랄라, 노래를 부르며 손뼉을 치며 그렇게 길을 갔다고 하는군요.

이렇게 해서 저녁나절에 황토치에 도착한 관군은 진을 치고 농민군의 접근을 기다리면서 본격적으로 질펀하게 놀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술과 쇠고기(돈 주고 사 왔을 리는 없을 듯 - 아마 농가에서 약탈해오지 않았을지)를 곁들인 저녁을 배불리 먹고 "바보 천치같은 동학당 놈들은 지금 개울물을 마시고 나무껍질이나 벗겨 먹고 있겠지!"하고 비웃으면서 말이죠.

술과 고기로 끝났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관군 간부들은 주변 촌락 아낙네들을 끌어다가 작부처럼 자기네 술시중을 시켰고, 심지어는 겁탈하기까지 했습니다. 동학군이 관군 진지를 들이쳤을 때, 옷깃이 풀어헤쳐진 젊은 여자들이 울면서 막사 사이를 헤메는 것을 목격했다는 기록이 동학군 쪽에 남아 있다고 하네요.


 

황토치 전투를 재현한 축제의 한 장면
(사진출처 : http://cfs2.flvs.daum.net/files/41/87/73/1/9449633/thumb.jpg)



이렇게 술에, 고기에, 여자에 빠져 놀아나고 있었으니 전투준비라고 제대로 할 리가 없지요. 저녁에는 그래도 경계하는 시늉이라도 하고 있었던 관군은 동학군이 얼른 나타나지 않자 안심해서는 술먹고 춤추며 놀다가 다 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죽창이 주무장인 동학군의 야습을 당해서 전멸해 버렸죠. 생존자는 극소수-_-;;;

* 위 대목은 당시 전투의 생존자들을 인터뷰(1960년대 초기)한 이규태씨의 저서에 주로 근거한 것이나,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기록이 존재합니다. 동학군의 진지에 대해 감영병 250명과 수천의 보부상으로 이루어진 관군이 돌격하다가 패주했다는 이야기(주로 공식 기록)도 있는데, 제가 공부가 부족해서인지 뭐가 맞는지 모르겠군요.
이와 같이 대립되는 양자의 기록이 있는 경우, 관군은 실제로 술먹고 퍼져 자다가 기습당해 놓고서는 명목상으로만 "용감히 돌진하다가 함정에 빠져" 패했다고 보고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큽니다. 이럴 경우 정부의 "공식" 기록은 후자의 것으로 남게 되지요. 뭐가 맞으려나.


이 패배 이전에 전라감사는 서울에 원병을 요청했습니다. 조정은 이에 양호초토사 홍계훈(임오군란 때 중전의 생명을 구하고, 훗날 을미사변 때 경복궁을 지키다가 전사한 바로 그 사람입니다)에게 800의 정예 경군을 딸려 파견했습니다. 홍계훈은 일찌기 동학도들의 보은 집회(1893년 3월)를 진압하러 600의 군사를 이끌고 출동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었지요.

이들 병력은 모두 서양식 훈련을 받고 군복도 모두 양복으로 갖춰 입은 장위영 소속의 정예였어요. 홍계훈은 보무도 당당하게 기선 창룡호와 한양호(관민합작 해운회사인 이운사 소속의 배), 그리고 청나라 군함 평원호를 타고 이들과 함께 인천을 떠나 출항 다음날인 음력 4월 5일에 군산포에 상륙했습니다. 그리고 4월 7일에 전주성에 들어갔습니다만 이때 홍계훈의 병력은...

470명 뿐이었습니다.



단 이틀 동안 절반에 가까운 330명이 탈영해버린 거죠. 사실 훈련도 받고 군복은 잘 갖춰입었지만 당시 조정의 병사들에 대한 대우는 엉망진창이었습니다.

당시 경군 병사들은 현금으로 하루에 50문의 급료를 받았습니다(당시 조선군은 직업군인제). 그런데 이 돈 외에는 쌀 한 톨 지급이 안 되었던 데다가, 이 알량한 봉급도 3개월째 지급이 안 되고 있었어요. 가족들 생활도 힘든 판에 민란을 진압하러 가라는데, 전라도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소식이 감영군의 패전 소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병정들이 기혼자였으므로 자기가 죽으면 뒤에 남을 처자식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죠.

게다가, 관군 병사들에게는 잘 싸운다고 해서 포상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고 전투중에 죽거나 다친 데 대한 보상도 전혀 없었습니다. 한 병사는 첫 전투인 백산 전투에서 복부에 총을 맞아 관통상을 입고 돌아왔는데, 감영에서는 이 병사에게 치료조차 해주지 않고 1관문(1관문 = 10냥 = 1,000문)의 돈을 주고 즉각 제대시켜버렸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죠. 이런 대우를 받으면서 관군의 사기가 높을 리 있나요.

농민군에 대한 숫적 열세에 겁먹고, 지방민들의 반정부적인 분위기에 위기감을 느낀 데다 승승장구하는 농민군에게 승리할 자신이 없었던 홍계훈은 동학군의 규모가 워낙 큰 데다 "사방에 적도와 내통하는 자가 널려 있어"서 싸울 수 없으므로, 원병을 보내달라는 전보를 보냅니다. 이에 장위영의 잔여병력 300명과 강화도의 심영병 500명이 추가 파병되고, 이 소식에 기운을 얻은 홍계훈은 비로소 싸움에 나설 결심을 합니다.

하지만 아직 원병이 실제로 도착하지는 않았으므로 홍계훈은 자기가 거느리고 온 병력에다 남아있는 감영병 소속의 정예병력을 달달 긁어 남부 지방을 맴돌고 있는 동학군을 추적합니다만, 공연히 병력을 양분해서 활동하다가 4월 23일의 장성 전투에서 대관 이학승 지휘하의 별동부대 300이 또 참패합니다. 홍계훈 나름대로는 서울에서 내려온 원군이 법성포에 상륙했으므로 자기는 이 병력을 인수하고 이학승에게는 그동안 동학군의 발을 묶어놓게 할 심산이었지만 계산이 빗나간 거죠. 홍계훈의 예상대로라면 이학승이 동학군 주력을 붙들고 있는 사이 자신이 거느린 관군이 그 배후를 쳤어야 했는데, 너무 쉽게 이학승이 패해 버린 겁니다.

이학승도 나름 자신은 있었습니다. 그는 개화기를 맞아 새로 교습한 새 군사학을 배운 제법 유능한 장교였고, 고지에 자리잡고 대포 진지와 기관총 진지를 만든 데다(대포만 2문이라는 기록도 있는데, 당시 개틀링 기관총을 "회선포" 또는 "기관포"로 표기했으므로 이를 그냥 포로 취급, 대포 2문으로 적었을 수도 있습니다) 능선에 소총병들을 위한 참호까지 파서 진지를 구축해놓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병사들의 각개 무장도 동학군이 기껏 화승총인데 서양식 라이플(양총이긴 하지만 당시 관군의 무장은 연발이 안 되는 후장 단발총임)이었으니, 압도적으로 유리했죠.

다만 압도적인 수적 열세와 종교적 광신성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학승의 군사가 300명인데 반해 동학농민군은 4,5천에 달했습니다. 게다가 "궁궁을을(弓弓乙乙)"이라고 적힌 부적을 달고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라는 주문을 외우며(부적과 주문의 힘으로 총알이 피해 간다고 믿었음) 돌격하는 동학군을 저지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전의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오후에는 압도당해버렸죠. 잠깐의 휴식 동안, 동학군 수뇌부가 생존 장병을 대상으로 "죽은 놈은 부적을 잃어버렸거나 주문을 외우지 않은 자들 뿐이다"라는 정신교육을 실시했거든요.

이에 종교적 신앙심으로 사기충천한 동학군은 총탄이 날아오건 포탄이 날아오건 상관없이 "닥돌"했고, 원체 수가 적은 관군은 장비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일패도지하고 말았습니다. 병력을 추스르려고 애를 쓰던 대관 이학승도 패주하는 경군 배후에서 5명의 부하 병졸들과 같이 최후까지 분투하다가 전사하고 말았지요. 현재 장성에는 장성 유생들이 건립하고 최익현(다들 아시는 그 사람)이 비문을 쓴 이학승의 추모비가 남아 있습니다. 물론 승전한 동학농민군을 기념하기 위한 동학농민군 승전 기념공원(사적 406호)도 있어서, 기념행사도 천도교 주최로 열리고 있다고 하네요.


 

장성에 남아있는 이학승의 추모비
(사진출처 : http://donghak.go.kr/images/historic/add2/034.jpg)



영광 법성포에 머무르고 있던 초토사 홍계훈은 장성에서의 패잔병들을 수습한 다음 서울에서 온 원군을 이끌고 서둘러 동학군의 뒤를 쫓았지만, 동학군이 먼저 전주성에 들어가고 말았지요. 그나마 남아 있던 병력도 홍계훈이 긁어간 뒤라 전주성은 제대로 저항도 못 해 보고 함락되었습니다. 이들의 뒤를 따라온 관군은 성을 탈환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 가능성을 들어 농민군 지도부를 설득한 끝에 전주성을 돌려받습니다. 하지만 이미 양쪽 군대가 조선에 들어와 있었고, 얼마 안 가서 청일전쟁이 이땅에서 발발하게 되지요.

청나라와 일본의 주전장이 만주로 넘어가자 동학군은 2차 봉기를 통해 일본군을 격파하고자 했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작전으로 붕괴, 진압당하고 맙니다. 진압의 수적 주력은 관군이었고, 일본군은 단지 후비보병(전역 5~9년차의 예비군. 지금 우리 개념으로 생각하면 향토예비군 수준) 1개 대대뿐이었어요. 다만 조선군의 지휘권은 일본군 장교가 행사했습니다. 여기에 각지에서 일어난 "민보군" 및 "의병"들이 동학군 공격에 나서면서 관군, 일본군, 민보군의 협공을 받은 동학군은 쇠멸하게 됩니다. 관군 및 일본군에게는 장비와 전술에서 밀리고, 양반들이 주도한 민보군은 그 보조병력으로서 숫적 우세를 강화했으니 말이죠.


참고자료 :

들불, 유현종, 삼성당, 1994
이규태의 개화백경 vol.5 - 개화는 싫어 개국은 더욱 싫어, 이규태, 조선일보사, 2001
한국사 vol.40 -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국사편찬위원회, 2000
현대한국사 vol.1 - 시련에 선 왕조(1863~1895), 편집부, 신구문화사, 1969
동학농민혁명 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