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조선의 해외 무기 획득 사업-제2편-

구름위 2013. 1. 15.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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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4년 4월 24일.조선왕조 실록에,

일본의 도쿠카와 이에미쓰의 습직(襲職; 직무를 이어 맡음)을 축하해주려 파견하는 회답사(回答使)의 파견을 앞두고 비변사에서 조선 특산 비단을 가져가서 일본 시장에 팔고 그 대금으로 일본제 조총을 사오자고 건의하는 기록이 보인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경기의 군사가 가장 정예하고 건장하므로 안을 지키고
밖을
막는 데에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대합니다. 그러나 경기의 물력이 피폐하여 기계를 마련하여 줄 수 없습니다. 이 번에 일본으로 회답사가 가는 편에 호조로 하여금 화사주(花絲紬) 수천 필을 장만해 보내어 수천 자루의 조총을 사오게 하여서 경기 군사에게 나누어 주어 교련(敎鍊)하여 성취하게 하소서. ”

※화사주(花絲紬)는 일본에서 인기 있었던 조선 특산 비단이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환도(環刀-일본도)도 사오도록 하라.”하였다.


                                 임금님 어가를 호위하는 어영청 조총병들


인조의 신정권이 비록 친명 반 후금 정책을 취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북방의 심상치 않은 정세에 대비해서 소멸해 버린 조총대를 다시 만들자는 비변사 내면의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이 이 건의에서 보인다,


이괄의 난에 혼난 인조의 심기에 맞추어, 왕실 근위대격인
어영청 소속 경기 병사들을 품질 좋은 일본의 조총으로 장비 시키자는 건의였다.

당시 후금국은 초반부터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인조 정권에 심사가 잔뜩 뒤틀어져 있을 때였다.


후금국이 조만간 손을 보려고 벼르고 있는 상황에서 그 전 군주 광해군
같았으면 미리 앞장서서 일본에서 조총을 구해왔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회답사로 임명되어 일본에 가는 정립이 아래와 같이 무기 구입을 뒤틀어 버리는
한심한 건의를 한다.


무기 구입을 건의하는 비변사의 건의가 재가(裁可) 된 후 보름이
지나지도 않아서였다.


1624 5월 11일,

정립, 강홍중, 신계영을 보내어 일본(日本)에 회답하였다.

정립 등이 떠나려 할 때에 아뢰기를,

중국은 부모의 나라로서 혹 유무(有無)를 무역해도 본디 크게 해로울리 없는데도 오히려 수검(搜檢;금제품(禁制品) 따위를 수색하여 검사함.)하는 법이 있습니다. 

더구나 왜노(倭奴)는 원수의 나라로서 사신을 보내어 회답하는 것은 실로 부득이한 상황에서 나왔는데, 재화(財貨)를 가져가서 이익을 꾀하는 일이 있다면 사신이 모욕을 당하고 나라의 체모가 손상되어 관계되는 것이 작지 않을 것입니다.

비국(備局-비변사)의 공사(公事)에 따라 화사주 수천 필로 조총, 환도를 사오게 하셨는데, 이 성명(盛名)의 시대에 처음 사신을 보내면서 버젓이 재화를 가져가 무역의 길을 열게 하면, 도이(島夷)에게 깔보이고 나라의 체모를 손상시킬 듯합니다.”


하니, 인조가 답하기를,


아뢴대로 하라. 수검하는 일은 사신이 엄금하면 절로 그 폐단이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반드시 따로 경관을 보내야 하겠는가.”

험악해져가는 국제 정세는 외면하고 명분론에 젖어 후금에 적대하다가
재앙을 불러온 인조의 신하답다.


답답한 인조는 보름 전에 비변사에 내린 전교를
뒤집어 버리고 정립의 건의를 따른다.


국제 정세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이렇게 명분을
따지는 허황된 인식이 인조 정권에 통하고 있었으니 청[후금국]이 인조를 손보려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일으킨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인조가 국방을 게을리 했던 댓가는 엄혹했다.
1638년 12월 1일 용골대와 마부대가 인솔하는 기습대가 압록강을 건너 단 3일 만에 왕실의 피난지인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을 차단하고 인조의 조정을 남한산성으로 몰아 넣었다.


이어서 청 태종이 거느린 15만 명의 청군이 후속하여
침공, 남한산성을 물샐 틈 없이 포위하고 공격해 들어왔다.


공성전(戰; 성이나 요새를 빼앗기 위하여 벌이는 싸움)47일간 계속되었다.
수비대는 식량 부족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식량이 떨어지고 더 버티지 못했던 인조는 결국 1638년 2월 1일 성을 내려와 송파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진흙 바닥에서 세 번이나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이나 조아려야 하는 삼궤구고두의 수모를 겪으며 한국 역사 최악의 수치스런 항복을 하게 된다.



                                                남한 산성


광해군과 달리 아무런 국방의 준비도 안하고 있으면서, 외교적으로는
신생 강국 청에 뻣뻣하게 대응한 인조에게 이러한 결과는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엄청난 정월의 추위 속에서 47일간 진행 된 공성전은 치열하였다.
후금 군은 대포까지 동원해서 남한산성을 파상적으로 공격했다.


그래도 1만 명의 방어 군이 지키던 남한산성이 15만 대군의
청에게 함락되지 않고 방어 해냈던 것은 조총병의 분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총에 이은 다른 해외 도입 무기를 소개한다.

이 것은 무기가 아니라 조총의 필수품인 화약의 원료 '염초(焰硝)'이다.

우리는 고려 때 최무선이 원나라 상인 이원에게서 화약의
제조법을 입수했고 한국 최초의 화포도 제조한 것으로만 알고 있다.[1377년]


그러나 조총에 사용하는 화약의 기초 핵심 성분인
염초는 300년 넘게 국내 생산이 되지가 않았었다.


그 긴 세월 고려나 조선의 화약은 중국이나 일본에서
수입한 염초로 제조해야 했다.

[최무선이 이원에게서 염초의 제조법을 배웠다고 쓴 기록도 있는데 이는 신뢰하기 어렵다. 300년이 넘는 염초 수입이 이를 뒷받침한다.]


염초는 폭발력이 강한 성분으로 오늘날 번개탄의
기본 성분이 되는 초석과  같은 것이다.


염초에 유황이니 숯가루니 하는 성분들을 섞어서
화포나 화승총에 쓰는 흑색 화약을 만드는 것이다.


옛 염초는 오래된 건물의 천정이나 대들보 마루 사이에 
쌓인 고은 먼지를 모아 끓이는 등의 몇 가지 공정을 거치면 생성이 된다.


일본의 각 영주들은 농민들에게 이 먼지를 공출하여
조총용 화약을 만들었다.


중국은 별로 어렵게 보이지도 않는 이 염초 제조 비법을 조선에
전해 주지 않아 조선은 전량 중국이나 일본에서 수입해서 써야했다. 그 세월이 무려 300 년이나 된다.


임진왜란 해전 때마다 일본의 선단을 격멸했던 충무공 이순신 함
대의 각종 함포[총통]들도 수입한 염초로 만든 화약을 사용했었다.


믿어 지지 않는 사실이지만 조선왕조실록에 이를 증명하는
기록들이 보인다.


앞서 인조에게 '일본에 비단을 수출하고 그 대금으로
조총을 사오자'는 상서문에 이런 구절이 뒤이어 붙어있다.


“... 그리고 염초를 사오는데 편리하기는 중국만한 데가
없으니, 이번 사은사가 가는 편에 역시 해조로 하여금 수만 근을 살 수 있는 값을 주어 사오게 하소서.“


염초가 국내 생산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또 다른 사실이 이 보다 앞서 임진왜란 중인 1593년의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다.


비변사가 조우여문이라는 왜군 포로가 염초를
만드는 기술이 있다고 보고하자 선조가 지시를 하면서


“...
이 포로가 조총과 염초의 기술을 안다고 하니 잡아 두고서 우리 군사에게 이 기술을 전수하게 하라.“ 했다.


하지만 다른 신하가 간사한 왜인은 믿을 바 없다고 처형을 건의해서
염초 제조 기술이 전수되지 않았다.


염초 제조 기술이 국내에 도입된 것은 왜란과 호란을 겪고
세월이 한참 지난 숙종 때가 다 되어서였다.


숙종 때 역관 김지남[1654-1718]이 사신 판서 민취도를 수행하여
연경에 사행(使行)갔다가 이의 제조 비법을 알아냈다.


그가 중국에서 입수한 비법대로 염초를 만들어 실험해보니
매우 성공적인 결과가 나왔다.


김지남이 이를 조정에 보고하니 재상 남구만이 숙종에게 계청(啓請;임금에게 아뢰어 청하던 일)하여
군기시(軍器寺)에게 실험해보게 하고 마침내 이를 대량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김지남은 1698[숙종 24년]년, 신전차초방[新傳煮硝方]이라는
염초 제조법을 책으로 간행하여 전국에 널리 보급하였다.


이 때부터 염초 제조법은 군대는 물론 민간에도 퍼져
포수들 까지 염초를 직접 제조해서 100% 국산 화약을 활용하게 되었다.


그의 업적을 인정한 조정은 그를 정3품 통정대부에 승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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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문의 아들 김경문도 역관(譯官)이었다. 1718년 국경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서 청나라에서
목극등이 오자 김지문 부자는 조선 측 대표 박권과 백두산에 방문하였다.

고지대 국경선 실제 조사에는 박권이나 김지문은 고령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김지문의 아들 김경문이 목극등을 수행하고 올라갔다.


그가 현명하게 대처해서 국경선이 우리 주장대로 되고
백두산에 정계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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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문은 300년 숙원 문제를 해소하여 병기의 완전한 
국내 생산을 성공시켜 자주 국방의 기본 토대를 열었다.


그의 공로는 최무선이나 문익점의 공로에 못지않은 것인데
현대에 그의 공로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유감스럽다.


한 때 적국이었던 일본으로부터 도입한 조총이 정작 대 활약을 해야 했을 전쟁은 광해군이 준비했던 후금국과의 전쟁이었는데, 광해군이 준비한 조총과 조총대는 오히려 후금을 위해서 싸우는 기구한 운명이 되어 버렸고, 청 태종이 침공한 병자호란 때도 국운을 건져내는 대승리는 아쉽게도 이루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의 조총, 또는 조총병의 운명이 그렇게
기대 밖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세계 전사에 특기되는 일본 오다 노부나가의 삼단 사격에
의한 대승과 비슷한 승리가 병자호란 때 있었다. 남한산성에 포위 된 인조를 구하기 위해서 출동했던 평안도 병력이 강원도 김화 탑골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나가시노 전투의 다른 그림. 김화 탑골 싸움을 연상해볼만한 단서를 준다.


나가시노 전투 보다 규모는 훨씬 작았지만 명군을 연파했던 철기병이 조선의 조총대에게 맥을 못 추고 대패 당한 전투였다.


김화의 탑골 전투는 평안 병마사 유림과 평안 관찰사
홍명구가 지휘했다.


전투가 개시되자 청군은 전매 특허격인 기병 돌격으로 쇄도해왔다.
산기슭에 진을 쳤던 홍명구의 조선군은 청군 철기병들의 공격에 와해되어 전멸하다시피 했고 홍 명구도 전사했다. 사르호에서 철기병에게 당했던 조선군의 참패를 닮은 전투였다.


그러나 병마사 유림은 전술적으로 철기군이 활동할 수 없는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있었다.


산의 능선을 차지했는데 앞에 잣나무 숲이 있었다.
이 지리적 위치를 이용해서 유림은 대단히 능란한 전투 지휘를 했었다.


나가시노에서의 다케다군과 같이 청 군의 철기병은 파상공격을
해왔다.


           앞편의 그림 다시 올린다. 총이 풍부했었던 노부나가 부대와 달리 조선군은 총수와 궁수가
           혼성 편성되어있다.



유림은 위의 그림에서와 같이 총수와 궁수가 혼합된 사격진을 갖추어놓고, 적을 불과 몇 십 보 앞까지 유인한 후 깃발 신호에 따라 총과 활을 일제 사격으로 발사하는 사격 지휘 방법을 사용했다.


이 일사분란하게 통제된 집중 사격에 후금 군은 수차례의
기병 돌파를 시도하다가 무더기로 시체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조총병들에게 대어가 낚였다.
임진왜란의 전투 중에도 이런 대어가 낚인 일은 없었다.


전투 도중에 유림이 내려다보니 한 청군 장수가 말을 타고
산 위 아래를 달리면서 악을 쓰며 병사들의 돌격을 독려하고 있었다.


유림은 저격병 열 명을 엄선해서 적 기병을 차단하기위해
만들어 놓은 목책을 넘어 숲 사이로 빠져나가 이 자에게 접근했다.

[이 대목에서 조선군이 나가시노 전투와 같이 마방진지(馬防 陣地)를 구축해놓은 사실이 드러나 보인다.]


사거리 내에 몰래 접근한 저격대는 침착하게 조준을 하고
유림의 사격 명령에 일제 사격을 가했다. 청 장수는 말에서 고꾸라지며 굴러 떨어져 죽었다.


전쟁이 끝나서 그의 신원이 알려 졌는데
그는 누르하치의 매부가 되는 왕족이었다


이날 교전에서 총과 활의 조합된
사격으로 청군이 입은 피해가 막대하였는데, 그날 밤 적진에 몰래 접근한 조선 정찰병이 관찰한 바 통곡 소리가 진내에 가득했다고 한다.


유림이 지휘했던 조총수들은 별도 파견된 어영청 휘하의
정예 부대였었다.


비록 앞에서 말한 비변사의 비단 판매와 조총 구입이
실행되지 않았었다해도, 그 이후 1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임금을 모시는 정예 어영청 부대는 대마도를 경유해서 수입 된 조총들을 최우선적으로 장비했을 것이다.


선조가 시작했었던 해외 병기 취득 사업이 몇십년만에 조그만 결실을
맺은 전투라고도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