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시파(時派)와 벽파(僻派)

구름위 2013. 1. 21. 15:32
728x90

수원 융릉(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증 되고 능이 됨)18세기후반, 생산의 증대와 인구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인류사회가 낡은 허물을 벗고 새로운 각질(角質)을 만들기 위한 진통이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지역에 따라 나름대로 진행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프랑스혁명으로 뒤범벅이 되었던 그 시기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도 조심스럽게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

 

이런 물결에 편승해서 1776년 3월, 한반도에서는 조선왕조 22대의 왕 정조(正祖 / 1752 ~ 1800)가 등극, 끊임없는 개혁으로 중흥의 군주가되고자 부단히 노력했지만 양반 중심의 신분사회의 두터운 벽을 허물지는 못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진보적인 시파(時派)를 국왕의 동반자로 삼아 보수적인 벽파(僻派)를 제어(制御)하고 개혁을 추진했으며, 경제적으로는 시전(市廛)이 가지고 있던 금난전권(禁亂廛權)을 대폭 제한, 난전(亂廛)의 숨통을 열어주고, 전통적인 억상(抑商)정책에 일대 수정이 가해진다.

 

규장각(奎章閣) 설치와 일성록(日省錄)의 작성, 수원성축조와 장용영(壯勇營) 편제, 박지원 박제가 등으로 대표되는 북학파, 김홍도 신윤복으로 대표되는 조선후기 화단과 이들이 남긴 풍속화, 실학자 정약용의 관계 진출, 이승훈,이벽, 김범우 등의 천주교(天主敎)입문, 명재상 채제공(蔡濟恭/1720~1799)의 중용, 등등이 정조치세 기간 24년 중(1776 ~ 1800)에 시작되었거나 있었던 일이다.

 

그 가운데 시파와 벽파, 시전 상인들의 금난전권 폐지,최초의 천주교 박해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진산사건(珍山事件 / 辛亥迫害)등의 내용을 상식적인 범위에서 다시 한번 간추려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724년 춘추 37세로 경종이 승하하고, 31세의 왕세제 연잉군(延 君) 이금(李昑)이 왕위에 올라 조선왕조 21대왕 영조가 되었다. 희빈 장씨소생이었던 경종은 후사가 없었고 병약했기 때문에 왕의 이복동생으로서 영조(숙종과숙빈 최씨 사이에 태어남)가 왕위를 잇게 된 것이다.

 

사극(史劇)의 소재로 널리 알려진 장희빈(張禧嬪) 이외에도 숙종은 많은 후궁으로부터 6남 2녀를 두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모두 일찍죽었고,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난 영조만이 다른 형제들의 명운(命運)까지 가지고 태어났는지 춘추 83세의 장수를 누렸다.

 

그가 왕세제가 되고 왕위에 오르기까지 그를 도왔던 정치세력은 노론이었고, 이를 집요하게 방해했던 것은 소론이었다. 당쟁에 휘말려 자칫 잘못했으면 임금은 고사하고 목숨까지 잃을 뻔했던 뼈저린 경험을 갖고 있던임금 영조로서는 당쟁에 진저리를 내고 즉위와 동시에 탕평책(蕩平策)을 실시하여그 폐단을 근원적으로 막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150 여 년 간의 세월 속에 깊게 뿌리내린 당쟁이 그렇게 쉽게 해소될 리는 없었다. 이때가 되면 동인계열(남인, 북인)은 당쟁에서 밀려나고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이 권력을 잡기 위해 목숨을 건 한 판승부 수를 던졌다가 결국은 노론만이 실세로서 남게 된다. 그런데 노론과 소론은 서인(西人)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갈라진 것이고, 남인과 북인은 동인에서 분파된것이다. 그렇다면 서인(西人)과 동인(東人)의 뿌리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는가?

 

조선왕조에서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이라는 붕당의 출발은 선조 8년(1575) 관리들의 인사추천 권을 쥐고 있는 이조전랑(吏曹銓郞) 문제를 두고 김효원(金孝元 / 1532 ~ 1590) 과 심의겸(沈義謙 / 1535 ~ 1587)의 사사로운 다툼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일반적인 상식이다.

 

두 사람 모두 퇴계(退溪 / 李滉 / 1501 ~ 1570)의 문인으로서 학문적인 뿌리를 같다. 그런데 김효원이 김종직계열(士林派)의 사류(士類)인데 반하여 심의겸은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 심씨의 친정 동생으로서 훈구원훈(勳舊元勳)계열(勳舊派)의사류(士類)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생긴다. 다시 말하면 김효원은 향촌에 세력기반을 둔 보통의 선비출신이고, 심의겸은 명문가에서 태어난 귀공자 출신의 선비다.

 

유학(儒學)을 정치원리로 채택했던 조선왕조에서 중종과 명종을 지나 선조(宣祖 / 1567∼1608) 년간이 되는 16세기 후반에 이르면 성리학적인 명분으로 무장된 사림(士林)이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 의정부와 6조, 삼사(三司)에고루 포진하게 되고, 이들의 새로운 관계진출로 관직에 대한 치열한 경쟁이 일어났다. 관직을 선호하는 수요에 비해서 공급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런 처지에서 사림파계열의 신진사류들은 학문적 깊이 없이 부조(父祖)의 음덕(陰德)으로 높은 관직과 많은 농장을 차지하고 있는 훈구파의 후예들을 무위도식(無爲徒食)의 도당들이라고 은근히 무시하였고, 반대로 훈구파계열의 사류들은 시골선비 주제에 어쩌다가 벼슬자리를 얻었다고 해서 스스로의 분수조차 분간할 줄 모르는 주변머리 없는 고집불통의 무리들이 신진 사류들이라 해서 역시 멸시하였다.

 

결국, 양반 관료사회가 안고 있었던 이런 모순과 잠재적 신(新)·구(舊) 세력간의 갈등은 서로간에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게 만들었고, 이들이 각각 김효원과 심의겸이라는 대리자를 앞 세워 패거리를 만들고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이 동인과 서인이라는 붕당(朋黨)의 출발이다.

 

붕당이 만들어지고, 부추기는 패거리가 뒤에서 버티고 있는 한 김효원과 심의겸은 본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적대관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두 사람의 다툼은 이미 개인 차원을 넘어 집단의 대변자 구실을 할 수밖에없었고, 여기에 집단의 이해관계가 걸리면 쌍방간 한치도 물러설 수 없는 목숨을 건 투쟁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삿대질을 하는 이런 당파가 조선왕조에서만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고 권력이 있는 곳이면 고금동서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이며, 이해관계가 어긋나면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적(敵)이 되는 것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일이다. 이런 가운데 사회는 변화되고 발전하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고, 반대로 사회를 혼란시키고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게 하는 부정적인 면도 있다.

 

문제는 조선왕조의 지배계급인 양반사회의 붕당이 그 자손에게까지 세습되어 왕조가 멸망될 때까지 반목(反目)과 질시(嫉視), 공작(工作)과 음모(陰謀)가 계속되었고, 시대가 흐를수록 그 수단과 방법이 교활(狡猾)해 졌으며, 결과적으로 왕권을 약화시키고 공리공론에 치중하게 되는가 하면, 혈연(血緣), 학연(學緣),지연(地緣)을 배경으로 담합하므로써 근대화를 지연 시키게 되었다는데 있다. 그 중요한 전개 양상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일들이 있었다.

 

선조 22년(1589)에 있었던 기축옥사(己丑獄事)로 이발(李潑/ 1544 ~ 1589) 등 천 여 명의 동인들이 화를 입었다.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 혹은 정여립의 옥사라고도 불리는 이 옥사의 주인공 정여립은 서인에서 동인으로 자리를 옮긴 자(者)며, 이 옥사 처결의 담당자는 서인의 거두로서 가사문학을 대성시킨 송강(松江) 정철(鄭澈 / 1536 ~ 1593)이었다.

 

정철의 가혹한 옥사 처리를 두고 동인의 유성룡은 서인과의 절충적 입장을, 정인홍 등은 서인배격을 주장, 결국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선다. 유성룡은 퇴계의 문인이고, 정인홍은 남명(南冥 / 曺植 / 1501 ~ 1572)의 문인이다. 이때 북인이건 남인이건 동인계열을 된 서리를 만났고 서인들은 득세 했다. 그런데 서인 정철의 고향은 창평이고, 동인의 이발은 남평, 정여립은 전주로서 모두 호남 출신들이다.

 

선조 24년(1591) 왕세자 책립을 둘러싸고 건저문제(建儲問題)가 발생, 정철을 위시한 서인들이 이번에는 큰 화를 입었다. 동인은 건저문제를 서인들에 대한 보복수단으로 이용하였고, 결국은 많은 서인들이 쫓겨나고 동인들은 세력을 만회했다.

 

왜란(1592 ~ 98) 중에도 당쟁은 계속되다가, 남인의 거두 유성룡이 실세(失勢)하고,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되자, 이들 북인들은 1599년 대사헌 자리를 둘러싸고 다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갈라선다. 대북에는 이산해와 홍여순 등이 자리하게 되고, 소북에는 유영경, 김진국, 남이공 등이 있었다. 소북은 대북에 눌려 빛을 잃고 있다가 차츰 세력을 만회하고 한때 대북과 연합했다. 대북은 세자 광해를 등에 업었고, 소북은 선조의 적실 소생 어린 영창대군을 끼고 돌았다.

 

1604년 유영경이 영의정에 오르고 소북이 권력을 독점, 세자로 있던 광해군(光海君)를 폐(廢)하고 영창대군을 옹립코자 하여 선조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이런 폐세자 문제를 두고 다시 남이공 등의 청(淸)소북과 유영경 등의 탁(濁)소북으로 갈라서고, 서인과 남인은 물론, 같은 북인 이던 대북일파도 권력에서 소외당하고 소북, 곧 탁(濁)소북 일파의 세상이 되었다.

 

탁소북의 유영경 등은 결국 영창대군 옹립에 실패했고,1608년 선조가 승하하고 세자 광해군의 즉위로 유영경 일파의 소북정권은 몰락했고, 세자 광해군에 줄을 섰던 대북 일파가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홍여순을 필두로 한 골북(骨北)과 이산해를 우두머리로 한 육북(肉北)으로 갈라선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북인들은 몰락하고 이후 정계에서 사라졌다. 권력은 당연히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서인들이 장악하게 된다. 크게 보면 정권이 동인(東人)에서 서인(西人)으로 넘어간 것이다.

 

정권을 장악한 서인들 중에서도 반정에 공이 있던사람들을 공서(功西)라 했고, 비록 서인이기는 했어도 반정에 참여치 않았던 김상헌 등을 청서(淸西)라 했다. 인조 효종 연간에는 이들 공서 일파가 정권을 독점했다.

 

1660년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顯宗 / 1660∼74)이 즉위. 두 차례의 소위 예송(禮訟) 문제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게 되는데, 1차는 서인이 승리했고 2차는 남인이 승리했는데 그 전말은 대략 이런 것이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繼妃)인 조대비(趙大妃/ 慈懿大妃)의 거상(居喪) 기간을 윤휴, 허목 등 남인측에서는 3년 상(喪)을, 송시열 등 서인측에서는 1년 상(喪)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1년이든 3년이든 하찮은 일에 불과 하지만 당시로서는 당파간 목숨을 건 일전이었고, 이런 일전에 현종은 서인측의 주장을 채택, 그들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맏아들이 부모 먼저 죽으면 부모는 그 맏아들을 위해 3년 상(喪)을 입어야 하고, 둘째 이하의 아들이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부모는 그 아들을 위해 1년간 상복(喪服)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 조선시대의 예론(禮論)이었다. 이에 따르면 효종이 비록 왕통은 이었으나 인조의 둘째 아들이기 때문에, 법통상 효종의 어머니가 되는 조대비는 자기보다 먼저 죽은 이 아들을 위해 1년간 상복(喪服/ 朞年說)을 입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 것이 서인들이 었다.

 

그러나 남인측에서는 왕실의 경우, 상례(喪禮)를 일반백성들과 같이 할 수 없고, 효종은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적통(嫡通)이기 때문에 장자의 예를 갖추어 조대비는 마땅히 3년 거상(居喪)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중국 고전 등 여러 전범(典範)들을 예시하며 서인들과 맞섰는데, 이런 양측의 주장에 대하여 현종은 경국대전의 전례(典禮)에 따른다는 구실로 조대비의 복상을 1년으로 정했지만, 그 이면에는 서인들을 재(再)신임했다는 것이 되고, 반대로 남인들은 정권도전에 실패했다는 정치적인 의미가 포함된다.

 

그러다가 1674년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 장씨가 사망하였다. 이때까지도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는 살아 있었다. 그렇다면 자의대비는 다시 며느리의 복상을 입어야 한다. 맏며느리가 먼저 죽으면 시가(媤家)의 시부모는 1년 복상(服喪)을 입어야 하고, 둘째 이하의 며느리의 경우라면 9개월 동안 복상을 입어야 한다(大功說)는 것이 당시 조선의 예론(禮論)이다. 이에 근거해서 효종 승하 때와 마찬가지로 남인측에서는1년설을 서인측에서는 9개월 설을 내세웠다.

 

그런데 같은 사안을 두고 이번에는 현종이 남인측에 손을 들어주어 서인들을 실각시켰다. 반정공신 등 공신들의 등쌀에 몸서리를 낸 현종으로서는 예송논쟁을 이용해서 이런 공신들, 즉 서인들을 몰아 내는 도구로 활용한 것이고, 계속해서 서인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남인들을 대거 기용하는 기회로 이용하게 된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남인들은 현종 말에서 숙종 초까지 정권을 잡게 되고, 다시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분열하더니 숙종 6년(1680)에는 다시 정계에서 쫓겨나게 되는데, 그것은 숙종이 파쟁(派爭)만 일삼는 이들 남인들에게 염증을 느낀 것이 첫째 원인이고, 허견 등 남인들이 다른 왕손들을 앞세워 모반(三福之變)을 꾸몄다는 것이 그 직접 이유였다.

 

다시 정계에는 서인들이 들어오고 남인들이 쫓겨나게 되는데, 이를 서인측에서는 경신환국(庚申換局)이라 했고, 반대로 쫓겨난 남인측에서는 경신출척(庚申黜陟)이라 했다.

 

다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훈신과 척신, 남인들에 대한 처리, 숭명반청과 북벌의 현실문제 등을 두고 서인의 거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 ~ 1689)과 그 제자 명재(明齋) 윤증(尹拯 / 1629 ~ 1714) 사이에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이런 사제(師弟)간의 논쟁으로 서인은 송시열을 지지하는 노론(老論)과 윤증을 지지하는 소론(少論)으로 갈라선다.

 

숙종 15년(1689) 희빈 장씨의 소생(후일 경종)의 명호(名號) 문제를 두고, 희빈 장씨와 손을 잡은 남인들은 다시 서인들을 반격, 정권장악에 성공하고 정계에 복귀했다. 이른바 기사환국이라고 부르는 이 과정에서 희빈 장씨는 왕비가 되고 인현왕후 민씨는 폐출(廢黜)되었으며, 이를 반대했던 노론의 거두 송시열은 83세의 노령으로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국문을 받기 위해 귀경 도중 정읍에서 사사(賜死) 당했으며 서인들은 정계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잠깐 1794년 다시 인현왕후는 복위되고 왕비가 되었던 희빈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었다가 훗날 사사(賜死)되었으며, 남인들은 다시 정계에서 쫓겨났다. 이를 남인들은 갑술옥사라 하고, 서인들에게는 갑술환국이 된다. 이 사건이후 입지가 좁아진 남인들은 정계에서 더 이상의 운신의 폭을 넓히지 못하고 쇠락했으며, 정국은 서인에서 갈라진 노론과 소론의 주도권 싸움으로 양상이 변질된다.

 

1720년 숙종의 뒤를 이어 희빈 장씨의 소생 경종이 왕위에 올랐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후사 없이 허약했던 경종을 두고 노론과 소론은 후계 문제를 두고 격돌하게 된다. 노론은 경종의 이복동생 연잉군을 왕세제로 세워후계문제를 매듭 지워야 된다고 주장했고, 소론은 시기상조라고 반대했다. 결국 건강과 후사에 자신이 없었던 경종은 노론의 주장대로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립하고 대리기무까지 맡겼다.

 

1721년 이렇게 되자 불안해진 소론측에서는 경종을 부추겨 그의 친정(親政)을 유도하고,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청했던 이른바 노론의 4대신(김창집, 이이명, 조태채, 이건명)을 귀양 보냈다가, 이듬해(1722)에는 다시 이들이 경종을 시역((弑逆)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처형하고 노론을 정계에서 몰아내고 소론이 완전히 정권을 장악했다.

 

소론들에 의해서 많은 노론들이 사사(賜死)되거나 유배 당했던 이 사건을 신임사화라고 부르고, 이때가 조선왕조 당쟁사의 극을 이루었던시기가 된다. 이 과정에서 노론의 지지를 받아 왕세제가 되었고 대리청정까지 맡았던 연잉군의 위치는 바람 앞에 흔들리는 등불과도 같았지만, 1724년 병약했던 경종은 결국 후사없이 승하하고 뒤를 이어 왕세제로 있던 연잉군이 뒤를 조선왕조 21대 왕 영조가 되었다.

 

당쟁의 피해를 수 없이 보았고, 하마터면 자신도 회생될 뻔했던 기억들이 너무도 생생했던 영조로서는 즉위와 동시에 당쟁의 폐해를 역설하고 탕평책(蕩平策)을 펴 나갔다. 그러나 줄 서기를 잘 못했던 소론들로서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영조 4년(1728)에는 이런 불안들이 이른바 이인좌의 난으로 증폭되고, 임금 영조는 표면적으로는 탕평책을 실시했으나 내면으로는 그를 지지해 주었던 노론을 신임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영조연간에는 노론들이 정권을 잡게 된다.

 

그러다가 사도 세자 사건이 일어나고 이를 계기로 정계는 다시 사도세자를 동정했던 시파(時派)와 사도 세자의 죽음은 자신의 비행에 대한 책임일 뿐 조금도 동정의 여지가 없다는 벽파(僻派)로 갈라진다.

 

사도세자의 아들로 태어난 정조(正祖)는 여덟 살에 세손(世孫)에 책봉되고, 열 한 살 되던 해 2월에 김시묵(金時默)의 딸을 맞아 가례를 치렀으나, 그 해 5월에는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참혹하게 죽어 가는 모습을 두눈으로 직접 보아야 했던 아픔을 겪었다. 그로부터 25세의 국왕으로 탄생되기 까지 십 수년간은 말이 왕세손이지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위기 속에서 밤낮을 지세야만 했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비명횡사(非命橫死) 하였다는 것은 그렇게 몰고 간 정치세력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들 정치세력들은 계속 권력을 장악하고 보복이라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 그 아들이 다음 대를 이어 왕이 되는 것을 결사적으로 막아야 한다. 벼랑 끝에 선 이들이 왕세손을 음해(陰害)하는 비방과 공작이 끊이질않았다.

 

그 대열에 앞장 선 것은 영조의 제 9 녀 화완옹주의와 그의 양아들 정후겸,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 그 친정 동생인 김귀주 영조의 후궁 숙의 문씨, 정조의 외 종조부가 되는 홍인한 등인데, 이들의 악랄한 음해에도 불구하고 임금 영조는 이 세손을 끔찍이도 사랑하였고, 정조 자신도 현명하게 처신하여 수많은 위기를 슬기롭게 피해 나갔다.

 

화완옹주는 일성위 정치달에게 출가했으나 일찍 남편을 여이고, 정후겸(鄭厚謙 / 1749 ~ 1776)을 양자로 맞아 영조의 신임을 얻고 궁중에 무상 출입하면서 권력을 휘둘렀고, 홍인한(洪麟漢 / 1722 ~ 1776)은 세손의 외척이었으나 세손이 비천하게 여겨 멀리하자, 이에 원한을 품고 권세를 부리던 정후겸(鄭厚謙)에게 붙어 세손의 적당이 되었다.

 

이런 세손이 1776년 영조가 승하하고 왕이 되어 훗날 정조라고 불렀다. 그 역시 탕평책을 계속 추진하였으나 시파(時派)가 득세하고 벽파가 몰락하는 순서만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