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정문부- 영웅에서 역적이 된 슬픈 운명의 장수

구름위 2013. 1. 21.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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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부, 영웅에서 반역자가 되었던 슬픈 운명의 장군.
  (1) 함경도에 침입한 가토의 군사를 물리친 정문부.

 

  2005년 10월 무렵,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의 반환 소식으로 국내가 떠들썩했던 일이 있었다. 북관대첩비는 1593년, 함경도에 침입한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를 당시 함경북도 평사인 정문부(鄭文孚)가 의병을 일으켜 몰아낸 사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이 북관대첩비는 러일 전쟁 중 함경도에 진주한 일본군이 발견하고 약탈해 야스쿠니 신사에 보관해 오다가 지난 2005년에야 국내와 일본 민간단체들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반환될 수 있었다. (일본 군국주의의 소굴인 야스쿠니 신사에 왜 배일 정서의 상징물인 북관대첩비를 보관하고 있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임진왜란을 맞아 조선이 국토의 끝인 함경도까지 몰리며 위기에 처한 때에,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외적과 매국노 일당을 섬멸하여 국토와 백성을 지켜낸 함경북도 평사 정문부. 이제부터 그의 사적을 알아보기로 하자.

 
  정문부는 본관이 해주(海州) 정씨 출신으로 아버지는 정신(鄭愼)이다. 명종 20년인 1565년 2월 19일, 한양에서 태어났다. 24세가 되던 1588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는 승정원 주서가 되었고, 곧바로 정 7품 벼슬인 정자와 정 6품 관직인 홍문관 수찬과 사간원 정언을 역임하였다. 사간원 정원 직을 마치자 정 5품 관직인 사헌부지평에까지 승진하였으며, 1591년에는 자원하여 함경도의 방위 체제를 관장하는 북도병마평사가 되었다.


  그의 관직 생활은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으나 정계에 발을 들인 지 얼마 안 되어 북평사라는 고위 직책에 오른 것을 보면, 상당히 유능하고 영특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정문부가 부임한 함경도는 당시 매우 위험한 지역이었다. 두만강 너머 만주에서는 날이 갈수록 여진족들의 발흥이 거세지고 있었다. 1583년에는 니탕개가 이끄는 여진족들이 경원과 종성, 갑산, 혜산진을 공격했고, 4년 후인 1587년에는 두만강 건너 시전 부락의 여진족들이 녹둔도에 침입해 군사들을 죽이고 주민 1백 명을 납치해 갔다.

 
  이를 보다 못한 조선은 1588년 1월, 대규모 토벌대를 파견해 시전부락을 공격하여 초토화시켰으나 나머지 여진족들의 위협은 여전히 상존하고 있었다.


  건주 여진 출신인 누르하치는 다른 부족들을 통합하고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1588년에는 그 휘하의 한 부대가 압록강 너머의 혜산진을 침입해 조선군을 습격했다. 3년 후인 1591년에는 마침내 누르하치가 압록강 일대의 통로를 장악해 명나라와 조선의 육상 교통로가 차단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요동에서 여진족을 견제하고 있던 명나라 총병 이성량은 해임되었고, 그 후임자들은 누르하치에게 휘둘려 제대로 기를 써보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날이 갈수록 누르하치의 세력은 계속 커져만 갔고, 북방의 전운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 놓였다.

   
  정문부는 이렇게 위험한 분위기 속에서 함경도 병마사로 취임한 것이었다.

     
  1592년 4월 13일, 마침내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고니시가 지휘하는 1군 18,700명의 뒤를 이어 4월 20일,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2진 20,800명이 도착했고 이들은 한양에 입성한 후, 진로를 동북 방향으로 돌려 강원도를 순식간에 석권하고 함경도로 북상해 오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출몰과 함께 이상한 유언비어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조선 조정이 이미 일본에 항복했고 풍신수길이 이덕형을 임금으로 삼아 조선을 다스린다는 것이었다. 이런 말들은 경기도와 평안도에도 나돌아 민심을 혼란스럽게 했던 것들이었다. (일부 연구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일본군에 매수된 장사꾼들이 일부러 이런 유언비어들을 퍼뜨렸다고 한다.)


  전쟁의 소식과 나도는 헛소문에 불안해하던 함경도 주민들을 위무하던 정문부는 골치 아픈 불청객을 맞이하게 된다. 일찍이 한양에 있을 때부터 백성들을 상대로 온갖 행패를 부렸던 개망나니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이 함경도로 들어왔던 것이다.

 
  특히 임해군은 어릴 적부터 성질이 사납고 난폭하여 백성들을 함부로 구타하고 남의 노비와 기생을 빼앗는 등의 횡포를 일삼았다. 부왕인 선조가 안타깝게 여겨 여러 번 그를 타일렀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주인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의 하인들도 거리의 상점에서 재물들을 약탈하고 온갖 행패를 부려 높은 원성을 샀다.

 
  임란이 발발하고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피신을 하자, 그동안 임해군이 저지르는 횡포에 고초를 겪었던 백성들이 몰려가 그의 집을 불태워 버렸다. 선조가 잠시 머문 개성에서도 선비들이 임해군의 잘못을 규탄하며 그를 처벌하라고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평양에 도착한 선조는 임해군에 순화군을 딸려 함경도로 보냈는데, 표면적인 이유는 의병을 모집해 오라는 것이었지만 내심은 격렬하게 퍼부어지는 비난 여론에서 아들들을 잠시 피신시키기 위함이었다. 아울러 임해군이 의병을 모아 약간의 공이라도 세운다면 비난 여론을 잠재울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가 된다.

 
  불행히도 두 왕자는 전란을 당했음에도 평소에 하던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왕궁에서 사치스러운 음식만 먹었던 임해군과 순화군은 고기를 먹고 싶다며 백성들이 키우는 가축을 강제로 빼앗아갔으며, 수령들에게 진귀한 물건을 바치라고 생떼를 썼다. 그러나 전쟁 중에 그것도 여의치 않자 아예 하인들에게 민가에 들어가 노략질을 해오라고 시키는 짓까지 저질렀다.

 
  이 두 왕자가 부리는 행패가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민심이 더욱 나빠졌다. 그렇지 않아도 평안도와 함경도를 비롯한 북도 사람들은 가뜩이나 중앙 정부로부터 차별과 소외를 받아 평소부터 피해 의식이 가득한 상태였다. 조선 건국 초기부터 북도 지역 주민들은 과거에 응시해도 합격되지 못했고, 간신히 합격이 되어도 벼슬조차 얻지 못할 정도로 천대받았다. 순조 임금 무렵에 평안도 사람 홍경래가 반란을 일으킨 것도 이런 지역차별 때문이었다. 임해군과 순화군은 의병을 모으기는커녕, 오히려 주민들로부터 깊은 원망만 사고 말았다.


  바로 이 때, 가토의 일본군 2만 명이 함경도로 물밀듯이 진격해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가토는 6월 1일, 함경도와 강원도의 길목인 철령을 거치면서 “우리는 새로운 임금을 세우고 너희들을 잘 살게 해주겠다. 항복하는 주민들은 결코 해치지 않으니, 안심하고 나와 우리를 맞으라.”하고 외치며 통행증을 뿌렸다. 무섭게만 여겨지던 일본군이 뜻밖에도 난폭 행위를 하지 않는 모습을 보자, 함경도 백성들은 그동안 억눌려 있던 나라와 조정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며 적군의 앞잡이로 돌변했다.

 
  남병사 이혼은 철령을 지키고 있다가 북상하는 일본군과 교전했으나 수가 너무 적어 당해낼 수 없었다. 이혼은 달아났다가 일본군과 내통한 백성들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함경감사 유영립은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도망쳤으나 역시 친일 반역자들에게 생포당해 일본군에게 넘겨졌다.

 
  1592년 7월 18일 새벽, 일본군은 마천령을 넘었다. 회령부사 이영은 4백 명의 군사로 북청에서 적을 막으려 했으나 수적에서 너무 불리하여 후퇴하고 말았다.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한극함(韓克諴)은 자기 휘하의 기병 1천 명을 이끌고 나와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해정창의 곡식 창고 안에서 꺼낸 쌀자루를 엄폐물로 세워놓고 그 뒤에 숨어 조총을 쏘아대는 일본군의 전술에 휘말려 격퇴 당했다.


  패잔병들을 이끌고 인근 봉수대에서 머물고 있던 조선군은 야음을 틈탄 일본군의 기습을 당해 전멸되었고, 사태가 불리해지자 한극함은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를 놓아둔 채 홀로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 마을로 도망쳤으나 그들에게 붙잡혀 경원(慶源)성으로 보내졌고, 즉시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명천과 종성에서는 관가의 노비들이 반란을 일으켜 관아를 점거하고 관원들을 붙잡아 적에게 내주었다. 외적의 침입을 당한 함경도는 이처럼 자중지란을 맞아 붕괴되고 있었다.

 
  자신들을 지켜줄 군대도 없어지고 주민들이 적개심을 품고 반민 행위를 일삼자 겁에 질린 임해군과 순화군은 국경의 끝인 회령까지 도망쳤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그들은 무사하지 못했다.

 
  회령의 아전 국경인은 원래 전주에 살다 범죄를 저지르고 북방으로 유배된 자였다. 그는 춥고 황량한 변방으로 자신을 내쫓은 조정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시세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일본군이 대규모로 진주해 오고 관군은 전혀 손도 써보지 못한 채 풍비박산 나고 있다. 게다가 자신이 살고 있는 회령에 두 왕자가 피난해 온 게 아닌가. 일본군에게 조선의 왕자보다 더 탐나는 먹잇감은 없으렷다. 국경인의 머릿속은 빠른 장삿속으로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국경인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던 숙부 국세필과 짜고서 회령의 군사들과 무뢰배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너희들은 내 말을 잘 들어라! 임금은 의주로 도망쳤으며, 나라 전체가 일본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이 회령과 함경도도 머지않아 일본 땅이 될 것이다. 내 듣기로 왜인들은 항복하면 해치지 않으나 반항하면 용서 없이 모두 죽인다고 하였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개, 돼지처럼 죽임을 당하겠는가? 아니면 나와 함께 일본군을 맞이하여 목숨을 건지겠는가? 다행히 이 곳 회령에는 두 왕자가 도망쳐 와 있다. 이 둘은 일본군이 우선적으로 노리는 목표물이다. 저 두 왕자와 그들이 거느리는 패거리들로 인해 그동안 너희들이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느냐? 왕자와 일행들을 일본군에 넘겨주면 목숨도 건질 수 있고, 잘하면 그들로부터 상까지 받아 부귀영화도 누릴 수 있다! 어떠냐? 나와 함께 하지 않겠느냐?”

 

  회령 뿐 아니라 함경도의 주민들은 평소에도 무거운 부역과 여진족의 약탈에 시달리며, 나라로부터도 차별 대우를 받아 불만이 팽배해 있는 상태였다. 이런 백성들의 조정에 대한 불만과 일본군에 대한 공포로 불안에 떨고 있던 심리를 예리하게 파헤친 국경인의 선동은 일파만파로 번져갔고, 순식간에 5천 명이나 되는 추종자들이 몰려들어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때 순변사 이영(李瑛)과 부사 문몽원(文夢轅)은 성의 남문(南門)에 있다가 국경인의 반란 소식을 듣고는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용맹하고 과감한 성격의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이 이영에게 “국경인이 반역하자 본부의 군사 중 절반이 따랐지만 모두 그의 심복은 아닐 것이오. 공(公)은 여기서 군관(軍官)과 병사들을 모아 경계를 엄중히 하면서 기다리시오. 나는 가서 국경인을 달래어 군사를 해산시키도록 하겠소. 만약 즉시 들어주지 않으면 곧바로 머리를 베고 여러 사람에게 깨우쳐 해산하게 할 테니 공은 여기서 그들을 불러 모아 항복을 받도록 하시오. 그러면 지금의 난동이 저절로 안정이 될 것이오.”라고 건의했지만, 겁이 많은 이영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경천과 이영이 나눈 대화가 국경인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부하들을 보내 건장한 군관들을 잡아 모두 죽였다. 사태가 이쯤 되자 유경천은 즉시 휘하의 몇 사람과 함께 서문(西門)을 열고 도망쳤다.


  국경인은 추종자들과 함께 왕자 일행이 머문 객사(客舍)를 포위하고 두 왕자와 왕자 비, 시녀와 노비 등과 왕자들을 따라온 조정 대신인 김귀영(金貴榮)과 황정욱(黃廷彧), 황혁(黃赫)과 그들의 가족들을 잡아 모두 결박하고 한 칸 방에 가두었다. 이영이 국경인을 찾아가 왕자를 풀어주라고 애걸하였으나 국경인은 그도 잡아 가두었다.


  왕자 일행을 모두 손에 넣은 국경인은 가토 기요마사에게 자신이 귀중한 인질들을 데리고 있으니 빨리 와서 데려가라는 편지를 보냈다. 가토는 회령부에 이르러 성 밖에 진을 치고 홀로 성에 들어와 왕자와 여러 신하들을 본 뒤 “이 사람들은 바로 너희 국왕의 아들과 조정의 신하들인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곤욕을 가하는가?”하고 꾸짖었다. 가토는 손수 왕자들의 결박을 풀어 주고 군중(軍中)에 두도록 하여 후하게 대접하였다. 조선의 왕자는 인질 중에서도 최고의 가치가 있으니 결코 푸대접을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왕자 일행을 넘긴 대가로 국경인은 가토로부터 판형사제북로(判刑使制北路)라는 관직을 받았고 그의 숙부인 국세필과 다른 일당들도 허울뿐인 벼슬을 얻어 의기양양했다.

 
  이렇게 해서 여진족과 마주한 함경도 북방 최전선인 회령마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여러 진(鎭)과 보(堡)의 토병(土兵)과 호수(豪首)가 모두 관리를 붙잡고 배반하며 항복하였으므로 일본군은 함경도에 들어온 지 한 달도 안 되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대부분의 성과 마을을 점령하게 된 셈이었다.


  가토는 수천 명의 군사로 길주(吉州)를 지키게 하고, 명천(明川) 이북의 8개 요새에 모두 반민(叛民)들로 수령을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가토가 안변부(安邊府)로 돌아오자 함경남도의 지역과 요새들도 반민들이 장악해 모두 그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단천 군수(端川郡守) 강찬(姜燦)은 평소 백성들을 잘 다스려 민심을 얻었으므로 그가 있는 단천(端川)에는 배신자들이 발을 붙이지 못했다.

 
  함경도를 석권한 가토는 한 때 군사를 인솔하여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 노토 부락(老土部落)의 마을까지 쳐들어갔으나, 여진족들의 거센 저항을 받고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자 경성(鏡城)으로 철수했다.


  이대로 일본군과 반민들의 손에 계속 지배될 것 만 같았던 함경도의 상황은 9월 1일, 의주로 피신해 있는 조정에서 서북보(西北堡) 만호 고경민(高敬民)이 몰래 들어와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하면서 변하게 되었다.

 

  “명나라 군사가 곧 조선을 도와 왜적들을 몰아내러 올 것이오. 헌데 조정에서는 이미 북계(北界: 함경도)를 역적의 소굴로 판단하고 있으니, 왜적을 평정하고 나서 곧바로 토벌할 것이오!”

 

  고경민의 말이 퍼지자 함경도 백성들은 서로 그 말을 주고받으며 두려워하였다. 사실 엄격히 따지면 그들이 저지른 행동은 분명한 역모였다. 일본군이야 자기들 나라로 도망쳐 버리면 그만이지만, 그들이 떠나고 나면 자신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꼼짝없이 적과 내통한 역적들로 몰려 죽임을 당하고 말 것이 자명했다.

 
  한편 가토가 지휘하는 일본군 쪽에서도 차츰 사정이 악화되고 있었다. 계절이 9월로 접어들면서 추위가 심해졌고, 식량 보급도 제대로 되지 않아 많은 병사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처지가 이렇게 되자 맨 처음 보여주었던 위민 정책을 더 이상 펴나갈 필요가 없었다.

 
  일본군 병사들은 여러 마을들을 돌면서 추위를 막을 의복과 배고픔을 달랠 식량을 징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춥고 배고프기는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숨겨놓은 옷과 곡식을 내놓으려 하지 않자, 일본군은 잔인한 본성을 드러냈다. 곳곳에서 많은 백성들이 창칼에 찔려 죽고 집들이 불태워졌다. 여기에 일본군을 믿고 거드름을 피우며 거들먹거리던 국경인 일당들의 행패가 더해지면서, 그들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시각은 험악해져 갔다.

  
  이 무렵 정문부는 자신의 제자인 교생 지달원(池達源)의 집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지달원의 집은 경성의 가장 외진 해변 가에 있어 일본군의 눈을 피하기 쉬웠다.

 
  한동안 몸을 피한 채, 민심의 동향을 살펴보던 정문부는 일본군에 대한 주민들의 심기가 적대적으로 변해가고, 조정에서 명군을 끌어들여 일대 반격을 하려 한다는 조짐을 파악하자 지금이 바로 일어설 때라고 판단했다. 그는 제자 지달원과 최배천(崔配天) 등과 함께 은밀히 뜻있는 선비들과 무사들을 규합했다. 수백 명의 함경도 지방 군사들과 선비, 무사들이 모였고 그들은 정문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함경도에서 일본군을 남김없이 몰아낼 것을 다짐했다.

 
  정문부가 이끄는 의병대는 경성 사람인 전 만호 강문우(姜文佑)를 선봉에 내세우고 즉시 부성(府城)에 이르렀다.


  부성은 국경인의 숙부인 국세필(鞠世弼)이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예백(禮伯)이라고 일컬으며 병사(兵使)의 인(印)을 가지고 군사 업무를 주관하고 있었는데, 의병들이 성을 에워싸자 급히 성문을 닫고 성에 올라 저항하였다. 이에 강문우 등이 “관북의 여러 사람들이 우리를 따르고 있다. 항복하면 살려두겠지만, 저항하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라고 위협하자 국세필은 대적하지 못할 것을 알고는 성문을 열어 맞아들이고 병사의 인을 반납하였다.


  정문부는 “대소의 병민(兵民)이 예전에 범한 죄는 문책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고 국세필에게 그대로 예전처럼 군사를 거느리게 하였다.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일단 국세필 일당들과 섣불리 접전을 벌였다가 성을 빨리 얻지 못하고, 병사들의 피해가 커지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 일단 그들을 안심시켜 놓은 뒤에, 부성을 근거지로 삼아 의병들을 더 모으고 그렇게 해서 세력을 탄탄히 다진 다음 국세필 일당들을 제거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부성을 제압한 정문부는 각 성읍에 격문을 퍼뜨렸다. 그것을 본 종성(鍾城)의 무사 김사주(金嗣朱)와 경성인 오박(吳璞) 등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달려왔다. 종성 부사 정현룡과 경원 부사 오응태, 경흥 부사 나정언과 고령 첨사 유경천, 군관 오대남(吳大男) 등은 산 속에 숨어 대세를 관망하고 있던 중 정문부가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는 와서 모였다.


  정문부는 자신의 지위인 북평사가 부사인 정현룡보다 낮은 관계로 그에게 의병 대장 자리를 양보하려 하였으나, 정현룡은 사양하였고 다른 사람들도 ‘평사의 벼슬이 낮다고 해도 많은 사람이 마음속으로 따르고 있으니, 의병 대장이라고 칭하여 통솔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므로 정문부가 의병의 총수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함경도 의병들의 수는 3천 명으로 늘어났다. 의병 중에서 날래고 용맹감한 기병들을 뽑아 선봉대를 조직했고 이를 유경천이 거느렸다.


  길주(吉州)에 주둔한 일본군이 이 소식을 듣고 1백 명의 군사를 보내 성의 서쪽에 와서 정황을 알아보게 했는데, 강문우가 선봉 기병대를 이끌고 성문을 열고 나가 공격하여 수십 명을 참살하자 남은 왜병들은 달아났다.

 
  일본군 일단의 병력을 격퇴시키자 의병들은 자신감을 얻었고, 부성의 백성들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각 지휘관들은 군사를 출동시킬 날짜를 가려 출발하려 했으나 그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일본군과 내통했던 국세필 등의 반역자들을 처단하는 일이었다.

 
  정문부는 국세필(鞠世弼)과 그 일당 13명을 잡아 참수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애당초 왜적과 내통해 역모를 하는데 앞장선 자들은 이들뿐이며 이 밖에는 참여한 자가 없으니 성 안 사람들은 안심하라.”하고 말하니,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였다.

 
  이러한 관대한 조치에 의문을 느낄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국세필이 조카인 국경인과 왕자 일행을 붙잡아 일본군에게 넘겼을 때, 그 일을 도운 일당들은 수천 명에 달했는데, 왜 겨우 14명만을 처벌하느냐고. 하지만 생각해 보라. 그 많은 인원을 전부 처벌하려 했다가는 심한 반발을 사고 폭동이 일어날 우려도 있었다. 최소한의 처벌로 불안한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정문부의 이러한 조치는 현명한 일이라고 봐야 한다.

 
  국세필 일당을 처단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국경인 차례였다. 정문부는 육진에 격문을 보내어 “수천의 의병들이 창의의 깃발을 들고 일어섰으니, 이제 곧 함경도는 회복될 것이며 왜적도 물러갈 것이다. 누구든 의기 있는 자는 역적 국경인의 목을 쳐 죄인의 굴레를 벗고, 나라에 공을 세우라!”라고 외쳤다.

 
  이 격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글을 읽은 회령의 유생 신세준(申世俊)은 동료 유생들과 군사들을 모아 국경인이 사는 집을 포위하고 불을 질렀다. 갑작스러운 화재에 당황하여 집 밖으로 뛰쳐나오는 국경인을 신세준과 다른 유생들이 참살하였고, 이로써 함경도 제일의 반역자는 숙부와 함께 더러운 이름을 남기고 사라졌다.


  국경인의 사망으로 많은 성과 요새들을 의병들이 접수했으며 다른 반역자들은 백성들에 의해 살해되거나 달아났다. 하지만 아직 함경도에서 일본군이 완전히 물러간 것은 아니었다.

 
  정문부는 의병을 둘러 나누어 한 쪽은 고참역(古站驛)으로, 다른 한 쪽은 명천(明川)으로 보내 일본군과 내통했던 정말수(鄭末守)를 죽이고 성을 되찾게 하였다. 그러자 부성에 군사를 보냈다 패한 길주의 일본군이 다시 성 밖으로 나왔고, 그 중 하나가 명천의 해창(海倉)으로 향했다.


  일본군은 길주성의 동쪽에 있는 장덕산(長德山) 밑에 이르렀으나 이미 길주의 남쪽 마을에 함경도 의병들이 매복해 있었다. 의병들이 먼저 산 위를 차지하자 일본군은 조총을 쏘아대며 서둘러 산을 오르려 했다. 이 때 유경천(柳擎天)이 기병대를 이끌고 산 아래로 내려가 일본군을 무찔렀다. 그와 동시에 고경민(高敬民)이 미리 군사를 서쪽 산 밑에 잠복시켰다가 대포를 쏘며 병사들을 돌진시키자 일본군은 포위될 것을 우려하여 황급히 퇴각해 계곡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의병들이 추격하였다. 그들은 계곡을 겹겹이 에워싸고 일본군이 달아나지 못하게 했다.


  그날 밤, 폭설이 내리고 추위가 심해 일본군 대부분이 동상에 걸리고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물론 의병들도 추운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은 오랫동안 함경도에서 살아오면서 추위에 익숙해진 형편이었는데 반해, 일본군 대부분은 따뜻한 남쪽 지방 출신이어서 추위에 더욱 약했다.

 
  아침이 되자 의병들은 포위망을 열고 계곡 안으로 들어가 급습을 감행했다. 이미 일본군 중 적지 않은 병사들이 손발이 부르트고 쓰러져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 전투에서 6백 명의 일본군이 죽임을 당했고,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은 길주성으로 들어가 성문을 굳게 닫고 감히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정문부가 의병 본대를 이끌고 성을 포위하자 일본군은 성벽 위에 올라 조총을 쏘아댔다. 섣불리 공격했다가는 아군의 피해도 커질 것 같아 정문부는 일단 물러나고, 그들을 더욱 추위에 떨게 만들어 전투력을 약화시키려는 속셈으로 성의 땔감 공급로(供給路)를 차단했다.


  이 때, 일본군 한 부대가 마천령(摩天嶺) 아래 영동관 책성(嶺東館柵城)에 주둔하면서 임명촌(臨溟村)을 불태우고 노략질 하자 정문부는 의병들을 이끌고 공격하였다. 양측 군대는 쌍포(雙捕)에서 전투하였는데 수와 기세에서 밀린 일본군이 패주하자 의병들이 추격하면서 적병 60명을 참살했다. 패배한 일본군은 책성으로 퇴각해 성을 굳게 지킨 채 나오지 않았고, 정문부는 군사를 둘로 나누어 포위하였다.

 
  그렇게 일본군과 싸우고 있을 무렵인 11월 1일, 의주로 피난 가 있는 조정에서 사신이 당도했다. 적의 수중에 넘어갔던 함경도의 대부분을 회복하고 국경인 등의 반역자들을 토벌한 공로로 정문부를 통정대부로 승진시키고 나머지 사람들도 차등 있게 관직으로 포상을 내리는 조치였다.

 
  해가 바뀐 1593년 1월 1일, 마침내 길주에서 농성하던 일본군이 성을 비워놓고 후퇴했다. 의병들이 포위가 계속되자 성 안의 일본군은 불을 피울 장작과 양식을 공급받을 수 없어 민가를 뜯어서 땔나무로 쓰는 등 그 형세가 점점 궁색해지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철수한 것이다.

 
  길주성의 일본군은 조선군의 추격이 두려워 밤중에 도주하였으나 그조차 여의치 않아 조선 의병들이 쫓아오자 정신없이 패주하여 황급히 고개를 넘어 남쪽으로 달아났다. 도망가면서 일본군은 단천과 이성(利城) 등 주변 고을들을 모두 불태웠고, 약탈하였다. 이로써 1592년 12월, 길주성을 접수한 정문부는 북으로 육진(六鎭)을 순행하면서 반역자들을 찾아내 처형하고 여진족과 교섭하여 그들이 침입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모든 요새를 수복하여 장교들을 파견해 굳게 지키게 한 후, 해가 바뀐 1593년 1월 13일 길주로 돌아왔다.

   
  한편 안변에 머무르던 가토 기요마사는 이 소식을 접하자 군사들을 이끌고 북상하면서 “내가 다시 함경도를 평정하겠다.”라고 호언장담했다.


  가토가 이끄는 일본군 주력 부대가 전진해 오자, 단천 군수(端川郡守) 강찬(姜燦)은 정문부에게 군사를 보내어 함께 싸우자고 요청했다. 정문부는 그의 전언을 듣고 정예 기병 2백 명을 4대로 나누어, 1대장은 훈련 정(訓鍊正) 구황(具滉), 2대장은 훈련 첨정(訓鍊僉正) 박은주(朴銀柱), 3대장은 훈련 판관(川鍊判官) 정원침(鄭元忱), 4대장은 훈련 판관 고경민(高敬民)이 각기 50명씩을 거느리고 1593년 1월 20일에 산길로 단천에 도착했다.


  이튿날 아침 4대의 군사를 단천성 밖 20리쯤 되는 지점에 숨기고 단천 군사 30명으로 하여금 성 밖 4리 가량 되는 지점까지 진출하여 도전케 하니 성안에 머물던 적들은 2백여 명이 일시에 성을 나와 곧바로 진격해왔다.


  단천 군사들이 패하는 체하면서 되돌아 달아날 즈음 피로한 말을 탄 두 병졸이 적에게 살해되자 적은 더욱 기세등등해 추격해 왔다. 일본군이 조선 의병들이 잠복한 지점까지 이르렀을 때. 4대의 복병들이 일시에 쏟아져 나와 정면을 막고 후방을 차단하면서 화살을 비 오듯이 퍼붓자, 왜적은 갑자기 튀어 나온 기병들을 만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조총을 마구 쏘아 댔으나 당황한 중에 쏘는 것이라 모두 빗나갔다. 사기가 떨어진 일본군은 도망가기에 겨를이 없어 감히 조선 의병에게 덤비지 못했다.

 
  조선군이 추격하여 성 밑에까지 이르자 일본군은 거의 사살되고 겨우 30여 명이 남았는데 그것도 태반은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이 때 죽인 적의 수효는 적어도 백여 명은 되며, 싸우면서 간 거리는 20여 리나 되었다.


  그러나 아직 가토가 이끄는 일본군 본대는 도착하지 않았다.

 
  가토의 본대에 앞서 순찰 중이던 일본군 척후대를 유경천이 만나 수십 명을 참살하자 가토가 대병력을 이끌고 추격해 왔으므로 유경천은 급히 후퇴했다. 소수의 기병으로 족히 수천이 넘는 대군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가토가 지휘하는 일본군 본대가 마천령을 넘어오자 정문부는 3천의 의병들을 거느리고 영동책(嶺東柵) 외곽에서 그를 맞아 격전을 벌였다. 세 번의 치열한 교전 끝에 수적에서 불리한 의병들이 일단 경성으로 후퇴하여 농성전의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일본군 쪽에서도 피해가 만만치 않았고, 무엇보다 혹독한 추위와 보급의 어려움으로 인해 더 이상 전투를 계속한다는 것이 무리임을 알고 밤에 고개를 넘어 남쪽으로 철수했다. 정문부가 이 소식을 듣고 즉시 빠른 경기병 부대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함흥에 이르렀지만 가토가 이미 안변(安邊)으로 들어가 버려 잡을 수 없었다.

 
  안변성에 도착한 가토는 의병들의 공격보다 더 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군량과 보급 물자들이 다 바닥이 났던 것이다. 남쪽의 후방에서는 의병들의 연이은 봉기로 인해 보급로가 차단당했고, 이로 인해 일본군은 극심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겨울을 보내야 했다. 결국 1593년 2월 1일, 가토는 안변에서 모든 군대를 이끌고 철수하여 한양으로 향했다.

 
  이로써 함경도는 완전히 평정되었다. 이것이 약 8개월에 걸친 “북관대첩”의 진상이었다.

 
  함경도에서 가토가 물러가고 성읍이 회복되었지만, 정작 그러한 공을 세운 정문부는 그에 걸맞는 대접을 받지 못했다. 정문부의 공을 시기하던 순찰사(巡察使) 윤탁연(尹卓然)이 조정을 상대로 로비를 벌여 정문부를 모함했던 것이다.

  
  일의 경위는 처음, 정문부가 의병을 일으켰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문부는 의병 대장으로 추대되고 나서 윤탁연에게 의병에 동참해 달라는 서신을 보내었는데, 윤탁연은 자기보다 낮은 직급에 있던 정문부가 졸지에 의병 대장이 되어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듯이 행동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그의 지시를 전혀 따르지 않았다.

 
  윤탁연은 정문부가 다른 장수들과 함께 의병 활동을 벌이는 동안에도 전혀 참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문부가 세운 승리와 전공의 내용을 모두 사실과 반대로 조정에 보고하였으며, 정문부의 부하가 일본군의 수급을 가지고 의주에 있는 행재소에 가려 관남(關南)을 지날 때면 모두 빼앗아 자기 군사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정문부의 행동이 불충하다고 조정에 아뢰었다.


  이 말을 들은 정문부가 군사를 해산시켜 조정의 의심을 덜려 하였으나 병사들은 모두 흩어지지 않고 그의 곁에 있었으며, 그 중 일부가 사잇길로 달려가서 의주의 행재소에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의심을 풀고 두 사람을 무마시켰다.


  그래도 윤탁연은 정문부에 대한 미움을 풀지 않았다. 정문부가 퇴각하던 일본군을 추격하여 함흥에 이르렀을 때, 윤탁연은 “평사(評事: 정문부)가 적을 놓아 내보낸 죄를 지금 당장 추궁해야겠으니, 속히 잡아오라.”는 명령을 휘하 군사들에게 내렸다.

 
  참으로 황당한 지시였다. 정문부는 적이 서둘러 퇴각하는 바람에 미처 잡지 못한 것이었지, 일부러 놓아 보낸 것이 아니었다.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을 저렇게까지 왜곡하려 하다니. 인간의 심사가 뒤틀리면 어디까지 삐뚤어질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화가 난 정문부는 그 지시에 대응하여 “애초에 순찰사(巡察使)가 왜적이 함경도에 들어오도록 가만히 있었기 때문에 의병장(義兵將)도 적을 놓아 내보낸 것이니, 내가 체포될만한 이유가 없다.”라고 반박하였다.

 
  윤탁연의 계속되는 모함에 행재소에서 사신을 보내 진상을 조사하게 하자, 윤탁연은 사신에게 푸짐한 뇌물을 주어 무마시켰다. 그리고는 좀 더 교활한 수를 썼다. 평소와는 정 반대로 함경도 남부 지방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곡식을 보내 궁핍한 생활을 구제해 주자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모두 윤탁연을 칭송하였다. 또, 추위에 떨고 있는 병사와 백성들에게 두툼한 옷을 나눠주자, 그들 모두가 윤탁연을 옹호하고 정문부의 공은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이런 얄팍한 술책에 지각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분개하며 탄식하였다. (소설 상록수에 보면 부패한 마을 유지가 읍장 선거를 치를 때, 굶주리던 동네 사람들에게 썩은 돼지고기를 돌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와 유사한 모습이다.)


  마침내 조정에서는 북관대첩에 대한 포상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전공을 모두 정현룡의 몫으로 돌려 그를 함경도 병사(兵使)에 제수하고, 정문부는 고작 반역자를 참살한 공만을 인정하여 길주 부사(吉州府使)로 임명하였다. 6개월 동안, 강대한 일본군과 목숨을 걸고 싸웠던 주역은 누가 뭐래도 정문부였고 정현룡은 보조적인 역할에 그쳤다. 그런데 주객이 전도되어 정현룡은 고관직에 오르고 정문부는 그보다 훨씬 낮은 벼슬을 받은 것이다. 공로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대접이었다. 그래도 직접적으로 세운 공이 전혀 없는 윤탁연에게 관직이나 승진 지시를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조정이 아주 편파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함경도 사람들은 정문부가 이룩한 공덕을 거론하며 그가 병사(兵使)가 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정문부는 평소 강직한 성품에 조정의 고관들과 교제가 적어 자신을 편들어줄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관직 문제 때문에 불필요한 충돌과 갈등이 유발되는 것을 원치 않아 그냥 참고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