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이괄의 난에 가담했던 항왜들의 이야기...

구름위 2013. 1. 21.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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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무렵, 조선에 투항한 일본군 병사들을 항왜(降倭)라고 부른다. 이 항왜들이 조선사에 최후로 두각을 나타낸 때는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방향이었다. 1624년 1월 22일, 반정공신임에도 불구하고 논공행상에서 불리한 대접을 받았고, 급기야 역모의 누명을 쓰게 되자 더 이상 가만히 있다가는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게 될 것을 두려워 한 이괄(李适)이 일으킨 반란, 소위 말하는 이괄의 난에 항왜들이 대거 참가한 것이다.

 

  항왜들이 무슨 조선 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거창한 야심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이괄은 2등 공신이 된 후, 부원수의 직책을 받고 평양에 부임하여 후금의 침략에 맞서 싸울 군사를 훈련시키는 일을 맡았는데, 마침 북방에 항왜들 중 상당수가 거주하면서 조선군에게 창검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북방의 주력 군대 1만 명을 지휘하게 된 이괄에게 자연히 항왜들도 편입되어 지휘를 받았고,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그의 군대에 따라 반란에 가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괄의 반란에는 한명련(韓明璉)도 함께 했는데, 일설에 의하면 한명련은 처음에는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 없었는데, 역모의 누명을 쓰고 금부도사에게 잡혀가던 도중, 이괄이 그 사실을 입수하고 항왜들을 보내 금부도사를 베어 죽이고 한명련을 구출하여 이괄의 진지에 데려왔고, 이괄이 그를 설득하여 반란에 가담하게 했다고 한다.

 

  이괄의 반란군은 황주(黃州)에서 정충신과 남이흥이 이끄는 관군을 격파했는데, 이 전투에서도 항왜군이 큰 역할을 했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항왜군들이 칼을 휘두르며 돌진하자 관군이 이를 보고 있다 겁을 먹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는 바람에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관군을 패퇴시킨 반란군은 봉산으로 진군하여 지금의 예성강 상류인 마탄(馬灘)에서 관군을 또 무찔렀다. 거침없이 남하하는 반란군의 기세에 눌린 조정에서는 동래의 왜관에 사신을 보내 일본에 원병을 요청해 오자는 비상식적인 논의까지 나왔다. 이괄의 반란군이 항왜를 선봉으로 삼아 승세를 타고 저돌적으로 쳐들어오니, 교련시키지 못한 군졸로서는 저항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왜관에 보내질 사신 역의 이경직이 “왜관에 원병 요청을 알리더라도 일본 본토에까지 소식이 도달하려면 시간이 걸리고, 또 급히 원병이 온다고 해도 그 수가 많으면 일이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습니다.”라며 신중론을 내세웠고, 영의정인 이원익도 일본인들의 속셈은 급변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며, 혹시 우리가 도움을 청함에 따라 군사를 많이 보내온다면 뜻밖의 환란을 당할지도 모르니 보내지 말자고 강력히 건의함에 따라 일본에 원병을 보내려는 요청은 무산되었다. 이처럼 항왜들을 앞세운 이괄의 반란군은 조정에서 일본에 원병을 청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을 정도로 막강한 위세를 떨쳤다.

 

  결국 왕실과 조정 대신들이 일단 한양을 떠나 남쪽으로 피난을 가고, 그 틈에 각지에서 정부군을 모아 반란군을 제압하자는 논의가 유력하게 거론되어 인조는 대신들을 거느리고 공주로 피난을 가기에 이르렀다.

 

  반란을 일으킨 지 약 3주일 만인 2월 11일, 왕실과 조정 대신들이 사라진 텅 빈 한양에 이괄의 반란군이 입성했다. 이괄은 선조의 열 번째 아들인 흥안군(興安君)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고, 과거 시험을 치러 선비들을 대거 등용하는 등 새로운 국가 기구의 정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이괄의 반란군은 오래 가지 못했다. 도원수 장만과 안주목사 정충신이 거느린 관군은 다시 전열을 수습하여 무악재에 진을 치고 도성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들어갔다.

 

  관군이 무악재에 진을 쳤다는 사실을 안 이괄과 한명련은 “관군은 오합지졸에 불과하며 일부 군사와 항왜군을 이끌고 창의문에서 삥 둘러 나가 도원수 장만을 사로잡으면 관군이 전의를 상실하여 단번에 이길 수 있다. 승리하고 나서 밥을 지어 군사들을 먹이겠다,”라고 호언장담하며 도성문을 열고 나와 출정했다. 반란군은 이괄과 한명련 두 사람이 각기 이끌었고 군대는 둘로 나누어져 한쪽은 산을 포위하고 한쪽은 산을 오르게 했다. 이때, 반란군과 관군의 전투를 구경하려 나온 백성들이 곡성(曲城)에서 남산까지 성채를 가득 메웠다고 한다.

 

  우선 한명련이 항왜군을 인솔하는 선봉이 되어 무악재에 진을 친 관군 진영에 돌격하였고, 이괄은 중군(中軍)에서 전투를 총괄하였다. 때마침, 동쪽에서 심한 바람이 일어 무악재에 있는 관군에게 불어닥쳤다. 반란군은 바람을 타고 급하게 공격하여 관군을 상대로 조총과 화살을 소나기처럼 퍼부었다. 관군은 수세에 몰렸으나 산꼭대기에 있는 터라, 달리 도망칠 곳도 없고 도망을 친다고 해도 산 아래로 내려갔다가는 꼼짝없이 반란군에게 죽을 터라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끝까지 싸웠다.

 

  그러나 반란군의 기세도 만만치 않아서 관군의 장수인 김경운(金慶雲)과 이희건(李希建)은 앞에 나서서 반란군과 싸우다 그 중 김경운이 조총에 맞아 전사했다. 장수가 죽어 관군이 위기에 처해 있을 무렵,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변해 거센 서북풍이 반란군의 머리 위로 불어 닥쳤다. 설상가상으로 자욱한 모래와 먼지가 반란군들의 눈과 귀와 코를 덮치는 바람에 반란군 병사들은 제대로 앞을 보지 못하고 숨도 쉬지 못하는 판국이 되었다.

 

  이 모습을 본 관군 병사들은 사기가 치솟아 반란군을 산 아래로 밀어 붙였고, 반란군의 장수 중 한 명인 이양(李壤)이 관군의 총탄에 맞고 전사하고 항왜군을 지휘하던 한명련도 화살에 맞아 물러섰다. 불리해지는 전황을 본 이괄이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서려고 하는데, 관군 장수인 남이흥이 이를 보고는 휘하 병사들로 하여금 “이괄이 패했다!”라고 큰 소리로 외치게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반란군 병사들은 크게 놀라 급히 도망치느라 서로 밟고 미는 통에 많은 병사가 골짜기 아래로 떨어져 죽거나 다쳤다. 관군이 기세를 타고 함성을 지르며 추격하자 반란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마포나 서강 쪽으로 정신없이 패주했다. 이괄이 칼을 뽑아 도망치지 못하도록 말리려 했지만 이미 기운 전세를 혼자의 힘만으로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괄은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도성으로 들어가 농성전을 준비하려 했지만, 전황을 보고 있던 백성들이 돈의문(敦義門)과 서소문의 두 문을 닫고 막아버렸다. 이괄과 한명련은 수백 명의 패잔병만 거느리고 수구문(水口門)을 급히 빠져나와 경기도 이천(利川)의 묵방리(墨坊里)에 도착했는데,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그의 부하 기익헌(益獻) 등이 이괄과 한명련을 급습해 죽여 목을 잘라서 도원수 장만이 있는 원수부에 가서 바쳤다.

 

  이렇게 해서 이괄의 난은 일단락되었으나, 이괄을 따라 반란에 참가했던 항왜들은 반역자로 간주되어 큰 타격을 입었다. 고효내(高孝乃)라는 이름을 가진 항왜는 심문을 받다 처형되었고, 사쇄문(沙洒文)이라는 항왜는 경상도에서 참수되어 성벽에 목이 걸렸다. 서아지(徐牙之)라는 항왜는 이괄의 반란군에 가담했다가 관군에 소속된 동료였던 항왜 김충선에게 살해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처벌은 반란군에 포함되었던 항왜들이 후금과 대치하고 있는 북쪽 변방으로 보내졌다는 것이다.

 

 

  <인조실록> 인조 2년(1624년) 3월 20일 기사

  <경상 감사 이민구가 항왜로서 적을 따른 자를 변방에 옮길 것을 건의하다.

 

  이민구가 아뢰기를,

  “항왜(降倭)로서 적을 따른 자가 가장 심하게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우리 겨레가 아니므로 마음이 반드시 다를 것이고 그 무리가 매우 많으니, 가을 방수(防戍) 때가 되기 전에 조정에서 용서하는 뜻으로 타이르고 변방에 나누어 옮기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춥고 긴 겨울이 지배하는 북방으로 강제로 보내진 항왜들은 그곳에서 힘든 국경 경비를 맡는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그 이후 항왜들의 활약상은 더 이상 사료에 전해지지 않는다.

 

  한 때, 출중한 백병전 솜씨와 조총술로 조선군 병사들에게 경외의 대상이 되었던 항왜들은 이렇게 잘못된 역사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지고 사라져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