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광교산 전투와 금화 전투, 병자호란에서 조선군이 거둔 승리

구름위 2013. 1. 21.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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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1637년 1월 5일, 전라병사 김준룡(金俊龍)은 약 2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경기도 용인과 수원 사이에 있는 광교산(光敎山)에 도착했다. 김준룡은 광교산에 진을 치고 산과 골짜기의 곳곳에 복병을 설치했으며, 정찰병을 여러 군데에 보내 청군의 동태를 살피게 했다. 수천 명의 청군이 광교산으로 진군하는 것을 정찰병이 발견하고 알리자, 김준룡은 전군에게 명을 내려 제 1선에는 포수를, 제 2선과 3선에는 각각 사수와 살수를 배치하도록 했다.

 

  이윽고 산기슭에 수천 명의 청군이 당도했다. 광교산으로 진군한 청군을 지휘하던 장수는 청 태종 홍타이지의 사위인 양구리(楊古利)였다. 그는 청 태종으로부터 초품공(超品公)이라는 직위를 받았으며, 6천 명의 기병을 휘하 병력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청군은 산에 진을 친 조선군을 보고는 단숨에 짓밟을 기세로 말을 몰아 올라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김준룡은 북을 울리고 기를 흔들게 하여 1선의 포수들에게 사격을 명령하였다. 포수들이 일제히 조총을 쏘는 것과 동시에 사수들이 활을 쏘아대자 청군은 당황했다. 여태까지 그들이 상대해온 조선군은 자기들이 돌격을 하면 지레 알아서 겁을 먹고 도망을 가던데, 이 군대들은 사뭇 달랐다. 조선군의 총탄과 화살 세례가 퍼부어지자, 말들이 쓰러지고 기수들이 말에서 떨어졌다. 청군이 돌격을 계속 하지 못하고 주춤거리자, 이 틈을 타 제 3선의 살수들이 앞으로 나와서 청군을 향해 창과 칼을 휘두르며 닥치는 대로 죽였다. 조선군의 맹렬한 공세에 놀란 청군은 더 이상의 전투를 포기하고 산 아래로 퇴각했다. <(인조실록), (연려실기술)>

 

  조선군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김준룡은 아군들의 전열을 재정비하고 진형을 굳게 갖추라고 엄중히 명을 내렸다. 아직 청군의 주력 부대는 손상을 입지 않았고, 조선군이 승리에 도취되어 방비를 허술히 하다가 청군이 기습을 해올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날인 1월 6일, 청군의 공격은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총사령관인 양구리 본인이 직접 남은 병력을 모두 이끌고 공격해왔다. 산의 곳곳에서 조선군과 청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가 한창 전개될 무렵, 조선군의 동남부 진영이 수적으로 우세한 청군 기병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 이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청군을 통솔하던 양구리가 매복해 있던 조선군 포수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 것이다. 갑작스럽게 통솔자를 잃은 청군은 당황하여 물러났고, 미처 퇴각하지 못한 청군 병사들은 조선군의 손에 의해 남김없이 죽임을 당했다.

 

  이틀간에 걸쳐 진행된 광교산 전투는 조선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청군의 총지휘관이자 청 태종의 사위인 양구리를 비롯하여 약 2명의 청군 장수가 전사했으며, 수천 명이 넘는 청군 병사들이 죽었다. 훗날 영의정 체제공은 1794년, 광교산에 기념비를 세워 김준룡의 공적을 찬양했다.

 

  광교산 전투로부터 22일 후인 1월 28일에는 금화(金化)에서 다시 조선군과 청군 간에 두 번에 걸쳐 큰 전투가 벌어진다.

 

  근왕병을 이끌고 오던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洪命耉)는 포수 3천 명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에서 청군에 포위당하고 있는 인조를 구원하러 오고 있었다. 평안병사 유림(柳琳)은 2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그와 함께 오고 있었는데, 홍명구와 전술에서 의견이 달라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1월 26일, 홍명구는 금화(金化)에 이르러 그곳에서 약탈을 벌이던 수백여 명의 청군을 격파하고 포로로 잡힌 조선인 백성들을 구출해냈다. 홍명구의 부대와 싸운 청군 패잔병들은 그들의 본대로 달려가 조선군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다음날인 1월 27일, 1만 명의 청군 기병이 금화의 외곽에 도착했다. 청군의 본대를 본 홍명구와 유림은 급히 회의를 벌였으나, 두 사람은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각자 부대를 나누어 진을 쳤다. 홍명구는 평지에 진을 쳐서 적과 싸울 것을 주장한데 반해, 유림은 기병이 대부분인 청군을 상대하는 데는 평지보다 산이 더 유리하다고 반박했던 것이다. 홍명구는 목책을 설치하고 포수와 사수와 살수를 순서대로 배치하여 적을 맞을 준비를 했다.

 

  그것을 본 청군은 우선 평지에 진을 친 홍명구 부대를 먼저 공격해 쳐 없애고 다음에 산에 진을 친 유림 부대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청군은 대포를 동원하여 조선군의 목책을 부수고 병사들을 돌격시켰다. 홍명구는 삼수병 체제의 기본적인 전술대로 포수와 사수의 원거리 사격을 퍼붓고 살수들을 내보내 청군의 초반 공세를 막아냈다. 순식간에 청군은 두 명의 장수를 잃었고 수천 명의 병사들이 전사했다. 서전에 불리해진 청군은 별동대를 산의 뒤편으로 보내 홍명구 부대의 후방을 공격토록 했다. 별동대는 말에서 내려 보병이 되어 털옷으로 몸을 감싸고 한꺼번에 홍명구 부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조선군은 전력을 다해 저항하였으나,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청군의 기세를 끝내 막지 못하고 무너졌다. 홍명구는 급히 연락병을 보내 유림을 불렀지만 유림은 불리한 정황이니 가보아야 소용없다고 판단하여 가지 않았다. 구원병을 받을 수 없게 되자, 홍명구는 최후를 실감했다. 그는 병부(兵符)와 인감(印鑑)을 가져다 아전에게 넘겨주고 “나는 여기서 죽어야 마땅하다!”하고 외치며 손수 활을 당겨 청군을 쏴 죽이다, 청군이 쏜 화살을 세 대 맞자 화살을 뽑고 칼을 들어 청군과 싸우다 끝내 전사하고 말았다.

 

  홍명구 부대를 전멸시킨 청군은 이제 산에 진을 친 유림 부대를 향해 몰려왔다. 유림은 청군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저지하기 위해 삼수병 체제의 기본을 바꾸어 제 1선에 살수를 배치하고 2선과 3선에 사수와 포수를 넣었다. 그리고 산 중턱에 별동대를 매복시켜 놓은 후, 청군을 기다렸다.

 

  청군이 산에 올라오자 유림은 살수들을 돌격시켰다. 살수들은 청군이 탄 말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기수들을 낙마시키고 떨어진 기수들을 죽였다. 그리고 살수보다 높은 곳에 진을 치고 있던 사수와 포수들은 산 아래에 있는 청군들을 향해 교대로 화살과 총탄을 쏘아댔다. 조선군의 유기적인 삼수병 전술에 청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하지 못했다.

 

  청군은 일단 군사들을 물린 후, 3번에 걸쳐 다시 공격해 왔으나 조선군의 전열을 뚫지 못하고 사상자만 늘려갈 뿐이었다. 청군이 4번째 공세를 진행하자 유림은 산 중턱에 매복시킨 병사들을 출동시켜 그들을 타격했다. 전투가 막바지로 치병자호란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1637년 1월 5일, 전라병사 김준룡(金俊龍)은 약 2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경기도 용인과 수원 사이에 있는 광교산(光敎山)에 도착했다. 김준룡은 광교산에 진을 치고 산과 골짜기의 곳곳에 복병을 설치했으며, 정찰병을 여러 군데에 보내 청군의 동태를 살피게 했다. 수천 명의 청군이 광교산으로 진군하는 것을 정찰병이 발견하고 알리자, 김준룡은 전군에게 명을 내려 제 1선에는 포수를, 제 2선과 3선에는 각각 사수와 살수를 배치하도록 했다.

 

  이윽고 산기슭에 수천 명의 청군이 당도했다. 광교산으로 진군한 청군을 지휘하던 장수는 청 태종 홍타이지의 사위인 양구리(楊古利)였다. 그는 청 태종으로부터 초품공(超品公)이라는 직위를 받았으며, 6천 명의 기병을 휘하 병력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청군은 산에 진을 친 조선군을 보고는 단숨에 짓밟을 기세로 말을 몰아 올라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김준룡은 북을 울리고 기를 흔들게 하여 1선의 포수들에게 사격을 명령하였다. 포수들이 일제히 조총을 쏘는 것과 동시에 사수들이 활을 쏘아대자 청군은 당황했다. 여태까지 그들이 상대해온 조선군은 자기들이 돌격을 하면 지레 알아서 겁을 먹고 도망을 가던데, 이 군대들은 사뭇 달랐다. 조선군의 총탄과 화살 세례가 퍼부어지자, 말들이 쓰러지고 기수들이 말에서 떨어졌다. 청군이 돌격을 계속 하지 못하고 주춤거리자, 이 틈을 타 제 3선의 살수들이 앞으로 나와서 청군을 향해 창과 칼을 휘두르며 닥치는 대로 죽였다. 조선군의 맹렬한 공세에 놀란 청군은 더 이상의 전투를 포기하고 산 아래로 퇴각했다. <(인조실록), (연려실기술)>

 

  조선군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김준룡은 아군들의 전열을 재정비하고 진형을 굳게 갖추라고 엄중히 명을 내렸다. 아직 청군의 주력 부대는 손상을 입지 않았고, 조선군이 승리에 도취되어 방비를 허술히 하다가 청군이 기습을 해올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날인 1월 6일, 청군의 공격은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총사령관인 양구리 본인이 직접 남은 병력을 모두 이끌고 공격해왔다. 산의 곳곳에서 조선군과 청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가 한창 전개될 무렵, 조선군의 동남부 진영이 수적으로 우세한 청군 기병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 이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청군을 통솔하던 양구리가 매복해 있던 조선군 포수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 것이다. 갑작스럽게 통솔자를 잃은 청군은 당황하여 물러났고, 미처 퇴각하지 못한 청군 병사들은 조선군의 손에 의해 남김없이 죽임을 당했다.

 

  이틀간에 걸쳐 진행된 광교산 전투는 조선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청군의 총지휘관이자 청 태종의 사위인 양구리를 비롯하여 약 2명의 청군 장수가 전사했으며, 수천 명이 넘는 청군 병사들이 죽었다. 훗날 영의정 체제공은 1794년, 광교산에 기념비를 세워 김준룡의 공적을 찬양했다.

 

  광교산 전투로부터 22일 후인 1월 28일에는 금화(金化)에서 다시 조선군과 청군 간에 두 번에 걸쳐 큰 전투가 벌어진다.

 

  근왕병을 이끌고 오던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洪命耉)는 포수 3천 명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에서 청군에 포위당하고 있는 인조를 구원하러 오고 있었다. 평안병사 유림(柳琳)은 2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그와 함께 오고 있었는데, 홍명구와 전술에서 의견이 달라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1월 26일, 홍명구는 금화(金化)에 이르러 그곳에서 약탈을 벌이던 수백여 명의 청군을 격파하고 포로로 잡힌 조선인 백성들을 구출해냈다. 홍명구의 부대와 싸운 청군 패잔병들은 그들의 본대로 달려가 조선군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다음날인 1월 27일, 1만 명의 청군 기병이 금화의 외곽에 도착했다. 청군의 본대를 본 홍명구와 유림은 급히 회의를 벌였으나, 두 사람은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각자 부대를 나누어 진을 쳤다. 홍명구는 평지에 진을 쳐서 적과 싸울 것을 주장한데 반해, 유림은 기병이 대부분인 청군을 상대하는 데는 평지보다 산이 더 유리하다고 반박했던 것이다. 홍명구는 목책을 설치하고 포수와 사수와 살수를 순서대로 배치하여 적을 맞을 준비를 했다.

 

  그것을 본 청군은 우선 평지에 진을 친 홍명구 부대를 먼저 공격해 쳐 없애고 다음에 산에 진을 친 유림 부대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청군은 대포를 동원하여 조선군의 목책을 부수고 병사들을 돌격시켰다. 홍명구는 삼수병 체제의 기본적인 전술대로 포수와 사수의 원거리 사격을 퍼붓고 살수들을 내보내 청군의 초반 공세를 막아냈다. 순식간에 청군은 두 명의 장수를 잃었고 수천 명의 병사들이 전사했다. 서전에 불리해진 청군은 별동대를 산의 뒤편으로 보내 홍명구 부대의 후방을 공격토록 했다. 별동대는 말에서 내려 보병이 되어 털옷으로 몸을 감싸고 한꺼번에 홍명구 부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조선군은 전력을 다해 저항하였으나,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청군의 기세를 끝내 막지 못하고 무너졌다. 홍명구는 급히 연락병을 보내 유림을 불렀지만 유림은 불리한 정황이니 가보아야 소용없다고 판단하여 가지 않았다. 구원병을 받을 수 없게 되자, 홍명구는 최후를 실감했다. 그는 병부(兵符)와 인감(印鑑)을 가져다 아전에게 넘겨주고 “나는 여기서 죽어야 마땅하다!”하고 외치며 손수 활을 당겨 청군을 쏴 죽이다, 청군이 쏜 화살을 세 대 맞자 화살을 뽑고 칼을 들어 청군과 싸우다 끝내 전사하고 말았다.

 

  홍명구 부대를 전멸시킨 청군은 이제 산에 진을 친 유림 부대를 향해 몰려왔다. 유림은 청군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저지하기 위해 삼수병 체제의 기본을 바꾸어 제 1선에 살수를 배치하고 2선과 3선에 사수와 포수를 넣었다. 그리고 산 중턱에 별동대를 매복시켜 놓은 후, 청군을 기다렸다.

 

  청군이 산에 올라오자 유림은 살수들을 돌격시켰다. 살수들은 청군이 탄 말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기수들을 낙마시키고 떨어진 기수들을 죽였다. 그리고 살수보다 높은 곳에 진을 치고 있던 사수와 포수들은 산 아래에 있는 청군들을 향해 교대로 화살과 총탄을 쏘아댔다. 조선군의 유기적인 삼수병 전술에 청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하지 못했다.

 

  청군은 일단 군사들을 물린 후, 3번에 걸쳐 다시 공격해 왔으나 조선군의 전열을 뚫지 못하고 사상자만 늘려갈 뿐이었다. 청군이 4번째 공세를 진행하자 유림은 산 중턱에 매복시킨 병사들을 출동시켜 그들을 타격했다. 전투가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청군을 지휘하던 장수가 조선군 포수가 쏜 총탄에 저격당하자 청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철수했다.

 

  이상이 병자호란에서 조선군의 삼수병 체제가 청군을 상대로 위력을 발휘하여 승리를 거둔 두 가지 전투이다. 금화 전투가 안타까운 것은 유림이 승리를 거둔 때와 동시에,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 태종에게 항복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적을 맞아 방비를 좀 더 확실히 갖추었더라면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는 일도 없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청군은 결코 무적이 아니었고, 그들도 얼마든지 패배를 겪었으니 말이다.

 

 

달을 무렵, 청군을 지휘하던 장수가 조선군 포수가 쏜 총탄에 저격당하자 청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철수했다.

 

  이상이 병자호란에서 조선군의 삼수병 체제가 청군을 상대로 위력을 발휘하여 승리를 거둔 두 가지 전투이다. 금화 전투가 안타까운 것은 유림이 승리를 거둔 때와 동시에,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 태종에게 항복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적을 맞아 방비를 좀 더 확실히 갖추었더라면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는 일도 없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청군은 결코 무적이 아니었고, 그들도 얼마든지 패배를 겪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