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쌍령 전투, 병자호란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패전

구름위 2013. 1. 21.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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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은 매우 안타까운 전쟁이다. 적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며 일진일퇴를 거듭했던 임진왜란과는 달리, 청군의 노도 같은 진격에 일방적으로 밀리다 끝내는 국왕이 나와 항복하는 완패로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과정을 살펴보면 매우 아쉬운 부분들도 눈에 띈다. 조금만 준비를 더 갖추고, 침착했더라면 전세를 뒤바꿔놓았을 수도 있는 흐름들이 말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군 체제를 대폭 개편하였다. 기병 전력을 대폭 축소하고, 창과 칼을 쓰는 근접전 담당 병과인 살수(殺手)와 일본을 통해 들여온 조총을 사용하는 포수(砲手)를 집중 양성하고 활을 쓰는 사수(射手)를 곁들인 삼수병 체제를 채택한 것이다.

 

  임란 전까지 조선의 주력 부대였던 기병은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많은 허점을 드러냈다. 조선군의 장기인 기사(騎射: 마상 사격)는 일본군의 조총 사격에 상대가 되지 못했고, 육박전에서도 일본군 보병 부대의 장창 전술에 밀리기가 일쑤였다. 일례로 조선 제일의 맹장이라 칭송받던 신립은 그가 북방에서 여진족을 격퇴할 때 선보였던 기병 돌격을 탄금대 전투에서 4차례나 반복했으나, 일본군의 조총과 밀집 창병진형에 막혀 참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기병과 관련되어 조선군은 지나치리만큼 활과 화살에 의존했다. 무관을 뽑는 무과시험에서 기마술과 궁술은 필수였지만 검술이나 창술은 선택 과목이거나 아예 보지 않았다. 이러한 편향적인 성향에 대해 임진왜란의 전란을 한참 겪고 있던 1592년 12월 9일, 사헌부에서는 “우리나라의 장기(長技)는 활만 믿는 처지인데 적과 싸운 지 이미 오래이므로 계속 지탱할 방책이 없어 각도에서 패배했다는 보고가 날마다 이르고 있으니…”라는 장계를 올리기도 했다.

 

  물론 조선시대의 무기들이 활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활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어 위험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활에 치우친 결과, 조선군은 길고 큰 창과 날카로운 일본도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일본군의 돌격에 제대로 대응조차 해보지 못한 채, 겁을 먹고 패주하는 일이 속출했다. 평소에 활쏘기만 하고 백병전에 필요한 창검술은 전혀 연마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근접전에 약한 조선군의 단점은 조정에서도 일찍부터 논의가 되었다. <중종실록>에는 “왜구(倭寇)가 검을 빼어들고 수군의 배에 올라타면, 용감한 병사가 10명이 있어도 당해내지 못한다.”는 언급이 있으며, <선조실록>에도 “우리나라의 병사들은 전투가 시작되면 오직 고함을 지르며 활을 쏘다가 적이 다가오면 달아나고 맙니다.”라는 탄식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인 정조 시대 편찬된 병법서 <무예도보통지>에서 검이나 창, 곤봉, 편곤 같은 백병전 기술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킨 이유도 임진왜란 때 지나치게 활에만 의존하다가 참패한 쓰라린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임진왜란이 끝나고 난 이후, 조정에서는 기마와 궁술에 치우쳤던 종래의 군제를 탈피하여 조선에 파병 온 명나라 장수들이 전해 준 보병 전술인 ‘절강 병법’을 토대로 한 삼수병 체제를 새로이 만들어 채택한 것이다.

 

  삼수병 체제에서는 종래에 도외시되었던 창과 검술을 다루는 근접 전문 보병인 살수와 임란 때 맹위를 떨친 조총을 사용하는 포수를 중요 병과로 채택하였다. 창검술은 명나라 장수들이나 조선에 투항한 항왜들이 주로 도맡아 가르쳤다. 조총의 경우는 전쟁 중에 일본으로부터 노획한 것을 쓰다가 점차 기술을 습득하여 자체적으로 제작하였다. 조총의 사격 방법은 항왜들로부터 전수받았다. 반면 여태까지 조선 전력의 핵심이던 활을 쓰는 사수는 보조적인 역할에 그쳤고, 시간이 갈수록 그 비중이 점차 줄어들기에 이른다.

 

  이렇게 편성된 삼수병 체제가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세 부대 간의 원활한 조율과 합동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혼란이 발생하여 전체 부대에 악영향을 줄 수 있었다.

 

  한 예로 1637년 1월 3일 경기도 광주 쌍령(雙嶺)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조선군 4만여 명은 약 3백 명의 청군 기병대에게 대패를 당했다. 당시 지휘를 맡은 경상좌병사 허완과 경상우병사 민영은 아군 병사들이 청군을 보면 겁을 먹고 조총을 마구 쏘아댈 것을 염려하여 일부러 화약을 적게 나누어 주었다. 조선군이 쓰던 조총은 총에 강선(라이플)이 없어 유효 사정거리가 짧고 명중률이 낮아 먼 거리에서 쏘면 대부분 맞지 않았다. 따라서 최소한 적이 5~60미터 안에 들어온 후, 일제히 밀집 사격을 퍼붓는 것이 기본적인 전술이었다.

 

  이것은 조선군뿐 아니라 그 당시 세계 모든 나라들이 다 그러했다. 그런 차원에서 생각해 본다면 화약을 많이 분배해 주었다가 아군 병사들이 적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마구 사격을 하여 화약을 낭비할 수도 있다는 우려는 결코 잘못되지 않았다.

 

  하지만 화약을 조금씩만 나누어 준 결과, 그만큼 포수들의 화약이 빨리 떨어져 조총을 더 이상 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화약이 떨어진 병사들이 어서 화약을 달라고 소리를 쳤다. 병사들이 화약을 분배받는 동안, 청군 기병대가 돌격을 감행하자 조선군은 매우 당혹스러워 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조총만 갖춘 포수였고, 창과 칼을 들고 근접전을 수행할 살수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총을 가진 포수가 기병의 돌격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총구에 총검을 달고 보병들의 밀집 대형인 방진(方陣)을 형성해야 한다. 그러나 조선군에게 총검이 있을 리 만무했다. 총검은 1600년대 후반에야 프랑스에서 개발되었으니 말이다.

 

  청군 기병대의 급습을 받은 조선군은 혼란에 빠졌고 이윽고 대부분의 병사들이 겁을 먹고 달아났다. 조선군의 대열은 순식간에 붕괴되었고, 청군은 그런 조선군을 추격하며 닥치는 대로 죽였다. 이 기막힌 전투에서 조선군은 약 2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지휘를 맡았던 경상좌병사 허완과 경상우병사 민영도 전사하고 말았다. 쌍령 전투의 패인은 삼수병 체제의 핵심 중 하나인 살수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원거리 병과인 포수에만 편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유능한 지휘관과 엄정한 군기와 각 부대 간의 효율적인 운용이 원활하게 이루어진다면, 삼수병 체제는 탁월한 효과를 드러냈다. 앞서 언급한 광교산 전투와 금화 전투가 그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