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정년을 맞아 퇴직하여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듯이, 함선들 또한 어뢰/폭탄/각종 사고 등을 피해 운좋게 살아남아 운용연한을 다하게 되면 퇴역하여 현역함으로서의 임무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후 그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결국 다 해체되는거 아냐?’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퇴역 후의 진로는 각양각색으로써 섣불리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이 해군의 함선 명부에서 삭제되는지의 여부입니다. 1척의 함선이 퇴역하여 임무에서 해제된다 해도 그 배는 아직 해당 해군 소속의 함선이며 재산으로 인정됩니다. 명부에 남아있는 한 언젠가 다시 재취역하거나 다른 용도로 재활용될 수 있는 것이죠. 그렇지 않을 경우 명부에서 삭제된 후 아래와 같은 3가지 결말을 맞게 됩니다. (혹은 아래의 절차를 거친 후에 삭제되거나)
1. 최종적인 결말들
1) 해체 / 스크랩 처리
가장 일반적인 동시에 대부분의 함선들이 도달하게 되는 결말이 바로 ‘해체 & 스크랩 처리’ 입니다. 이 경우 함선은 사전에 무기와 주요 장비들을 제거하고 처리장으로 옮겨진 후 조각조각 분해되어 고철로 팔리게 되는 것이죠.
[스크랩 처리되어 고철로 분해되는 함선들]
2) 기념함 / 박물관
기념함이 되는 것은 퇴역 후의 진로중 가장 성공적인 케이스라 할 수 있지만 이것은 동시에 가장 가능성이 적은 ‘좁은 문’이기도 하지요. 우선 현역 시절부터 쟁쟁한 무공을 쌓아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는 배라는 것을 관계자들에게 각인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배를 보존할 자금을 대줄 스폰서가 나타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현역이 아니라 하더라도 대형함을 유지하는데는 1년에 몇 백만 달러나 되는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태평양 전쟁 개전부터 종전 때까지 살아남고 주요 해전에는 거의 빠짐없이 참가했던 항모 엔터프라이즈나 1970년대 유일의 1차대전형 순양전함인 야부즈(舊 괴벤)조차도 자금부족으로 결국 해체되는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기념함이 되자! : 성공사례와 실패사례]
어쨌거나 기념함이 되면 사람들도 심심찮게 찾아오고 수입원도 되며 계속해서 형태를 유지한채 사람들의 관심도 받게 되니(역사적 가치 등으로 인해) 함선으로서도 가장 안락한 노후라고 할 수 있죠. 게다가 무공이 굉장히 혁혁하여 밀리터리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역사책이나 교과서에까지 실릴 정도의 역사적 가치가 인정될 경우, 함선 명부에서도 삭제되지 않은 채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예비역’ 인채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주 : 넬슨 제독의 기함 ‘빅토리’ 나 미국 건국 초기의 프리깃함들이 이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단, 기념함이 됐다고 해서 노후보장이 반드시 완벽하다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미서전쟁에도 참전했던 미국 전함 오레곤(BB-3)은 퇴역한 후 1924년에 박물관으로 개조되었지만, 스폰서의 파산으로 고철로 팔릴뻔 했다가 1942년에 해군에 재징집되어 바지선으로 개조되기도 했죠.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기함이었던 미카사 역시 1920년대에 기념함이 됐지만 일본이 2차대전에서 패배한 후 소련의 압력으로 해체될뻔 하기도 했습니다.
3) 실험용 표적
가장 비참한 것은 표적으로 처분되는 것입니다. 현역 함선들은 기량 향상 및 유지를 위해, 혹은 신병기의 실험 및 테스트를 위해 반드시 실제 화기를 사용하는 해상 훈련을 실시해야만 하고 이 경우에 표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퇴역한 폐함들입니다. 1921년에 행해진 빌리 미첼의 항공력 위력시범에서도 미 해군의 퇴역한 구형전함들과 1차대전 승전 전리품으로 받은 독일의 노급전함이 사용되었고, 1946년의 비키니 핵실험에서도 다수의 미국 노후함들과(이라지만 1년전까지 버젓이 현역으로 뛰던) 전리품으로 가져온 독일/일본의 함선들이 표적으로 사용되어 사라졌죠. 오늘날 림팩 훈련에서도 1960~70년대에 퇴역하여 보존돼오던 구형함들이 표적으로 사용되곤 합니다. 이 한몸 희생해서 후배의 밑거름이 된달까요?
[(좌) 미첼의 항공기 위력시범 / (우) 림팩 훈련의 표적함]
2. 중간단계 - 각종 형태의 재활용
그런데 퇴역한 배들이 곧바로 위와 같은 3가지 결말만을 맞는 것은 아닙니다. 1척의 배, 특히 대형함의 경우에는 그만한 함체를 만드는 것에 많은 시간과 자금이 소요되죠. 그것을 단지 고철로 팔아버리기에는 뭔가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대형함들의 커다란 덩치는 비록 전투용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방면에 활용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이죠. 때문에 근대해군이 시작된 이래로 많은 국가들은 퇴역한 배들을 곧바로 폐기하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재활용하곤 했습니다.
1) 모스볼 상태로 보존
미국은 1912년 이래로 퇴역한 배들중 성능과 상태가 양호한 일부의 함정들에 산화방지 처리를 하여 항만 내부에서 보존해왔습니다. 평시에는 더이상 필요없게 된 함선들이지만 만약 유사시에 함정 수요가 급격히 늘어날 때는 새로 배를 건조하는 것보다 이들 퇴역함정들을 다시 현역으로 복귀시키는 쪽이 더 유용하다는 것이죠.
[오늘날의 모스볼 함대]
사람으로 치면 인공동면 상태에 빠진 것과도 같은 이들 모스볼 함선들은 2차대전이나 한국전쟁 같은 대규모 전쟁이 발발했을 때 다시 복원되어 현역으로 활동했습니다. 이 방면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아이오와급 전함들이며, 이들은 모스볼/소생을 반복하며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걸프전쟁 등 주요한 국면마다 참전했죠. 혹은 플레쳐/기어링급 구축함들처럼 모스볼 상태에서 재취역 했다가 1970년대에 퇴역하여 다시 모스볼 상태로 보존되고, 이후에 우리나라나 대만 같은 중소 해군국에 팔려가서 제 2의 함생을 시작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모스볼 상태로 보존된 함선들은 짧게는 5년에서 길게는 20년 안에 다시금 최종적인 운명이 갈리게 됩니다. 다른 곳으로 팔려가 그곳에서 퇴역하거나, 항만 한구석에서 썪다가 표적함으로 끌려나오거나 조용히 해체되거나 말이죠. 그 점에서 아이오와급 전함들은 운이 좋다고 할 수 있겠네요. 아직도 모스볼 상태에 있거나 (비록 재취역할 가망은 거의 없어보이지만) 기념함으로 살아남았으니..
2) 사격훈련용 표적함 / 기타 훈련함
이것은 첫 번째 항목의 ‘실험용 표적’과 유사해보이지만 가라앉지 않는다는 점에서 조금 차이가 납니다. 표적으로 사용되긴 하지만 훈련 중에 실탄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죠. 표적함으로 개조되는 배들은 무장을 모두 제거하고 내부에는 코르크나 가벼운 수지 등을 빈틈없이 채워서 배에 구멍이 나도 가라앉지 않도록 하죠. 또한 훈련 때는 작약이 들어있지 않은 연습탄이나 모의어뢰 등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없어도 함의 운항이 가능하도록 무선으로 통제되는 조타 장비를 설치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부류의 RC 장난감이랄까요? ^^;)
[(좌) 표적함 / (우) 대공 훈련함]
그 외에 주포를 들어내고 대공포를 잔뜩 달아 대공 훈련함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고 무장을 제거한 후 사관생도들의 원양 실습함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들 또한 마찬가지로 훈련/표적함으로 임무를 다하다가 한계에 이르면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며, 대개는 최후 훈련에서 실탄을 사용함으로써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3) 지원함
대형함의 커다란 덩치는 각종 지원설비들을 탑재하는데도 아주 유용합니다. 러일전쟁에도 참전했던 일본의 전 노급전함 아사히는 워싱턴 해군군축조약에 의해 무장이 철거된후 1925년대에 잠수함 모함이 되었다가 1937년에는 중일전쟁의 발발에 따라 최전선에 나가있는 함선들의 응급수리 지원을 목적으로 응급배수장치와 수리 설비 등을 갖추고 수리함으로 개조되기도 했습니다. 1920년에 퇴역한 미국의 전 노급전함 키어사지(BB-5)는 상부구조물을 모두 걷어낸 후 최대 250톤까지 운반이 가능한 초대형 크레인을 설치하여 공작함으로 개조되었습니다. 이 녀석의 크레인은 도크 용량이 모자랐던 대전 중에 신형전함들의 포신 교체 등 자잘한 정비 작업에서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고 하네요.
[(좌) 수리함이 된 아사히 / (우) 키어사지에 설치된 크레인]
이외에도 구식 구축함들이 상륙지원용 고속수송함으로 개장된 사례 등도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4) 수상 병영
모든 함선들은 그것을 운용하는 승조원들의 거주를 위해 자체적으로 침실이나 식당 등 생활공간을 가지고 있고, 때문에 구식화하거나 상황이 열세에 놓여 더 이상 바다에 나가지 못하게 된 배가 그대로 항구에 머물며 수상 병영 역할을 하는 것은 그다지 보기 드문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구형함들이 그렇듯이 배의 거주공간이란 육상에 비해 꽤나 열악한 편이며 그 안에서 장기간 생활하는 것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죠. 그래서 보통 군함을 활용한 병영은 죄수들을 수감하는 감옥선 등으로 이용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기존의 거주구를 활용하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배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전 노급전함 일리노이(BB-7)은 1920년에 퇴역한 후 함체를 제외한 상부구조물과 기관 및 기타 모든 설비들을 들어냈습니다. 그녀의 새 주인들은 그대신 배의 하단부를 기반으로 삼아 배 위에 육지의 그것과 똑같은 막사 건물을 올려놓았죠. 그 이후 일리노이는 1955년까지 부두에 계류된 채로 뉴욕주 해군 치안대 병사들의 거처가 되었습니다.
[(좌) 수상병영이 된 일리노이 / (우) 오늘날의 수상병영]
뭐 사는 사람으로서는 육지의 막사보다 공간이 좁다거나 물이 부족하다거나 하는 문제들이 있었지만 당국으로서는 부지 매입에 필요한 예산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이런 방식을 꽤나 마음에 들어했다고 하네요. 1944년부터는 아예 애초부터 추진기관을 배제하고 거주능력만을 극대화한 APL(Barrack Craft non-self propelled)이라는 함형이 등장했고, 베트남 전쟁에서는 건물을 세울만한 땅이 적은 메콩강 하구 등지에서 이 형태의 배가 막사로써 집중적으로 배치되기도 했다는군요.
5) 위장 전함
일시적으로 적국을 기만하기 위해 함선에 가짜 연돌이나 가짜 포탑을 다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배 자체를 완전히 뜯어 고쳐서 다른 배로 행세하게 한다는 황당한 활용방법도 있었습니다. 영국은 1차대전중 대양 여객선이나 대형 상선 등을 징발한 후 갑판 위에 나무로 된 가짜 포탑이나 가짜 상부 구조물 등을 씌워 자국의 주력 전함과 비슷하게 개조하였죠. 이들의 목적은 실제 전함들의 위치를 기만하거나 독일에게 이쪽의 전함 수를 부풀리는 것이었습니다. 2차대전 때에도 위장 전함을 활용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님께서 일전에 언급하신 전함 센츄리온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님의 블로그 글 「퇴역후에 특이한 이력을 가진 함선들 2」 참조.)
[퇴역 전의 센츄리온]
[위장 전함 형태와 원본과의 비교]
개조의 결과물은 위의 사진과 같습니다. 독일군이 저런 위장 전함에 어느 정도 넘어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람한 함교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 것만 빼고는 KGV만의 독특한 4연장+2연장 포탑이나 연돌/마스트 형상 등이 많이 닮은 것을 볼 수 있죠. 참고로 센츄리온은 1차대전 중에 건조된 KGV급 입니다. 같은(?) KGV급이라서 이런 인연이 된걸까요? ^^;
6) 기타 괴악한 최후들
저런 방법들말고도 일전에 언급한 일본 구축함 후유츠키처럼 배가 그대로 방파제가 되는 경우도 있고, 미국의 퇴역한 에섹스급 항모 오리스카니(CV-34)는 조만간 바다에 수장되어 세계 최대의 인공 어초 겸 생태 연구지가 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제가 이 글에서 언급한 것들 이외에 또 다르게 최후를 맞거나 재활용 되는 방법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일본에 있는 군함 방파제]
[참고문헌 / 자료 출처]
- http://www.navyphotos.co.uk/index2.htm
- http://bobhenneman.info/Breakers1.htm
- http://www.navsource.org/
'전쟁..... > 해군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잘 알려지지 않은 부대 (0) | 2012.12.25 |
---|---|
日本의 집념 88 함대 (0) | 2012.12.24 |
생존자들의 표류 사례 (0) | 2012.12.24 |
해상에서의 생존법 (0) | 2012.12.24 |
미 해군의 연식 비행선 이야기 (0) | 2012.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