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해군이야기

생존자들의 표류 사례

구름위 2012. 12. 24.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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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디애나폴리스의 생존자들 : 우디 유진 제임스의 경우

우디 유진 제임스(Woody Eugene James)는 1922년 11월 13일에 앨라배마주의 길버타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942년 9월 11일에 해군에 입대했고 1943년 6월에는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로 배속되었죠. 1945년 7월에 유명한 인디애나폴리스 격침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디 역시 그곳에 있었고 이후 그는 5일동안 표류하면서 화상, 갈증, 상어 등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승조원 1197명중 약 900명이 침몰하는 함에서 탈출했으나 5일 여의 표류 끝에 불과 317명만이 살아남았죠. 우디의 증언은 그 참혹했던 5일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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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 이전의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는 방법」에 수록됐던 내용에서 이어집니다.)

(전략) 나는 동료인 짐 뉴홀과 함께 벽에 걸린 구명밧줄을 풀고 현측에 늘어뜨린 다음 타고 내려와 바다로 뛰어들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곧 함을 벗어나기 위해 수영을 시작하여 아마도 50~90m 정도를 헤엄쳤던 것 같다. 그리고나서 조금 숨을 돌린 후 뒤를 돌아봤는데 우리 배는 이미 우측으로 기울어진채 ⅔정도가 잠겨있었으며 이젠 쓸모없게 된 스크류만이 아직도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침몰해가는 함쪽에서 한 젊은 장교가 구명조끼도 없이 뛰어내린 후 허우적거리며 패닉상태에 빠져있는 것이 보여서 나는 구명조끼를 벗어 그쪽으로 던져주었다.

어쨌거나 덕분에 나는 구명조끼도 없이 버틸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선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나는 배영을 하듯이 하늘을 바라보며 둥둥 떠있다가 근처에 감자박스가 하나 떠다니는 것을 보았다. 당시에는 감자를 나무박스에 넣어서 보관했는데 때마침 그 박스는 텅 비어있어서 아주 훌륭한 구명대가 되어주었다. 감자박스를 붙들고 있은지 얼마 후 사람 목소리 같은 것이 들려서 나도 큰 소리로 외쳤더니 누군가가 또 응답을 해왔다. 그는 아까 배위에서 헤어진 짐 뉴홀이었고 그래서 나는 그쪽으로 헤엄쳐 갔는데 거기엔 짐 외에도 몇 명 정도가 더 모여있었다. 상황은 너무나 혼란스러웠고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화상을 입은 상태였으며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표류 1일차]
이튿날 아침 우리는 인원수를 세기 시작했는데 대략 150명 정도가 있었다. 우리는 이런저런 작은 조각들 단위로 모이도록 하였다. 이때 우리들은 상황은 그렇게 나쁘지 않으며 오늘 안으로 구조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필리핀 기지측은 정기교신을 통해 우리가 오전 11시경에 이 부근을 항해하고 있을 예정이란걸 알고 있었을테고 따라서 정기교신이 두절되면 그들은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판단하여 이 부근을 수색할꺼라고, 그래서 우리는 오늘 하루가 가기 전에 구조될 수 있을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밤이 찾아왔으며 추워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말로 추웠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자 이번에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지기 시작해서 빨리 해가 져버리라고 기도를 하기까지 했다.

[표류 2일차]
상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실 그들은 어제 오후부터 출몰하긴 했지만 아무도 물린 사람이 없어서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사실 어제는 다들 그날 안으로 구출될거라는 생각에 몰두해서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상어는 여러 마리가 떼로 모여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고 우리는 우리대로 상어에게 공격당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밤이 찾아오자 상어들은 사라졌지만 우리는 또다시 찾아온 추위에 떨면서 하루 빨리 태양이 떠오르기만을 기도했다.

[표류 3일차]
태양이 마침내 다시 떠올랐고 우리의 몸도 다시금 따뜻해지게 되었다. 이때까지 몇몇 사람들이 갈증을 견디지 못하고 바닷물을 마셨는데 덕분에 그들은 반미치광이 상태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인디애나폴리스는 가라앉지 않고 수면 밑을 잠행하고 있으며 함내PX도 열려있어서 이따위 물 몇 방울에 허덕일 필요없이 아이스크림이나 사탕같은 것들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거긴 아직도 열려있다구. 자, 가서 소다수나 실컷 마셔보자.” 이들의 끈질긴 헛소리에 3~4명 정도가 넘어갔고 끝내는 그 미치광이들과 함께 가버렸다.

하루가 또 지났고 상어 역시 여전히, 그것도 수백 마리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렸고 특히 오후 늦게쯤에는 더 그랬다. 이상하게도 상어의 습격은 한낮보다 늦은 오후에 더 심한 것 같았다. 밤 역시 예외는 아니었는데, 주변이 고요한 가운데 때때로 비명소리가 들려오면 누군가가 또 상어에게 습격을 당했다는걸 알 수 있었다.

낮 시간동안에는 약간의 시원함조차도 느낄 수가 없었다. 사실, 짐이 내게 “이봐 제임스, 지옥에 여기보다 더운데가 있을꺼라고 생각해?” 물었을 때 나는 “잘 모르겠지만 지옥이 있다면 여기일꺼라고 생각해.”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배가 고팠고 목이 말랐다. 우리에겐 음식도 물도 없었고 잠도 잘 수가 없었으며, 더위 때문에 몸은 더 바싹 말라가기만 하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발광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짐이 사소한 싸움에 휘말렸고 나는 우리가 상처를 입기 전에 이 그룹으로부터 떨어져있기로 햇다. 나와 짐은 함께 머무를 수 있도록 서로의 구명조끼를 함께 묶었으며(첫날에 던져버리고선 언제 또 구한거죠? -_-;;) 짐쪽이 좀더 좋은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내려쬐는 햇볕 때문에 손에 심한 화상을 입은 상태였고, 때문에 아무 것도 쥐거나 만질 수조차 없었다.

[표류 4일차]
또다시 다음날이 시작되었다. 이때 나는 단지 마실 물 한모금이 없어서 끔찍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입술은 딱딱해져서 마치 목화 송이처럼 되었고 입에 바닷물을 머금어서 입술을 적신 다음 뱉어내는 일을 반복하곤 했다. 나는 오후가 될 때까지 그 짓을 수십차례쯤 했는데 그 때문에 나중에는 목에 소금물로 인한 궤양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나중에 구조되었을 때는 내 목구멍은 내 머리만큼이나 컸다.

어쨌든, 우리는 그저 태양이 높게 떠올랐다가 다시 저물어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그때 비행기 1대가 낮게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사실 첫째날부터 이 부근에는 비행기들이 돌아다녔으나 그들 대부분은 너무 높은 고도를 날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표류자들 중 몇몇은 가지고 있던 거울로 신호를 보내려고 애쓰기도 했으나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어쨌거나 그 비행기는 우리에게 접근하는듯 하다가 지나쳐버렸고 우리는 절망에 빠져 “제길, 그는 우릴 보지 못했어. 가버린거라구.”라고 한탄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가버리는줄로만 알았던 그 비행기가 선회하더니 다시 우리 쪽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발견된 것이다!!

그 비행기는 대잠초계기인 PV-1 벤츄라였다. 그는 우리를 발견한 것을 보고한 후 약간의 식료품과 약품을 던져주고는 돌아갔으며 잠시 후에 PBY 카탈리나 비행정 1대가 도착해서 우리 근처에 착수했고 몇몇 사람들이 구조되었다. 해가 지기 전에 또다른 PBY가 날아와서 서바이벌 킷트와 3인용 구명정을 투하하고 갔다. 짐과 나는 그 구명정에 타기 위해 헤엄을 치기 시작했지만 짐은 타고 나는 타지 못했다. 사실 나는 너무나 기력이 떨어져있어서 짐의 어깨에 매달려서 버티고 있는 실정이었던 것이다. 짐이 나보다 먼저 구명정에 도착했을 땐 이미 거기에 2명이 먼저 타고 있었으며, 그 구명정은 단지 3명이 탈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어쨌거나, 구명정 반대편에도 2명이 구명정에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고 먼저 타고 있던 2명은 짐에게 그 두사람을 태우겠다고 말했다. 짐은 나를 먼저 태우고 그다음에 다른 두사람을 태우자고 얘기했으나 그들은 거절했다. 험악해진 분위기 속에서 먼저 주도권을 잡은 것은 다행히도 짐이었다. 그 구명정에는 알루미늄으로 된 노가 1쌍 있었는데 짐은 그것을 재빨리 집어들고는 “이봐, 비열해지긴 싫지만 우디를 태워주지 않으면 자네들은 손으로 이 구명정을 저어야만 할거라구.”라고 쏘아붙였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나를 끌어올려 구명정에 태워줬고 나는 짐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나를 태운 후 그들은 자기네들의 나머지 동료 2명도 끌어올려 구명정에 태웠다. 이제 구명정에는 6명이나 타고 있어서 꽤나 붐볐지만 우리는 주변을 표류하고 있는 3명의 남자를 발견하고 그들까지도 태워주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면서 자정이 지날 무렵 저멀리 수평선의 구름 밑에서 서치라이트의 불빛이 비추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드디어 구조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우리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아마 모를 것이다. 우리는 미친 듯이 날뛰고 소리지르곤 했다. “우린 구조됐어, 우린 구조됐다구.”

[표류 5일차]
구조선은 자정이 약간 지났을 무렵 현장에 도착했고 곧바로 생존자들을 구출하기 시작했다. 그 배가 우리의 작은 뗏목에 다가온 것은 아침해가 떠오를 무렵이었고 나는 그 작은 배의 갑판을 밟게 되면서 얼마나 기뻤던지 모른다.


[생존자들을 구조하는 초계함과 괌에 후송된 생존자들]

우리는 갑판에 오른후 해군의 전통에 따라 장교에게 경례를 하고 배에 탈 수 있도록 간청했다. 그리고나서 나는 아직까지 갖고 있던 담배 파이프를 그중 한명에게 주었다. 왜 그랬는진 모르지만 구조된데 대해 너무나 감사해서 뭐라도 주고싶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그들은 우리에게 달콤한 시럽 한 스푼씩을 주고는 기름으로 뒤덮인 몸을 씻도록 하게 해주었다. 기름 때문에 몰골이 지저분하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가 기름에 뒤덮여 있던 것은 정말로 축복이었다. 기름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강렬히 내리쬐는 햋빛 때문에 이 배를 만나지도 못하고 죽어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샤워실에 가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깨끗하게 씻기로 했다. 동행한 사람에게 샤워실 물이 담수인지 바닷물인지 물어봤더니 담수라고 하길래 머리를 들고 입을 벌려 샤워기 물이 마를 때까지 물을 마셨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그들은 갈아입을 옷과 잠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 배의 승조원들은 우리가 만나본 사람들 중에 가장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 자기들의 침상과 다른 모든 것들을 내주었던 것이다. 나는 침상에 등을 대고는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지만 눈을 떠보니 다리를 펼 수가 없었고 몹시 아팠다. 미처 몰랐지만 표류하는 동안에 양쪽 다리 뒤쪽 모두에 심한 화상을 입고있었는데 잠을 자면서 화상을 입은 부위가 심하게 눌린 모양이었다. 덕분에 나는 병원선으로 옮겨져 본격적인 치료를 받을 때까지 다리를 곧게 펼 수가 없었다.

나는 3일후에 병원선으로 옮겨졌는데 그때까지도 다리를 펼 수가 없었다. 배의 승조원들은 나를 들것에 실은채 병원선의 상갑판으로 옮겼고 거기엔 의사 1명이 대기하고 있다가 나를 응급실로 옮기도록 지시했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나를 수술대에 올리더니 주사를 놓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군의관님 주사는 안돼요. 나는 지금도 충분히 심하게 다쳤는데 더 이상 심한 짓거리를 하지 말아주세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군의관은 ”그래? 그래도 주사를 맞는게 좋을걸?“ 이라고 대답했다. 곧 간호사가 찬 수건을 들고와서 내 발목에 감았고 다음 순간 군의관이 내 발목과 엉덩이를 잡더니 우악스럽게도 다리를 펴버렸다. 어찌나 아팠던지 머리가 천장을 뚫을 것만 같았다. 나머지 다리에도 그런 치료가 행해진 다음 간호사는 내 다리에 연고를 발라주고는 붕대로 조심스럽게 감았다. 그들은 2~3시간마다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갈아주었다. 그렇게 3일을 보낸 후 배의 환자들은 모두 괌의 해군병원으로 옮겨졌고 대략 5주 정도 그곳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그 사람들이 어떤 치료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내게는 그 사건으로 인한 흉터가 남아있지 않다.


2. 구명정에서 보낸 83일 : 바실 D. 이지의 경우

이 사례는 몇 번 올린적이 있어서 아마 아시는 분들이 많을겁니다. 바실 D. 이지는 미 해군 소속 이등수병으로써 네덜란드 상선 「잔담」호에 무장 경비병 자격으로 타고 있었습니다. 그 배는 브라질 연안 부근에서 독일 잠수함 U-174에게 피격되어 침몰되었으며, 이지는 뗏목에 타고 83일(1942.11. 2 ~ 1943. 1.24)동안 표류하다가 구조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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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 이전의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는 방법」에 수록됐던 내용에서 이어집니다.)

(전략) 한참을 헤엄쳐간 후에 근처에서 부유물을 하나 찾아낼 수 있었고, 나는 그날 오후와 밤, 그리고 다음날까지 그 부유물에 매달려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나는 그 안에서 83일을 보내게 됐던 뗏목을 발견했다. 그 안에는 4명이 타고 있었는데, 어쨌거나 나는 열심히 헤엄을 쳐서 그 뗏목에 도달했고 그들은 내게 약간의 초콜렛과 우유, 그리고 물을 주었다. 우리는 그날동안 서로 어떻게 배에서 탈출했고 어떤 부유물에 의지해왔는지 등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당시 그 뗏목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우리 포대장과 다른 수병, 그리고 네덜란드인 2명이었다. 네덜란드인 중 1명은 우리 배의 선원이었는데, 그는 기관실에서 근무했었다고 한다. 우리는 그날동안 푹 쉬었고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난파당한 다른 사람들이나 어떤 비행기나 배의 흔적도 아무 것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다음날이 되자, 우리는 시계에 밥 주는걸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간에는 10분마다 시계 태엽을 감아주었고 야간에는 1시간이나 2시간마다 태엽을 감았다. 우리는 그것을 35일째 되는 날까지 계속했다. 사실 그 날 이후로는 체력이 너무 약해져서 더 이상 시계태엽 감는 일조차 할 수 없었다.

우리가 갖고있던 음식은 16일째까지만 남아있었고, 우리는 그걸 아주 작은 조각으로 쪼개서 먹었으며 물도 매우 아껴서 마셨다. 한동안 우리는 먹고 남은 비스켓 부스러기를 바다새들에게 던져줌으로써 그것들을 유인하여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했었다. 식량이 다 떨어진 후에는 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지만, 음식만은 어떻게든 조금씩이나마 구할 수는 있었다. 당시 우리는 약 4m 정도 되는 가느다란 막대기와 로프를 하나 갖고 있었고 그걸 활처럼 구부려서 올가미를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올가미를 뗏목 옆에 걸어놨는데, 그렇게 하면 곧 뗏목 밑에서 상어가 나타나 우리를 공격할 터였다. 우리는 발과 손을 물속에 담그고 그걸 이리저리 휘져어서 상어를 불러모았다.

한동안 그 짓을 했었는데, 처음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두 번째에는 상어가 올가미에 걸려들었다. 우리는 그놈의 꼬리를 잡아서 뗏목 위로 끌어당겼으며, 노와 막대 등으로 그놈을 있는 힘껏 후려갈겨댔다. 녀석이 잠잠해진 다음 우리는 나이프로 심장과 간을 꺼냈는데, 그 심장은 꺼낸지 15분이 되도록 여전히 뛰고 있었다. 우리는 심장과 간을 먹었고 그 다음에는 등쪽의 흰살 부분을 잘라내서 먹었다. 그 살은 매우 질겼고 팍팍했지만 우리는 그걸 어떻게해서든 계속해서 먹어댔다. 모두가 충분히 먹고나자, 우리는 남은 부분들을 잘라내어 식량저장고에 넣어두었다. 그것은 지금까지는 한번도 쓰이지 않고 텅 비어있었는데, 우리는 남은 상어고기를 넣어둔 다음 그게 다음날까지 상하지 않을지 어떨지 지켜볼 참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 고기는 더 이상 먹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우리는 그걸 모두 바다에 버렸다. 그것은 우리가 잡았던 최초의 물고기였다. 그날 밤, 뗏목 주변에서 많은 새들이 물고기를 잡으려 하고 있었는데, 바다가 너무 거칠어서 새들이 제대로 파도를 탈 수 없었고 그중 견디다 못한 몇 놈들이 우리 뗏목에 올라왔다. 그래서 우리는 뒤에서부터 달려들어서 그 새들을 잡았고, 그런 식으로 대략 25마리 정도의 새들을 손에 넣었다. 하루는 8마리 정도의 작은 정어리들을 잡을 수 있었는데, 그들은 큰 물고기에게 쫓겨서 우리 뗏목의 좁은 틈 사이로 몸을 숨기려 왔던 것이다. 우리는 그저 손을 내밀어 그들을 잡기만 하면 되었고, 그렇게 잡은 정어리들은 나중에 새를 잡기 위한 미끼로 사용되었다.

우리가 가장 좋은 음식을 먹었던 것은 추수감사절 때였다. 오후 3시반 정도에 큰 새 한 마리가 근처로 날아왔고 마침내 우리 뗏목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내려앉았다. 우리들 중 누군가가 바로 달려들어서 그 새를 잡으려고 했지만, 우리는 그에게 그 새가 좀더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가까이 오지 않았고, 마침내 젊은 네덜란드인이 펄쩍 뛰어서 그 새의 목을 잡았다. 그 날은 추수감사절이었고 우리는 많은 고기를 질릴 때까지 먹고 또 먹었다.

20일째 되는 날, 우리는 처음으로 배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신호탄에 불을 붙이고 그걸 있는 힘껏 흔들어댔지만 그 배는 아마도 우리를 지나가는 배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다음날에도 배 한 척이 지나갔는데, 그때는 대략 오후 4시 30분 정도였고 우리는 전날과 마찬가지의 일을 되풀이했다. 당시 우리에겐 신호탄 4개가 남아있었는데, 우린 그중 3개를 사용했고 우리의 셔츠와 노란색 천도 마구 흔들어댔다. 그 배는 아마도 우리의 신호를 눈치챘던 것 같지만 결국 약간 진로를 바꾸다가 곧 원래의 항로를 따라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약 3주 후에 우리는 커다란 배를 봤지만 그것은 불행히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예 신호를 보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고 우리는 때때로 아무 음식도 없이 2~3일간을 보내기도 했다. 가끔씩은 물 없이 4일간을 보내야했고, 가장 심했을 때는 무려 6일간이나 한모금의 물도 없이 버텨야만 했다.

(*주 : 다른 자료에 의하면 24일째에 최초로 물이 떨어졌는데, 때마침 3일 후에 비가 오는 바람에 캔버스 천으로 빗물을 받아서 살아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66일째 되는 날에, 우리 중 한 명이 뗏목 위에서 죽었다. 그는 죽기 전에 오랫동안 심하게 병들어있었고, 그 기간은 대략 한 달이나 5주 정도였을 것이다. 그는 위장에 심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고 눈은 거의 장님 상태였으며, 귀 또한 아무 것도 들을 수 없는 상태였다. 그는 65일째의 밤에 심한 고통을 호소했으며 계속해서 기침을 해댔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계속해서 불러대곤 했다. 우리는 그날 밤 그를 뗏목의 마른 부분에 옮겨다 놓았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는 이미 죽어있었다.

우리 포대장도 그때쯤 매우 아팠었는데, 그는 먼저 사람만큼 심하게 아프지는 않았으며 그는 자기가 다음 차례가 되지 않기를 바랬다. 그렇지만 그가 바로 다음 차례였다. 그는 76일째 되는 날에 죽었지만, 그는 앞서 간 비즐리(Beazley : 처음에 죽은 사람의 이름)만큼 고통을 겪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를 위해 기도했고, 그를 바다에 묻었다. 어쨌든... 우리들 중 3명이 살아남아 있었고 우리는 남은 사람 중에 누구라도 또 죽게 된다면, 차라리 3명 모두가 같은 날짜, 같은 시간에 죽기를 바랬다.

82일째 되는 날에 우리는 최초로 비행기를 봤는데, 그 고도가 너무 높아서 우리는 그 비행기가 우리를 보지 못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일찍, 같은 기종의 항공기가 다시 날아왔고, 고도가 그렇게 높진 않은 대신 거리가 약간 먼 상태였다. 그 때문에 우리는 뗏목이 지금 육지 가까이에 있다는걸 알았고 아마도 근처에 호송선단이 지나가고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약 1시간 후 우리는 수평선에서 연기를 봤는데 그것은 금방 사라져버렸다. 조금 후에 그 연기는 다시 나타났고, 곧 더 많은 연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1시간 후에 우리는 선단에 있는 모든 배들의 마스트를 볼 수 있었고, 그 외에도 구축함 1척과 우리가 구축함이라고 생각했던 다른 1척의 구잠정이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들 중의 네덜란드인 1명이 일어나서 천조각을 흔들기 시작했고, 나를 포함한 다른 2명은 그가 뗏목 바깥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그의 다리를 붙들고 있었다. 그는 열심히 신호를 했으며 우리는 그 배가 한 방향으로 갔다가 곧 다른 방향으로 항로를 바꾸는 것을 보았다. 한번은 그가 말하길, “저 배가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는 것 같아.”라고 했는데, 그렇지만 우리는 그에게 포기하지 말고 계속 신호를 보내라고 했다.


[83일간의 안식처가 된 뗏목과 구조된 생존자들의 처참한 몰골]

훗날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구잠정(PC)의 우현측 견시는 약 4,500m 정도에서 우리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정장(艇長)을 불렀는데, 정장은 망원경으로 그 물체를 본 후 그것이 작은 뗏목이라는 깨닫고 곧장 호송함대 지휘관에게 그것을 구조하겠다는 요청을 했다. 그들은 최고속력으로 우리에게 달려왔고 그 덕분에 연돌에서 대단한 연기가 났다. 당시 그 상황을 본 우리는 그 배가 어뢰를 맞은거라고 생각했으며, 정말로 낙담해서 누군가가 “이런~ 그들이 어뢰에 맞았어.”라는 말을 했다. 그러나 잠시 후 나는 그것이 어뢰가 아니었으며 그 배는 계속 속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광학신호기를 점멸했고 갑판에 있던 승무원은 팔을 흔들며 우리에게 신호를 보냈기 때문에, 우리는 드디어 그 배가 우리를 발견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우리 뗏목에 사다리를 내렸고 우리가 배에 올라가는 것을 도와주었으며, 그들이 내게 처음으로 준 음식은 복숭아였다.

(*주 : 다른 자료에 따르면,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배에 오르려고 했지만, 그러기는커녕 걸어다니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83일이나 표류했으니 그럴 법도 하지만...)

한편 우리 일행 중의 네덜란드인은 콩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그들은 콩은 우리의 위에는 아직 부담스럽다며 복숭아를 먹으라고 했다. 그후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우리를 아래쪽으로 데려간 다음, 복숭아를 좀더 주었다. 나는 그 배에 11일 정도 머물렀고, 그리고나서 비로소 육지를 밟을 수 있었다. 항구에 도착한 즉시 나는 해군 병원에 보내졌고 거기에서 한달간 머물러 있었다. 그런 다음 나는 비행기로 마이애미에 갔고, 다시 마이애미에서 워싱턴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다시 메릴랜드 주의 베데스다에 있는 해군 의료센터에 보내졌다.




[참고문헌 / 자료 출처]
- http://www.armed-guard.com/iz83.html
- http://www.history.navy.mil/faqs/faq87-3j.htm
- http://members.tripod.com/IndyMaru/IndyMaru.html
- http://www.ussindianapolis.org/woody.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