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해군이야기

북극해 호송선단 선원의 고통과 공포

구름위 2012. 12. 22.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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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극해 항로의 항해여건

일전에 언급한 알류션 열도가 ‘외롭네, 춥네’ 하는 푸념을 늘어놓을 수 있었던 곳이라면 같은 북극권임에도 그런 푸념을 늘어놓는다는 것 자체가 사치인 근무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러시아행 북극해 호송선단이었죠.

북극해 호송항로가 열리게 된 것은 독-소전의 발발 때문이었습니다. 독-소전 개전 이후 독일은 파죽지세로 소련군을 밀어붙였고 만약 소련마저 독일에게 패배한다면 영국은 유럽을 완전히 제패한 독일과 단독으로 맞붙어야할 판이었죠. 때문에 영국 수상 처칠은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직후 라디오 방송에서 소련에 대해 대대적인 지원을 약속하는 한편, 1941년 8월에 이르면 허리케인 전투기로 구성된 비행대를 무르만스크에 파견하여 선단 항해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까지 하도록 하는 등 소련에 대한 지원을 서둘렀습니다.



딱하게 된 것은 북극해 방면에 투입되어야 하는 해군 함정의 승조원들, 그리고 상선의 승무원들이었습니다. 당시 대서양에서는 연합국의 호송선단을 노리는 독일 잠수함들(그리고 그들을 사냥하려는 영국의 호위함들과 대잠세력들도)이 득시글거리는 상황이었고, 6월 한달동안만 해도 61척의 상선(총 310,000톤)이 격침되었죠. 호송선단에 참가한 배의 승무원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여부를 자신의 운과 배가 싣고 있는 화물에 맡기는 형편이었습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거죠.

「만약 광석을 싣고 있는 배에 타고 있다면 갑판 위에서 잠을 자야한다. 어뢰가 명중할 경우 당신에겐 수 초의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의 배가 일반화물을 싣고 있다면 거주구에서 잘 수 있지만, 어뢰 명중시 당신의 생존여부는 몇 분 단위로 판가름 될 것이므로 옷과 신발은 여전히 입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의 배가 항공유나 탄약을 싣고 있다면, 거주구에서 옷을 다 벗고 문까지 걸어잠근 채로 편하게 잠을 자도 좋다. 어뢰가 명중하면 어차피 그대로 끝장이기 때문에.」


상황이 이렇게 좋지 않은 판국에 북극해 방면에 투입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악조건까지 더하는 것이었습니다.

① 대서양에 비해 증강된 위협
대서양 항로에서는 오직 독일 잠수함만을 상대하기만 하면 됐지만, 북극해 호송선단은 도중에 반드시 노르웨이 북부 근해를 지나가야 했으므로 잠수함 외에도 항공기와 수상함 세력의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초에는 독일측도 항공병력의 대부분이 대 소련전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노르웨이 전역에까지 충분한 항공기를 배치할 여력이 없었으나, 곧 대대적으로 항공기 세력을 증강하여 1942년 중순에 이르면 1개 선단에 대해 Ju-88 쌍발 폭격기 및 Bf-110 전폭기, Ju-87 급강하 폭격기 등을 최대 100기까지 내보낼 수 있게 되었죠.


[북극해 전역의 독일측 3인방들]

저속에다 대공화력도 충분하지 않은 상선에 대해 항공기가 갖는 우위는 말할 필요도 없을테고 변변찮았던 독일 수상함대 역시 노르웨이처럼 기지와 가까운 수역에서는 나름대로 충분한 위협이 되었습니다. 1941년 11월에 5척의 신형 구축함을 투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12월에는 전함 티르피츠가 선단 저지를 위해 노르웨이로 이동하였고 1942년 초에는 포켓전함 뤼초프와 어드미럴 쉐어, 중순양함 히퍼가 투입되었으며, 도버해협 돌파 작전 이후에는 전함 샤른호르스트까지 합류하게 되었죠.

② 빈약한 선단 호위세력
이것은 초기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북극해 호송선단의 투입 이후 독일군의 전력이 차근차근 증강되고 있었던데 비해 영국측의 호위전력 증강은 그에 따르지 못하는 실정이었습니다. 영국의 딜레마는 북극해 항로 외에도 생명선인 대서양 항로까지 동시에 유지해야 한다는데 있었고, 당시 본국함대 사령관인 토베이 제독은 영국의 주력함대가 소련으로 향하는 선단과 북대서양 항로 어느 곳도 충분히 호위하지 못할 상황이라며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계속 경고하고 있었죠.

한편 호위함 외에 수상전력은 어땠는가 하면, 북극해 호송선단 운용이 결정되었던 1941년 9월 당시 스카파플로를 모항으로 하는 영국 본국함대의 전력은 KGV급 전함 3척, 순양전함 리펄즈, 항모 빅토리어스, 그리고 순양함 6척과 구축함 수 척을 보유함으로써 일개 지역함대만으로도 독일 수상함대를 압도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이후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순양전함 리펄즈가 일본의 위협에 대비하여 극동지역으로 빠져나감으로써 전력이 다소 약화되었으나 수상함대 규모에서는 여전히 영국측이 우위에 있었죠. 그러나 이들 본국함대의 최우선 과제는 선단 호위가 아니라 티르피츠 추적이었고, 선단과는 별도로 행동하였으므로 막상 선단이 적 항공기나 구축함 등에 습격당했을 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좌) 호위함이래야 이런 작은 코르벳 / (우) CAM선에서 이륙 준비중인 허리케인]

선단에 대한 항공 호위가 여의치 않은 것은 대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북극해의 경우는 대서양과 달리 적 항공기가 날아온다는 점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항속거리의 한계 때문에 육상기에 의한 대잠초계나 선단 엄호는 불가능했고, 결국 궁여지책으로 도입한 것이 대서양 항로에서 사용하던 CAM쉽(상선 위에 화약식 캐터펄트를 얹고 허리케인 전투기를 발진시키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허리케인 전투기 몇 기로 수 십대의 적기를 막아낼 수는 없는 일이고, 한번 이륙하면 다시 배로 돌아올 수 없다는 한계 때문에 별 도움은 되지 못했죠. (*주 : 임무를 마친 허리케인 기는 근처에 육지가 있다면 그곳으로 날아가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가급적 아군함에 가까운 곳에 착수한 다음 구조를 기다렸음. 이때 북극해의 수온이 살인적이므로 빠른 시간 내에 구조되지 못하면 조종사는 사망함.) 선단에 대한 항공 호위가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1942년 후반 이후에 호위항모들이 북극해 항로에도 투입되기 시작하면서였습니다.

③ 북극해의 극한 환경
북극해는 항상 강풍이 불고 파고는 보통 20m를 넘나드는데다가, 항해 중에 북극에서 흘러내려온 빙산과 충돌할 위험도 많았습니다. 북극해의 차가운 물이 멕시코만의 더운 물과 만나면서 짙은 안개를 만들고, 눈도 그치지 않습니다. 또한 고위도 지역인 북극해에서는 하절기의 경우 해가 지지 않고 낮이 계속되므로 독일군이 공습을 가해오기에 유리했죠.


[북극해 항로의 배는 늘상 이런 모습을 달고 산다고 생각해도 좋을 듯]

게다가 기온이 항상 영하이므로 파도에 실려 배 위로 들이치는 바닷물은 순식간에 얼어붙게 되죠. 그러다 보면 갑판 전체가 얼음으로 뒤덮여 자칫 배의 중심이 높아져 전복될 위험도 있었고, 그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선원들은 파도를 무릅쓰고 갑판에 나와 얼음을 일일이 깨줘야 했습니다. 북극해 호송선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소설 『여왕폐하(HMS의 직역-_-;) 율리시즈호』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수록되어 있죠.

「북극해는 영하 33도에서도 여전히 얼지 않습니다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북극과 그린랜드의 얼음벌판에서 불어오는 영하 20도의 바람이 제아무리 두꺼운 옷이라도 메스처럼 찌른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500톤의 얼음이 갑판에 얼어붙는 것을, 5분 동안의 피부 노출이 동상을 의미한다는 것을, 배의 머리가 파도를 때릴 때 물보라가 얼음이 되어 얼굴을 때리는 것을, 손전등의 전지조차도 혹한에 제구실을 못하는 것을 당신은 아십니까. ......(중략)........ 게다가 며칠이고 잠을 못 자는 일, 몇 주일 동안 하루에 2, 3시간 밖에는 잠들지 못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당신은 알고 계십니까. 그 감각을 스타 제독은 아실까요. 전신의 신경과 뇌수의 모든 세포가 당장이라도 조각나버릴 것처럼 팽팽히 얼어붙고, 절규하고 싶어 광기로 가득한 구렁텅이에서 자신을 억지로 일으키려는 그 실낱처럼 절박한 감각. 제독은 그것을 알고 계시는지요.」


[저런 상태에서 근무서는 것도 쉽지 않죠]

더군다나 좋지 않은 것은, 만약 배가 피격되어 침몰할 경우 그 배의 승무원은 거의 살아남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수온이 비교적 높은 북대서양에서는 겨울만 아니라면 물에 빠져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지만, 항시 수온이 0도에 가깝거나 오히려 0도를 밑도는 북극해에서는 물에 빠질 경우 5분 안에 저체온증으로 인한 쇼크와 심장마비로 인해 사망하게 되죠. 혹시 운이 좋아서 침몰 직전에 구명보트에 옮겨 탄다고 해도, 곧바로 다른 배에 구조되지 않는다면 이 역시 북극해를 표류하다 길어야 10일 이내에 빳빳이 얼어붙은 시체로 변하게 될 뿐입니다.


[5분이 지나면 이렇게 되는거죠]


2. 북극해 호송선단 : PQ-13 선단의 이야기

앞의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기후나 해상 상태나 생활/근무 여건이 끔찍한 해역을 항해해야 하는 상황에다가, 거의 매일 적기의 폭탄이나 항공어뢰, 잠수함/수상함의 공격이 선단을 찾아오고 호위는 빈약하기 짝이 없으며, 결정적으로 배가 한번 침몰하면 거의 살아날 수 없는 환경이라 하겠습니다. 실제로도 상선 선원들이나 해군 장병들이 가장 기피하는 해역이 바로 이곳 북극해 항로였다고 하죠. 이번 장에서는 항해시에 겪게 되는 일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선단의 항해과정을 뒤따라가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PQ-13 선단은 1942년 3월 10일에 영국을 출발하여 3월 31일에 무르만스크에 도착하였으며, 이들은 북극해 항로가 시작된 이래 최초로 대규모 피해를 입은 선단이었습니다. 20척의 선박중 6척이 독일군에 의해 침몰했던 것이죠. 당시 선단은 상선 20척 및 호위함으로 소해정 2척, 대잠 초계용으로 개조된 트롤어선 2척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약간 거리를 두고 경순양함 1척, 구축함 2척이 호위함대로 따라붙고 있었으며, 선단과는 별도로 전함 2척(킹죠지V, 듀크 오브 요크), 순양전함 1척(레나운), 항모 1척(빅토리어스), 순양함 2척(켄트, 에딘버러), 구축함 11척으로 구성된 함대가 선단을 노리고 출항해올 티르피츠를 추적하기 위해 대기중이었죠.


[(좌) 레이캬비크에 정박중인 선단 / (우) 드디어 무르만스크를 향해 출항]

1942년 3월 10일에 스코틀랜드의 Loch Ewe를 출항한 선단은 16일에 아이슬랜드의 레이캬비크 항에 도착, 이곳에서 대기하면서 미국 동해안에서 항해해오는 다른 선박들과 합류했습니다. 이틀 후인 3월 18일에 선단은 레이캬비크에서 출항했으나 티르피츠가 출동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레이캬비크로 되돌아갔습니다. 20일이 되어 다시 레이캬비크를 출발한 선단은 6.5노트의 속도로 순조롭게 항해했으나 27일경 해상에서 악천후를 만나 선단 전체가 뿔뿔이 흩어져버리고 말았죠.

선박들은 소그룹으로 나뉘어 무르만스크를 향해 항해하다가 28일에는 Raceland와 Empire Ranger가 항공기의 폭탄에 의해 침몰했습니다. 몇 시간 후 선단을 추적중이던 독일 구축함 Z-24, 25, 26이 이들 선박의 생존자들 61명이 표류하던 것을 발견하여 구조하였고, 생존자들에게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남은 선박들의 위치를 알아낸 구축함들은 다시 추적을 개시하여 29일 새벽에 다시 Bateau를 포격으로 격침시켰습니다. 뒤늦게 호위함대의 경순양함 트리니다드가 달려와 구축함을 격침시켰으나 이 과정에서 자기가 발사한 어뢰에 피해를 입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죠.

[선단이 흩어진 이후의 이야기 : 상선 Induna의 경우]
흩어진 선단의 일부 그룹들이 이런 일을 겪는 동안 선단 기함을 포함한 다른 배들은 홀로, 아니면 2~3척 단위로 나뉘어 항해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5,000톤급 상선 Induna를 포함한 그룹이었습니다. 다음은 Induna의 2등 항해사인 E. Rowland가 당시의 체험에 대해 회상한 것을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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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3월 27일
“저녁 무렵, 우리는 흩어진 선단중 Effingham, Dunboyne, Mana 등 3척의 배와 합류했다. 우리의 그룹은 상선 6척과 소해정 1척이 되었고 현재 위치를 무선으로 보고한 후 이대로 무르만스크를 향해 항해를 계속하기로 했다.”

② 3월 28일
“날씨가 청명했고 가끔 눈발이 날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시계도 비교적 양호했다. 9시 30분에서 10시 사이에 독일의 급강하 폭격기가 습격해왔는데, 배에 실린 40mm 기관포와 기총으로 반격해봤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서 전혀 피해를 주지 못했다. 이후 오전 내내 수평선 부근에서 항공기가 선회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우리는 그것이 아군의 항공 엄호라고 생각했지만 낮게 깔린 구름 때문에 항공기의 모습을 보진 못했다. 13시 30분경, 갑자기 쌍발기 1대가(Bf-110으로 추정) 구름을 뚫고 80m의 고도에서 전속력으로 강하하더니 우리 배의 좌현 쪽에 있던 Ballot에 폭탄 2발을 떨어뜨렸다. 주변에 있던 모든 배들이 포문을 열었지만 적기는 유유히 선단 위를 선회하더니 우현 쪽의 Mana에도 폭탄을 떨어뜨리고는 수평선 저멀리 사라져버렸다.


[적기가 공습해올 때는 아마도 이런 광경이었을테죠]

Mana는 항해를 계속할 수 있었지만 Ballot은 속도가 점점 떨어지더니 뒤처지기 시작했다. 소해정 Silja가 Ballot 주변을 돌기 시작했고 곧 두 척 모두 눈발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Ballot의 선장은 선원들을 모두 구명보트로 탈출하도록 했다고 한다. 소해정 Silja가 16명의 선원들을 구조했으며, Ballot 자체는 어떤 방법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자력으로 무르만스크까지 왔다고 한다.“

③ 3월 29일
“오전 4시에서 8시 사이, 소해정 Silja에서 연료가 다 떨어졌으니 우리 배로 자기들을 예인해줄 것과 Ballot에서 구조해낸 생존자 16명을 수용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우리 배는 그렇게 했지만, 아침 무렵에 거의 빙판처럼 보이는 거대한 부빙군과 마주치는 바람에 멈춰서야만 했다. 다른 4척의 배들로부터 우리 배가 빠져나올 수 있는지 연락이 왔지만 우리는 자력으로 탈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응답했다. 그래서 선단의 나머지 배들은 우리를 남겨두고 항해를 계속했으며, 이로써 우리는 다시금 홀로 남게 되었다. 선장은 배를 천천히 후진시킨 다음 부빙군의 주위를 돌면서 빠져나갈만한 틈을 찾기 시작했고 마침내 15시경에 우리 배는 다시금 무르만스크를 향해 항해를 재개할 수 있었다.


[(좌) 부빙군에 맞닥뜨린 배 / (우) 강한 파도에 휩쓸리는 모습]

저녁 무렵부터 바람이 강하게 불기 시작하여 Silja를 예인하는 케이블이 지나치게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케이블의 길이를 30m 정도 늘렸지만 날씨는 점점 더 나빠지기만 했고, 마침내 20시가 되자 한계 이상의 장력을 견디지 못한 케이블이 끊어지면서 Silja는 파도 사이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즉시 후부 갑판에 몇 명의 선원들을 보내서 휘슬을 불고 고함을 치고 손전등을 비추며 Silja를 찾아보도록 했지만 그 배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는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수색을 계속했지만 시계가 극도로 나빴고 눈폭풍도 잦았기 때문에 결국 수색을 포기하고 다시 무르만스크로 향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구조대가 올 수 있도록 무선으로 Silja가 사라진 지점을 보고했는데, 나중에 들은 바로는 놀랍게도 소해정 1척이 파견되었고 31일쯤 그 배를 발견했다고 한다.“

④ 3월 30일
“날씨는 흐림. 시계는 보통이며 간간히 눈발이 날리고 바다는 거친 편. 풍향은 북북서 방향이었고 풍력계수는 6정도였다. 우리는 7시 20분경 10.5노트의 속도로 정남향으로 북위 70.55도, 동경 37.18도 지점을 항해하고 있었는데, 그때 1발의 어뢰가 배에 명중했다. 아무도 어뢰의 항적을 발견하지 못했고 사전에 어떤 경보도 울리지 못했다. 어뢰는 우현 5번 선창에 명중했는데 그곳에는 가솔린이 가득 차 있었다. 금세 화재가 발생했고 새빨간 불꽃이 갑판 위까지 올라오다가 선체에 격렬한 충격을 주며 폭발을 일으켰다.


[선박의 침몰과 탈출]

곧 ‘총원 구명보트로 이동하라!’ 라는 신호가 떨어졌는데, 나는 기밀서류들을 소각하느라 탈출에 조금 늦고 말았다. 우리 배는 각 현당 구명보트 1척과 작은 고무보트 1척을 갖고 있었는데 비상시 내가 탑승하도록 정해진 곳은 우현쪽 구명보트였다. 막상 도착해보니 보트는 이미 꽉 차있었지만 나는 몸을 우겨넣다시피 해서 올라탔고 보트는 곧 바다에 내려져서 배로부터 180m 가량 떨어진 곳까지 벗어났다. 그때 배의 우현으로부터 300m쯤 떨어진 곳에서 독일 잠수함이 수면으로 부상했고 2번째 어뢰를 발사했다. 어뢰는 4번 선창 부근에 명중했고 우리 배는 사방 천지에 파편을 날리며 폭발한 후 후미부터 빠른 속도로 가라앉고 말았다. 수밀문이라고는 기관실 입구에 하나밖에 없었던데다 그나마도 탈출하는 와중에 경황이 없어서 미처 닫지 못했던 것이다. 배가 완전히 가라앉은 후 우리는 좌현쪽 구명보트를 찾아봤지만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⑤ 표류 기간 (3월 31일 ~ 4월 2일)
“구명보트로 옮겨탄 후 우리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육지를 향해 이동하는 것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바람이 우리의 뒤쪽, 그러니까 육지방향을 향해 불었기 때문에 항해를 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된 것도 어디까지나 우리가 갖은 고생 끝에 보트의 마스트를 세우고 돛을 매달게 된 다음의 일이었다. 당시 보트 안에는 32명이 있었는데 그중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구명보트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표류 첫날밤이 지나가는 동안 날씨는 끔찍스러울 정도로 추웠고, 누군가가 보트 안에 있던 위스키 7병을 꺼내 주변에 돌리기 시작했다. 나는 한 모금 정도 밖에 마시지 않았지만 몸을 덥힌다고 조금 과하게 마셨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불행히도 모두들 그날 밤 안으로 얼어죽고 말았다. 우리는 그들의 시신을 보트 가장자리에 눕혀 놓았다. 우리는 3일동안 표류했는데 첫날밤(3월 30일)에 7명이 죽은 것을 시작으로 하루당 1~2명이 죽었고 마지막 날에는(4월 2일) 4명이 죽었다.


[(좌) 북극해에서의 표류 / (우) 잠들면 이렇게 되는거죠]

날씨는 정말 추웠고 모두들 자기의 손이나 발, 그리고 일부는 얼굴에도 동상을 입고 있었다. 보트가 조금씩 새는 바람에 펌프나 양동이를 동원해서 물을 퍼내야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의 얼음이 보트 표면을 파손시키는 것은 어쩔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발은 늘상 물에 잠겨 있었다. 나는 다행히도 신발 위에 두꺼운 가죽제 부츠를 덧신고 있어서 별로 발이 시렵거나 하진 앟았지만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은 모두들 발에 지독한 동상을 입고 말았다.

보트에는 페미컨, 분유 사탕, 비스킷, 초콜렛 등 비상식량과 식수가 저장되어 있었는데, 음식은 질이 좋았지만 물은 차가운 날씨 때문에 벽돌처럼 단단히 얼어붙어 있었다. 우리는 얼음조각을 입 속에 넣고 갈증을 달래거나 얼음을 잘게 부숴서 씹어먹었다. 나는 작은 조각을 한움큼 삼키는 것보다 큰 것을 녹여먹는 쪽이 더 낫다는걸 알았지만 어느 방식도 갈증을 해결하는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모두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초콜렛이었고 그밖에 하루에 1번 분유사탕과 비스킷 몇 조각이 배급되었다. 단, 페미컨은 추위 때문에 얼어있었고 우리의 손아귀 힘으로는 그걸 먹을만한 크기로 쪼개는 것이 불가능했다. 모두들 많이 먹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배가 고프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모두들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좌) 당시 구명보트에 비치되던 비상식량 / (우) 저것이 페미컨입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떡갈비랄까요?]

우리는 몸을 녹이기 위해 교대로 노를 저었지만 추위 때문에 손이 너무나 곱아 있어서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노에 매달리는 정도였다. 4월 2일 오후쯤, 우리는 전방 6km 부근에 등대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리로 노를 저어 가려고 했지만, 다들 몸 상태가 너무 약해져서 곧 그런 희망을 버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머리 위로 소련 항공기 3대가 해안 방향으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남은 힘을 다해 깃발을 흔들었고 그들을 보트 위를 세 번 선회한뒤 육지로 날아갔다. 1시간 뒤인 20시경, 소련 소해정 1척이 도착해서 우리 보트의 생존자들을 수용했다. 그때 당시 우리는 간신히 설 수는 있었지만 걸어다닐 수는 없을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고 배에 올라갈 때 러시아인 선원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그들은 우리를 매우 정중하게 대해줬지만 보트에 있던 기구들-육분의, 망원경 등-을 모두 압수해갔다. 그리고나서 러시아인들은 우리를 따뜻한 식당에 모아놓고 옷을 모두 벗겨버리더니 두꺼운 모직제 코트로 우리를 감싸주고 코코아와 보드카로 몸을 녹이게 했다.

무르만스크로 가던 도중 좌현쪽에 있던 구명보트의 생존자들이 구조되었다. 이 보트에는 9명이 남아있었는데, 그중 2명은 육지에 도착한 후 병원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우리는 다음날 아침(4월 3일)에 무르만스크에 도착했는데 앰뷸런스가 대기하고 있다가 우리를 병원으로 실어갔다. 병원에 도착한 직후 병원 사람들이 우리가 소해정으로부터 받은 모직제 코트들을 모두 벗기고 환자복만을 남겨놨다. 아무도 옷을 갖고있지 못했고, 뒤에 영국해군의 군의관이 우리를 진찰했을 때 나는 그에게 러시아인들이 우리 옷과 보트의 도구들을 가져간 것에 대해 보고했다.
(*주 : 옷은 결국 안돌려주고 나중에 영국으로 귀국할 때 소련해군 하복만 내줬다고 함.-_-;)

우리 배에는 군인을 포함해서 50명의 승무원이 타고 있었으며, 도중에 Ballot호의 생존자 16명을 받아들여 모두 66명이 타고 있었다. 그런데 구명보트 안에서 15명이 죽었으며 2명이 육지의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고 그 외에 27명이 배가 침몰하는 과정에서 죽거나 실종되어, 총 44명이 죽거나 실종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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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Q-13 선단의 배 20척중 6척이 상실되었으며 2척은 항공기, 2척은 잠수함, 1척은 구축함, 그리고 나머지 1척은 정박중 공습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북극해 호송선단의 위험율은 나날이 높아져만 갔으며 PQ-15 선단은 26척중 4척, PQ-16 선단은 36척중 8척이 격침되었습니다. 이후 1942년 7월 1일에는 악명높은 PQ-17 참사가 일어남으로써 38척의 선박중 24척이 격침되었으며, 2달 뒤인 PQ-18 선단에서는 44척중 13척이 침몰하는 결과를 낳았죠. 결국 PQ-18 이후 영국은 약 3개월간 호송선단 운용을 중지했다가 3개월 뒤인 1942년 12월부터 코스를 바꿔서 선단 파견을 재개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과 달리 하절기에는 선단 운용을 중지한다는 방침이 내려졌고, 북극해 호송선단이 완전히 안전하게 이 해역을 지나게 된 것은 1943년 말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1941년 9월부터 1945년 5월에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연합국이 이 해역에서 상실한 상선은 90~103척에 달하며 830여 명의 상선 선원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다른 해역에 비하면 사망자의 총 수가 그다지 많지 않은 듯하지만 저곳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어떤 환경에서 최후를 맞이했는가를 생각해보면 당시 북극해 항로에 투입된 상선과 군함의 승조원들이 유서부터 남겼다는 기분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참고문헌 / 자료 출처]
- http://www.eyewitnesstohistory.com/convoy.htm
- http://www.warsailors.com/convoys/pq13induna.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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