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해군이야기

영국 해군과 럼(Rum)

구름위 2012. 12. 22.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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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Rum)이란 사탕수수 즙과 당밀을 원료로 하여 약 40도 이하로 증류한 술입니다. 생산지로는 카리브해 연안이 가장 유명하지만 보통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생산하며 가격도 아주 저렴한 축에 들죠. 우리나라에서는 ‘럼’이라고 하면 보통 ‘바카디’나 칵테일 원료를 떠올리기 쉽고, 스트레이트로 마시긴 좀 그렇다거나 ‘불쇼 할 때 쓰는 술-_-;’ 이라는 평판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들르시는 분이라면 해양모험물 등에도 어느 정도 관심이 있으셨을테니, 범선 시대를 다룬 해양물 소설이나 해적 영화에서 선원들이 종종 럼주를 물처럼 들이키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기억하실겁니다. 아니면 이젠 추억거리가 되어가는 국산양주 ‘캡틴큐’(이 녀석도 럼주입니다^^;)의 마스코트가 애꾸눈 선장이었다는걸 기억하는 분이 있으실지도 모르겠군요. 그만큼 럼주는 ‘선원의 술’ 혹은 ‘해적의 술’ 이라는 이미지도 널리 퍼져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럼과 해양세계라는 측면에서 누구보다도 중심이 되었던 것은 바로 영국해군이었습니다. 오래된 사진들을 보다 보면 가끔 영국 수병들이 양동이나 머그컵 등을 들고 갑판 위에 한 줄로 서서 뭔가 배급받고 있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Daily Rum Ration」이라고 하여 1730년대부터 시작되어 1970년 8월까지 지속된 공식적인 럼 배급제도였죠. 영국해군의 수병과 준사관, 하사관들은 점심 때 한 번, 저녁 때 한 번, 이렇게 하루에 2회씩 0.5파인트(약260~280cc)의 술을 받아 마실 수 있었습니다. 일반적인 관념으로 보자면 군대에서 공식적으로 술 배급을 준다는 것부터가 의아하지만, 그보다도 그런 관습이 현대 해군에까지 지속될 수 있었다는 것 또한 흥미로운 일이죠.

그런 이유로 이번 글에서는 영국해군과 럼의 관계에 대해 다뤄볼까 합니다.


1. 럼(Rum)의 기원

럼의 원료가 되는 사탕수수는 본래 인도네시아 지역이 원산지였습니다. 그것이 이슬람 상인을 통해 인도와 중동을 거쳐 지중해 지역에 전파되었고, 유럽인들의 신항로 개척시대가 도래하자 다시금 스페인 인들에 의해 카리브해의 서인도 제도 지역에 전파되어 대규모 사탕수수 경작지가 형성되었죠. 이후 사탕수수를 원료로 하는 설탕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설탕 제조과정에서 생겨나는 부산물인 당밀(Molasses)도 늘어나게 되었고, 17세기 초쯤 누군가가 이것을 발효시켜 술을 만들어볼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발효된 당밀술을 증류하여 불순물과 잡티를 걸러내보자는데까지 이르게 되었고 이것이 오늘날의 럼(보다 정확히는 다크 럼)으로 발전했죠.


[사탕수수 → 당밀 → 럼]


[다크 럼이 과거 범선시대의 직계 후손이며, 화이트럼은 주로 칵테일 원료 등으로 사용됨]

초창기의 럼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은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럼은 80proof(약 40도)를 표준으로 삼는데, 당시의 럼은 55도에 달하는 독한 물건이었고 바로 마시기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죠. 바베이도스 섬에 남겨진 1651년의 한 문서는 럼에 대해 “이 섬에서 만들어지는 가장 주된 술은 럼블리온, 다른 말로 Kill-Devil 이라고도 불리는 술이다. 이것은 사탕수수를 정제한 찌꺼기로 만들어지는데 지독하게 독하고 끔찍한 술이다” 라고 언급하고 있죠. 럼은 재료의 특수성(설탕을 정제하고 남은 찌꺼기라는 인식) 때문에 고급술로 간주되지 않기도 했고 값싸게 만들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주로 고된 육체노동에 시달리는 하류층이나 선원,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의 노예 노동자들이 한 잔 술에 취해 잠깐동안 시름을 잊는데 사용되곤 했습니다.


[18세기의 사탕수수 농장과 럼 증류소]

18세기에 들어서면 선원들을 통해 북미의 뉴 잉글랜드 지역(훗날의 미국)에도 럼이 전파되어 증류업이 성행하게 되었고 이는 악명높은 노예무역의 수단으로써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서인도 제도로부터 실어온 당밀을 북미에서 럼으로 가공한 후 서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매매하는 결제수단으로 활용했고, 이렇게 실어온 노예들을 다시 서인도 제도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 투입하는 식이었죠. 이런 용도 외에도 럼은 북미와 호주 등 영국의 식민지에 널리 퍼져 하층민의 술로써 자리를 잡았습니다.


2. 영국해군의 럼(Rum) 도입

그렇다면 럼이 영국 군함에 도입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요? 그것을 서술하기 이전에 우선  범선 시대의 항해에 왜 주류가 반드시 필요했는지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수분을 섭취하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며 사람은 바닷물을 마시지 못하므로 대양을 항해하는 선박은 반드시 충분한 양의 식수를 싣고 다녀야 한다는 것 또한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부패하지 않을 것 같은 물도 항해가 길어짐에 따라 물이끼가 생기고 점차 끈적끈적 해지며 고약한 냄새가 나서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상태로 변하게 되죠. 그래서 선박들은 물 외에도 수분을 섭취할 수 있는 수단으로써 물에 비해 쉽게 변하지 않는 각종 술들을 싣고 다녔던 것입니다.


[물이 떨어져 가는 배의 참상 (영화 ‘마스터 앤 커맨더’)]

17세기 당시 영국해군이 물과 함께 싣고 다녔던 것은 주로 맥주였습니다. 그런데 대서양 항로가 열리면서 항해기간이 2~3개월 단위까지 늘어나자 곧 맥주 또한 그렇게까지 오랫동안 버티지 못한다는 것이 드러나기 시작했죠. 가장 진한 맥주조차도 몇 주가 지나면 시어지기 시작했고, 선원들은 맥주가 변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소모한 다음 썩어가는 물에 맥주나 와인을 타서 조금이나마 악취를 줄인 뒤에 마시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근본적으로 맥주 자체가 도수가 약한 술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납득이 가는 일일테지요. 물론 프랑스 연안이나 지중해 등에서 작전하는 선박은 현지로부터 브랜디, 진, 와인 등을 조달할 수 있었지만 이들은 맥주보다 값이 비싸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영국의 해상권이 커지고 군함의 항해거리가 길어질수록 식수의 변질과 부족 문제는 더더욱 두드러졌고, 값이 싸면서도 오래가는 술에 대한 요구 또한 절실해져갔죠.

(※주: 진은 저렴한 술이었지만, 당시 사회에서 하층민에게 미치는 해악이 너무나 컸기에 이를 보급용으로 쓰는 데 대해 저항감이 있었습니다.
 -코스모스 님의 지적으로 2010.01.23에 수정-)


1655년, 영국해군은 스페인령의 자메이카 섬을 공략하여 서인도 제도 지역에 본격적인 거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곳 자메이카에서는 유럽과 달리 맥주도 와인도 브랜디도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대신 이곳이 사탕수수 산지인만큼 럼은 넘쳐날 정도로 공급받을 수 있었죠. 자메이카 점령 이전부터 카리브해에서 활동하던 영국 해적이나 사략선 등에 의해 럼은 영국인들에게도 비교적 잘 알려져 있었고, 이 ‘하층민과 선원의 술’은 1687년부터 영국 군함에 공급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 럼이 영국해군 전체에 확산된 것은 아니었고 서인도 제도 지역에 주류하는 함대에서만 현지조달 형식으로 배급되는데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죠.


[영국의 자메이카 점령]

하지만 럼 공급이 거듭되면서 서서히 맥주나 와인이 따라잡을 수 없는 럼만의 장점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서두에도 언급했듯이 당시의 럼(다크 럼)은 도수가 55도에 육박했기 때문에 항해기간 동안에 절대로 변질되지 않았고, 오히려 묵혀둘수록 더 맛이 좋아졌던 것이죠. 게다가 하층민의 술답게 가격도 비싸지 않았습니다. 이런 장점에다가 서인도 제도에 진출한 영국인 사탕수수 농장주 및 증류업자들의 로비에 힘입어, 드디어 1731년에 럼이 해군규정집에 공식적인 배급품으로 등재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영국해군이 오랫동안 바래왔던 ‘싸고 오래가는 술’이 드디어 수중에 들어왔던 것이죠.

(※주: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 영국 해군에서는 일일 배급표 상으로 하루에 맥주 1갤런을 지급하도록 되어 있었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맥주의 지급이 곤란할 경우(항해 기간이 오래 돼서 맥주가 시어졌다든가 할 때) 그 "대체품"으로써 와인 1파인트(0.5리터) 또는 도수 높은 술 0.5파인트(spirits, 0.26리터)를 지급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코스모스 님의 지적으로 2010.01.23에 수정-)


럼은 장교를 제외한 준사관 이하 승조원들에게만 지급되었고(단 20세 이상인 자에게만) 하루에 0.5파인트(약 260~280cc)씩을 점심과 저녁으로 2번에 나누어 배급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35cc 양주잔으로 환산하면 대략 8잔 정도가 나오는군요. 55도짜리 술을 하루에 8잔이나 준다니 눈이 번쩍 뜨일 판이지만 그래도 명색이 군함인데 저렇게 해도 괜찮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하는군요. 뭐 사실 이 문제는 당시 해군 고위층에서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3. 술에 물 타기 : 그로그(Grog)

범선시대의 선원들은 항해중에 종종 돛줄에서 떨어지거나 파도에 휩쓸리곤 했고 빈약하고 질 낮은 음식물에 기대어 연명해야 했으며, 뱃일로 인해서 생기는 온갖 불구 및 괴혈병, 발진티푸스 등의 질병들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또한 엄격한 선상규율과 선장의 학대-악명높은 고양이 채찍(cat o' nine tails)-등도 배에서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곤 했죠. 앞에서는 수분 섭취수단으로서의 술에 대해 언급했습니다만, 범선 시대에 있어서 술의 또다른 기능은 저렇듯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게 해주는 아편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1700년대의 선원들이 남긴 다음의 문구들은 선원문화에서 술이 얼마나 중요한 부분이었는가를 간접적으로 시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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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뱃사람의 육체와 정신이 함께 붙어있게 해주는 접착제이다.”
“선원들은 차고 음습한 곳에서 다른 생필품의 부족을 메꾸기 위해서 이따금 독한 술에 탐닉하는 것 같다.”
“선원에게 좋은 술이란 옷보다 더 좋은 법이다.”

‘그러니 선원들이 좋은 술을 얻으면
잠시나마 하늘에 올라앉은 느낌
배고픔도 추위도 병도 모두 사라진다네
세상 근심도 함께
그러니 우리는 걱정할 것이 없네‘
(1730년대에 선상에서 불린 노동요)

(마커스 레디커, 박연 譯,『악마와 검푸른 바다 사이에서』, pp. 180~181 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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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밤에 벌어지는 선원들의 술자리]

선원들과 수병들이 술에 집착했던 반면, 해군의 고위층들은 기본적으로 수병들에 대한 술 배급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음용수가 필요했기에 규정에 따라 하루에 2번씩 럼주를 배급하긴 했지만, 다른 대체수단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술을 배급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죠. 그들의 생각으로는, 독한 술이 수병들을 나태하고 게으르게 만들며 상관에 대해 무례한 태도를 취하게 하고 기강을 흐트릴 것으로 보였던 것이죠. 불행히도 이런 생각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는데, 배급받은 럼을 마시지 않고 1병 분량이 될 때까지 모아놨다가 한꺼번에 마시고 고주망태가 되는 수병이 있는가 하면, 술에 취해 상관의 명령을 거역하거나 인사불성이 되어 근무 때를 놓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함장 이하 장교들은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규율과 체벌을 강화했고, 그러면 수병들은 이 고통을 견디기 위해 한층 더 음주에 집착하는 식의 악순환이 벌어지곤 했죠.

이무렵 에드워드 버논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시대의 해군 제독치고는 나름대로 말단 수병들의 처우개선에도 관심을 가졌다는 제독이 있었습니다. 버논은 당시 골칫거리였던 수병들의 만취가 바로 독한 술을 그대로 배급했기 때문이라고 판단, 술에 물을 타서 같은 양만큼 배급한다면 술주정이나 기강해이도 줄어들고 그에 따른 가혹한 체벌도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1740년 8월 21일, 버논 제독은 예하 함장들에게 다음과 같은 취지의 명령을 하달했죠.

“앞으로는 매일마다 럼을 배급할 때 ½파인트의 럼과 2파인트의 물을 혼합할 것. 수병들이 술의 양을 속이거나 물을 섞지 않은 럼을 받아가지 않도록 당직사관이 갑판에서 직접 배급과 물 타기를 감독하도록 하고, 물탄 럼이 좀더 맛있어지도록 라임쥬스와 설탕을 추가적으로 배급할 것.”


[(좌) 'Old Grogram', 에드워드 버논 / (우) 18세기의 그로그 배급 광경]

수병들이야 당연히 이런 조치를 환영할 리가 없었고 그들은 곧 버논 제독의 별명인 Grogram(방수망토의 일종. 버논이 항상 Grogram을 착용하고 다녀서 이런 별명이 붙었다 함)을 본따서 물탄 럼에 ‘그로그(Grog)‘ 라는 이름을 붙였죠. 어쨌거나 수병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그로그는 완전히 정착되어 1756년에는 해군 규정집에 정식으로 ’럼을 배급할 때는 물을 섞을 것‘ 이라는 문구가 등재되었죠. 그리고 이때부터 낮 12시와 저녁 6시만 되면 당직사관이 해병대원과 함께 럼을 꺼내와서 'Grog Tub' 라는 통에 담아 물을 섞고, 수병들이 양동이와 컵을 들고 그 앞에 한 줄로 늘어서는 풍경이 일상화되었습니다.

(*주 : 오늘날 우리가 쓰는 ’그로기(groggy) 상태‘란 말 역시 그로그를 마시고 취해서 비틀대는 사람을 빗댄 것이 어원이라고 합니다.)

버논 제독의 조치 이후에도 해군 당국은 수병들에 대한 술 배급을 줄이려는 시도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한때는 럼과 물의 비율이 1:5까지 옅어진 적도 있었고 1824년에는 저녁 배급을 폐지하고 대신 차와 설탕을 지급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술대신 마실 것이 있다면 굳이 술만 배급할 이유가 없다는 이유에서였겠죠.

이런 공식적인 배급감축 외에도 각 배의 보급관이 개인적으로 저지르는 횡령에 의해 수병들의 배급량이 줄어드는 일도 잦았습니다. 이를테면 파운드와 온스의 환산 비율이 모호한 것을 이용하여 보급관이 부수입을 챙기는 경우도 있었고 (당시 1파운드=16온스였으나 일부 보급관이 1파운드를 14온스로 환산하여 남는 부분을 자기가 챙겼음), 럼의 경우에는 배급시에 물을 섞는다는 것에 착안하여 애초에 통에 담기 전부터 물을 섞은 다음 남는 양을 빼돌리는 수법 등이었죠.


[(좌) 횡령한 물품장부를 살피는 보급관 / (우) 지나치면 선상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죠]

(*주 : 이런 부정을 막기 위해 취해진 것이 다음과 같은 방법이었습니다. 약간의 럼을 바닥에 뿌린 후 그 위에 화약 한 줌을 얹고, 돋보기로 햇빛을 쪼입니다. 럼이 약한 불꽃을 내면서 타오르면 정상농도, 불이 붙지 않으면 물을 섞은 것으로 간주하여 보급관을 처벌했고, 럼과 화약이 폭발(!)하면 농도가 너무 짙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보관중인 럼이 폭발해서 배가 침몰한 경우도 있다고 하니 그저 덜덜덜...-_-;)

1850년에 이르면 영국 사회에 빅토리아식 도덕주의가 완전히 자리를 잡음에 따라 이젠 해군뿐만이 아니라 사회 일반에서도 절주(節酒)에 대한 압력이 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해군 당국은 이를 계기로 그로그 배급을 완전히 폐지하려고 했지만 오랜 난상토론과 수병들의 저항 끝에, 결국 일일 럼 배급량을 ⅛파인트(약 70cc)로 줄이는 한편 럼과 물의 혼합비를 1:3으로 하는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죠. 그 외에 술을 마시지 않는 수병에 대해 한달에 1실링 7페니의 수당을 지급하는 등 나름대로 금주에 대한 유인책이 강구되기도 했습니다.


4. 럼 배급제도의 종말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함내 거주설비의 개선, 급료 인상, 악형의 금지 등 수병의 처우에 대한 대폭적인 개선이 이뤄지자 술에 대한 수병들의 의존도는 점차 낮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사관 중에는 자기 몫으로 받은 럼(1850년 이후 준사관과 하사관들은 물을 섞지 않은 럼을 받도록 되어 있었음)을 마시지 않고 병에 담아뒀다가 내다파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했으며 럼 배급을 받지 않고 현금 수당을 챙기는 사람의 비율 또한 과거에 비해 다소 늘어났습니다. 또한 이 시대의 수병들은 옛날의 선배들과는 달리 이 독한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죠. 몇몇 젊은 축은 1:3의 비율로 물을 탄 그로그조차도 독하다고 여기기도 했습니다. 다음 내용은 2차대전중 구축함 HMS Lightning에서 근무했던 George Gilroy라는 사람의 회고록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수병은 물을 섞지만 하사관은 순수한 럼을 마실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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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만약 (그로그 배급시간 때에) 당직중이었다면 당신은 자기 몫의 그로그를 받기 위해 뛰어온 다음, 다시 자기 위치로 돌아가면서 그 술을 단숨에 재빨리 목구멍으로 넘겨야만 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짓을 몇 번이나 했는데, 물을 탔음에도 불구하고 럼이 너무나 독해서 그것을 목구멍으로 넘긴 뒤에 한동안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또 한번은 젊은 친구 하나가(아마도 리차드 바나드였을 것이다) 럼 창고를 청소하라는 명령을 받은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창고에 가득 찬 럼 향 때문에 30분 이상 머무르는 것이 금지돼있었다. 어쨌거나 그는 완전히 잊혀졌다가 나중에야 럼 창고에서 완전히 고주망태가 되어 뻗어있는 상태로 발견됐다. 그 불쌍한 친구는 곧바로 영창에 수감되었지만, 뒤에 의외의 사실이 드러나면서 풀려나게 되었다. 그는 술병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지만, 단지 창고에 가득찬 럼 향 때문에 만취해버렸던 것이다. ....(후략)

(
http://freespace.virgin.net/e.gilroy/life_aboard.html 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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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자인 수병들에게 있어 럼 배급이 ‘주니까 고맙긴 하지만 옛날처럼 그렇게까지 절실하지는 않은 것’이 되었다면, 공급 측면에서도 과거처럼 윤리나 기강 차원이 아니라 보다 절실한 이유로 럼 배급을 제한해야 할 필요성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증기기관으로 대표되는 과학기술의 발달 때문이었죠. 증기선이 도입된 이후 군함의 병기와 장비는 나날이 복잡하고 정밀해져 갔고 옛날과 달리 수병 1명의 사소한 실수가 함 전체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1930년대 중반에 이르면 비록 공식적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항공계통과 기관&정비 직별의 승조원에게는 정오의 럼 배급을 건너뛰고 일과 종료 후인 18시의 배급 때 일괄해서 지급하는 관행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인식은 2차대전 종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공론화되기 시작했고 1969년부터 국교회와 의회를 중심으로 하여 럼 배급제도의 존폐 여부를 놓고 ‘전통 vs 윤리&기능적 필요성’의 구도로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국해군 당국은 1970년 7월 31일을 끝으로 럼 배급제도를 폐지한다는 결정을 내렸죠. 과거와 같이 폭동을 일으키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7월 31일 정오가 되자 세계 각지에서 항해중인 모든 영국 군함에서는 마지막 럼 배급을 기념하여 각자 나름대로 기념식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럼을 마신 후 모두 일제히 컵을 바다로 던지는 배도 있었고 배급이 끝난 후 그로그 통(Grog Tub)을 정식 장례 절차에 따라(위병과 예포까지 동원하면서) 정중히 장사를 지낸 배도 있었다고 하네요.


[최후의 만찬 : 1970년 7월 31일(Black Tot Day)의 모습]


[최후의 럼 배급 기념식 : (좌) 해병들의 럼 운반 / (우) 그로그 통을 장례 지내는 수병들]


[럼 배급 폐지를 바라보는 2가지 시각 : (좌) 해군 당국의 관점 / (우) 수병들의 관점]
: 'Demon Rum' 이라는 문구까지 쓴걸 보니 럼이라는 악덕이 사라져서 시원한 모양이군요^^;


한편 영국해군이 럼 배급제를 폐지한 것을 시작으로 같은 관습을 지녔던 영 연방 국가들 또한 럼 배급제를 폐지했는데, 호주가 1970년에, 캐나다가 1972년에 각각 럼 배급을 중단하였고 뉴질랜드 해군이 가장 마지막으로 1990년 3월에 럼 배급제를 폐지함으로써 260년 이상 지속되어온 럼 배급제도는 해군에서 완전히 종말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5. 마치며...

군 시절, 단체 회식 등으로 상급부대에서 몇 번 술을 배급받아 본적은 있었지만 모두 비공식적이거나 이벤트성이 짙은 것이었고, 군대에서 매일 매일 공식적으로 술 배급이 나온다는 개념은 글을 마친 지금까지도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공식적으로 행해진데는 어떤 ‘필요성’이 작용했을 것이고, 또한 그것이 260년간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에는 필요성 외에도 ‘관성’ 혹은 ‘당국과 수병집단간의 힘겨루기’ 등등이 작용했기 때문이겠지요. 주변에서 비슷한 경우라면 아마 군에서 지급되는 면세 담배를 들 수 있지 싶은데, 이 경우는 당국이 없앤다 없앤다 말은 하면서도 흡연장병을 고려했는지, 혹은 지방세 수입 때문인지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하더군요. 지금은 어떻게 됐을런지..

그 다음으로 나중에라도 다시 짚고 넘어갔으면 하는 문제가 있는데, 바로 미 해군과 영국과의 차이입니다. 영국해군과 비슷하게 럼 배급의 전통을 가졌던 미 해군은 1862년 9월에 수병에 대한 배급을 완전히 중단했고 이후로도 해군 내에서 점차적으로 음주의 여지를 좁혀가더니, 1914년에는 아예 선상이건 육상기지건 간에 영내에서는 절대 술을 마시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을 제정하여 오늘날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양국 모두 당국이 술 배급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졌고 최종적으로는 폐지를 시도했지만, 결과적으로 영국은 1850년의 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1970년까지 술 배급을 지속한데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함상에서의 음주가 자유로운 반면, 미 해군은 전면 금주 정책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비슷한 역사적 배경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영국의 방향이 달라진 이유는 무엇인가?’ 혹은 ‘미국이 했던 것을 영국은 어째서 하지 못했는가?’ 에 대한 의문은 아직도 남아있고, 추후에라도 음주에 대한 당시 영미 사회의 시각 차이, 수병의 저항 강도 등과 관련하여 좀더 파고들어볼까 합니다.


p.s. 럼의 별명중에 ‘Nelson's Blood' 라는게 있습니다. 트라팔가 해전에서 전사한 넬슨 제독의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럼 통에 담아서 영국까지 돌아왔는데, 막상 통을 열고보니 럼이 한 방울도 들어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연인즉슨, 빅토리호의 수병들이 몰래몰래 술통의 럼을 다 빨아마셨다는 것이고 그래서 럼에 ’Nelson's Blood' 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전설or일화죠. 그런데...... 다 읽고나서 생각해보니 과연 그런 술을 먹고싶을런지? (우읍...-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