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오지(隔奧地) : 해안이나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에 있는 땅. 외진 곳.
저는 의 군 생활 중 첫 번째 절반을 GOP... 그러니까 TV에서 가끔 자료 화면으로 나오는 휴전선 철책에서 보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GOP 남단에는 민간인의 출입을 제한하는 민통선이 있기에 GOP와 민통선 사이의 공간에는 드문드문 펼쳐진 논밭 정도가 있을 뿐 건물이나 차량, 사람 등 일반 사회나 문명세계의 정취를 느낄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시야를 돌려 전방을 바라보면 이 또한 몇 km의 비무장지대가 펼쳐져 있고 그 뒤 저멀리 북한 지역의 산이 흐릿하게 보일 뿐이죠. 앞도 뒤도 적막하고 오로지 10~20명 단위의 사람들끼리 작은 소초에 모여 살아가는 육지위의 섬, 그곳이 GOP입니다.
[(좌) 처음 투입됐을 당시는 꼭 이런 분위기였죠 / (우) 밤마다 머나먼 불빛을 바라보며..]
[(좌) 가을에는 철새에 넋을 잃기도 하며 / (우) 겨울에는 눈과 칼바람에 시달립니다]
처음 GOP에 투입됐을 때는 사방에 보이는 황량함에 놀라서 ‘이런데서 어떻게 1년동안이나 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배치된 곳이 일반적인 산악 GOP가 아니라 평야 한복판이었습니다. 태어나서 지평선이란걸 처음 봤음-_-;) 밤이면 후방 저멀리 빛나는 민가와 읍내의 불빛을 보고 가족과 사회를 그리워하기도 했죠. 지금 같은 초겨울이 되면 북방에서 날아온 철새들이 바로 머리 위를 지나 근처 논밭에 내려 앉아 쉬기도 했고, 한겨울에는 평지 지역이라 바람을 막아줄 것이 아무 것도 없어서 칼바람에 시달리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눈이 올 때면 몇 안되는 행정반 인원들끼리 제설작업을 한다고 난리를 피우기도 했었죠. 게다가 외출/외박이나 면회도 불가능. 밖으로 나올 수 있는건 오로지 휴가에 의해서만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1년에 평균 1~2회)
그런 곳에서 1년동안 살면서 느낀건 ‘사람이 그립고 바깥 세상이 보고싶다’는 감정이더군요. 한편으로는 문명세계와 떨어져 나 홀로 이런 적막한 곳에 고립돼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도시생활에선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풍부한 자연환경에 경이감을 느끼기도 하고.. 게다가 평소에는 그렇게까지 신경쓰이진 않지만 가끔씩 상황이 걸리면 여전히 평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긴장하게 만드는 북한군의 존재도 빼놓을 수 없었죠. 그런 복잡하고 모순된 감정을 아마도 ‘격오지 정서’ 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옛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고향을 떠나와 북방의 유목민들로부터 장성을 수비하는 병사나 과달카날 섬에 진주한 미 해병대원의 심정에도 어떤 공통된 면이 있지는 않을까요. 당장 2차대전 시기만 해도 남태평양의 섬들, 버마, 만주/외몽고, 북아프리카, 알래스카/그린랜드/아이슬랜드, 노르웨이 북부, 소련 북부 등 문명의 영향이 희박했던 전장은 많았습니다. 그런 곳에서 싸웠던 사람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요?
1. 알류션 열도 : 개요
알류션 열도. 북미 대륙 알래스카 지역을 달리던 산맥이 바다 속에 잠기면서 그 여세를 몰아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섬을 이루어 놓은 곳. 북위 50~53도에 걸쳐 동으로부터 유니마크, 유나라스카, 움나크, 애트카, 아다크, 키스카, 그리고 가장 서쪽 끝의 애투 등 7개의 주된 섬과 그 외의 크고 작은 수십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 지역입니다. 알래스카 준주의 영역에 속하여 미 본국의 일부라고는 하나 섬 자체는 미 본토 서해안이나 하와이로부터도 3,000km 이상 떨어져 있는 (그리고 가장 서쪽 끝의 애투는 오히려 일본 쪽에 더 가까운) 북방의 오지이죠.
알류션 열도는 화산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각 섬의 대부분을 뒤덮고 있는 것은 화산재와 바위, 그리고 깎아지른 듯한 산입니다. 식생은 빈약하기 짝이 없으며 유나라스카 섬의 더치하버 항구 주변에 전나무 몇 그루가 드문드문 서 있을 뿐이죠. 숲이 없기 때문에 건축에 필요한 목재를 구하기도 어렵고 난방에도 곤란한 점들이 많습니다. 저지대 지역은 1미터 두께에 달하는 늪지나 툰드라로 덮여 있습니다. 이런 땅은 마치 푹신푹신한 스폰지와 같아서 걷기가 매우 불편할 뿐 아니라 건물이나 비행장도 지을 수 없죠. 게다가 늪지는 흡습성이 매우 높으므로 물은 대개 툰드라층 밑에 얼음 형태로 갇혀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해빙기가 되면 갇혀있던 얼음이 녹아 지표면으로 올라오면서 섬 곳곳을 진흙탕으로 만들기가 일쑤죠.
[알류션 열도의 툰드라 지형과 안개]
이 지역의 날씨 또한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이른 봄에는 잔잔한 바다에 날씨도 그럭저럭 조용한 날이 많지만 여름에는 1주일에 5~6일 꼴로 짙은 안개가 끼고 10월부터는 눈보라가 휘몰아치곤 합니다. 맑게 개인 하늘을 볼 수 있는 것은 연간 8~10일 정도라고 하며 가을과 겨울 초에는 비나 눈이 집중적으로 내리죠. 섬을 지나가는 배나 항공기에게는 특히 ‘윌리와우(williwaw)' 라고 하는 갑작스런 스콜이 위협이 되곤 합니다. 다만 기온은 북극권에 인접해있는 것에 비해 비교적 온화하여 하절기에 평균 13도, 동절기에 평균 영하 11도 정도지만 말이죠.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알류샨 열도 지역에서는 미국, 일본 양측 모두 대규모 군사행동을 일으키기 쉽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1942년 6월 이전까지 미국은 유나라스카 섬의 더치하버에 소수의 수비대와 항공기를 유지했을 뿐, 그 이상 서쪽의 섬들에는 진출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42년 6월, 일본이 미드웨이 작전의 양동 및 미-소간의 교류 차단 등을 목적으로 더치하버를 공습하고 애투와 키스카 섬에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을 상륙시키자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죠. 물론 당시로서는 남태평양의 과달카날 전역 쪽이 훨씬 우선시 되었기에 대규모 지상군이나 기동부대를 동원할 수는 없었고, 대신 미국은 잠수함과 육상기지에서 발진하는 항공기 등을 통해 애투와 키스카를 무력화 한다는 방침을 세웁니다.
[완성된 아다크 항만과 비행장]
그에 따라 미국은 더치하버의 항공대를 증강하는 한편, 1942년 8월 30일에는 알류션 열도 중앙부의 아다크 섬에 진출하여 비행장 건설 작업을 개시했습니다. 공사 개시 2주만에 첫 항공기가 이륙하여 키스카 섬을 공습했고 그후 B-24와 B-25로 구성된 제 404 폭격 비행대가 주둔하여 본격적으로 애투/키스카에 대한 폭격임무를 수행하게 되었죠.
2. 아다크 비행장에서의 생활
1942년 9월말, Will R. Eubank 라는 군의관 (당시 계급은 중위) 1명이 알래스카를 거쳐 404 폭격 비행대에 전입해왔습니다. 그는 이후 1년동안 아다크 비행장에 머물면서 가족에게 60여 통에 달하는 편지를 보냈으며 비행장에서의 생활모습이 담긴 사진도 많이 남겨놓았습니다. 비록 당시의 검열제도 때문에 비행장에 대한 직접적인 내용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대신 그의 편지와 사진은 1년동안 비행장의 시설이 어떻게 발전해가는지, 그리고 그곳에서 생활하는 것에 대해 그가 어떻게 느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문 출처 : http://www.eubank-web.com/Donald/Aleutian/letters)
[(좌) 아다크 비행장 전경 / (중) 폭풍 속에서 작업중인 사람들 / (우) Eubank 중위의 초상]
1) 편의시설
급조된 시설이 으레 그렇듯이 아다크 비행장 역시 항공기 운용에 필요한 설비는 비교적 충분했지만 사람들을 위한 편의시설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를테면 거주구의 경우 9월말에 비행장이 완공된 이래 11월 말까지 약 2달간 (사병들은 43년 중반까지) 분대용 텐트 속에서 밤을 지새워야만 했습니다. 알류션 열도가 생각만큼 추운 지역이 아니긴 했지만 스산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을테죠. 텐트 안에는 당연히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고 밤에는 촛불이나 등유 램프로 내부를 밝혀야만 했습니다. 눈이 많이 오면 입구가 파묻히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그 눈이 녹으면 주변이 온통 물바다가 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죠. Eubank 중위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좌) 비행장 요원들의 천막촌 / (우) 눈이 녹으면 저렇게 물바다가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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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0. 6) ...우리는 텐트에서 흩어져서 자고, 밖에서 줄을 서서 밥을 먹고 있어요. 그래도 고무로 된 매트리스랑 두꺼운 침낭을 갖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1942.10. 7) ...저는 지금 텐트 기둥에 매달린 촛불에 의지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어요. 다른 친구들은 각자 자기 침상에서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거나 하고 있죠. 우리들은 다들 뭔가 하고싶은게 많지만 이곳에서는 별로 할 수 있는게 없다는걸 깨달았어요. (중략)
이 촛불 빛은 정말 좋지 않아요. 내일은 편지 쓰기에 괜찮은 다른 장소를 찾아봐야겠네요.
(1942.10.19) ...우리 텐트의 한 친구가 주변에 구덩이를 파놔서 우리는 바람으로부터 좀더 보호받을 수 있게 됐어요.
(1942.11. 6) ...우리 텐트의 해리스와 튜어트가 최근에 텐트에 많은 진보를 가져왔어요. 창문이 있는 진짜 출입문과 옷걸이 몇 개,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들이 생겨났죠. 텐트 안에는 등유램프도 2개 생겼는데 편지를 쓸 때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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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정식 숙소의 내부 / (우) 식당이 생기기 이전의 식사 장면]
정식으로 숙소 건물이 생긴 것은 11월 중순이었습니다. 합판으로 지어진 건물에 침대와 캐비넷, 세면대, 난로 정도가 있을 뿐이었지만 이제까지 텐트에서 지내던 것에 비하면 감지덕지할 판이었죠. 숙소뿐만 아니라 식당, 세면/샤워 시설, 수세식 화장실, PX 등 열악하거나 없는 시설은 많았습니다. 이를테면 식당 건물이 생긴 것은 1942년 10월 16일 (즉, 그전까지는 야전에서처럼 줄을 서서 밥을 탄 후 바닥에 쭈그리고 둘러 앉아 밥을 먹었다는 얘기죠), 의무실이 생긴 것은 10월 21일이었죠. 한편 샤워장이 만들어진 것은 11월 17일이었는데 샤워장이 생기기까지의 사연도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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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0.21) ...문명생활의 즐거움이란.. 저는 요즘 비행대 사람들을 위한 샤워장을 만들 계획을 갖고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을 임시변통으로 대처해야 할테고 수도관을 만들만한 자재도 없지만 말이죠. 요즘 바깥을 돌아다닐 때면 텐트나 의무실에 소용이 될만한 물건들이 있나 둘러보는게 습관이 됐어요.
(1942.10.29) ...업무가 너무 바빠서 샤워장을 만들려는 계획이 잘 진행이 안되고 있어요. 최근에 저는 진짜 샤워를 해본지 2주가 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그리고 머리를 손질하려면 옆에 있는 친구한테 부탁해야만 하구요. 덕분에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도 다들 꾀죄죄하고 거친 얼굴을 하고 있죠.
(1942.11. 6) ...저의 샤워장은 단계별로 조금씩 진행되고 있어요. 클리프 삼촌께 제 동료들은 삼촌만큼 좋은 도구들을 갖고 있진 못하지만 나날이 임기응변이 늘어가고 있다고 전해주세요. 예를 들면 우리들은 어느 날 밤에 격납고 옆에 쌓여있는 자재 더미에서 나무기둥 몇 개를 몰래 가져온적도 있어요. 샤워장이 완공될 때까지 시멘트나 다른 여러 가지 물건들은 여전히 부족할 것 같지만 말이죠.
[(좌) 목재를 구해오다 / (우) 샤워장 완공]
(*주 : 섬에서 구할 수 없는 물자는 보급선과의 물물교환-남는 에틸알콜(술대신 마실 수 있다)을 주고 수세식 변기나 수도 파이프를 다음 보급 편에 받아오는 등-으로 조달했다고 함 -_-;)
(1942.11.17) ...오늘의 가장 큰 이벤트는 샤워장-이 근방에서 가장 좋은-이 완성된 일이에요. 저와 함께 일한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기 차례를 기다리느라 샤워장 앞이 북적거렸죠. 저도 근 1달만에 진짜 샤워를 하고는 정말 상쾌한 기분이 들었어요. 아버지나 어머니도 아마 이런 것들이 주변에서 사라진 후에야 그것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깨닫게 되겠죠. 제 다음 계획은 의무실과 병동을 위한 장비와 작은 창고를 만드는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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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장이 생기긴 했어도 물은 당연히 냉수였고 샤워장이나 의무실에 온수가 공급되는 것은 이듬해인 1943년 5월이 되어서였습니다. 그 외에 수세식 화장실이나 수도시설이 생긴 것도 43년 5월 이후였죠. 위도에 비해 그다지 춥지 않은 지역이라 해도 최소한 우리나라의 겨울 정도 되는 날씨에서 찬물로 샤워를 한다고 생각해보시길.
식사의 경우, 양은 충분히 제공되었으나 메뉴의 다양성이 제한되어 있고 대부분 통조림 음식으로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비엔나 소세지, 당근, 콩, 콘비프 등은 매 끼니마다 꼭 한가지씩은 올라왔다고 하네요. 그렇지만 빵이나 버터, 잼 같은 것들이 부족하지 않게 나와서 그다지 불만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때문에 비행장 사람들은 여가활동을 겸해서 낚시를 하거나 해변에서 조개를 주워오는 식으로 신선한 먹거리를 즐기고자 하기도 했죠.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을 편지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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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1.26) ...아직도 낚시를 하러 가보지 못했어요. 대신에 조만간 조개를 주우러 해변에 나가볼 생각이에요. 몇몇 친구들이 자기가 그걸 요리할 수 있다고 하거든요. 그리고 덫을 놔서 이 주변에 많이 돌아다니는 까마귀들도 잡아볼 생각이에요. 그걸 먹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막상 잡으면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네요.
(1942.12.19) ...지난 주에는 까마귀를 거의 잡을뻔 했어요. 시밍턴 중위는 그렇게 하면 자기는 진짜로 그걸 요리해버리겠다고 겁을 주긴 했지만요. 참, 두분께는 이미 늦은 경고가 될진 모르겠지만 다른 친구분들께도 충고해두세요. - “전장에 나가 있는 병사를 가장 불행하게 하는 것은 그에게 스팸(Spam)을 보내는 것이다.” 라고 말이죠.
(저곳 사람들도 스팸에는 질렸던 모양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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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의료 서비스
Eubank 중위 자신이 군의관이었던 만큼 그는 아다크 비행장에서의 의료 서비스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의무실이 완성된 것은 1942년 10월 21일이었습니다. 아직까지도 텐트에서 잠을 자야 했던 당시에 전기가 들어오고 석유난로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흙이 아닌 진짜 마룻바닥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기뻤다고 서술하고 있죠. 의무실은 흔히 ‘퀀셋’ 이라고 불리는 조립식 건물 안에 있었고 1개의 방에 진료실과 약제실이 있고 그 옆에 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침상이 몇 개 놓여있는 곳이었습니다. 의무실에는 Eubank 중위 외에도 군의관 1명, 중사 1명, 의무병 3명이 배속되어 진료를 돕도록 되어 있었죠. 물론 소부대 군의관의 특성상 자기의 전문 분야 외에도 다른 증상을 보이는 환자들까지 돌봐야 했으며 1주일에 1번 안과나 치과 진료소를 열기도 했다고 하네요.
[의무실의 전경과 진료실 내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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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0.29) ...오늘은 제가 의무실 당직사관이라서 시간이 별로 없네요. 내일은 1주에 1번 있는 안과 진료를 하는 날이라 제가 이 지역 유일의 안과 의사가 돼요. 아마도 제겐 좋은 경험이 되리라 생각하지만, 제가 전문의 과정을 수료하고 왔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1942.11. 6) ...안과에 대한 임상사례들을 몇 가지 살펴봤어요. 그리고나서 매주 열리는 안과 진료소를 시작했죠. 최근에는 점점 이 분야에 능숙해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네요. 조만간 사람들 눈의 굴절률까지도 측정할 수 있는 수준이 될 것 같아요. (중략)
오늘은 꽤 힘든 오후를 보냈어요. 저녁을 거르면서까지 의무실에서 환자를 봐야 했거든요. 10명의 환자를 진료했지만 이곳의 조명과 장비가 여전히 열악해서 별로 성과가 좋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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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크 비행장에는 없었지만 더치하버에는 몇 명 정도의 여자 간호사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중 6명이 아다크 섬을 방문한적이 있었는데 Eubank는 3개월만에 여성을 만난 것은 기뻤지만 그날 밤 의무실 식구들끼리 보급품 관리나 환자 후송 같은 화제들에 관해 토론할 때는 그녀를 대화에서 배제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글쎄... 왜 그랬을까요?
3) 여가와 휴식, 명절
북방의 외진 섬에서도 시간을 보내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편의시설도 없는 판에 오락거리 같은 것이 제공될리는 만무하고 결국 비행대의 사람들은 각자 알아서 남는 시간을 때워야 했죠. 가장 보편적인 것은 역시 자기 침상에 앉아 책을 읽거나 가족, 애인, 친구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것이 지루한 사람들은 섬 북방의 휴화산이나 해변가를 돌아다니기도 했고 텐트 근처에 조그마한 경기장을 마련해놓고 동료들과 배구 등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 Eubank 중위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도 적혀 있습니다.
[(좌) 배구를 하는 사람들 / (우) 산에 오른 Eubank 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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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0.19) 친애하는 풀먼에게
이곳에도 날씨가 안좋을 때가 있기 때문에 오늘은 아침에 예배를 드리러 간 것을 제외하고는 하루의 대부분을 텐트 안에서 보냈어. 오늘 오후 우리는 텐트에 앉아서 모노폴리 게임을 3차례 했는데 그중 한 번은 내가 이겼지. 책을 읽기도 했는데 아무거나 손에 들어오는걸 닥치는대로 읽었어. 내가 읽은건 『무서운 이야기』 라는 책이었는데 별로 재미는 없더라.
시간을 보내는 또다른 방법은 비공식적인 강의를 듣는거야. 룸메이트인 로이드 해리스는 사회에 있을 때 건축기사였는데 우리에게 파르테논 신전에 대해 얘기해줬지. 패리쉬는 언어의 기원에 대해 설명했고, 튜어트는-그는 우리중 유일한 기혼자였는데-「젊은 여성을 기쁘게 하는 법」에 대해 가르쳐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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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낚시를 한 사람들 / (우) 위문단의 공연]
드물게 미국 위문협회(U.S.O)에서 위문 공연단이 찾아오는 날도 있었습니다. 1942년의 크리스마스 때는 빙 크로스비(당시의 유명한 연예인)이 찾아와 공연을 한적도 있었다고 하네요. 한편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축제일에는 식당에 다같이 모여 파티를 열고 보통 때보다 훨씬 좋은 만찬 메뉴를 먹으며 (굴 스튜, 칠면조 구이, 감자 샐러드, 롤빵, 버터, 커피, 파이 2종류 등등이 나왔다고 합니다.) 다같이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거나 했다고 합니다.
4) 외부 세계로부터의 소식
본토로부터 멀리 떨어진 섬이었던 만큼 바깥세상으로부터의 소식은 한층 더 절실한 것이었습니다. 아다크 비행장에서 그러한 수단은 2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본토에서 오는 편지였고, 다른 하나는 단파 라디오였죠.
편지를 기다리는 마음이야 군인이면 다 비슷하겠지만 불행히도 이 당시 알류션 지역에서는 본토로부터의 편지 수신이 지연되는 일이 잦았습니다. 1주일 정도 늦어지는 것은 늘상 있는 일이어서 편지를 보내고 그에 대한 답장을 받는데 3주가 넘게 걸리는 경우가 보통이었죠. 오랫동안 집으로부터 편지를 받지 못했거나 다급한 사연-가족 친지의 병환, 혹은 아내의 임신 등-을 기다리는 사람으로서는 편지가 지연된다는 것이 분통터지고 불안/초조한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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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2. 3) ...편지 배달 상황은 요즘도 여전하지만 우리들은 언제나 그걸 기다리고 있어요.
(1942.12.13) 친애하는 아버지 어머니께
오늘 작은 편지를 하나 받았어요. 10월 18일자 「타임즈」 신문이 들어있더군요.(편지를 받는데 2달 가까이 걸렸다는 의미-_-;) 저는 저녁 내내 우리 고향의 이야기가 나올걸 기대하면서 표지 기사와 사회면을 낱낱이 읽어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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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류션 열도에서 단파 라디오는 미 서부해안과 호놀룰루의 전파를 수신할 수 있었고 때때로 수신 상태가 좋진 않았지만 런던이나 모스크바, 심지어 도쿄의 라디오 방송이 잡히는 때도 있었습니다. Eubank 중위는 댄스 밴드의 공연이나 지역 뉴스, 새로운 상품의 광고 같은걸 들으면서 사회와 좀더 가까이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고 서술하고 있죠. 요즘이야 왠만한 격오지에도 위성방송이나 인터넷이 가능하지만 편지 외에 별다른 통신수단이 없던 시대에는 저것이 외부세계의 소식을 들려주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을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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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0.21) ...라디오는 제가 한 것 중에 가장 좋은 투자였어요. 전기가 들어온 이후 저는 라디오를 콘센트에 연결했고 그건 아주 잘 작동했죠. 어젯밤에는 샌안토니오, 앨버커키, 솔트레이크 시티, 덴버, 오타와, 기타 서부 해안과 호놀룰루의 지역 방송을 들을 수 있었죠. 댄스 밴드나 뉴스, 상품 광고 같은걸 듣다 보면 본토가 좀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1942.11. 6) ...라디오 뉴스에서 디트로이트의 노동조합이 파업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걸 듣고는 내 분노를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정말 폭발할 것만 같았죠. 저는 그 작자들이 여기서 고생하고 있는 병사들과 마주치게 되면 몸이 성하지 못할꺼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 그 주모자는 정말이지 배신자로 목매달아야 할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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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격오지 생활에 대한 심정
근처에 일본군이 자리잡고 있는 전장이라곤 하나 진지 근처에까지 일본군이 쳐들어오고 때때로 백병전도 벌어지곤 했던 과달카날과는 달리 알류션 열도는 상대적으로 조용한 곳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둔지란 곳은 초겨울에 찬물로 샤워를 하고 텐트 생활을 해야 하며 본토의 온화한 환경에 비해 지형이나 기후 면에서 극도로 황량하기 짝이 없습니다. TV나 전화 같은 것도 없고 겨우 라디오 방송이나 주고받는데 몇 주일이나 걸리는 편지를 통해 외부세계와 연락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이런 것들을 잊게 해줄 오락거리나 여가 시설조차 풍부하지 않습니다. 이런 환경이라면 강철과 같은 심지를 가진 사람이 아닌 이상, 아니 그런 사람이라도 때때로 잡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까요.
[파티장의 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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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 9월) ...아버지와 어머니는 제가 본토를 떠나면서 어떤 기분이 들지 궁금하시겠죠. 음, 어쨌거나 저는 그것에 대해 전혀 걱정하고 있지 않아요. 1년전에는 본토를 떠난다는 것이 저를 흥분이나 걱정으로 잠 못들게 만들었지만, 지금 저는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슬퍼할거란 것 외엔 그다지 신경쓰이는 일이 없어요.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단조롭고 가끔씩 외로울꺼란걸 알고 있지만 동시에 제가 봐야 할 새로운 것들과 어떤 모험들이 많을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는 우리들이 너무 늦기 전에 다시 만날거라고도 생각해요.
(1942.11. 1) 친애하는 풀먼에게
(중략) 오늘 너와 같은 식탁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다면 좋을텐데. 집을 떠난 뒤 많은 것이 변한 것 같구나. 우리는 충분한 음식을 먹고있긴 하지만 주변 환경이나 서비스는 너무나 틀리거든. 대학은 잘 다니고 있니? 너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잘하길 바란다 동생아.
(1942.11.26 - 추수감사절) 친애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께
오늘 모든 식구들이 집에 다같이 모일 수 있었다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가슴이 복받쳐 오르네요. 가장 즐거웠던 추수감사절은 할아버지 댁에서 모든 친척들이 모였던 때 같아요. 아이들이 식탁에 앉아 음식을 기다리곤 했던. 지금은 그때가 아주 먼 옛날처럼 느껴지네요.
(1942.12.15) ...요즘 제가 얘기해야할만한 특별한 일은 아무 것도 없어요. 언젠가 그런 일이 생기게 되면 두 분께 말씀드릴께요. 제가 갖고 있는 작은 일기장이 기억을 되살리는데 아마 도움이 되겠죠. 오늘은 식사가 꽤 괜찮았어요. 그래도 그건 절대로 어머니께서 해준 음식과 상대가 될 수 없죠.
(1942.12.25 - 크리스마스) 친애하는 마가렛.
넌 아마도 이곳의 폐쇄적인 총각파티(빌어먹을)에 대해 궁금해할테지. 파티는 기지 식당에서 열렸고 아주 성공적이었어. 파티장은 밝은 풍선들로 치장되었고 우리는 파티가 진행되는 동안 식탁에 앉아 있었지.
첫 번째 부분은 몇몇 4인조 중창단과 솔로 공연-주로 크리스마스 캐롤-으로 구성돼 있었지. 그리고나서 청중들은 「밝게 빛나는 보름달」이나 「나는 6펜스가 있다네」 같은 영국 조종사들에게 인기가 많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지. 그 노래의 내용은 그가 갖고 있는 모든 돈을 써버렸고 그 때문에 행복을 잃었다는거야. 그리고나서 우리는 먹고 마시기 시작했지. 다만 술은 별로 없었어. 그건 이 지역에선 극단적으로 부족하거든. 만찬 메뉴는 굴 스튜, 크래커, 셀러리, 크랜베리 소스, 칠면조 구이, 아이리쉬 포테이토, 롤빵, 버터, 커피, 2종류의 파이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어. 그리고나서 시가에 불을 붙여 목구멍 깊이 들이마셨지.
오늘 밤에는 라디오를 듣고 있어. 점점 이곳 생활이 단조롭고 지겨워지기 시작하는 것 같아.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그걸 「I'm dreaming of an un-white Christmas」라고 바꿔부르고 싶은 심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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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bank 중위가 아다크 비행장에서의 생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마디로 단정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위에서 보듯 어떤 편지에서는 ‘전에는 이곳에 오는걸 두려워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고 말하는가 하면 그후 몇 주도 안돼서 ‘생활이 단조롭고 지루하다’ 고 말하기도 하며, 그러다가 또 ‘이런저런 재미있는 일들이 있었다’ 라는 편지를 쓰기도 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편지에서 간간히 고립감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처럼 사회에서라면 가족과 친지, 그리고 다양한 문명의 이기들과 보내는 때에는 그런 정서가 더 강하게 나타나죠. 앞서 열거한 여러 가지 일들-샤워장을 만들거나 까마귀를 잡으려고 하거나 라디오를 듣는 등-역시 단순히 생활의 불편을 해결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그런 고립감을 지워내기 위한 자기 나름대로의 노력이기도 했다고 본다면 너무 지나친 해석일까요?
[당장에라도 고향에 날아가고 싶은 심정...]
사람마다 정도의 차는 있겠지만 저런 환경에 처하게 되면 누구나 한번쯤 쓸쓸함과 외로움을 느끼고, 그리고 그것에서 당장 벗어날 수 없는 한은 스스로 그곳에서 즐거움을 찾아내려는 복잡한 감정이 인지상정이 아닐까 합니다. 그때 그랬듯이 지금도 역시.
[참고문헌 / 자료 출처]
- 이호원,『실록대하소설 태평양 전쟁, 제 2권』, 한림출판사, 1969
- http://www.eubank-web.com/Donald/Aleutian/letters/
- http://www.hlswilliwaw.com/aleutians/adak-homepage.htm
- http://www.alaskool.org/projects/ak_military/paintinglist.htm
- http://www.ibiblio.org/hyperwar/USN/Aleutians/USN-CN-Aleutians-Intro.html
- http://www.history.navy.mil/ac/wwii/alaska/alaska6.htm
- http://www.army.mil/cmh-pg/brochures/aleut/aleut.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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