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해군이야기

식문화의 전파 : 일본해군과 양식(洋食)

구름위 2012. 12. 22.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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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식생활과 문화의 차이

사람이 살아가면서 체득하는 여러 가지 습관, 혹은 문화 중에서 가장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식생활이 아닐까 합니다. 각종 제도나 의생활, 건축양식 등 외적인 측면에서의 변화는 설령 낯설고 이질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수용되는데 그렇게 어려움을 겪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정신적인 측면이 관계하는 변화, 그중에서도 특히 식생활의 경우에는 새로이 접하는 음식이 문화적으로 크게 이질적일 경우 반드시 격렬한 거부와 저항을 수반하게 되죠. 기아에 허덕이던 아프리카 사람이 그런 극한상황에서도 서구의 구호식량을 먹기를 거부했다는 얘기도 있고, 2차대전중 연합군 포로에게 우엉을 먹였다가 전범재판에 회부됐다는 얘기도 있으니 말이죠. (식사에 나무뿌리를 제공했다는 웃지 못할 이유로) 머리로 싫고 좋고를 느끼기 이전에 우선 혀가 거부한다는 그런 느낌일까요?


[나름대로 문화 차이의 극복에 성공한 경우]

그런데 미각이란 것이 참 오묘해서 새로 접한 음식을 거부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구미에 맞는 것은 재빨리 수용하는 것이 또 재미있는 점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자기에게 맞는 방식으로 음식에 개량이 이루어지는 일도 많으므로 최종적으로 나온 산물이 반드시 본래의 것과 같은 형태라고는 할 수 없죠. 카레, 커피, 차, 두부, 초밥 등등도 서구에서 아시아로 혹은 그 반대로 전래되면서 원산지의 그것과는 다른 형태로 변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개화기나 일본의 메이지 시대에도 서구에서 많은 새로운 음식물들이 전파되었고 그것들은 조금씩 모습을 달리 하며 기존 식문화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졌죠. 그러한 현상은 일본 해군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일본 해상자위대에는 금요일마다 카레를 먹는 것이 전통으로 되어 있다고 하며, 그 기원은 1880년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네요. 일본의 군대에서 카레가 전통이 되어 있다는 것이 왠지 이상하게 생각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위에서 언급한 식문화의 수용 패턴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일본해군과 각기병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서구 각국으로부터 문물과 제도를 흡수하는데 열심이었고, 해군 역시 영국 및 프랑스로부터 함선을 수입하거나 영국을 모델로 하여 제도를 정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추세와는 달리 식생활 면에서는 외국의 문물을 도입하지 않은 채 장교나 수병 할 것 없이 여전히 밥, 국, 야채절임으로 구성된 일본식 식단을 따르고 있었죠. 이런 상황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것은 바로 각기병이었습니다.

각기병이란 비타민 B1의 결핍 때문에 생기는 영양실조의 일종으로써 각기병에 걸리면 다리가 부어오르고 부종이 생기며, 증상이 악화될 경우 시력 저하나 심장마비에까지 이르러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비타민 B1은 보리 등의 곡물이나 콩류에 많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많은 문화권의 일반적인 식사에서는 결핍이 일어날 이유가 없지만, 쌀의 경우에는 쌀겨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콩이나 육류 같은 부식을 적절히 섭취하지 않고 도정한 백미만을 먹으면 비타민 B1이 부족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기병의 발병은 서구 문화권에서는 보기 드물었고 쌀을 주식으로 하는 아시아 문화권에서도 백미를 늘상 먹을 수 있는 일부 부유층에만 한해서 발생하는 일종의 사치병이었죠. 그런데 이 당시 일본의 경우, 농업기술과 정미 기술이 진보한 결과 중류층이나 빈민층에서도 백미를 먹는 비율이 늘어나게 되어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각기병이 크게 창궐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해군이 특히 각기병 환자의 비율이 높았으며 각기병으로 인해 해군의 명운이 경각에 달할 정도의 위기에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1878년부터 1881년까지 해군의 총원은 약 4,500명이었는데 그중 1,100명에서 1,700명, 즉 매년 30% 이상의 사람들이 각기병에 걸려 있었고 연간 30명 이상이 사망하는 결과를 나타내고 있었죠. 1882년의 임오군란 당시에는 일본해군에서도 5척의 함선이 출동하고 있었는데, 불과 1개월가량의 출동기간중 각 함마다 30~50% 정도의 승무원들이 각기병에 걸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또한 1882년 말에는 연습함 류조가 뉴질랜드-칠레-하와이를 경유하는 원양항해를 실시했는데 승조원 378명중 169명이 각기병에 걸려 쓰러지고 그중 23명이 사망했으며, 함장이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함의 귀환 여부조차 가늠할 수 없다”는 전문을 보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면 이미 해전에서의 승리를 논하기 이전에 해군 자체가 존립의 위기에 처했다고 할 수 있겠죠. 메이지 정부는 이미 1877년부터 각기병원을 만들어 연구에 국비를 투자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원인은 발견하지 못했고 치료법도 불명이었습니다.

(*주 : 당시 일본을 방문한 서구의 의사들은 자국에서 나타나지 않는 각기병이 동양 여러 나라, 특히 일본에 많은 것에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또 유행기가 있는 것 때문에 전염성 풍토병의 일종으로 간주하기도 했고 세균을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했죠. 정작 진짜 원인이 밝혀진 것은 1912년에 폴란드의 훈크가 비타민을 발견한 이후입니다.)


3. 해군식단의 양식(洋食)화

1879년, 영국으로부터 다카기 가네히로라는 유학생 1명이 귀국했습니다. 그는 사쓰마 번 출신으로 막부군과의 전쟁 당시 의사로써 종군했고 종전 후에는 일본에 와있던 영국인에게 의학을 배운 다음, 해군 군의관 최초의 유학생이 되어 영국 세인트 토마스 의학교를 졸업한 해군 의무국의 기대주였죠. 귀국후 다카기는 의무국 부장에 취임했고 그가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당연히 해군의 사활이 걸린 각기병의 퇴치였습니다.


[(좌) 다카기 가네히로 / (우) 항해중 다수의 각기병 환자를 낸 연습함 류조]

다카기는 이전부터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던 계절, 기온, 거주하는 장소, 의류의 차이 등과 각기병의 발생에 상관관계가 있는지 조사했습니다. 조사 결과 그러한 요소들과 각기병의 발병에는 그다지 큰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지만, 대신 다음과 같은 2가지 특이한 점이 발견되었죠.

① 각기병은 수병에게 많이 일어나고 장교의 경우는 발병이 드묾.
② 원양 항해의 기록에 의하면, 기항지에 정박중일 때는 각기병이 전무하며 항해중에 다발하고 있었음.


당시 일본해군은 계급별로 식비를 정하고 이것에 의해 필요한 쌀을 조달한 다음, 나머지 돈을 개인에게 현금으로 지급하여 부식을 조달하도록 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1일당 책정된 식비의 액수는 장성급이 1엔 20전, 영관은 80전, 위관은 40전이었고, 수병의 경우는 불과 18전에 불과했죠. 게다가 수병들은 그 얼마되지 않는 부식비를 조금씩 아껴서 집에 송금하는 경우가 많았고 결국 반찬은 조금밖에 갖추지 않은 채 밥을 많이 먹는 것으로 식사를 해결하는 실태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다카기는 쌀을 주식으로 하는 식사가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했습니다. 각기병에 걸린 수병의 식사는 단백질이 탄수화물의 15분의 1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외국의 기항지에서 각기병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단백질 비율이 높은 비싼 양식을 먹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죠. 따라서 다카기는 식비를 현금으로 지급하는 대신에 책정된 예산에 따라 일괄적으로 구매하여 현물로 지급할 것과 식단을 양식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현물지급 쪽은 1884년 1월에 식료급여 규칙이 개정되면서 통과되었지만, 식단의 양식으로의 전환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우선 식단을 양식으로 전환하면 식비가 이제까지보다 늘어나는데다가, 정책 결정권자인 해군 상층부에는 양식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양식이 각기병의 발병을 막는데 얼마나 효용성이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널리 퍼져있었죠. 때문에 다카기는 원양 항해중의 식단을 전면적인 양식으로 하는 실험을 통해 이것을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실험대상으로 선택된 배는 연습함 츠쿠바였습니다. 항로는 1882년에 막대한 각기병 환자를 낸 연습함 류조와 동일하게 뉴질랜드, 칠레, 하와이를 경유하여 일본에 돌아오는 코스로 계획되었죠. 이에 다카기는 영양가를 세세하게 계산하여 1일당 쌀 675g, 고기 300g 이상, 생선 150g 이상 등으로 식단을 정했습니다. 또한 우유나 보리, 연유나 비스킷 등도 항해중의 식단에 포함시켰죠.

실험은 대성공이었습니다. 1884년 2월 3일에 출항하여 11월 초순에 귀국할 때까지 츠쿠바에서 발병한 각기병 환자는 단지 15명뿐, 그것도 모두 경증으로써 사망자는 1명도 없었던 것이죠. 또 해군의 각기병 발병자도 줄어서 1883년에 1,236명(그중 49명 사망)이었던 것이 식료급여 규칙을 개정한 1884년에는 718명(그중 8명 사망)으로 격감했고, 1885년에는 해군 총인원 6,918명중 발병자는 겨우 41명뿐(사망자 없음)이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다카기의 견해는 이제 전면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고 해군의 식단도 그의 의견대로 양식화가 추진되기 시작했죠.

(*주 : 사태가 진정된 것은 해군뿐이었고, 이후로도 일본 육군에서는 각기병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다카기의 “질소 부족론”에 대해 육군측은 “세균 원인설”을 채택하고 있었죠. 때문에 육군은 주식에 여전히 백미만을 보급했고 이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전사자보다도 각기병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다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4. 양식화된 식단에의 저항과 변형된 양식의 도입

다카기는 쌀을 모든 악의 근원으로 간주했으며 그의 최종 목표는 쌀밥을 전면적으로 폐지하고 주식을 빵으로 대체하는 것이었습니다만, 이것에는 2가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우선 예산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식단을 전면 양식화 하려면 식비가 2배가량 증액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조사 결과도 있었고, 주식인 빵을 굽기 위해서는 기존의 함선에 설치돼있던 밥솥을 모조리 오븐으로 교체하지 않으면 안됐던 것입니다. 예산도 적은데다 그 대부분을 외국으로부터의 함선 도입에 사용하고 있던 가난한 해군에게 있어서 그런 지출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죠.

다른 하나는 수병들의 기호 문제였습니다. 글 서두에서도 언급했지만 미각이란 상당히 보수적인 감각에 속하므로, 당시 해군에 입대한 장정들 또한 이제까지 쌀과 야채를 중심으로 한 식사를 해오다가 갑자기 버터, 우유, 고기, 빵 등을 접하자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양식이란 “서양티가 나는“ 음식이며 도저히 밥 대신 먹을 수 있는 대용품은 아니었죠. 이를테면 시험적으로 양식을 도입한 함에서는 식사 때가 되면 뱃전의 옆에 엄청난 양의 빵이 버려져 둥둥 떠다니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츠쿠바의 원양 항해에서 발생했던 15명의 각기병 환자들 역시 실은 양식을 싫어하여 제대로 먹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는군요. 하사관이나 수병에게 있어서 식사는 군대생활 중의 유일한 즐거움이므로 식사가 맛이 없으면 당연히 사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할 수없이 다카기는 고육지책으로써 빵과 원료가 같은 보리밥의 채용을 생각해냈습니다. 게다가 보리는 쌀보다 영양가가 높고 값도 싸다는 장점도 있었죠. 물론 보리만으로는 맛과 식감이 나빠지므로 주식은 쌀과 보리를 절반씩 혼합하는 것으로 정착되었습니다. (당연히 ‘군대에 가면 쌀밥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고 생각한 장정들로부터는 악평이 자자했지만) 그리고 빵이 아닌 밥이 주식으로 결정됨에 따라 기존의 양식화 식단에 따라 올라왔던 반찬들도 밥에 어울리도록 다소의 변형이 이뤄졌죠.


[(좌) 원형이 된 비프스튜 / (우) 일본식 변형판이라 할 고기감자]

그중 하나가 일본의 가정요리인 고기감자(肉じゃが)입니다. 고기감자란 쇠고기와 감자, 양파를 넣고 간장, 청주 등으로 양념한 조림요리로써 우리 감각으로는 쇠고기 감자조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고기감자의 기원은 지역 면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주 : 구 해군의 주요 기지였던 마이즈루와 구레가 서로 고기감자의 원조를 내세우며 싸우고 있다고 함.-_-;;)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공통적으로 일치하고 있습니다.

러일전쟁으로 유명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마이즈루(혹은 구레) 진수부의 사령관으로 있던 시절, 영국 유학 당시 먹었던 비프스튜의 맛을 그리워한 도고 제독이 관저 조리장에게 함상식으로써 비프스튜를 만들어보라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비프스튜 같은걸 만들어 본적이 없었던 조리장이 비프스튜와 동일한 재료로 만들어낸 전혀 엉뚱한 요리가 바로 고기감자라고 하는군요. 실제로 도고 제독이 고기감자의 기원에 관계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이것이 해군 어딘가에서 발상한 것만은 분명하고, “양식의 대용식으로서 효과적으로 쇠고기를 섭취할 수 있는 획기적 요리” 로써 수병들에게 사랑받았다고 하네요.


[(좌) 원형이 된 카레 풍미 스튜 / (우) 변형판인 해군카레]

또 하나, 그리고 좀더 널리 퍼진 요리는 다름아닌 카레입니다. 원래 일본해군이 채용한 카레란 영국해군이 먹던 카레 풍미의 스튜였습니다. 본래 스튜에는 우유가 들어가지만 장기간의 항해 중에는 신선한 우유를 입수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스튜의 대용으로써 스튜와 같은 식재료(감자, 당근, 양파, 고기)를 향신료를 넣어 끓인 형태였다는군요. 그리고 다카기에 의한 식단 양식화는 당연히 일본해군이 강하게 영향을 받고 있었던 영국해군을 모델로 하여 시행되었고 이때 영국해군이 먹고 있던 카레 풍미의 스튜 역시 일본 해군에 도입되었던 것입니다.

다카기의 당초 의도대로 주식이 빵으로 설정되어 있었던 초기에는 일본 해군 역시 영국과 마찬가지로 스튜 국물을 빵에 찍어서 먹는 방식이었다고 하지만, 이후 과정은 앞서 언급한대로 다수의 수병들에게 거부되는 결과로 끝났습니다. 다만 카레 자체는 구미에 맞았던지 식단에서 퇴출당하지 않았고 주식이 쌀과 보리가 혼합된 밥으로 정착된 이후에는 카레도 밥에 걸맞게 소맥분을 첨가하여 좀더 걸쭉한 형태로 만드는 것으로 변형되어, 오늘날과 같은 스타일이 완성되었죠.


[(좌) 현재의 요코스카 해군카레 전문점 / (우) 해상자위대의 카레]

이후 카레는 완전히 해군 식단의 하나로써 정착하였고 1890년대쯤 되면 토요일마다 카레를 먹는 것이 해군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늘상 똑같은 일과 때문에 요일 감각이 무뎌지기 쉬운 항해중에 휴일 전날인 토요일마다 카레를 먹음으로써 요일 감각을 상기시키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고 하네요. 현재의 해상 자위대도 이런 전통을 따라 매주 금요일마다(주 5일제를 적용하기 때문에 금요일이 휴일 전날이 되므로) 카레를 먹는다고 하며, 각 함별로 카레 맛의 우열을 가리는 대회가 열리기도 한다고 합니다.

또한 해군에서 카레를 맛본 후 고향으로 돌아온 군인들에 의해 카레가 전국으로 퍼졌다든가 해군기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던 요코스카, 구레, 사세보 등지에서 카레를 내놓는 음식점이 우후죽순처럼 생긴 이야기들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카레는 싼 값에 “양식(洋食)”을 맛볼 수 있는 수단이었고 1930년대에는 카레라이스 한 그릇의 가격이 10전이었다고 하네요. 목욕탕 요금이 2전, 계란 1판이 5전, 영화관 요금이 20전이었다고 하니 나름대로 부담없는 가격이었을 것 같군요. 현재에도 요코스카에서는 지역 명물로써 카레가 성황이라고 하며 “해군 카레”의 이름을 앞세운 음식점이나 식품 브랜드도 많다고 합니다.




[참고문헌 / 자료 출처]
- http://www.m-surf.ne.jp/~draraya/nfbn/nfbn019.htm
- http://suisandonya.foods.co.jp/isyokudougen/index.html
- http://www.down.ne.jp/ish/ijn/kaiyo/mugimesi.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