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해군이야기

구 일본의 사례로 본 군대와 사회의 관계

구름위 2012. 12. 22.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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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은 해군 관련은 아닙니다만 요즘 평소 관심있던 '군대와 사회의 관계'라는 주제가 많이 이슈화된 관계로 저도 관련 글을 하나 올려볼까 합니다.

일전에 「한 전함을 통해 본 오스트리아 사회사」에서는 군대 역시 그것을 낳은 사회의 하부구조라는 측면을 강조했지만, 사실 군대와 사회는 어느 한쪽만이 일방적으로 영향을 받는 관계는 아닙니다. 후발국가 등에서는 군이 근대화의 주체 및 교육장이 되어 오히려 사회를 선도하는 경우도 있으며, 군사적 영향이 지대한 사회에서는 사회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병영처럼 변하기도 합니다. 전반적으로 보아 군대와 사회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일종의 순환·재생산 관계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상호 순환·재생산 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 구 일본의 경우입니다. 특히 1910∼30년대 사이의 사회 민주화에 따른 反군풍조와 군기의 이완, 그리고 이에 대한 군측의 반작용 등 일련의 과정은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이라 봅니다.


1. 근대적 군대의 창설부터 러일전쟁까지

구 일본에서 근대적인 국민군의 성립은 1872년에 제시된 「징병권고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세습해서 먹는 자는 그 녹을 줄이고, 검을 풀며, 사민은 점차 자유의 권리를 찾게 된다. 상하를 평등하게 해서 인권을 하나로 하여, 평등하게 황국의 일반시민으로서 국가에 보답하는 길도 처음부터 다른 것이 아니다." 라는 문구에서 보듯이, 국민개병의 이념은 "의무"라기 보다는 국민개병의 기치 하에 이전까지 군사적 역할을 담당하지 않았던 일반 국민들에게 국가에 군사적으로 공헌할 수 있도록 하는 "권리"라는 차원에서 접근되었고 1873년 1월에 "징병령"이 발표됨으로써 징병제 시행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되었죠.

물론 이의 시행에는 당연히 저항도 뒤따랐습니다. 군무라고 하는 독점적 기능과 경제적 특권을 상실하고 폐도령 등 정신적으로도 타격을 받은 사족층이 이에 반발한 것은 당연하지만, 평민들 역시 징병을 권리가 아닌 새로이 생겨난 의무로 간주하여 부담스럽게 여겼습니다. 이런 와중에 징병에 관한 유언비어가 돌면서 각지에서 징병제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죠.

징병제 시행령중 "사람은 원래 심력을 다해서 국가에 보답해야만 한다. 서양인은 이를 칭하여 혈세라고 한다. 그 산 피를 가지고 국가에 보답하는 것이다." 라는 문구가 있었는데, 이것이 곧이곧대로 와전되어 '혈세는 징병된 병사의 피를 뽑아서 외국인에게 파는 것이다' 라던가 '피를 뽑아서 모포나 군복, 군모를 빨갛게 물들이는 것이다' 라는 황당무계한 유언비어로 비화됐던 것입니다. 덕분에 1873년 5월에는 오카야마 현에서 수 만명의 농민들이 봉기하여 부호의 저택, 학교, 피차별민의 부락 등을 불태우고 관리와 교사를 살해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6월에는 인근 돗토리 현에서도 2만 2천명이 봉기하여 징병제와 소학교의 폐지를 요구한 사건이 있었죠. 또한 혈세의 의미를 오해하지 않은 농민들에게 있어서도 징병은 노동력의 차출을 의미했으므로 가계의 생계유지 곤란 등의 문제를 낳기도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징병령 자체도 국민개병이라는 취지에 어긋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1873년 1월에 발표된 징병령에는 금전납부에 의한 병역면제가 인정되었고, 그 외에도 관리, 고등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 호주 및 상속인 등이 징병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이런 불완전성-특히 금전에 의한 면제-이 징병에 대한 불공평성을 심화시켜 국민들의 반감을 한층 더 높이는 원인이 되었고, 2·3남이 분가하여 호주가 되거나 당시 징병령이 적용되지 않던 북해도로 호적을 옮겨서 징병을 면하는 수법도 흔히 사용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876년 당시 만 20세의 징병 대상자 약 30만명중 82%가 징병에서 제외되었고 1878년에는 89%에 달했다고 합니다.


[사격훈련 중인 병사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불합리했던 징병령도 3차례의 개정을 통해 점차 징병면제를 축소·폐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징병기피자에 대한 처벌도 강화돼가면서, 징병제는 여전히 부담이긴 했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군 복무의 경험은 개개인 단위에까지 '근대화'를 학습시키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군대는 새로운 시간 관념과 규율, 근대적 노동 개념 및 근무형태의 보급에 공헌하였고 군대에서의 생활과 거기서의 교육을 통해 병사들은 국가의식, 근대화에 적합한 태도 및 행동양식을 몸에 익히게 되었죠. 또한 1889년의 징병령에서는 그때까지 면제 대상자이던 사범학교 졸업자가 단기 현역복무 대상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이것은 초등교육에 교사의 군대경험을 반영하고자 하는 의도였고, "교사의 군 체험→초등교육→교육받은 세대들의 군복무"로 이어지는 일종의 근대체제의 시작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사회 전반에 걸쳐 근대체제가 확산되는 것과 더불어 국외적으로도 일본은 청일전쟁·러일전쟁 등 팽창·침략 일로의 대외정책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군은 이러한 정책의 선두에 서서 한반도와 대륙 각지에서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고 일본 국민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팽창·침략은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졌죠. 특히 러일전쟁의 경우 유럽의 강국에 대항하는 "국가의 운명이 걸린 위기"라는 인식 하에 민·관·군이 하나의 목표를 공유하여 일체감과 연대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있어서 군대와 사회의 관계는 그다지 적대적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서로의 이해가 일치하는 면도 있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2. 전후의 균열과 사회의 도전

러일전쟁의 승리는 아직 근대화의 초창기에 있던 일본에 있어서 유럽의 강국(비록 실상은 낙후했지만)을 물리쳤다는 국민적 자부심을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뿐, 이 전쟁은 근본적으로 일본의 전쟁수행능력을 상회하는 것이었고 전시재정의 뒤처리는 일본에게 있어 크나큰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전쟁전 약 5억 5천만엔이었던 공채 발행고는 전후 22억엔을 넘어섰고, 그 금리 및 상환금만으로도 재정이 허덕일 지경이었습니다. 또한 민간경제계는 "금융핍박, 신용폐쇄로 은행 회사의 파탄이 계속 발생하여 각종 사업은 위축, 부진상태에 빠져 오랫동안 이를 방치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는 상황에 있다"고 말할 정도로 어려웠죠. 이런 상황에서 육·해군의 무절제한 군비증강 및 그것을 가능케 하는 육군 군벌의 전횡 및 정치개입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고, 결국 1912년의 "다이쇼 정변"을 통해 군벌이 일시적으로 타도되고 문민 정치인에 의한 정당정치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상황 역시 군에게 호의적이진 않았습니다. 앞서 말한 반 군벌-반 군비증강 풍조 외에도, 러일전쟁의 승리로 인해 국민과 군대 및 정부 사이에 공유돼온 확실한 국가적 목표가 사라지자 그때까지의 일체감·연대감도 약해져 사회는 전체적으로 아노미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물론 목표의 상실감만이 아노미의 원인은 아니었습니다. 근대화와 서구화의 진전이 일본사회 안정의 기반이 되어 온 전통적 가치를 약하게 하거나 파괴했고, 이와 더불어 1차대전 후 물질주의와 민주주의의 이념이 유입됨으로써 사회풍조가 변화하여 가치의 혼란을 빚어내고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상부구조인 사회가 이런 변화를 겪음에 따라 하부구조인 군대도 당연히 저런 영향으로부터 무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1) 군기 이완
1908년 1월, 6사단 소속의 고참 병사 수십 명이 병영을 집단으로 탈주하였다가 다음날 교토 시내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사건의 내막은 병을 지도하는 하사관이 고참병사를 신병과 같이 엄하게 취급했다고 해서 고참병 한 명이 하사관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가 구타를 당했고, 이를 계기로 수십 명의 고참병들이 외출을 나가서 술을 마신 다음 귀대하지 않음으로써 항의 표시를 한 것이었습니다. 같은 해 3월에는 도쿄의 1사단 소속 병사 30여 명이 훈련에서 복귀하지 않고 다음날 밤에 겨우 돌아온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훈련 때는 그럭저럭 참아냈지만 훈련장에서 부대까지 구보로 복귀하게 되자, 그대로 대대장에게 가서 직접 호소하려 했다가 대대장 관사를 찾지 못하고 밤을 새게 된 것이었죠. 이 직후 오사카 주둔의 16사단 소속 병사 수십 명이 야간에 주둔지 후문 위병소를 통과하여 탈영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날 일찍 일과를 마친 그들은 술에 취해 큰 소리로 떠들다가 하사관에게 심하게 질책을 받았는데, 이에 분개하여 밖에서 다시 마시자고 하여 탈영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군기이완은 상하고하에 관계없었고 일부 장교들 또한 비행에 가담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일본 육군성 기록에 의하면, 1908년 경부터 폭행, 수뢰, 순찰중의 유흥, 만취 등등 현역과 예비역을 불문하고 장교들의 군기위반 사례가 증가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또한 1910년 1월에 육군성이 각 부대에 내려보낸 훈령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이 강조되었습니다.

(전략) 「그러나 근래 들어 장교, 특히 청년장교 중에는 가끔 수행이 부족한 사람이 있어, 심한 경우에는 형법에 저촉되는 사람조차 있다. 장교라는 것은, 일상에서 그 직무에 충실함과 동시에 품성을 고상하게 하고 지위와 명예를 중시해, 실질강건한 기풍을 길러 솔선수범으로 부하를 교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불미스러운 행위나 폭행이 허락되지 않음은 물론 "외관적 미를 추구해서 불미스러운 일에 빠짐"과 같은 것도 엄하게 경계될 필요가 있다.」

이런 훈령이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일부 장교들의 비행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나 상층부의 통제와 훈시에도 불구하고 다이쇼 시대에 이르기까지 군기의 이완 현상은 크게 개선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1차대전 후의 호황에 따른 배금주의 풍조로 인해 더욱 악화되어가기만 했습니다.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게다가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 고, 1918년에 개시된 시베리아 출병에서도 이러한 군기 이완과 비행이 발생했습니다. 당초 하사관이나 병사들 중 출병의 목적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었으며, 국비로 만주여행을 하는 기분을 가진 자가 많았다는 비판이 있을 정도로 사기는 떨어졌습니다. 초급장교의 이치에 맞지 않는 명령에 불평을 하는 병사가 있으면 그것을 바로 사회주의자라고 단정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와는 정반대로 부하의 반항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고분고분 받아주는 장교도 있었습니다. 또한 어떤 보병 중대에서는 중대장이 병을 구타하였다고 해서 중대원 전원으로부터 린치를 받아 중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2) 군인 경시 풍조
위와 같은 군인의 비행과 군기 위반은 그대로 사회 일반에서 군인을 백안시하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또한 1912년 다이쇼 정변 이래의 군벌 비판과 1차대전후 주류로 자리잡은 "독일 군국주의의 전쟁 책임론" 또한 군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하는데 일조했죠. 또 한편으로는 외적의 위협이 적어진 것도 군인 경시풍조에 기여한 바가 컸습니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인해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이 제거된 것 이외에도, 1차대전의 참혹한 경험으로 인해 "이제 이러한 어리석은 행동은 반복되지 않으며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 이라는 인식이 일본에서도 자리잡게 되었죠. 이에 따라 육·해군 모두 국내적으로 군축에 대한 강한 압력을 받게된 것은 앞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평화주의적 풍조는 개인의 군대·안보관에도 깊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군부의 관제잡지인 「해행사기사(偕行社記事)」에 기고한 한 초급장교는 입영하는 장정들의 교육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이미 그들은 더 이상 전쟁은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소감을 밝히고 있습니다. 1923년의 징병검사 때 행하는 장정 상식 시험문제에는 "전쟁은 없어졌다고 생각하는가?", "일본에서 군비를 없애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항이 나오기도 했으며, 군측에서 이런 질문을 던질 정도의 상황이라면 당시의 평화주의적 풍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해볼 수 있겠습니다.

군인들의 사회적 상식 결여도 비판의 대상이 되어있었습니다. 신문과 잡지에서는 육군 군인의 상식 결여를 성토했으며, 심지어 의회에서도 군인의 상식 부족이 이슈화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일상생활 면에서는 시내의 전차에서 장교의 외투나 승마용 구두에 붙어있는 박차, 차고 있는 군도 등이 방해가 된다고 하여 다른 민간인 승객으로부터 불평을 듣는 일도 있었고 군복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장교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3) 군인의 사회적 지위 저하
사회의 군인 경시는 곧 군인의 사회적 지위가 저하됐음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본래 장교의 사회적 지위는 그 대부분이 구 사족층에서 기원한 것이었으므로 비교적 높은 편이었습니다. 유년학교나 사관학교는 재능있는 청소년들을 끌어들여 뛰어난 인재들을 얻을 수 있었고 그렇게 배출된 장교들 역시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는 엘리트로 인정되었으며, 러일전쟁의 승리는 그러한 가치를 더욱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육군 유년학교 생도들의 단체사진]

그러나 1차대전 이후 장교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점차 낮아지기 시작했고 그것은 곧 사관학교 지원자의 감소로 드러나게 되었죠. 러일전쟁 이후 1916년까지 사관학교 지원자는 계속 증가 일로에 있었고 그것이 절정에 달한 1916년에는 226명 모집에 약 4,300명이 몰려 19:1이라는 경쟁률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18년에는 사관학교 지원자가 전년도에 비해 1,000명 가량 감소(3,926명→2,971명)하여 충격을 주었고 1921년에는 지원자 수가 1,000명을 간신히 넘길 정도로까지 급감했습니다. 물론 1924년 이후 경제의 호황과 더불어 지원자 수는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지만 지원자의 질적인 측면은 과거와 결코 동일한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사태는 학교 졸업생들이 사관학교보다도 실업계를 지망하는 경향 때문이었습니다. 중학교의 성적 우수자가 군학교를 지망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경제적으로 유복한 집안의 자제로서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사관학교보다도 대학이나 전문학교 등의 고등교육을 지망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고 합니다. 중류계급 이상에 있어서는 군인이 더 이상 매력있는 엘리트가 아니게 된 것이었지요.

군인의 경제상태 또한 사회적 지위에 관계하고 있었습니다. 물가 상승이나 타 직업의 임금수준에 맞춰서 군인의 봉급도 약간 인상되었으나 상대적으로 낮은 급여라는 실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현상의 원인은 우선 봉급체계의 문제를 들 수 있었습니다. 같은 관료라 해도 문관은 호봉제도로 인해 승진이 늦어도 연공에 따라 급여가 오를 가능성이 있었지만, 장교의 경우 중위와 대위를 제외하고는 같은 계급 내에 봉급의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승진하지 않는 이상 급여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청일전쟁 이래로 비대화된 장교 수가 인사적체를 낳았고 군축 시기 이후에는 보직 수의 감소로 인해 이러한 폐쇄적 상황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승진이 되지 않으면 급여도 오르지 않고, 오랫동안 같은 계급에 있는 사이에 정년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게다가 계급이 낮을수록 정년도 빠르기 때문에 승진이 늦으면 박봉으로 생활에 여유가 없는 동안에 퇴직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퇴직금 또한 반드시 충분하지는 않았죠. 이러한 추세에 특히 타격을 받았던 것은 40대 중반의 대위·소령 예편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경우 퇴직금도 넉넉하지 않았고 재취직도 곤란했기 때문에 퇴직이 곧 생계의 곤란과 사회적 계층의 하락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죠.

또한 군인의 사회적 지위가 저하되었으므로 청년장교의 결혼상대의 사회적 지위가 떨어지거나, 장교의 자녀가 결혼할 상대의 사회적 지위도 떨어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지위의 저하와 경제적 압박은 청년장교들에게는 전직준비에의 몰두를, 장년장교들에게는 생활고에 대한 우려를 가져다주었고 결과적으로 군인으로서의 본분과 직무를 소홀히 하는데 기여했습니다. 또한 인사 적체와 한정된 밥그릇 수는 젊은 장교들 사이에 승진 경쟁을 격화시켰고 이러한 경쟁이 군 내부의 사조직과 파벌 결성에 일조하기도 했죠.


3. 군으로부터의 반작용 (1908∼1920년대)

그렇다면 이러한 일련의 위기에 대해 군은 어떻게 생각하고 대응했던가?
군인들의 일반적인 인식으로는 당시의 사회 변화는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1908년에 개정된 『군대내무서』의 서문에는 당시의 사회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우리 고유의 무사적 예절이 점차 없어지고 신문명에 대한 대처가 아직 미흡하다. 사치와 게으름, 도덕심이 날로 떨어져 자칫하면 동맹파업이 되거나 직공의 폭동이 되어, 사회주의가 유행할 조짐이 되어, 사회 질서가 바로 서지 않는다.」

또 한편으로 관제 잡지인 「해행사기사」에 게재된 논설에서는 사회가 물질주의나 배금주의, 수뢰, 사기, 도박, 횡령, 살인, 염세자살, 추락, 위선 등의 악덕으로 가득차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또한 1차대전후 소위 '데모크라시'가 급격히 확산되면서 자유주의·민주주의 이념 또한 군대에의 위험요소로 간주됐습니다. 전후 유럽의 정치혼란이나 사회주의 대두의 원인이 민주주의 이념에 있다고 여겨졌으며 각종 기강 이완, 질서혼란 또한 민주주의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습니다. 특히 전후 국제적으로 주장된 징병제 폐지론이나 군비 철폐·축소론 역시 민주주의 정치사조 임에 틀림없고, 그 점에서 민주주의는 군인정신과 양립할 수 없으며, 민주주의는 질서파괴의 원흉으로써 군대의 계급 질서나 존재 그 자체에 위협을 주는 것으로 여겨졌죠.

그러나 군이 이런 "악화된" 사회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군의 유지와 기능발휘를 위해서는 그 "악화된" 사회에서 대량의 장정을 징집해서 교육하고, 또 현역을 마친 병사의 군인정신과 훈련도를 "악덕이 횡행하는" 사회 속에서 유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1) 정신교육의 강화
가장 기본적인 대책은 병사들에 대한 정신교육의 강화였습니다. 바람직하지 않은 사회풍조에 오염된 장정들을 철저히 교육해서 군인정신을 주입하는 것이 필수 불가결하다고 판단했던 것이죠. 그에 따라 1908년에 개정된 『군대내무서』에서는 러일전쟁 승리의 원인을 주로 정신력의 우위에 돌리며 정신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1922년의 개정에서는 그에 더해 "국체(國體)"에 대한 강조도 추가되었습니다.

「우리의 국체를 세계에서 으뜸이 되게 하는 것이 국군 건설의 목표임을 명심하고, 병역이 국가에 대한 숭고한 책무 및 명예라는 것을 자각해서, 자칫 사고의 선택을 그르치지 않도록 해야한다.」

이렇게 국체가 강조된 배경은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사상의 대두 때문이었습니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 이래로 군주제를 부정하는 사회주의가 징병을 통해서 군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여겨졌고, 실제로 1908년에는 그 전해에 입영한 무정부주의자가 막사의 벽에 "불경"이라는 문구를 써놓고 탈주하거나 사회주의자가 입영 장정에게 격문을 배포하려던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사상대책의 대상에는 민주주의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 사상은 일본의 국체인 군주제의 기반을 위협한다고 여겨졌죠. 군부는 국체에 대한 신념이 흔들리면 군대의 근간인 명령복종 관계 또한 동요될 것이라고 여겼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최종적으로 채택된 것이 바로 군주제의 존엄성에 대한 강조였습니다.

이에 따라 천황에 대한 존엄의식 내지는 숭배가 비정상적으로 강요되었고, 덕분에 일본군을 특징짓는 또 하나의 축인 "천황숭배"가 완성되었습니다. 이를테면 대화 중에 '천황'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갑자기 부동자세를 취한다거나 다이쇼 천황이 황태자 시절 사관학교를 방문했을 때 안경을 쓴 생도들에게 모두 안경을 벗도록 한 것이 그런 예일 것입니다.(안경을 통해서 보면 불경스럽다는 이유로)


[다이쇼 시기의 군기 기념식]

군기의 존엄성이 강조된 것도 이 시기에 들어서였습니다. 본래 군기는 신사참배나 천황과 황후에 대한 경례 이외에는 아래로 드리워지지 않도록 되어 있었지만, 1910년 육군 예식령의 개정을 통해 기수·군기위병·군기중대는 군기를 수호하고 있는 동안 천황을 제외한 어느 누구에게도 경례를 하지 않게 되었죠. 이제 군기는 마치 천황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로 변모했던 것입니다.

2) "중대 가족주의"와 내무반의 설치
1908년의 『군대내무서』에 나타나는 또다른 정신은 병영을 '군인의 가정'으로 하여 중대장은 "엄한 아버지"로 하고 하사관은 "자애로운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때까지의 징벌과 감시에 의해서 군기를 유도하고자 하는 경향과 병사의 인격을 무시하고 군기의 틀에 무리하게 집어넣는 방식을 버리고, 대신에 군기의 엄정함을 완화하며 병사의 이해에 근거한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자애로운 어머니"인 하사관의 지휘능력과 판단력이 중시되었고 하사관을 반장으로 하는 내무반이 설치되어 20명 전후의 병사가 취침, 식사, 병기수입, 교육 등을 함께 하도록 하였습니다. 한 내무반은 전시에 분대로 편성되었으며 내무반장인 하사관은 평시부터 분대를 장악하는 동시에 병영에서의 일상생활을 통해 병사에게 군기나 군인정신을 교육하도록 되었죠.


[내무반에서의 야간점호와 기합]

문제는 하사관의 질이었습니다. 하사관은 병사들 중 적임자를 선발해서 육성되었지만, 병사들 중에서 하사관에 지원하는 자는 점점 감소하고 있었으므로(사회의 타 직업과 비교해볼 때 처우도 뒤떨어지고 장교로의 진급도 막혀있었으므로) 능력이나 인격 면에서 우수한 하사관을 선발한다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은 하사관이 기대대로 "자애로운" 지휘능력을 발휘하기보다는 강권이나 강제에 의해 병사의 복종을 확보한다는 것이었죠.

또한 1921년의 개정에서는 자각이나 이해에 근거한 복종의 강조와 군대 내무의 완화가 방종이나 불규율, 명령의 불실행으로 왜곡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렇게 해서 『군대내무서』의 개정은 약병(弱兵) 양성의 원인으로 간주되어 이를 개선하기 위해 자의적인 사적제재가 "필요악"으로 간주되어 갔습니다. 때문에 불상사는 가급적 외부에 알리지 않고 내부에서 처리한다는 관행이 일반화했으며, 내무반에서의 병영생활은 가족주의의 취지와는 달리 오히려 개인의 자유와 프라이버시를 더욱 억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3) "사회 교육자로서의 군" 관념
앞서의 두 가지 방향이 군대 내부에 한정된 것이었던 반면, 군대가 더 나아가 사회에의 직접적 개입을 시도한 것이 바로 "사회 교육자론"이었습니다. 단순히 악화된 사회에 물든 장정을 입영 후에 재교육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래의 병사가 될 자원인 청소년들을 사회의 악덕에서 차단하고 입영해 올 장정들의 질을 향상시키는 방법으로 학교 교육의 중요성에 주목한 것입니다. 물론 군은 민간에 의한 학교 교육이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기에 충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학교 역시 사회에 오염되어 청소년의 악폐를 조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일부 군인들은 민간에 의한 학교 교육에 기대하지 않고 군대 자체가 사회 교육의 주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1912년에 관제 잡지 「해행사기사」에 실린 논설 중에는 "학교 교육에 의존하지 않고 거꾸로 군대교육을 국민에게 보급해서 가정과 사회는 물론. 가능하다면 학교 교육에까지 감화를 미치고싶다"는 의견도 있었고, 보다 극단적으로는 "국민의 품성을 도야하는 곳이 군대이며, 우리 군인이 사회의 선각자라고 자부하는 것은 지금 추락의 늪에 빠지려 하는 국민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이 군대뿐이기 때문이다."라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류의 주장은 1913년에 제정된 「군대교육령」에서 다음과 같이 정식화되었죠.

「군인은 국민의 정화에 대해서 그 중요부를 차지한다. 따라서 이러한 교육의 옳고 그름은 바로 고향사람들의 풍속을 좌우하고, 이로써 국민정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군대에서 습득시킬 수 있는 무형의 자질을 가지고, 국민의 모범이 되어 내실있고 강건한 기풍을 순화해서 국가의 융성을 증진하지 않으면 안된다. (후략)」

여기서 나타난 것은 군인이 전투를 본분으로 하는 군사 전문직으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국민의 정화", "국민의 모범"을 양성한다는 사회교육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할 것으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군인이 담당할 사회교육에서, 장정에 대한 사회의 "악영향"을 교정·방지하고자 할 때 강조되는 것은, 당연히 자유주의를 배제한 국체에의 강조, 충절, 신의, 정신주의 등이었죠.

4) 소수의 의견 : "사회와의 공존"론
한편 군부 일각에서는 자유주의적 사회 풍조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의 긍정적 측면을 이해하고 군대와 자유주의와의 조화와 공존을 도모하고자 하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습니다. 「해행사기사」에 실린 어느 논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죠.

「입헌정치의 진전과 함께 국민도 진보하고 있다. 진보한 국민을 가지고 우수한 병사나 정예 군대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다. 국민이 진화했기 때문에 군기가 이완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장정의 교육을 담당하는 장교가 예전 그대로를 고집하고, 사회에 적응되지 않는 사상과 방법으로 교육하고 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중략) 종래 군대는 군대 자신의 분위기를 사회에 보급하는 것에 힘써, 군대 자신의 선전은 게으르지 않았지만, 사회의 분위기를 군대에 흡수하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다. 그래서는 국민의 융합은 바랄 수 없다. (중략) 세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는 하지만, 전쟁과 전쟁의 사이에 끼어있는 평화의 기간이 전쟁의 기간보다 길고, 최근에는 그것이 점점 길어져가고 있다. 이 사실은 군인과 사회와의 접근을 더욱 촉진한다. 사회는 병사를 공급하여 주기도 하고, 또한 군대에서 나온 병사를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 사회를 충분히 이해하는 것은, 교육자로서 우리들의 필수요건이다.」

이러한 주장들을 논문에 게재하는 것 이외에도 군내행사에 민간인들을 초청한다거나 하는 교류도 진척되었고, 소부대나 개개 병사의 판단력이 중요하게 작용했던 1차대전의 교훈에 주목하여 병영 내부에서 병사 개개인의 자발적 복종을 강조하는 부대가 생겨나거나 『군대내무서』 개정에 이들 공존파의 의견이 일부 반영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들은 전체 군부 내에서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주류파의 의견은 대개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시대의 흐름의 진전을 살펴서 거기에 순응하는 것은 군대에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위협을 받아 의미 없이 영합하고 전통에 반하는 군기를 서둘러 만들 필요는 적어도 없다.」

「우리 군인들은 세계의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오더라도 동요하지 말고 태연해야 한다. 세상은 물질만능주의가 되고 평화론이 활발하게 주장되는 '불확실하고 의심스러운 시대'지만, 우리의 본분으로서는 철저하게 이에 역행해가지 않으면 안된다.」


즉, 사회가 어떻게 변화하더라도 군대와 군인은 그것에 좌우되지 않아야 하며 군대는 오히려 사회에서 격리되어 그것에 초연해야 한다고 간주되었습니다. 만약 민주주의가 사회의 악습을 조장한다면 그것과의 공존 역시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죠.


4. 군에 의한 국가개조론의 대두

1920년 말기에 들어 "악화된 사회"에 대한 군의 우려는 군인 경시풍조와 군인의 낮은 지위·경제적 곤란 등에 힘입어 점차 사회에 대한 반발심으로 발전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사회의 군인에 대한 혐오는 이제 모멸과 박해로 옮아가고 있다.", "최근 전쟁이 없다고 해서 함부로 군인을 학대하고, '군축, 군축'하며 군인편중이 부당하다고 하고 연금법까지 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라는 등의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견해들은 물론 실태를 과장한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그런 과장이 반발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군인들은 그들을 비판하는 의회나 매스미디어에 대해서도 반발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까지 군의 정치개입은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정부의 정책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없었으나 국방문제의 취급이나 군인비판에 대해서는 때로 공적인 통로로 불만을 표시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해행사기사」에 실린 몇몇 주장들을 살펴보면...

「공평무사한 입장으로 신중히 심의해야 할 의회에서 의원의 언행 태도는 매우 졸렬하고, 그 질문에 이용하는 자료도 대단히 천박하다. 특히 군사상 지식에 있어서는 매우 빈약하여 실태의 관찰은 외형에 지나지 않고, 당파적인 견해로 국방문제를 다루어 정쟁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진실로 우려된다.」

「군사관계의 기사는 내용이 대단히 빈약할 뿐 아니라, 국방의 대의를 망각하고 정쟁의 도구로 사용하거나 군대를 오해해서 군사사상의 발달을 저해하는 기사만 나열하고 있다.」

「모든 언론기관이 펜을 들어서 군인을 공격하는 가운데 군이 한마디도 반론하지 않는다면, 국민은 군인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오해하기 때문에 군 당국은 국민에게 진상을 알려서 오해를 풀어야 한다.」


군대와 일반사회와의 관계는 전 시대에 단순히 우려 수준에 그쳤던 것을 넘어서 이제 사회의 군 비판에 대해 군대가 피해의식과 적의를 갖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과거 소수파의 주장과 같이 사회와 군의 공존·융합이라는 의견이 군 내부에서 받아들여질 여지는 거의 없었죠. 그 대신 등장한 것이 과거의 "사회 교육자론"을 넘어서서 군이 국가와 사회를 주도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국가개조 운동"이었습니다.


[1936년 2.26 사건 당시의 사진]

예전부터 정당에 대한 불신을 갖고 있었던 군부는 혼란한 정치 상황을 계기로 "국익이 위협받는데도 정부가 이를 돌보지 않는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정치개입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930년에 결성된 급진장교의 그룹인 「사쿠라회」의 취지서는 그런 신념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지금의 사회를 보면, 위정자나 정당의 부패, 자본가의 대중무시, 언론기관의 유도에 의한 국민사상의 피폐, 농촌의 황폐......(중략)....... 등등 국가의 견지에서 보면 기가 막혀 참을 수 없는 현상이 쌓여가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에는 이것을 해결할 정책이 없고, 아직 일말의 성의조차 않는다. 따라서 정부의 위신은 점차 땅에 떨어지고, 국민은 실로 불안한 상태에 있어, 국민정신은 점차 이완되고 , 국세는 나날이 하강하고 있다. (후략)」

게다가 정계의 거듭된 재정합리화와 긴축정책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경제적 상황은 그다지 호전되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1929년에는 세계대공황이 발생하여 일본도 1930년의 무역총액이 전년도의 69%로 감소하고 실업율이 급증하는 등 막대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정계는 이에 대해서도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내 일부 급진적 장교에 의해 수상이 암살되는 5.15 사건 및 2.26 사건 등이 발생하여 정상적인 헌정정치는 큰 타격을 받게 되었죠.

이러한 움직임의 직접적 원인이 사회에 대한 피해의식이나 적의 때문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일부 과격파 군인들이 대륙에서 독단적인 군사행동을 취하거나 국내에서 정치개입을 시도했을 때 대다수의 군인들이 이를 지지하거나 최소한 묵인했던 것은 이전에 사회에 의해 겪었던 신랄한 비판과 냉대에 대해 큰 반발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5. 마치며...

근대화 초기에 일본의 군은 비록 징병이라는 부담으로 국민의 원성이 되기는 했으나, 개인에게 근대체제를 학습시키는 사회화 도구로 작용하였으며 이후 일본의 대륙 침략기에는 국익달성의 첨병이 되는 등 당시 사회에서 선망과 위신의 대상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전후 경제적 어려움과 아노미, 민주주의 이념의 유입 등은 군을 둘러싼 환경과 군의 위상을 크게 변화시켰고, 군은 이에 점차 사회와 유리되어 끝내는 사회 그 자체를 변화시키기 위한 행동을 시도했습니다. 그런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이미 구 일본의 패망으로 자명하게 드러났을 것입니다.

요 근래 들어 군의 기강해이와 사고 다발, 군에 대한 경시와 안보의식 부재 등과 같은 문제들이 많이 제기되고 있고(사고가 최근 들어 다발하는게 아니라는 시각도 있습니다만), 최근에는 북한군 병사가 휴전선을 넘어오고도 이를 인지하지 못했거나 GP 내에서 한 병사가 동료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여 이에 대한 우려와 대책 마련에 대한 논의가 분분한 실정입니다. 다만 이런 논의들에서 아쉬운 점은 이런 이야기들이 주로 개인의 군기 해이 차원에서 다뤄진다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 본 일본의 사례에서도 보듯이 1908∼1920년대 사이에 벌어진 군기 해이나 군에 대한 경시는 근본적으로는 군의 존재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인해 공통의 목표가 사라지고 세계적으로 평화적 정세가 조성된 상황에서 군인들이 임무의 본질에 대해 흔들리고 국민들에게 군이 불필요하거나 중요치 않은 존재로 여겨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에 있어서도 군인이 존경받지 못하고 사람들이 군의 존재와 군복무의 중요성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것, 안보관의 부재, 그리고 군인의 복무자세가 해이해지는 것은 과거 50∼60년대와 달리 국민 대다수에게 있어 군의 존재 필요성에 대한 합의가 느슨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게 아닐까요.

따라서 논의의 초점 역시 적어도 외면적으로는 평화로운 이 시기에 있어 군대의 필요성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어떻게 도출할 것인지, 혹은 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어떻게 부각시켜야 할지에 맞춰져야 한다고 봅니다.

한편 보다 좁은 차원에서는 군이 현재의 사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도 논의되고 있습니다만, 1908∼1920년대 사이 일본에서 나타나는 군에 대한 경시와 군의 낮은 지위, 그리고 이에 대한 군부의 시각은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 군이 차지하는 비중과도 유사한 부분이 많아 우려되는 바가 큽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일본의 선례와 과거 우리 역사의 군부 쿠데타 경험에서 보듯이 군이 사회를 바꾸려는 것이 바람직하지도 않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군이 사회를 바꿀 수도 없고 또 사회와 유리될 수 없는 이상, 과거의 사례에 집착하기 보다 현재의 사회 내에서 어떻게든 사회와 공존·융합하려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비록 사회에 여러 군데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더라도 말이죠.




[참고문헌 / 자료 출처]
- 戶部 良一, 이현수 譯, 『근대 일본의 군대』, 2003,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
- 藤原 彰, 엄수현 譯, 『일본 군사사』, 1994, 시사일본어사
- 강창성, 『일본/한국 군벌정치』, 1991, 해동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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