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성격의 오다, 지략에 능한 도요토미, 대기만성형의 도쿠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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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사람은 지금도 일본사람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역사의 인물로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최고영웅은 비슷한 답이 나와도 일본인들의 최고 영웅은 사람마다 답이 다르다고 한다. 일본인이 추앙하는 영웅 10명안에 나란히 들어서는 전국시대 영웅 중의 영웅,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인들의 마음에 깊이 자리하고있지만, 세명을 평가하는 주관적인 기준에 따라 최고영웅을 내세우는 것이다. 여기서는 전국시대의 큰 흐름, 이 세명에 대하여 간단히 알아보겠다.
'멍청이' 오다 노부나가
풍운아 오다 노부나가는 '파괴의영웅' 으로 기존의 일본이란 집을 부수고 통일 일본인이라는 집을 지을 터를 마련한 군인, 전략가형이라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집 지을 터를 닦은 인물로 전시수상 재목이었던 데 반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 위에일본 통일이라는 집을 완성한 인물의 평화시의 수상감으로 비유된다. 이 세 사람의 성격을 비유한 이야기가 있다. 손 안의 새가 울지 않는 다면 어떻게 했을까? 다혈질에 성격이 급한 오다 노부나가는 즉시 죽여 버리고, 꾀가 많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떻게든 새가 울게 만들고, 느긋한 성격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새가 울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라고 한다. 죽은 나이도 노부나가가 49세, 히데요시 62세, 이에야스가 75세 로 그들 성질 급한 순서대로였다. 이 세 삶의 일본통일 과정에서의 행동을 묘사한 유명한 글을 소개해 보도록 하겠다. '오다가 쌀을 찧어 하시바가 반죽한 천하라는 떡, 힘 안 들이고 먹은 것은 도쿠가와' 이 세 사람 가운데 가장 드라마 같은 삶을 산 사람은 바로 오다 노부나가로 그가 통일의 터를 닦지 않았다면 일본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시대를 앞서는 안목과 남들과 다른 기발한 아이디어를 지닌 인물이었으며 천하를 그의 손아귀에 거머쥐려는 대야망의 소유자였다. 그는 적의 허점을 노리고, 기동성을 생명으로 여겼으며, 정보 중심의 작전과 치고 빠지는 작전, 그리고 군비의 현대화에 힘을 썼다. 그의 '삼단' 이라는 조직적 총격전은 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직업군인으로 군대를 조직하는 '병농분리'로 월등한 군사력을 가질 수 있었고, 이게 바로 그의 일본 최강자로 군림하게 된 비결이다. 그러나 일본통일을 눈앞에 두고 중신 아케치 미츠히데의 반란으로 혼노지에서 자결하고 만다.
'원숭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의 사후 권력의 자리에 떠오른 인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10일만에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하고 노부나가의 아들들을 조종하면서 경쟁세력을 굴복시키고 일약 노부나가가 누렸던 권력을 이어받게 되었다. 그는 간바쿠와 태정대신을 겸하여 명실상부한 일본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그리고 1590년에는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되고, 토지 수확량 조사로 다이묘 견제와 농민에게 토지소유권을 인정하게 하는 대신 연공을 내게 했다. 그리고, 그는 전국에 '가타나가리(칼사냥)'를 시행하여 농민의 무기를 몰수했다. 또 그는 '히토바라이령'을 내려 서로 다른 계급의 사람들이 섞이는 것을 금지했다. 그리고, 통일 후의 넘치는 군사력과 그의 야심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그러나, 조선의 수군과 의병, 그리고 정신을 차린 관군의 활약으로 7년에 걸친 전란은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병사함으로써 그의 패배로 끝나고 만다. 천하인 도요토미에게도 큰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56세에 낳은 5살짜리 아들 히데요리의 앞날에 대한 걱정이었다. 그는 5명의 다이로를 불러서 다짐을 받아내고 죽었지만, 문신파와 무신파가 대립하여 세력다툼을 벌이고, 그중에 다툼을 말리던 마에다 도시이에가 죽어 버렸다.
'너구리'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가 죽자 이에야스도 기회를 보다가 미츠나리에 맞서 동군을 일으키고, 미츠나리의 서군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주시키고 드디어 일본을 거머쥐게 되었다. 그는 전국 다이묘를 새롭게 임명하고, 반대파는 모조리 죽이거나 평민을 만들어 버렸고, 신반 다이묘와 후다이 다이묘, 도자마 다이묘라는 세 등급으로 나누어 차별 대우했다. 그러나 그의 절대 권력장악은 세가지 원칙에서 진행되었다. 첫째, 토지에서 생산되는 모든 산물을 쌀을 기준으로 하는 고쿠로 환산하여 세금이나 봉급 등 모든 경제활동을 고쿠로 따져 계산함으로써 국가 경제의 기초를 분명히 하며, 둘째, 부시와 농민이 뒤섞이지 않게 갈라놓는 병농분리제를 계속 실시한다. 셋째, 이러한 제도가 외국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쇄국정책을 펴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오사카성의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제거함으로써 에도 막부에 저항 세력은 완전히 제거되었다. 일본엔 이제 새로운 질서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오닌의 난 이후 전국시대는 이들 세 사람에 의해 다시 하나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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