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일본이야기

天下布武를 향한 대전략

구름위 2012. 12. 13.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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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가 노부나가

 일찍이 “천하포무의”의 의지를 가진 노부나가는 다른 다이묘와가가 상상도 못할 정도의 구상을 했다. 군사만이 아닌 여러 가지 정치적, 외교적 수단도 종횡으로 구사하고 있다. 특히 외교전략에서는 능숙한 솜씨를 발휘하고 있다, 노부나가는 오케하자마(桶狹間)전투후 동족의 이마가와(今川)의 영지가 아닌 미노(美濃)로 향했다. 미노공략에 앞선 영록(永綠)5년(1562) 노부나가는 인접국 미카와(三河)의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와 공수동맹을 맺는다. 하지만 전국의 외교전략의 상식은 이해관계의 충돌이 없는 멀리 떨어진 나라와 동맹을 맺고 배후를 견제하고 가까운 곳을 공략하는 “遠交近功”이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이 상식을 깼다. 이에야스라는 인물은 의리가 두터운 사람이라고 신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동맹은 노부나가가 혼노지(本能寺)에서 쓰러지기까지 20년도 넘는 긴 세월에 걸쳐 유지되고 있다. 이에야스는 신켄(信玄)의 대군을 맞아 자국의 멸망의 위기에 빠졌을 때 조차 노부나가와의 약속을 깨지 않았다. 노부나가는 물론 遠交近功도 했다. 미노공략에서 그 배후인 북오미(近江)의 아사이 나가마사(淺井長政)에게 동생 お市을 시집보내 동맹을 맺었다. 이 공수동맹은 원구(元龜)원년(1570)아사이에 의해 파기되었지만 이는 노부나가가 나가마사와의 약속을 어기고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朝倉)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아사이와 동맹을 맺은 다음해 영록8년(1565) 노부나가는 양녀를 다케다 신켄(武田信玄)의 아들 가쯔요리(勝賴)에게 시집을 보냈다. 이 동맹은 강호 신켄에 대해 노부나가가 저자세를 보이고 있다고 해도 좋다. 강자와는 싸우지 않는다는 노부나가의 철저한 현실주의 가 보인다. 나중에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과의 동맹을 맺는데 이 또한 같은 경우라 할 수 있다.

 誘降전략(적의 포섭)도 구사했다. 적을 설득시켜 내응하게 하는 모략을 노부나가가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미노 공격때였다. 수년간에 걸쳐 미노의 무사들을 회유해 아군으로 만들었고 미노 3인방이라 불리는 사이토 도산(齋藤道三)의 부장을 설득시켰다. 후에 히데요시(秀吉)의 참모가 되는 타케나카 간베에(竹中半兵衛)도 이때 노부나가편에 가담했다. 이 때문에 노부나가가 이나바(稻葉)산성을 급습했던 때는 도산도 수습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난공불락이라 불리던 명성(名城)이 순식간에 함락된 것이다.  

 천정원년(1573)의 아사이, 아사쿠라 공격에서는 아사이의 가신 阿閉貞征와 오미의 토호들을 배반시켜 고다니(小谷)성을 고립시키고 있다. 에치젠의 아사쿠라의 부장들도 많은 수가 노부나가의 계략에 의해 내응해  아사쿠라 요시카케(朝倉義景)는 일족에게 공격당해 자멸했다. 다케다씨를 섬멸할 때도 木曾義昌과 일족인 穴山梅雪들의 중신들을 이반시켜 가쯔요리를 파멸에 이르게 하고 있다. 오케하자마(桶狹間)전투 이외에는 항상 상대를 상외하는 대병으로 적을 분쇄했던 노부나가이지만 그전에 이렇듯 전략을 구사해 그 기세를 꺼고 마지막에 결전에 들어간 것이다.     

 

권위는 활용한다

 노부나가의 계략이 한층 돋보이는 것은 강화전략에 있다. 즉, 화평공작에 조정의 권위를 이용하고 있다. 노부나가와 조정의 관계는 깊다. 노부나가의 아버지 노부히데는 천문9년(1540) 外官御展의 조영비용을 바치고 그 공으로 미카와노카미(三河守)를 임명받았다. 게다가 천문12년(1543)에는 천황이 거처하는 內裏의 수리비용으로 4000량을 헌납했다. 노부나가도 영록11년(1568)에 상경해 다음해부터 村井貞勝에게 명해 3년에 걸쳐 內裏를 수리하고 있다. 노부나가는 수리와 동시에 도성안의 사람들에게 쌀을 빌려주고 이 이자로 조정의 수리비용을 충당하라고 지도하고 있다. 중앙권력의 상징으로의 조정권위와 유효성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다.

 이어 노부나가가 처음으로 조정을 이용했다고 보는 강화전략은 아네가와(姉川)에서 아사이·아사쿠라 연합군을 격파한 원구(元龜)원년(1570)년 말경이다. 아네가와(姉川)에서의 대승에도 불구하고 노부나가는 그 후도 연합군과 대치해 교착상태에 있었다. 이것을 본 미요시(三好), 록가쿠(六角), 혼간지(本願寺)의 반(反)노부나가 세력이 공격해와 적의 포위망에 빠져 버릴 위험이 생긴 것이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 이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일련의 사태가 장군 요시아키에게 원인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잇는 노부나가는 요시아키에게 알선을 도모했다. 노부나가의 요구를 거절하면 자신의 음모가 밝혀지는 요시아키는 하는 수 없이 조정에 주청을 해 강화권고의 칙령을 내렸다. 노부나가는 기분좋게, 아사이·아사쿠라는 마지못해 권고를 받아들여 양군은 철수했다. 이런 감각의 고도의 전략으로 노부나가는 최대의 위기를 벗어난 것이다. 노부나가타도의 절호의 기회를 자신의 손으로 망쳐버린 요시아키는 그의 권위가 추락하는 것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노부나가의 고등전략을 최대의 난적 이시야마혼간지(石山本原寺)와의 전투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노부나가가 가장 위험하게 궁지에 빠져버린 것이 천정6년(1578) 가을이었다. 하리마( 播摩)의 別所長治, 세쯔쯔(攝津)의 荒木村重, 高山右近등이 모리(毛利), 혼노지(本原寺)와 결탁해 모반을 했다. 노부나가는 이 불리한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재차 조정에 화의알선을 요청한다. 조정은 혼간지(本願寺)에 칙사를 보내고 그 결과 혼간지(本願寺)는 모리와의 거리를 두어야 했다. 한숨을 돌린 노부나가이지만 칙사가 모리에게 출발하기 직전에 돌연 강화의 알선을 일방적으로 철회했다. 사실 그 짧은 기간에 노부나가 수군의 거대 철선이 木津川沖에서 모리수군을 격파하고 또 게략에 의해 高山右近과 中川淸秀가 투항한 것이다. 이어 천장8년(1580)의 혼간지(本願寺)를 양도받고도 병력의 보급로를 차단시켜 차츰 피로를 보이기 시작한 농성중인 잇키(一癸)무리들 사이에 화의파와 전투파의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 노부나가가 조정에 강화의 알선을 요청한 것이 성공했던 것이다. 난공불락의 요새를 무혈입성한 것이다.

 

전격군단의 비밀

 그러나 아무리 계략을 쓰더라도 실제 병력이 따라주지 않으면 실효가 없었다. 이 때문에 노부나가는 부국강병에 전력을 기울였다. 노부나가는 도로망을 완벽하게 정비했다. 도로는 전략상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군대와 군수품의 수송로이기 때문이다. 특이 노부나가 군단은 신속한 기동력으로 알려져 있지만 적의 의표를 찌르는 그 기민한 군사행동은 정비가 잘된 도로망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노부나가의 주위에는 모두가 적이기 때문에 이러한 도로망의 활용은 중요했다. 노부나가의 교통전략은 스케일이 컸다. 영국내의 도로의 폭은 3間半(6.4m)으로 강이나 하천에는 다리를 만들고 도로는 정비해 직선화 시켰다. 그 양측에는 가로수로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었다. 노부나가의 전략사상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 나카센도 스리바도우케(中山道 磨針峠)의 개수공사다. 인부 2만명을 동원해 폭 5.4m, 깊이 1m의 땅을 파고 암석은 화약으로 파괴했다. 그 결과 기후(岐阜)와 교토(京都)의 거리가 3㎞나 단축되었다. 노부나가 군단의 행동력은 말로 달려 5시간에 50㎞로 시속10㎞/hr, 도보부대는 5시간에 20㎞로 시속 4㎞/hr인데 3㎞거리의 단축은 기병으로 1시간, 보병부대로는 반나절 정도가 된다. 磨針峠의 개수로 인한 거리 단축이 실제에는 보병부대의 교토입성의 도달거리를 거의 하루를 앞당겼다.

 이 교통망을 이용한 전격작전으로 천정원년(1573) 7,8월의 행동이 있다. 7월3일에 장군 요시아키가 宇治에서 거병을 한 소식을 듣고 6일 노부나가는 새로 만든 쾌속정으로 비와호를 長浜에서 坂本까지 60㎞로 하루만에 건너 하루 밤을 잔 후에 7일에 입경, 순식간에 전島성에 잇는 요시아키를 추방했다. 또 8월8일 밤에 기후(岐阜)에서 출진해 북오미(近江)에서 아사아·아사쿠라와 대치하고 13일 밤에는 퇴각하는 아사쿠라군을 추격해 쯔루가(敦賀)에 이르러 16일까지 머물고 17일에는 에치젠을 공략하고 20일에는 아사쿠라 요시카케(朝倉義景)를 자결하게 한다. 26일에는 노부나가가 북오미(近江)에 돌아와 다음날 밤에는 히데요시의 군세가 고다니(小谷)성을 공략해 그 결과 아사이 나가마사(淺井長政)도 자결하게 된다. 강적, 난적과의 전투는 작은 공격과 계략을 게속해 상대를 약하게 만들고 기회가 보이면 전격적으로 격파하는 노부나가의 작전은 이러한 도로의 전략에 유지되었던 기동력이 있었기 때문에 실현이 가능한 것이다.

 

미완성의 마지막장

 마지막으로 노부나가의 전략은 철저하게 구시대의 타파가 필요했을 것이다. 노부나가는 일체의 우상을 경시하고 구시대의 귄위를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다. 히에이잔(比叡山)을 공격하고 곳곳에 불을 질러 승려 1600여명을 살육했던 사람이다. 천정9년(1571)에는 眞言宗의 명사찰 이즈미(和泉)의 마키오지를 공격 한 때도 堂塔伽藍에서 經典까지 일체를 불태웠다. 노부나가의 검지실시에 따르지 않았다는 구실로 무엇보다 승려들이 무력을 축적하고 사찰릐 영지를 늘려 부를 탐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또 노부나가는 필요가 없는 성곽은 파괴하고 있다. 영국 오와리(尾張)도 오케하자마(桶狹間)전투이전에 후루와타리(古波)성과 이와쿠라(岩倉)성을 모조리 부수고 있다. 야마토(大和)에서 마쯔나가 히사히데(松長久秀)가 있었던 다몬(多聞)성을 부수고 고리야마(郡山)성을 모조리 파괴해 버렸다. 이렇게 크고 작은 성채는 각지의 무사들의 근거지엿지만 이 또한 구시대 권위의 상징중 하나였고 천하통일을 지향한 노부나가에게는 구시대의 유물에 불과했다.

 이렇듯 노부나가의 갖가지 파괴전략은 난세를 통일하고 새로운 천하를 만들기 위한 큰 목표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건설을 위한 대파괴였던 것이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천문10년(1582) 6월2일 혼노지(本能寺)에서 쓰러져 그의 천하인의 꿈은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