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의 새 인간 노부나가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의 생애를 대외인식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또 다른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노부나가는 마치 혼란과 전란을 종식시키고자 태어난 인물처럼 일본의 통일사업에 매진하였다. 바쿠후를 멸망시키고 기존의 무장들과는 달리 중세적인 가치관인 불교의 권위를 부정하였으며, 새로운 신앙체계를 전파하는 선교사의 우대, 새로 대두되기 시작한 다도의 존중, 상인층의 자유로운 활동 보장 등을 행하였다. 새 부대에 새 술을 담으려는 정신으로 형식과 내용의 양면에서 모두 혁신을 감행했던 것이다. 노부나가가 이렇게 나아갈 수 있었던 데는 자신의 힘으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려는 강한 의지와 능력 외에, 당시 일본과 서양의 접촉에 의한 자극이 있었음을 간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1543년 큐슈 남쪽의 작은 섬 타네가시마에 포르투갈 인이 표착한 이래로 총포가 전래되고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등의 선교사에 의해 천주교가 전파되었다. 처음에는 선물용이었던 총포가 차츰 무기로서 그 효능이 부분적으로 인정받아갈 무렵, 노부나가는 총포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차례대로 연속발사를 할 수 있도록 훈련시킨 대규모의 총포부대를 편성하였다. 훗날 센코쿠 시대의 전술변화를 가져왔다고 평해지는 노부나가의 총포부대는 타케다 군과의 나가시노 전투에서 가공할 위력을 드러내 당시 천하무적이라고 불리워지던 타케다의 기마군단을 일시에 괴멸시켜 버린다. 노부나가가 강력하게 통일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강력한 총포부대가 있었던 것이다. 다른 무장들이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을 때 적극적으로 신무기를 받아들여 이를 전술화할 줄 아는 힘이 노부나가에게는 있었다.
이러한 총포의 전래와 활용이 기술적인 측면이라면, 천주교의 전래와 선교사와의 교류는 노부나가에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서양문물이나 무역상의 이득에 그치지 않고 유럽이라는 또 다른 세계의 존재와 둥근 지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세계의 변화를 알았던 것이다. 천축, 지나, 본조를 전세계로 인식하였던 일본의 전통적인 삼국 세계관에서 벗어나, 선교사들이 가지고 온 지구의와 세계지도 속에서 일본의 위치와 나아갈 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노부나가가 선교사들을 자주 접견하였다는 사실은 그들을 통해 이국세계를 알려는 호기심 정도가 아니라, 세계의 변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지속되는 국내의 전란을 하루빨리 종식시켜야 한다는 의지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노부나가가 우상파괴에 앞장서서 자신의 통일사업을 방해하던 불교도를 무자비하게 탄압한 점이나, 천하경영의 포부를 안고 쌓은 아즈치성의 가장 높은 건물을 천주각이라 부르고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점 등은 천주교와의 접촉에 의한 결과라 할 것이다. 센코쿠 시대의 무장들이 성을 쌓을 때 가장 높은 건물을 천수각이라 하는데, 아즈치성의 6층 건물은 발음은 같지만 다른 한자인 천주각(텐슈카쿠)이라 불렀다고 한다. 선교사를 우대하고 아즈치 성 아래에 천주교 신학교인 세미나리요(seminario)를 세우도록 허락한 노부나가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단순히 서양의 이국문화에 대해 관심을 보인 것 이상으로 그 자신이 천주교에 깊이 심취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노부나가에 있어서 천주교와 서구문물은 외적인 자극에서 그의 내면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주어 말년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새로운 신으로 모시도록 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자신의 생일인 5월 3일을 참배일로 정하고 그날은 살아있는 신으로서 사람들의 예배를 받았다고 한다. 노부나가가 추구한 신의 세계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는 일본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극히 이질적인 기질의 영웅으로 자신이 개척한 새 시대의 문 앞에서 불의의 기습을 받고 생을 마감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