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일본이야기

오다 노부나가

구름위 2012. 12. 13.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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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


천문20년(1551) 18세의 오와리(尾張)의 반정도를 상속받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천장10년(1582) 49세의 나이로 혼노지(本能寺)에서 죽었을 때 혼슈(本州)의 중앙부분을 거의 장악하고 있었다. 거의 천하를 평정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런 판도의 확장속도는 경이적인 것이었다.

이 노부나가의 궤적을 크게 3가지오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기는 오와리를 평정해 오케하자마(桶狹間)전투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本)를 쓰러트리기까지, 제2기는 장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교토(京都)로부터 몰아내고 무로마치(室町)막부를 멸망시키기까지, 제3기가 노부나가 5군단과 동맹자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을 수족처럼 활용하고 종횡으로 활약한 시기다.
제1기에 대해서 간단히 말하면 아버지 노부히데(信秀)의 사망으로 “尾張のうつけ”의 위장을 걷어버린 노부나가는 영지안의 반대자들의 숙청을 개시한다. 22세에 수호대(守護代)인 織田信友를 살해하고 (기요쓰)淸州에 입성, 24세에 반기를 든 동생 信行을 모반이라고 하여 제거한 다음 26세에 岩倉의 織田信安을 멸망시킨 것을 마지막으로 오와리전체를 완전히 평정했다.

국내에서 대항하는 일족을 제거하는 것은 戰國大名이 그 권력을 확립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길이다. 이기간이 약 7년, 노부나가에게 행운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강적 이마가와의 上京(교토에의 입성)이 오와리 영내의 평정이 완료된 다음해 영록(永祿)10년(1560)이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제 2기에 들어선 노부나가 최초의 적은 미노(美濃)의 사이토 도산(齋藤道三)과 이세伊勢의 키타다케(北田)씨였다. 29세에 이에야쓰와 동맹을 맺어 배후를 공고히 한 노부나가는 공략을 계속해 34세에 이나바(稻葉)산성을 공략해 미노를 평정한다. 「天下布武」의 朱印을 사용한 것도 영록10(1567)부터다.

다음해 봄 노부나가는 북 이세를 평정해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미노로 맞이한다. 그리고 9월7일에 요시아키와 함께 기후(岐阜=이나바 산성)를 출발해 상경에 오른다. 거느린 군세는 미노, 이세, 오와리의 무장과 이에야쓰군과 및 인척관계에 있는 아사이 나가마사(淺井長政)등의 5만여 병력이었다. 오미(近江)觀音寺성의 록가쿠(六角)씨를 곧 공격해 함락시키고 불과 20여일만에 숙망의 입경에 성공했다.

노부나가의 군세는 더욱 전격적으로 침공을 감행해 9월중에는 세쯔쯔(攝津), 카와치(河內)의 대부분을 평정한다. 10월초에는 마쯔나가 히사히데(松長久秀)가 항복하고 야마토(大和)도 수중에 넣는다. 역사가 크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때는 노부나가 35세의 일이다. 오케하자마 전투루 9년이 지난 때였다.

다음해 인 영록12년(1569)노부나가는 8만의 대군으로 키타다케(北田)씨를 공격해 이세를 평정했다. 이때부터는 새로운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노부나가에 의해 15대 장군이 된 요시아키가 중앙의 실권을 노부나가가 장악하고 있는 것을 알고 각지의 다이묘에게 밀서를 보내 장군권력의 만회를 위해 원조를 구한 것이다. 노부나가의 가장 힘든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후 노부나가는 철통같은 信長포위망(包圍網)을 상대로 악전고투를 하게 된다.


원구(元龜)원년(1570) 37세의 노부나가는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요시카케(朝倉義景)를 토벌하기 위해 쿄토를 출발 파죽지세로 와카사(若狹)에 침공하지만 노부나가가 없는 틈을 타 동맹국이던 북 오미(近江)의 아사이 나가마사(淺井長政)가 배반해 노부나가의 퇴로를 차단해 버린다. 노부나가는 급히 교토로 돌아왔는데 따라온 것은 불과 10여기 정도라 한다.

아사이와 아사쿠라의 접전에 이에야스의 지원을 구하고 2개월 후에 아네가와(姉川)에서 대결해 격전후 대승을 거두어 큰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완전히 뿌리를 뽑은 것은 天正원년(1573)이고 3년간에 걸친 수차례의 공방이 있었다.

이 밖에 信長포위망에 더해진 것이 다케다 신켄(武田信玄), 모리(毛利)家, 이시야마혼간지(石山本原寺), 미요시(三好)씨, 히에이잔(比叡山)의 승병등의 대세력이 있었고 노부나가는 이에 대해 각개격파의 작전으로 동분서주하며 싸웠다.

주요한 전투를 열거해 보면 37세의 가을에 세쯔쯔(攝津)의 야전, 후쿠시마(福島)성의 미요시(三好)3인의 공격, 38세 여름의 이세 나가시마 공격, 가을에 북 오미의 고다니(小谷)성 공격에 히에이잔(比叡山)을 화공으로 완전히 섬멸시키고, 39세의 한 래도 오미의 아사이 공격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신켄이 움직인다”라는 이에야쓰의 보고에도 원군만 보내게 되었다. 그 결과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遠州의 미카다가하라(三ケ原)에서 대패를 하지만 이 패전이 노부나가에게 오히려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 이러한 틈을 타 장군 요시아키가 거병을 한 것이다. 노부나가는 요시아키의 음모를 알고 있었지만 장군가의 전통적인 권위에 손을 대어 인망을 잃는 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군사를 일으켜 노부나가에게 칼을 들이 댄다면 경우가 달라진다. 정정당당하게 제거해도 된다고 생각한 노부나가는 천정원년(1573) 전격적으로 교토에 입성해 요시아키를 추방해 무로마치 막부의 종말을 고했다. 노부나가는 조정에서 재허를 얻고 천하통일의 명령을 하달했다. 40세의 노부나가는 명실상부하게 노부나가 정권을 확립했다.

제3기의 노부나가는 천하통일의 구상을 예술적인 전략·전술로 현실화했다. 40세에 나가시마(長島) 잇코잇키(一向一癸)를 평정하고 42세에는 나가시노(長篠)에서 다케다 가쯔요리(武田勝賴)를 쳐부수는 동시에 에치젠을 평정, 43세부터는 이시야마혼간지(石山本原寺) 공격에 주력, 47세때는 大坂을 수중에 넣었다.

물론 노부나가도 바쁘게 움직였지만 거의 모든 전투는 노부나가의 5개군단의 지휘관 柴田勝家, 明智光秀, 羽柴秀吉, 丹羽長秀, 瀧川一益등에게 맡겨졌다. 노부나가가 키워온 부장이 그 자체로 큰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질풍과 같은 속도로 일본 전국을 점령해가던 49세되던 천정10년(1582)에 츄고쿠(中國)지방의 모리씨를 공략하고 있던 羽柴秀吉(豊臣秀吉)의 고전에 지원을 하러 가던 도중 교토의 本能寺에서 부하 아케찌 미쯔히데(明智光秀)의 반란으로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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