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존재-닌자忍者 역사의 뒷무대를 달려온 닌자의 실상을 쫓는다
역사의 어둠 속에는 뭔가가 있다.
시대를 물들인 이런저런 사람들의 욕망과 책략을 등에 지고, 닌자는 어둠 속을 질주한다.
확실히 그 시기에 있어, 시대를 만들어 가면서도 존재가 비밀에 붙여져 왔던 닌자.
그 실상을 밝힌다.
수많은 수수께끼에 싸인 닌자전설의 실태를 폭로한다역사의 그림자에서 암약한 닌자의 실상
이나가키 시세이 稻환史生 작가
쇼토쿠聖德태자 시대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시대까지, 어둠의 세계를 지배한 어둠의 실력자-
닌자. 그 성립에서 말로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뒷무대에서 활약한 닌자의 전부를 쫓는다.
인술忍術의 역사는 오래되어, 기원전 3세기 진秦의 시황제 시대, 도교의 도사였던 서복徐福이 일본에 와서 전한 것이 처음이라고 한다. 고대의 항해술로는 몇 개월이 걸렸지만, 상륙한 것이 기슈우紀州여서, 밀감 등의 는 없었지만, 두터운 인정에 영주하게 되었다. 그는 모국에서는 도사였기에, 주민의 친절에 보답하는 의미로 숙달된 신선술을 가르쳤던 것이다. 신선술은 선인이 사용하는 마카후시기摩하不思議의 술법, 즉 인술의 원조라고도 하는 기술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 망양한 고대의 , 현실감이 없다. 실제로 비술을 문자로 기록한 것은 병서[손자孫子]이지만, 당唐이 된 중국에서 그것이 전해진 것은 한참 후인 일본의 나라시대였다. 견당사 키비노 마키비吉備眞備가, [오자吳子][육도六韜][삼략三略] 등의 병서와 같이 가지고 온 것이다. 이 [손자] 중에, 전략, 전술로서의 닌자가 설명되어 있었으나, 술자로서의 닌자의 존재 또한 나와있다.
전국戰國의 세상에서 암약했던 그 실상을 탐구한다 이가닌자伊賀忍者와 핫토리 한조오服部半藏의 수수께끼 15
토베 신쥬우로오 戶部新十郞 작가
은밀행동이 주된 일이었던 닌자는, 역사의 무대 앞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그들의 본래의 모습은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 초인적인 존재로 생각되는 닌자들의 의외일 정도의 인간미 넘치고 고뇌깊은 일면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을 섬겼던 핫토리 한조오服部半藏를 통해 해명한다.
1. 일본의 역사에 닌자가 등장하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닌자의 정의(무엇을 닌자라고 부르는가)에 의해, 또한 역사의 범위(시작은 언제인가)에 의해, 관점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나, 이런저런 닌자적 행동을, 전승을 포함하는 기록에서 찾아보면, 진무神武천황의 동정東征 때에, 야마토大和 시노부사카忍坂마을에서 미치오미노미코토道臣命가, '풍가도어諷歌倒語'(암호를 노래나 말에 숨겨서 전함)의 술수를 사용한 일, 야마토타케루노미코토日本武尊가 쿠마소熊襲의 수령, 가와카미 타케루川上梟師를 토벌할 때, 여장을 하고 접근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반센슈우카이萬川集海]에는, 쇼토쿠聖德태자가 모노노베物部 일족을 토벌할 때, '시노비志能備'를 사용했다고 하며, 텐무天武천황이 타코야多湖彌라는 자를 시켜, 진신壬申의 난에서 승리했던 일을 전한다.
이 전후로, 병법서 [손자孫子] 등이 들어왔으므로, 연관성을 고려해도 좋다.
구체적으로 '시노비忍'의 활약을 드러낸 것은 [다이헤이키太平記]에서, '의 시노비' 혹은 '의 시노비'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가샤伊賀者 49명을 사용해서, 신출귀몰했던 쿠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는 그 상징적 존재이다.
2. 이가伊賀에서 인술이 발달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우선 지리적 환경이 있다. 서울(헤이죠오平城, 헤이안平安 둘다)에 가깝고, 그렇게까지 높지는 않다하더라도, 험한 산들에 둘러싸인, 일종의 숨겨진 마을과도 같았다(지명의 하나인 나바리名張가 '나바리隱(숨기)'를 의미하고 있다).
여기에는 옛부터, 중앙에서의 패배자가 망명하여, 숨어 살았다. 國人은 그들 망명자를 받아들였지만, 그것은 중앙의 문물을 포용하여, 성씨의 혼혈을 촉진하지 않고는 안되었다. 산간의 땅이면서, 정보에 밝고, 그 수집, 전달의 가 좋았다.
그곳은 또한 토오다이샤東大寺를 영주로 하는 장원이었다. 國人은 어느 시기부턴가 결속해서 당을 만들어, 토오다이샤東大寺의 지배에 항거했다. '惡黨'이 되었다. '惡黨'은 물론, 산적, 밤도둑 류가 아니라, 本所 적대자의 의미이나, '쿠로다黑田의 惡黨'이 유명하다. 나바리名張군 쿠로다黑田장庄에서의 반항으로, 코오안弘安 년간(1278~88)부터 크게 횡행하고 있다.
이러한 반항적 기풍은, 국주, 영주를 갖지 않고, '소오' '잇一揆'라는 일종의 자치공화제를.
3. 핫토리 한조오服部半藏는 정말로 실존인물이었던 것일까
금일 도오쿄오토東京都 신쥬쿠新宿구 와카바若葉의 사이넨지西念寺에는, 핫토리 한조오 마사나리 服部半藏正成의 묘가 있다. 정면에는 '安譽西念大禪定門'이라 되어 있고, 측면에는 '慶長(케이쵸오)元丙申(히노에사루)年霜月(시모츠키)十四日' '三州(산슈우)住人服部(핫토리)石州(세키슈우)五十五歲'라고 새겨져 있다.
한조오는 즉, 미카와에서 태어나, 도쿠가와가에서 일하여 세키슈우石州(이와미노카미石見守)가 되어, 케이쵸오慶長 원(1596)년 11월 14일, 5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사이넨지 그 자체도 한조오가 건립한 것이다. 애용한 큰 창도 그곳에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실존 인물이다.
단, 표면 상의 기록에 따른 한, 충성스럽고 용맹한 한 무장에 지나지 않는다. 전공도 상당히 올려, 8000석을 받았다. 또한, 이가샤伊賀者同心 200인을 지배했다.
4. 핫토리 한조오服部半藏와 막부의 금산봉행 오오쿠보 나가야스大久保長安와의 관계
나가야스長安에게는 종종, 괴이한 전승이 붙지만, 당시에는 금산, 은산을 한손에 쥐고, 도쿠가와가의 재정을 담당했으며, 또한, 행정관료로서 탁월한 수완을 발휘해, 이에야스의 신용 또한 얻어, 위세가 비할 바가 못되었다. 그 딸이, 한조오의 둘째 아들 마사시게正重의 부인이 되었다. 핫토리服部씨의 명망 또한 컸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다른 관점으로 본다면, 둘다 특수기능자를 지배하는 입장이었다. 한 쪽은 닌자를, 다른 한 쪽은 금산중金山衆을 그 지배 하에 두었다. 역할상, 그들은 '사병私兵' 비슷한 것으로, 도쿠가와가의 기초를 튼튼히 하려면, 자연히, 지배권은 받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 같고, 두 집안 또한 그렇게 되었다.
5. 핫토리服部가가 改易(가문을 몰수당함)당하게 된 일의 진상은
한조오半藏 장남 마사나리正就는, 8000석의 유산 외에도 5000석을 더 받았던 오오미하타모토大身旗本였다. 上忍으로서의 능력 또한 없었고, 2대째에 흔한 제멋대로의, 편벽성의 인물이었다.
사저의 보수에 同心을 사역시키고, 따르지 않는 자는 월급을 깎던지, 주지 않았다. 필요할 때면 公儀同心인 그들을, 마치 上忍이 下忍을 부리듯이, 사병처럼 부렸다.
同心들은 반발하여, 四谷笹寺에 농성하여, 소청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마사나리를 죽이고, 모두 같이 죽겠다고 말하며 반항했다. 결국, 마사나리는 근신, 주모자 10인은 처형되었다. 그 중에 달아난 자가 있어, 마사나리는 추격을 하여, 다른 사람을 죽이는 등의 과오가 겹쳐, 개역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