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art 2 : 미그 앨리 (Sabre VS MiG) |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2. 8. 22 * 세이버 VS 미그 1951년 2월부터 4월까지 UN군과 중국군은 지상에서 밀고 밀리는 접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1.4 후퇴로 수원까지 내주고 밀렸던 UN군이 대규모 반격으로 2월초 38선을 넘어서까지 밀고 올라가자 중국군은 2월 중순경 대규모 공세를 전개하여 다시 전선은 38선을 중심으로 밀고 밀리는 형태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양측이 번갈아 가면서 거센 공세를 벌이고 또, 반격을 막아내는 동안 전력은 소진되었으며 병사들은 지쳤다. 그리고 이후에는 어느 쪽도 월등한 전력으로 상대방을 밀어붙이지 못하는 대치 상태가 지속되었다.
한편, 하늘에서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세이버 전투기들이 미그앨리로 계속 출동하여 미그-15 전투기들과 연일 힘겨루기를 지속했다. 1951년 3월과 4월의 압록강 상공에서 벌어졌던 공중전에서 미공군은 세이버의 손실은 전혀 없이 미그-15를 17기 격추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러시아쪽의 자료에는 이 기간동안 미그-15 7기의 격추손실은 인정했으나 미공군이 주장하는 17기의 격추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기간의 공중전에 대한 정확한 수치는 밝혀지기 어렵다고해도 전반적인 정황으로 볼 때 이 기간동안 F-86A들이 미그-15에 대해서 우세한 전과를 올린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F-86의 상대가 미그-15 단일 기종이었던데 반해서 미그-15의 상대는 압록강 상공으로 침투하는 모든 미군기였고 F-86을 제외한 모든 미군기들은 미그-15의 적수가 되지 못했으므로 1950년 11월 미그가 처음 출몰했을 때부터 1951년 3월말까지 미그-15에 의해서 격추된 미공군기들은 미군에 의해서 확인된 것만도 B-29 5기, F-80 4기, F-84 1기, RB-45 1기 그리고 F-86A 1기였다. 이것은 적진에 추락한 손실만을 계산한 것으로 다시는 출격하지 못할 정도로 대파되거나 우군 진영에 불시착한 기체들까지 포함하면 미그에 의한 미군기들의 손실은 30여기를 넘어설 것으로 추산되는 정도였다. 그 동안의 교전에서 드러난 양측의 전과에서는 F-86과 미그-15 전투기간의 대결에서만 보면 미공군의 기록과 소련측의 기록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지만 분명히 미공군이 앞서고 있었다. 이것은 이 기간동안 중국으로 파견되어 활동하던 소련 조종사들이 대부분 미그-15의 운용을 폭격기의 요격을 목적으로 훈련받았던 경우가 많으며 전투기간의 공중전에 대한 경험이 없었던 신참들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미공군은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할만한 압도적인 공중우세를 확보하지는 못했고 공중전은 일진일퇴의 공방전으로 치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압록강 상공에서 미그-15의 요격으로 미공군 폭격기들의 피해가 극심해져서 미공군이 압록강 상공에서 마음놓고 공습작전을 수행할 수가 없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 한국전쟁중 사용된 미그-15의 도색들, 모두 소련공군 조종사들의 기체로서 계절에 맞는 다양한 도색을 사용했다. 위의 502를 달고 있는 두 기체는 유명 에이스 니콜라이 이바노프의 기체이다. ] 게다가 이때까지 밝혀진 양측의 전투기들을 비교할 때 기체의 성능만을 놓고 보면 미그-15쪽이 세이버에 비해서 약간 더 우세한 성능을 보이고 있었다. 실제로 미그-15는 세이버보다 중량이 가벼워서 운동성과 상승성능이 우세했던 것이다. 미공군의 자존심으로서는 소련제 전투기가 자신들의 최신 F-86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겠지만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미그-15에게도 숨겨진 약점이 있었는데 고속 비행시에 기체의 밸런스가 완벽하지 않다는 점 (실제 미그-15는 수직으로 급강하해도 마하 0.93을 넘지 못했다.)과 급선회시에 실속에 빠지기가 쉬우면서 만일 실속에 빠지는 경우 조종사들이 매우 두려워하는 치명적인 스핀이 발생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런 비행특성을 전투에 능숙하게 이용하여 미군 조종사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던 뛰어난 조종사들도 있었다.) 이 때문에 조종사들은 미그-15의 뛰어난 운동성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가 없었다. 반면 F-86A는 순수한 운동성에서는 미그-15보다 뒤지고 있었지만 기체의 완성도가 뛰어나 고속 비행시나 급선회시에도 완벽한 밸런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종사들은 실속의 걱정이 없이 최대 G를 받으면서 선회를 지속할 수가 있었다. 따라서 실전에서의 기동능력은 F-86A도 미그-15에 대해서 별 문제없이 대응할 수가 있었다. (일부 소련 조종사들은 F-86의 기동성이 더 좋다고 믿었다.) 미그-15에 비해서 상승속도에서는 뒤지고 있었지만 F-86은 최고 속도에서는 더 빨랐으며 고속 비행에서의 안정성도 높아서 얕은 각도의 강하시에 음속을 돌파할 수도 있었다. [ 날렵한 디자인의 미그-15, 사진은 중국에 파견되기 직전 촬영된 소련공군의 기체이다. ] 미그-15와 F-86A는 두기체 모두 캐노피의 형태도 유사한 물방울형 캐노피를 가지고 있어서 시야가 좋은 편이었다. 특히 F-86A 같은 경우는 조종석이 높게 위치하고 있어서 하방시야도 좋아 그야말로 탁트인 시계를 자랑했다. 하지만 미그-15는 조종사를 보호하기 위해서 F-86보다 조종석이 약간 깊숙하게 위치하고 있었는데 물론 이는 조종사가 피탄될 확률을 낮추기는 했지만 이로 인해서 측하방의 시야가 F-86에 비해서 약간 나빴다. 격렬한 공중전의 상황에서 대부분의 조종사들은 방탄보다는 적기를 발견할 수 있는 시야의 확보를 더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는 F-86쪽이 좀더 유리했다. 게다가 미그-15는 여압시스템이 자주 문제를 일으켜 고공비행시에 조종석의 유리창에 성에가 끼는 일이 자주 있었다. 전후에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미그-15는 피격시에 조종사가 탈출할 수 있는 탈출레버가 조종석의 우측에만 위치하고 있었는데 만일 조종사가 오른손에 부상을 입는 경우에는 몸을 기울여 왼손으로 탈출레버를 당겨야 했으며 이때 자세가 좋지 않아서 비상탈출 순간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 제4 전투비행단 소속의 F-86A 세이버들이 김포에서 이륙 활주를 위해 대기중인 모습 ] 하지만 대부분의 소련 조종사들은 자신들이 조종했던 미그-15에 대해서 매우 만족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소련공군의 베테랑 조종사였던 세르게이 크라모렌코 (이미 2차대전중 독일기 12기를 격추시킨 에이스였고 한국전쟁에서는 13기의 미군기들을 격추시킨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한국을 방문하여 인터뷰를 한적도 있음)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한국상공의 참전초기에 우리는 매우 열악한 상태에서 출동했다. 보급도 충분하지 못했고 비행장의 상태도 나빴다. 처음 F-86과 만났을 때 우리는 양측의 전투기들이 거의 같은 성능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공군의 F-86과 몇 차례 교전을 해본 후 우리는 우리의 미그-15가 F-86에 비해서 상승률이 더 뛰어나고 더 높이 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중에서의 기동능력은 양쪽이 대등했는데, 3만 6천피트 이상의 고공에서는 미그-15가 더 우수했지만 3만피트의 중고도 이하에서는 F-86쪽의 기동능력이 더 우세한 것 같았다. 하지만 양측의 이런 고도에 따른 이점은 전투에서 발휘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첫 번째 조우이후 단시간의 교전 후에 우리는 미군기들을 고공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으며 미군 조종사들은 우리를 저공으로 끌고 내려가려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느 쪽도 불리해지는 고도로 적기를 따라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되면 양측의 간격이 벌어져 공중전은 자연스럽게 끝나기 마련이었다." 두 기체의 무장면에서 보면 F-86A의 12.7mm 기관총 6정에 비해서 미그-15의 N-37 37mm 기관포 1문과 NR-23 23mm 기관포 2문의 타격력이 더 컸다. 사실 미그-15가 가진 이러한 무장은 전투기와의 제공전투를 위해서 설계된 것이 아니라 고공으로 침투해오는 미공군의 폭격기를 요격하는데 맞추어 설계된 것이었다. 미그-15의 대구경 기관포는 포구속도와 발사속도가 느려서 천음속의 빠른 속도로 기동하는 F-86을 명중시키는데 있어서는 효율이 매우 떨어졌으며, 탑재탄약의 수가 적은 단점이 있었다. 특히 미그-15는 37mm 기관포의 경우 40발 (6초 분량), 23mm 기관포는 1문당 160발 (10초 분량) 밖에는 휴대할 수가 없는 약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 기관포들은 한발이나 두발정도의 명중탄으로도 F-86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었다.
반면 F-86의 12.7mm 기관총은 2차대전의 공중전에서 입증되었듯이 탄환의 포구 속도가 빨라서 급격한 선회시에도 탄도가 거의 직선에 가깝게 유지되었기 때문에 전투기간의 공중전에 더 적합했으며 빠른 발사속도와 6정의 기관총이 집중되는 장점, 그리고 사정거리가 더 길다는 것과 1600발의 많은 탄환 휴대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서 공중전중에 세이버쪽이 적기에게 더 많은 사격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공중전에서 피탄되었던 많은 미그-15기들이 무사히 귀환해서 돌아왔다는 소련측의 기록에서 보여주듯이 제트전투기간의 공중전에서는 아무래도 위력이 약했다. 미그-15와의 공중전을 경험한 한 미군 조종사는 거의 1000발에 가까운 기총탄을 명중시킨 후에서야 미그-15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고 기록했을 정도였다. 한국전쟁 기간동안 총 23기의 미군기를 격추시켜 한국전쟁 최고의 에이스로 인정받고 있는 예프게니 파펠라예프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F-86의 브라우닝 50구경 기관총탄들은 우리 미그-15에게는 콩알처럼 약한 것이었다. 미그-15의 조종석은 방탄처리가 잘돼있었고 전방창도 방탄유리가 부착되어 있었으며 연료탱크가 피탄되더라도 자동봉입되는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어서 우리는 적기의 기총 사격을 별로 겁내지 않았다. 심지어 나의 기체가 적기의 사격에 피탄되는 소리를 들었을 때 회피 기동을 해도 늦지 않았을 정도였다. 우리 미그기들이 격렬한 공중전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기체 표면에 40-50개의 피탄 흔적이 남아있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물론, 적기가 우리를 명중시키면 우리 미그-15에서 파편이 튀어날고 연기가 발생했을 것이지만 우리는 격렬한 급강하 기동으로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이런 장면을 목격한 미군 조종사들은 우리의 기체들이 연기를 끌면서 강하할 때 격추 당한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무사히 귀환해서 기체를 수리한 후 다시 작전에 투입될 수 있었다." 또한 양측 전투기가 장착하고 있었던 조준기의 성능에서는 양측 모두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미그-15의 ASP-3N 자이로식 조준기는 높은 G를 받는 격렬한 공중전 중에 자주 정지하곤 했으며, 급격한 기동시에 편차각을 산출하기 위해서는 1-4초간의 시간이 필요했는데 실제 1/10초를 다투면서 빠르게 기동하는 전투기간의 공중전에서 이런 시간은 정말로 긴 시간이었고, 포구속도가 느린 기관포를 적기에 제대로 조준하여 명중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후퇴익을 가진 제트전투기였던 세이버와 미그-15의 공중전은 2차대전 때와는 비교가 안될정도로 빠른 천음속의 스피드로 전개되었으며 이 경우 고속 제트전투기의 급격한 선회시에는 적기의 진로를 예측해서 명중시키는 예측사격은 양측 조종사들 모두 매우 힘들었으며 조종사들이 받는 높은 G는 적기를 향해 고개를 가누는 것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이런 면에서는 F-86A에 장비된 Mk 18 조준기도 말썽을 부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조준기도 자이로식으로 작동하는 것으로 미그-15의 그것보다는 우수했지만 시속 800km를 넘어서는 속도에서 공중전이 전개되는 경우에는 자주 오류가 발생했다고 한다. 따라서 양쪽의 조종사들은 모두들 조준기보다는 자신의 감각을 믿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자이로식의 조준기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해도 조종사들의 감각은 중요한 것이었는데 F-86A의 경우 기동시에 발생하는 G의 크기를 측정해서 비행경로에 맞추어 움직여 지게 되는데 적기가 1200피트 (약 400미터) 앞쪽에 있는 것으로 세팅되어 있었다. 따라서 조종사들은 목표물이 그보다 더 먼거리에 있다면 조준원을 목표물의 약간 앞쪽으로 조준해야 했으며 1200피트보다 가까운 경우에는 목표물의 약간 뒤쪽을 조준해주어야 했다. 미그-15는 전쟁이 끝날 때 까지도 더 우수한 조준기를 장착하지 않았지만, 미공군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적극적으로 매달렸고 세이버는 후에 등장하는 F-86E형에서부터는 레이더 조준방식의 조준기를 장비하여 이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두 기종은 여러 가지 면에서 충분히 라이벌 기체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으며 공중전에서 가장 중요한 승패의 요인은 기체의 성능에 의한 차이가 아니라 조종사의 기량이었다. 1951년 5월로 접어들면서 거의 대등한 두 기종을 조종하는 양측의 조종사들은 연일 피바람을 날리며 한치의 양보도 없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었으며 이런 공중전이 앞으로 더욱 격화될 것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