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공포의 미그

구름위 2012. 12. 3.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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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 미그 앨리

◇ Act 2. 공포의 미그

(MiG Panic)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2. 7. 13

 * 공포의 미그 

최초로 제트기간의 공중전이 벌어졌던 11월 8일이후 미그-15의 출현은 점점 잦아졌으며 미군의 항공작전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바로 다음날일 11월 9일, 압록강 지역으로 정찰비행을 위해 출격했던 RB-29 1기가 압록강 상공에 다다르자마자 상공으로 솟아오른 미그-15 4기의 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 태평양 하늘의 황제에서 미그의 사냥감으로 전락한 B-29, 미공군은 B-29 백여대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미그-15의 등장으로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

단시간의 교전이 벌어진 후 이 RB-29는 큰 손상을 입고 승무원 5명이 기상에서 전사했으며 검은 연기를 끌면서 간신히 아군 지역으로 날아와 불시착했다. 이날의 교전에서 미공군이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미공군의 자랑이던 중폭격기 B-29는 미그-15와 같은 고속 제트요격기에게는 속수무책이라는 점이었다. 미그-15의 빠른 속도는 2차대전당시 일본전투기를 견제하기 위해 설계된 B-29의 사격제어장치로는 어림도 없었으며 미그-15의 대구경 기관포는 몇 발만 명중해도 B-29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 이날 RB-29의 기총사수는 미그-15 1기를 명중시켜 연기를 끌고 추락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으나 사실 미그-15는 단 한 대도 B-29의 방어 기관총탄에 맞지 않았다.

다음날인 11월 10일에는 압록강의 교량을 폭격하던 B-29 편대가 미그-15기들의 공격을 받았으며 이번에는 B-29 1기가 격추 당했다. 우군기가 불길에 휩쌓여 추락하기 시작하자 나머지 B-29 폭격기들은 뿔뿔히 흩어져 허겁지겁 남쪽으로 기수를 돌려야 했다. 이제 미그의 존재는 이제 위협이라기 보다는 눈앞에 닥친 현실이었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후 지금까지 마음대로 창공을 누비던 미군의 항공작전은 커다란 장애에 직면한 것이다. 미 공군에게 있어서 물밀 듯이 쳐들어오는 중국군의 침공을 저지할 수 있는 가장 큰 항공전력인 B-29 폭격기 부대가 미그 제트전투기의 위협을 받게 된다는 점은 정말로 커다란 문제점이었다. 5년전의 일본 본토 공습작전에서 대부분의 일본 요격기들이 B-29의 비행고도까지 제대로 날아오르지도 못했지만, 미그-15는 B-29보다도 훨씬 높은 고도까지 순식간에 솟아올랐고 B-29의 방어 시스템으로는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기 때문에 임무 수행에 있어서 안전을 장담할 수가 없었다. B-29 승무원들이 안심하고 한국상공을 비행하던 시기는 미그-15의 등장과 함께 과거의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 미그-15의 격추장면이 F9F의 건카메라에 잡혔다. 우측 사진은 해군 최초의 미그킬을 기록한후 기뻐하는 토마스 에이멘 소령 ]

그러나 이날 미 항모 밸리포지에서 발진한 VF-111 선다우너스의 리더 토마스 에이멘 소령이 지휘하는 F9F 팬써 편대가 신의주 지역의 교량을 공격중인 F4U 콜세어 편대를 호위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 저공에서 돌진해 들어오는 미그-15 편대를 목격했다. 미그기들은 미해군기들을 보자마자 주저없이 달려들었으며 저공에서 근접 공중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저공에서는 미그-15의 장기인 고속 성능이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므로 저공에서 기동성이 좋은 F9F 팬써가 충분히 대적할 수 있었다. 더구나 F9F에게는 F-80보다 훨씬 강력한 20mm 4문의 강무장을 가지고 있었다. 격렬한 공중전 도중 결국 에이멘 소령의 F9F가 미그-15의 후미를 잡아 20mm 기관포를 퍼부어 1기를 격추시켰으며 나머자 미그기들이 교전지역에서 이탈함에 따라 미해군 공격팀은 피해없이 귀함할 수 있었다. 이날의 승리로 에이멘 소령은 미해군 최초의 제트기 킬러로 인정받게 된다.

[ 눈덮인 활주로에서 로켓탄을 장착하고 근접항공지원을 위해서 출격 준비중인 F-80, 미그의 등장으로 공중전에서는 물러나게 되지만 근접 항공지원에는 계속 맹활약 했다. ]

그러나 이런 작은 승리는 점점 확산되는 미그의 공포를 잠재우지 못했다. 이후에도 연일 미그-15의 요격은 계속되었으며 따라서 압록강 지역으로 출격하는 B-29 폭격기들의 손실도 계속되었다. B-29 폭격기부대는 출격할 때마다 미그의 요격을 만났으며 1-2기의 B-29가 기관포탄에 맞아 큰 손실을 입고 간신히 돌아오는 경우가 많아졌다. 하지만, 미군에게 있어서 B-29의 출격은 멈출 수가 없는 것이었다. 중국군의 공세가 본격적으로 강화되면서 지상의 전황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므로 만일 미 공군이 항공지원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한다면 지상의 미군과 다른 UN군들이 큰 곤경에 처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점은 당장 미그-15에게 대항할만한 성능을 가진 전투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비록 미그기와 접전을 벌이면서 전선을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공군의 F-80이나 해군의 F9F는 최대속도에서 미그-15에게 150km 이상의 차이가 났으며 공중 기동성에서도 미그-15가 이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게다가 B-29의 호위에 필수적인 고공성능에서는 더욱 문제가 있었다. 이렇다보니 비단 B-29의 안전뿐만이 아니라 그 동안 한국상공을 마음놓고 날아다녔던 모든 미군기들의 안전에도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 장진호

한편, 중국군의 공세에 따라서 지상의 전세는 더욱 급박해지고 있었다. 한반도의 통일을 눈앞에 두고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국군과 UN군은 압도적인 병력의 중국군과 필사적인 교전을 벌였지만 결국 중과부적인 상황으로 몰려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11월 하순에 이르러 중국군의 공세가 더욱 강화되었고 진격속도도 빨라졌다. 중군군의 병력이 워낙 많았으므로 방어전을 펼치던 대부분의 UN군부대들은 방어 거점으로 몰려온 중국군에게 신속하게 포위되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전투는 장진호 (미군에게는 초신 저수지로 알려져 있음)에 고립된 미해병 제 1사단의 경우였다. 이 부대는 장진호에서 중국군의 공세에 맞서 싸우던 중 사단 전체가 사방으로 중국군에게 포위된 것이다.

[ 중국군의 공세로 지상군이 위기에 처하자 미해군은 근접 항공 지원을 더욱 강화했다. 사진의 기체는 F4U 콜세어와 AD1 스카이레이더 공격기들로서 F9F의 엄호하에 계속 항공작전을 수행했다. ]

이후 벌어진 전투는 악전고투 그 자체였다. 살을 에이는 추위와 함께 절망적인 상황에서 밀물과 같이 밀려오는 중국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던 미 해병대 병사들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서 사투를 벌였다. 상황이 매우 급박하게 되자, 장진호의 상공에는 미해병대의 F4U 콜세어 전폭기들이 대공포화를 무릅쓰고 초저공으로 날아들어 포위망을 좁히던 중군군을 공격했다. 결국 수일간의 격전이 벌어진 끝에 결국 포위망이 뚫리기는 했으나 이들은 중국군에게 쫒기면서 70km 남쪽의 항구도시 흥남을 향해 고달픈 후퇴를 계속 해야 했다. 이 장진호 전투는 미군의 전사에도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 기간동안 미 해병대는 5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물론 인해전술로 공격하던 중국군의 피해는 더욱 커서 약 3만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군은 막대한 인명피해에도 불구하고 공세를 멈추지 않았고 전선은 점점 남으로 남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 압록강 하늘의 소련 조종사들 

11월 중순까지 압록강에서 벌어진 공중전의 결과 미공군의 모든 전폭기들은 미그-15에 대적할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 특히 미그기가 주로 출몰하는 미그앨리 지역으로 출동할때는 압록강 바로 건너의 안뚱에 기지를 두고있는 미그-15가 언제 날아올라 덤벼들지 모르므로 모든 조종사들이 초 긴장상태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안뚱의 미그기 기지는 압록강에서 매우 가까워서 날씨가 좋은 경우에는 미군 조종사들이 미그기들이 지상에서 긴급하게 이륙하면서 일으키는 먼지까지도 관측이 가능할 정도였다. 23mm 기관포 2문과 37mm 기관포 1문이라는 강력한 무장을 가진 미그-15는 1-2발의 명중탄으로도 미군의 F-51이나 F-80을 대파시킬 수 있었다.

[ 미그-15의 건카메라에 잡힌 F-80, 잠시후 기관포에 맞고 격추되었다. ]

다행히 프로펠러기인 F-51 머스탱은 미그-15와 속도차가 많이나면서 기동성과 가속능력이 좋았기 때문에 미그-15에게 완전한 기습을 받지만 않는다면 미그가 돌입해올 때 급격한 선회비행으로 미그-15의 화구에서 안전하게 벗어날 수가 있었다. 하지만 F-80C는 그렇지가 못했다. 공중전이 벌어지면 미그-15에 대항해서 계속 기동을 하면서 대응했으나 대개의 경우 미그의 기동성이 더 좋았으며 F-80은 급격한 선회후에 다시 속도를 회복할만한 가속능력이 부족했다. 이런 상황에서 F-80이 미그-15를 따돌리려면 급접 공중전중에 기회를 봐서 우세한 강하속도를 이용해 급강하 이탈하는 방법이 유일했지만 이나마도 이미 고속으로 비행중인 미그-15가 따라붙는 경우에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1950년 11월은 미 공군에게는 매우 절망적인 시기였다. 

그러나 미군에게 다행이었던 것은 이 무렵의 공산군 조종사들은 미그-15를 철저하게 미군기의 요격에만 사용했다는 점이었다. 특히 활동지역은 압록강 근처로 제한되어 있어서 미군기들이 후퇴하거나 피해를 입고 도주할 때는 추격을 멈추고 기지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서 소련 조종사들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존재를 숨기려 했고 만일 피격되는 경우에 조종사가 생포되는 것을 우려해서 절대 남쪽으로 미그-15를 진출시키지 말도록 제한되었다. 만일 소련공군이 미그-15를 이용해서 조직적인 공세에 나섰다면 미공군에게는 커다란 재앙이 닥쳤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 압록강 근처의 안뚱 기지에서 출격중인 미그-15 전투기들 ]

한국전쟁에 최초로 전투에 투입된 소련 조종사들은 일부 지휘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전투 경험이 없는 젊은 조종사들이 많았으며 미그-15를 수령한지 얼마 되지 않는 중국 조종사들도 다수 전투에 참가하고 있었다. 따라서 공산군 조종사들도 미 공군기들과의 교전이 벌어지는 경우에는 상당한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점점 항공전의 규모가 커지게 되면서 몇 개월 뒤부터는 2차대전의 베테랑 조종사들이 다수 참전하게 되지만 1950년 11월부터 몇 개월간은 전반적으로 소련 조종사들의 기량이 뛰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한국전쟁 최고의 에이스로 평가받고 있는 예프케니 파펠라예프, 이런 베테랑 조종사들은 대부분 전쟁 초기에는 참전하지 않았으나, F-86의 등장이후 소련공군이 열세로 몰리자 많은 베테랑 조종사들이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

그러나 이들 소련 조종사들은 적과 싸우고자하는 의욕에 있어서는 미군에게 절대 뒤지지 않았다. 당시 소련 국내의 분위기는 독일제국에 맞서서 영광스런 승리를 쟁취한 위대한 승전국의 일원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으며 이들은 자본주의의 도전에 맞서서 공산주의를 지키는 임무에 투입된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전장에서 비겁한 행위를 하는 경우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가혹한 처분이 내려질지 모른다는 강박관념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소련 조종사들은 모든 교신을 한국어 또는 중국어로 하도록 교육을 받고 있었으나 긴급한 공중전이 벌어지면 자연스럽게 러시아어로 소리지르게 마련이었으므로 미군도 감청에 의해서 소련 조종사들이 대거 파견되어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 세이버를 급파하라!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다급해진 미 극동공군 (FEAF)은 일단 압록강 지역에 대한 항공작전을 중지하는 동시에 미그-15의 위협에 대항할 수 있는 신형 전투기를 즉시 한국으로 급파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이무렵 미 공군은 신형 제트 전투기 F-86 세이버의 실전 배치를 막 진행되고 있는 단계였다.

[ 미항모 케이프 에스페란스에 탑재되어 급히 한국으로 수송중인 F-86A 세이버, 천으로 방수 조치를 취했으나 해수를 완전히 피하지 못해서 소금기에 노출되어 전자기기의 고장이 속출했다. ]

F-86은 미그-15와 같은 후퇴익의 신형기로서 이때까지만해도 이정도의 고성능 기체가 한국전장에 불필요 할 것이라는 판단으로 미 본토에만 배치되고 있었으나 한국에서의 상황이 다급해지면서 오직 F-86만이 미그-15에 대항해서 상공을 장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받고 급히 한국으로 파견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F-80보다 성능이 뛰어난 F-84 썬더제트도 한국으로 급히 파견을 추진했다. F-84는 직선익의 기체였으므로 미그-15와 공중전을 벌이는 것은 무리였지만 F-80보다 시속 70km 이상 빠르고 기동성이 뛰어나면서 무장능력이 좋아서 미그의 공격을 받더라도 쉽게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판단되었고, 다급한 상황에 몰린 미 지상군에게 근접지원을 시행하는데는 매우 이상적인 기체로 평가받았다.

[ 역시 다급파게 한국으로 급파되는 F-84 썬더제트기들, F-80을 능가하는 우수한 전폭기였다. ]

일단 미군은 11월 하순부터 본토에 전개한 3개 F-86A 부대의 기체들 중에서 상태가 좋은 기체들을 골라 미해군의 소형 항모 케이프 에스페란쓰에 탑재했다. 이 운송작전은 소련측의 첩보망을 피하기 위해서 극비리에 추진되었다. 그리고 이 항모는 은밀하게 일본으로 향했고, 결국 태평양을 건너는 항해 끝에 12월 10일 드디어 도꾜만으로 도착했다. 그러나 일본에 도착한 기체들을 점검해보니 많은 기체들이 항모의 갑판에서 바닷물에 노출되어 엔진, 전자장비와 연료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 있었다. 이것은 F-86의 해상운송시에 기체의 방수처리를 프로펠러기의 기준으로 시행한 때문이었다. 결국 급히 모든 기체들이 이상이 생겨 점검을 받았고 고장난 부품을 수리 받았다. 어떤 기체는 손상 정도가 심해서 1주일간의 수리가 필요한 경우도 있었다. 결국 예정보다 5일이나 늦은 12월 15일에서야 간신히 7기의 F-86A가 모든 점검을 끝내고 부르스 힌턴 소령의 인솔하에 일본을 출발해서 김포에 도착했다.

이것이 한국전쟁에서 용명을 떨치게 되는 제4 전투요격기전대의 첫 발걸음이었다. 제4 전투기 전대의 조종사들은 미 본토 방어를 위해서 훈련된 최정예 조종사들로서 라스베가스의 공군기지에서 계속된 공중전 훈련을 받았으며 한국전쟁이 벌어지기 전부터 T-33 제트 훈련기로 1년 이상의 전투비행 훈련을 받았던 조종사들이었다. 이들은 이미 F-86A로 몇 개월 전부터 기종 전환을 시작했으므로 모두들 F-86A를 능숙하게 다루고 있었다.

[ 일본을 출발해서 김포비행장에 도착한 F-86A, 도착하자마자 눈이 내려 기체가 눈에 덮여있다. ]

이들이 한국의 하늘에 도착했을 때 매서운 겨울 추위와 눈으로 하얗게 덮인 김포공항의 활주로가 이들을 맞이했다. 그리고 조종사들은 다음날 즉시 압록강으로 출격해서 미그를 잡으라는 명령을 하달 받았다. 하지만 이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아침을 맞이했을 때는 먹구름이 몰려오고 눈이 많이 내리는 등 기상이 불량해져 출격은 다음날인 12월 17일로 미루어졌다. 이제 바야흐로 한국의 하늘을 배경으로 미공군과 소련공군의 최신 전투기들이 정면 충돌을 벌이려는 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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