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탐색전

구름위 2012. 12. 3.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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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 미그 앨리

◇ Act 3. 탐색전

(Detecting Match)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2. 7. 28

 * 세이버 출격

1950년 12월 17일, 날씨가 개면서 아침해가 활주로에 깔린 눈에 반사되어 활주로는 눈이 부실정도였다. 즉시 활주로의 제설작업이 시작되었고 오전부터 압록강을 향해서 출격하라는 명령만을 기다리면서  대기하고 있던 부르스 힌턴 소령휘하의 F-86A 4기 편대 (편대명: 베이커)는 주익에 2개의 1040리터들이 외부 연료탱크를 장착하기 시작했다. 이 외부연료탱크를 장착하면 세이버의 행동반경은 790km로 연장되는데, 그렇다해도 김포에서 압록강까지의 직선 거리가 거의 680km정도에 달하므로 전투지역의 대기시간이 짧아 미그와의 교전시간이 상당히 제한되는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부르스 힌턴 소령은 마하 0.62 정도의 연료를 가장 아낄 수 있는 경제속도로 압록강까지 진입한 후 미그-15의 활동영역에 다다르면 즉시 전투속도로 증속하여 비행하는 전술을 지시했다.

[ 1950년 12월 말, 김포 공항에 집결한 제4 전투항공단 산하 제 335 전투요격기 대대 소속의 F-86A 세이버들의 사진, 1950년 겨울부터 51년 중반까지 미그-15에 맞서 사투를 전개했다. 기수를 자세히보면 검은 색의 레이더 조준사이트가 없어 A형임을 쉽게 알수있다. ]

이날의 작전은 미공군에게 있어서는 철저하게 공산군을 기만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F-86A의 편대는 기존에 F-80이 압록강으로 출격할 때 사용했던 비행고도와 경로를 따라서 비행하도록 지시받았으며 무선 호출코드도 F-80 편대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 동안의 미그-15의 출격 상황을 볼 때, 압록강 접경에는 소련의 레이더 기지가 있는 것이 틀림없으며 미그-15는 레이더에 탐지된 미군기에 대해서 지상관제에 의한 요격을 걸어오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만일 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이날 소련의 지상관제사가 레이더에 잡힌 F-86을 F-80으로 오인해준다면 상공으로 날아오른 미그-15 편대는 미공군의 의도대로 새로운 전투기 F-86A의 기습에 가까운 공격을 받게될 것이다.

오후 2시 드디어 출격명령이 떨어졌고 즉시 베이커 편대의 세이버 4기는 겨울하늘에 깔린 옅은 구름을 뚫고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평양 상공에 다다르자 부르스 힌턴 소령은 각 기체의 기총 상태를 점검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조종사들이 시험 사격을 실시하자 하늘에는 세이버에서 발사된 예광탄들의 궤적이 그려졌다. 잠시후 세이버 편대가 신의주 남쪽 5마일 지점에 다다르자 힌턴 소령은 미그의 출현에 대비해서 즉시 전투속도로 가속할 것을 명령했다. 바로 이때 미그-15 4기 편대가 북쪽에서 상승해오는 것이 보였다. 부르스 힌턴 소령은 긴장했지만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좋아! 작전이 들어맞았다. 저놈들은 레이더 관제에 의한 요격을 걸어오는 것이 분명해!"

F-86편대도 즉시 대형을 벌리면서 미그-15쪽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잠시후 4기의 세이버와 4기의 미그-15기들이 서로 교차하면서 일제히 산개했고, 하늘에는 빠른 속도의 제트기들이 서로 날카롭게 선회하며 적기의 꼬리를 물기 위한 기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어지러울 정도의 상황이 펼쳐졌다. 이날의 교전에 참가한 제트기들은 모두 후퇴익의 신예기들이었고 조종사들은 모두 적 전투기를 처음 보는 상황이었으므로 순간적으로 시야에 나타나는 적기와 우군기의 구분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마도 이때 미군기들이 F-80이라고 판단하고 솟아오른 미그-15 조종사들은 자신들의 기체와 같은 후퇴익을 가진 미공군의 새로운 전투기와 맞닥뜨렸을 때 크게 놀랐을 것이다. 얼마간의 교전 후 부르스 힌턴 소령의 세이버가 미그-15 2번기의 후방에서 사격위치를 잡았으며 미그-15가 희피기동을 시작했지만 침착하게 미그-15를 따라잡았다. 얼마간의 추격전후 세이버의 기수에서 수백발의 기관총탄들이 번개처럼 날아가 미그의 동체에 명중했다. 그리고 미그는 검은 연기와 노란 불꽃을 남기면서 추락해가기 시작했다.

[ 부르스 힌턴 소령 (좌측)이 부하와 함께 미그-15와의 공중전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

잠시 후 이 교전 장면을 목격한 다른 미그-15기들은 교전의욕을 상실한 듯이 공중전에서 이탈하여 북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이때 미그-15를 추격하던 다른 세이버의 조종사들은 미그-15기들이 일제히 북쪽으로 급선회할 때 미처 미그-15를 따라잡지 못했으며 미그의 놀라운 기동성에 감탄하고 있었다. 적기의 추락을 확인했을 때 부르스 힌턴 소령은 격렬한 공중전이 끝난 후 윙맨과 다른 F-86기들의 위치를 잃어버렸다. 속도가 빠른 제트기들의 공중전이어서 적기를 추격해서 격추하는 동안 많은 거리를 비행했고 결국 공중전이 끝난 후 다른 편대원들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김포 비행장까지 혼자서 돌아와야 했고 김포 비행장의 활주로가 시야에 보이자 활주로 상공을 통과하면서 승리를 알리는 빅토리 롤을 실시했다. 미공군의 기록에 의하면 이것은 이후로부터 한국전쟁이 끝날때까지 미그앨리에서 벌어진 공중전에서 세이버가 거둔 792번의 승리 중 첫 번째였으며, 이로서 미공군이 큰 기대를 하고 투입한 비장의 F-86 세이버가 그 존재를 과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날 귀환한 베이커 편대원들은 미그-15의 성능을 높게 평가했다. 이날의 교전에서 돌아온 후 부르스 힌턴 소령은 다른 조종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록 오늘 우리가 한 대를 격추시키기는 했지만, 우리가 만난 미그-15기들은 그동안 말로만 듣던 것보다도 훨씬 뛰어난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기체의 디자인도 매우 세련되었으며 아마도 우리 F-86에 대해서도 절대 뒤지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더 우수한 성능을 가졌을 지도 모른다."

물론 힌턴 소령의 말대로 이날의 전투는 앞으로 2년 7개월의 기간동안 양측의 많은 조종사들이 목숨을 걸고 전개하게될 치열한 사투의 작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 탐색전

1951년 12월, 혹독한 추위와 함께 지상의 중국군이 더욱 공세를 강화하면서 미군과 한국군을 비롯한 UN군은 한겨울의 추위속에 계속 후퇴를 해야했으며, 제대로 반격 태세를 갖추지 못한 UN군과 국군은 변변한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계속 후퇴를 거듭했으며, 연일 전선이 남으로 남으로 밀려 내려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몰렸지만 그나마 믿을 수 있는 것은 후퇴하고있는 지상군에 대한 지원을 여전히 든든하게 해주고 있었던 항공전력이었다. 만일 이런 항공지원마저 줄어든다면 지상군에게는 커다란 재앙이었을 것이다. 미군에게 있어서 이런 제공권의 우세가 미그 전투기에게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지상군에 대한 항공지원과는 별도로 압록강 상공에 나타나는 미그-15와의 대결에서도 한치의 양보도 허용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 김포 공항에 전개하고 있는 F-86A 세이버들의 사진으로 활주로 주변의 정비되지 않은 지면과 아무렇게나 널린 드럼통등이 전쟁당시의 어지러운 상황을 보여준다. ]

이러는 가운데 하늘에서는 12월 15일의 양측 최신예기간에 벌어진 첫 교전이후 며칠동안 미그앨리에서 세이버와 미그의 소규모 편대의 공중전이 계속 벌어졌다. 그러나 양측이 모두 전투에 적극적인 자세로 나선 것은 아니어서 공중전은 단시간의 탐색전만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으며 따라서 양측 모두 손실은 없었다. 이 기간동안 미공군도 소련공군도 서로 상대방의 신예 전투기의 성능이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는데 촉각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 탐색전 기간에 드러난 F-86의 가장 큰 문제점은 외부연료 탱크를 탑재하고 출격하더라도 미그 앨리 지역에서는 미그-15와의 조우에 대비해서 최소한 마하 0.85의 전투 속도로 비행해야 했으므로 비행시간이 20여분으로 제한된다는 것이었다. 이 시간은 미그 앨리에서 미그-15와 즉시 만나는 경우에는 어느 정도 공중전을 벌일 수는 있지만 만일 20분이 경과하여 돌아와야 하는 시점에서 미그-15와 마주친다면 매우 큰 곤경에 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점은 공산측에서도 곧 파악했다. 그들은 이런 세이버의 약점을 최대한 이용하려 했고, 미그-15기들은 세이버 편대가 출현하면 잠시 지상에서 대기 하다가 세이버들이 돌아가기 위해서 선회할 무렵 상공으로 솟구쳐 기습해오는 전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F-86 조종사들은 그저 일직선으로 도주하는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 몇 일간 지속되자 미공군은 즉시 대응 전술을 사용했다. 이것은 4기로 이루어진 세이버 편대 4개 편대를 대기시키고 있다가 5분 간격으로 출동시켜서 앞서 출발한 편대를 계속 지원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런 전술을 사용하면 세이버 4-16기가 전투 공역에 지속적으로 전개하게 되며 선두 편대가 돌아와야 할 무렵에는 마지막 편대가 도착하게 되므로 이 시점을 노리고 덤벼드는 미그-15의 위협을 방지할 수가 있었다. 이때 전투 공역에 도착한 마지막 편대는 다른 편대의 귀환을 방해하는 미그-15를 견제하면서 다른 편대를 귀환시키도록 하는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

[ 미그 앨리에서의 작전을 마치고 귀환중인 F-86A, 에어 브레이크가 펼쳐진 모습이 보인다. ]

그러나 이것도 잠시, 몇 일간의 탐색전기간이 끝나가면서 양측 모두 적극적으로 공중전에 나서기 시작했고 격렬한 공중전이 시작되었다. 미공군이 이그앨리로 세이버편대를 출격시키면 공산측은 기다렸다는 듯이 항상 세이버보다 수가 많은 미그-15기들을 발진시켰다. 1950년 12월 22일 2차대전의 에이스 출신 존 메이어 중령이 이끄는 8기의 세이버 편대가 미그 앨리에 도착했을 때 이들은 무려 15기 이상으로 보이는 미그기들의 도전을 받았다. 곧 하늘에는 양측의 전투기들이 일제히 투하한 수십 개의 연료탱크들이 비산했으며 세이버와 미그기들은 빠른 속도로 서로 뒤섞였고, 제트기들이 급격하게 선회할 때 발생하는 날카로운 굉음과 한계에 다다른 엔진이 내는 소음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면서 기관총탄과 기관포탄이 여기저기서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전투기들의 속도가 매우 빨라서 전투가 벌어진 후 몇 분이 지나자 교전 지역이 넓어져서 2-3기의 우군기와 적기들이 소규모 그룹으로 분리되어 대결을 벌이는 양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 미그 앨리 상공에서 세이버에게 격추되는 미그-15, 보기드문 컬러 사진이다. ]

그리고 얼마 뒤 여기 저기서 검은 연기와 함께 지상으로 추락하는 전투기들의 모습이 보였다. 격렬했던 공중전투가 끝난 후 귀로에 올랐을 때 존 메이어 중령은 세이버 1기가 돌아오지 못한 것을 알게되었다. 이날 귀환한 조종사들은 총 6기의 미그-15를 잡았다고 보고했다. 기록상으로는 6:1의 대승이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검은 연기를 끌면서 하강하는 미그-15기들이 지상에 격돌하거나 조종사가 탈출하는 장면을 목격하지 못한 경우가 많아서 과연 이 미그기들이 모두 격추되었는지는 불확실했다. 이후 1주일간은 본격적인 공중전이 없는 소강상태가 지속되었으며 12월 30일에 또다시 비슷한 규모의 공중전이 벌어져 미공군은 2기의 미그-15를 더 격추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공군의 주장에 따르면 1950년 12월은 한달 동안 1기의 세이버를 잃은 대신에 8기의 미그-15를 잡아낸 압도적인 승리의 기간이었다. 하지만 최근 공개된 러시아의 자료들에 따르면 이 기간동안 미공군이 격추했다고 주장하는 8기의 미그-15 중에서 단지 3기만이 돌아오지 못했으며 나머지 기체들은 크고 작은 전투 손상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귀환했다고 반박하고 이 기간동안 오히려 F-86A 3기가 미그-15에 의해서 격추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 적은 누구인가?

비록 공중전에서는 승리하고 있었지만 미그기의 조종사들이 결코 만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는 미그-15와 공중전을 벌였던 미공군 조종사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공군은 과연 이 미그-15기들을 누가 조종하는가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미그의 첫 출현이후 지금까지 목격된 미그기에 그려진 국적 마크는 북한공군의 것과 중국 공군의 것이었지만 이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1950년 미그 앨리 상공에서의 격전을 담은 일러스트, 러시아쪽의 홈페이지에서 받아온 자료로서 미그-15가 F-86A를 격추시키는 장면을 담고 있다. ]

미공군의 경우 세이버와 같은 고성능 제트 전투기를 몰고 전투에 투입될 정도의 조종사라면 최소한 수개월간의 고등 비행 훈련이 필요했기 때문에, 미공군은 사실상 소련이 이런 최신예 전투기를 비행 훈련이 부족한 풋내기 중국 조종사들이나 북한 조종사들에게 맡길 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게다가 전투 지역에서 감청된 공산측의 무선에는 러시아어가 간간히 잡혔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전투에 참가하고 있는 대부분의 미그기들은 이 기종으로 몇 개월 이상 훈련을 받은 소련 조종사들이 탑승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으며 그렇다면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만일 소련공군이 공식적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미공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한국전쟁의 상황에 따라서 2차대전이 끝난 후 치열한 이념대결을 벌이고 있는 세계의 양대 초강대국간의 전면적인 군사적 대결로까지 비화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했다. 그러나 아무도 이것을 입에 담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세계를 멸망에 이르게 할지도 모르는 3차 세계대전의 시작일지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 압록강 지역의 교량을 폭격하기 위해서 비행중인 B-29 편대, 미그-15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B-29 폭격기들은 출격을 주저하지 않았다. 한국전 당시 B-29들은 특징적인 테일코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사진에서도 Y자의 테일 코드가 보인다. 하지만 B-29들이야 말로 미그-15가 가장 노리고 있던 목표물이었다. ]

1990년 소련의 몰락이후 속속 공개된 소련공군의 기록에 의하면 미공군의 추정은 대부분 사실과 같았다. 이전에 알려진 내용과는 달리 중국군의 개입이후 미그-15를 몰고 압록강에 나타난 것은 거의 대부분 소련공군의 조종사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보안을 위해서 중국공군의 복장을 하고 북한군의 마크가 그려진 미그-15를 몰았다. 물론 소수의 중국 조종사가 소련 군사 고문관에게 교육을 받고  미그-15를 몰고 전투에 투입되기는 했으나 대부분 비극적인 결과로 끝이났다. 중국공군의 조종사들이 미그-15의 훈련을 충분히 마치고 본격적으로 대거 전투에 투입된 것은 최초로 미그기가 목격 된지 1년이나 지난 후인 1951년 12월에 이르러서였다고 하며, 북한 조종사들은 1952년초에서야 미그-15를 탑승하고 출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중국측은 중국 지상군의 참전 초기부터 다수의 중국 조종사들이 미그-15를 몰고 참전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맹활약으로 미공군을 상대로 큰 전과를 올렸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여러 가지 정황과 관련 기록들로 미루어볼 때 소련측의 기록이 더 신뢰성이 높기 때문에 적어도 미그의 등장이후 1951년말까지의 1년간은 미그앨리에서 전적으로 미공군과 소련공군간의 자존심 대결이 벌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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