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Act 6. 폭풍전의 고요

구름위 2012. 12. 3.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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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 눈물의 한반도

◇ Act 6. 폭풍전의 고요

(Calm before storm)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2. 5. 24

* 움직이는 중국군

1950년 10월초부터 중국과 소련은 한국전쟁의 양상을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었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 전군에 비상대기 명령을 하달했다. 38선을 돌파한 한국군을 선두로 미군이 주도하는 UN군이 빠른 속도로 북상하기 시작하자, 김일성은 재빨리 중국으로 도망갔으며 이 전쟁에 중국과 소련이 참전해 줄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 절박하게 소련과 중국을 오가면서 모택동과 스탈린을 만나기 위해서 움직였다.

[ 중국군의 참전을 호소하는 김일성, 맥아더는 김일성에게 무조건 항복할 것을 제안했으나 그는 중국과 소련을 오가면서 한국전쟁에 개입해 줄 것을 필사적으로 요청했다. ]

특히 중국은 자국과 국경을 맞대는 북한에 미군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크게 우려하고 있었으며 이 점은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만일 이대로 한국전쟁이 북한의 패배로 끝나고 이대로 통일이 되면 소련과의 접경인 두만강 지역에 미국의 최전선 교두보가 설치되어 큰 위협을 가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중국은 대만으로 도주한 장개석 정부를 분쇄하고 대만을 점령하기 위한 군사적인 움직임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미군이 북한 지역으로 들어온다면 사사건건 중국의 행보에 방해를 놓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중국과 소련의 군사적인 이해관계뿐 아니라 2차대전의 양대 승전국으로서 세계를 양분하고 먼저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 미국과 팽팽한 이념대결을 벌이던 소련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중국은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대규모 병력을 만주지역으로 이동시켜 배치한 상태였으며, 이미 10월 1일부터 만일 한국군이 아닌 다른 나라의 군대가 38선을 넘어서 북진한다면 이것은 중국에 대한 군사적인 도발로 간주할 것이며 즉시 중국군을 파견해서 저지하겠다는 내용의 외교 발언을 공공연하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을 크게 얕보고 있었던 맥아더에게 가볍게 무시당하고 있었다. 사실 중국군에게는 미군에게 대항할만한 항공전력이 전혀 없었다. 아무리 중국군의 병력이 많고 중일전쟁을 통해서 풍부한 전투경험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항공전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지상군만으로 이 전쟁에 끼어드는 것은 실로 무모한 것이 되리라는 것이 명백했으며 이점으로 인해서 중국군 장성들은 모택동에게 한국전쟁에 개입하지 말자는 의견을 진언했다. 모택동도 이 의견에 영향을 받아 즉각적인 중국군의 투입을 주저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김일성은 즉시 소련으로 향했다.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과 면담을 성사시킨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미군의 항공전력이 실로 막강하며 북한군은 최선을 다해서 싸웠지만 거의 다 이긴 전쟁을 미군의 군사적인 개입으로 인해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오직 공산주의의 대부 소련군만이 미군의 막강한 항공전력에 맞설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제발 북한을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 북한지역의 서해안에서 출격하는 F4U 콜세어, 전쟁이 다 끝나간다고 생각하던 시기였으므로 중국과의 접경지역에대한 순찰 비행이 주 임무였다. ]

그러나 스탈린도 고민거리가 많았다. 물론 소련으로서는 미군이 한국을 통일시켜 소련의 목 앞에 칼날을 세우게 하는 것만은 허용 할 수가 없었지만, 소련의 은밀한 지원을 받아 남한을 무력 침공했던 북한군은 UN에서 침략군으로 규정된 상태였고 소련은 공공연하게 이 전쟁과는 무관하다는 주장을 펴온 상태였으므로 소련군이 이런 북한군을 전면적으로 지원하여 전쟁에 개입한다면 아무래도 명분이 없었다. 이는 UN의 결의를 통해서 합법적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과 정면으로 대결을 벌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이렇게 되면 참혹한 2차대전이 끝난 지 5년만에 새로운 세계대전이 시작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더구나 소련은 비록 독일과의 격전을 승리로 이끌기는 했지만 아직 2차대전의 참화에서 완전히 일어선 상태는 아니었다. 제아무리 호전적인 스탈린이라도 막강한 미군과 전면적인 전쟁을 벌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 1950년 10월, 진해 비행장에 집결한 미공군의 F-51D 머스탱, 이무렵 전쟁은 UN군의 승리고 끝나리라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는 시점이었으며 이미 대부분의 지역이 UN군에게 장악되어 이 전투기들도 별로 할 일이 없었다. ]

10월초부터 소련과 중국사이에는 바쁘게 비밀 통신이 오고갔다.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소련군이 전면에 나서서 참전하기에는 아무래도 명분이 없어 곤란하니 중국군이 전쟁에 개입하여 북한 지역에서 미군을 몰아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소련의 이러한 제의를 받은 모택동은 소련이 마치 중국을 위성국처럼 여기는 것에 대해서 불쾌한 감정을 느꼈다. 그는 즉시 비약한 장비의 중국군만으로 막강한 미군과 맞서 싸우도록 할 수는 없다면서 스탈린의 제의를 거부했다. 하지만 만일 소련군이 최신 제트전투기를 포함한 전쟁물자의 공급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소련 조종사들을 파견해서 상공을 책임져 준다면 중국군을 움직일 수도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중국은 이 기회에 소련으로부터 최신 항공기술을 포함한 군사기술과 물자를 얻어낼 계획이었던 것이다. 스탈린은 처음에 이러한 요구를 단호하게 거부했으나 이에 분노한 중국이 단호하게 참전을 거부하자,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중국의 요구를 들어줄 것에 동의했다.

[ 드디어 베일을 벗는 미그-15, 특징적인 원형의 동체와 강력한 37mm, 23mm 기관포가 보인다. ]

어차피 2차대전 중에 생산해놓은 전쟁물자가 남아돌고 있었으므로 중국에게 이런 재고들을 군수물자로 제공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었으며 스탈린으로서는 소련 지상군을 움직일 필요가 없어 좋았고 현재 개발이 완료된 최신 미그 제트전투기를 실전에서 운용해볼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한편, 중국은 많은 병사들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게 되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견하고 있었으나 미군을 북한지역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군부의 의견에 더해서 소련으로부터 최신 항공기술을 얻어낼 수 있었으므로 서로간에 타협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 스탈린의 비밀 항공작전

소련공군이 한국전쟁에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는 것은 한국전쟁 당시부터 공공연하게 알려진 것이었지만 1990년 소련이 붕괴되기 전까지는 소련이 한국전쟁에 대해서 모든 것을 일체 비밀로 규정하고 있었고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했으므로 한국전쟁에 소련이 어느 정도까지 관여했으며 그 규모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베일에 가려진 상태였다. 따라서 지금까지도 한국전쟁의 역사적인 기록은 대부분 서방세계의 자료에 근거해서 기술되었으며 항공전의 양상도 미군의 활약상 위주로 기록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된 후 그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던 당시의 참전 조종사들이 여러 가지 증언을 하면서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나게 되었고, 특히 한국전쟁당시 압록강을 배경으로 벌어진 혈투의 실체가 다시 주목을 받게 된다.

[ 소련내의 항공기지에서 미그-15의 비행훈련을 실시중인 소련공군 조종사들, 이들은 곧 스탈린의 비밀명령으로 한국상공에 투입되게 된다. ]

이러한 새로운 자료들에 따르면 소련공군은 한국전쟁에 발발하자마자 이미 비상대기 상태로 들어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소련은 당시 북한군을 소련이 지원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는 인정하지 않는 대신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2차대전후부터 개발을 추진하고 있던 최신예 미그-15 제트 전투기는 신속하게 실전부대로 인도되었으며 조종사들은 즉시 이 신형 제트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도록 훈련에 돌입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미군의 첩보망을 피해서 은밀하게 추진되고 있었다. 특히 중국의 요구로 소련공군이 중국군을 지원하기로 결정되자 비밀리에 중국의 항공기지로 병력과 제트기가 신속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때 선발대에 포함되어 중국으로 향했던 소련공군 대령 발렌틴 골루베프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한국이라는 곳에서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비밀임무에 선발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어떤 임무인지 어디서 수행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들은 한국이 어디에 붙어있는 나라인지도 몰랐으며 우리가 그 전쟁에 투입되리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최신 제트전투기 미그-15에 대한 비행훈련을 받고 있었으므로 우리가 받은 비밀임무라는 것이 이 전투기를 테스트하는 것 정도로 가볍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뒤에 우리는 일제히 소집되었으며 곧 임무가 시작될 것이라는 부대장의 연설을 들었다. 곧 나는 20여명의 조종사들과 함께 소련공군 제복을 벗고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었으며 트럭을 타고 어디론가 실려갔다. 그리고 열차로 갈아탔는데 이 열차에는 엄중한 경호를 받는 커다란 컨테이너가 여러 개 실려있었다. 시베리아 철도를 이동하는 열차 내에서 우리는 모든 신분증과 소지품을 당간부에게 맡겨야 했고 임무가 끝날 때까지는 가족에게도 일체의 연락이 금지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 이동한 후 열차에서 내려보니 그곳은 중국이었다. 다시 트럭을 타고 중국의 센양 비행장으로 이동했는데, 그곳에는 전에 보았던 컨테이너들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컨테이너가 개봉되기 시작했다. 속에는 우리가 훈련받았던 최신 전투기 미그-15가 동체와 날개가 분리된 상태로 들어있었으며 이 미그 전투기들의 동체와 주익에는 모든 국적마크와 표식이 지워져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우리가 뭔가 중요한 임무에 투입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처럼 소련공군은 모든 것을 철저하게 비밀로 하고 조종사들과 제트기를 중국으로 이동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조종사들의 가족들에게도 그들이 조국을 위해서 중요한 비밀 임무를 수행중이라는 엽서만 전달되었다. 이무렵 중국에 도착한 미그-15 전투기들은 즉시 소련 기술자들에 의해서 현장에서 조립되었으며 대부분은 소련 조종사들이 운용했고 일부는 중국공군에게 넘겨졌다. 그리고 이러한 미그-15의 공급은 전쟁기간동안 계속 증가되게 되는데, 이 미그-15에는 대부분 북한공군의 국적마크가 그려졌으며 중국공군에게 넘겨진 기체들은 중국의 국적 마크를 그려 넣거나 북한공군의 마크를 도색하기도 했다.  

* 폭풍전의 고요

1950년 10월 중순 북한의 전면적인 패배가 명확해지자 중국과 소련은 즉시 한국전쟁에 개입할 것을 결정했다. 중국군은 10월 19일부터 은밀하게 야음을 틈타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으며 이들은 북한지역에 들어온 후 주간에는 산속으로 들어가 은신했으므로 UN군의 정찰기로부터 탐지되지 않았다. 이 무렵 UN군은 함경남도의 요지 함흥을 점령했으며 이로서 북한의 대부분을 장악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했다는 연락이 들어오자, 스탈린은 중국에 파견된 조종사들에게 즉시 전투태세에 들어갈 것이며 반드시 당과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서 미공군을 격파하라는 친서를 내렸다. 소련 조종사들은 곧 전쟁에 투입될 시기가 임박했다는 통보를 받고 초긴장 상태에 들어갔다.

[ 중국내로 이동한 소련공군 정비병들이 미그-15의 출격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이제 이 제트 전투기는 한국상공의 새로운 위협으로 떠오를 운명이었다. ]

이 무렵까지 중국에는 소련공군의 3개 항공사단이 파견되어 있었다. 이들은 제28 , 50, 151 항공사단으로서 각각 압록강 근처의 주요 항공기지인 센양, 안산, 안뚱 비행장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이후 계속 증강되는 소련 항공전력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제 소련의 비밀 무기 미그-15 제트전투기들은 출동준비를 완벽하게 갖춘 채로 출격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지상의 중국군도 한국군과 미군에게 기습적인 공격을 하기 위해서 언제라도 발진할 수 있도록 준비에 들어갔다. 이제 비극의 땅 한반도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들이 또다시 혈전을 벌이는 무대가 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 북쪽으로부터의 불길한 기운

[ 중국군이 대거 북한으로 이동하는 사진이다. 1950년 10월 14일에 촬영된 사진으로 이로서 한국전쟁은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게 된다.

한편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낙관적인 분위기 속에서 미군 병사들은 다가올 크리스마스에는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미군의 첩보망도 뭔가 불길한 기운이 감돌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10월 25일 압록강 근처에까지 다다른 미군 선발대가 갑작스레 나타난 적군과 소규모 전투를 벌였는데 미군 병사들은 이들이 북한군 복장이 아니었던 것 같다고 주장했다. 이 때만해도 미군은 이들을 북한군의 잔존 게릴라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미군 수색대가 적의 병사 몇 명을 생포해서 돌아왔는데 이들은 북한병사들이 아니라 중국군 병사들이었다. 이미 중국군은 전쟁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미군이 발견한 중국군 병력은 이미 북한으로 진입한 중국군 전체에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미 30만에 가까운 대규모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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