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Act 4. 인천 상륙작전

구름위 2012. 12. 3.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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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 눈물의 한반도

◇ Act 4. 인천 상륙작전

(Inchon Invasion)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2. 4. 6

* 맥아더의 대도박

[ 금천지구에서 F-80의 로켓탄 공격을 받고 주저않은 북한 전차들...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은 완전히 발목을 잡혔다. ]

1950년의 뜨거웠던 8월이 끝나갈 무렵, 낙동강 방어선이 안정되어가고 공산군의 도박이 점점 실패로 끝나가는 것이 확실해지면서 맥아더는 대반격을 구상했다. 그는 부산 방어지구를 둘러싼 공산군 부대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보다는 단 한번의 공격으로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을 원했고, 결국 인천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결행하기로 한 것이다. 태평양전쟁에서 미군은 뉴기니아의 섬 지역에 포진한 일본 수비대를 제압하는 방법으로 섬을 하나씩 탈환하는 것이 아니라 섬을 건너 뛰어가면서 공격해서 일본 수비대를 고립시켜 보급을 차단하고 전의를 상실시킨 후에 공격하는 '섬건너뛰기' 전법을 사용해서 일본군이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뉴기니아 전체를 장악할 수 있었다.

맥아더는 이때의 경험에서 영감을 받아 북한군의 약점을 노려 낙동강 방어선을 건너뛰어 인천에 한번의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는 방법으로 전세의 역전을 노렸던 것이다. 북한군은 대부분의 전력을 낙동강 방어선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부지방에는 병력도 적었고 낙동강에 포진하고 있는 주력부대는 보급선이 길어졌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제공권은 완전히 UN군에게 넘어간 상태였으므로 보급로는 거의 유지되고 있지 못했으며 전선 후방에 대해서는 제대로 통제가 되고있지 않았다.

[ 낙동강 전선으로 향하는 기차가 전폭기이 공격을 받아 폭발하는 장면, 제공권이 장악된 상태에서 북한군의 사정은 점점 열악해지고 있었다. ]

맥아더가 서해안의 항구도시 인천에 주목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곳은 남한의 수도인 서울과 매우 가깝고 한반도 전체로 볼 때 허리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인천으로부터 서울로 이어지는 지역을 단숨에 장악해 버린다면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은 북으로부터의 보급선을 완전히 잃게되고 북과 남으로부터 포위 당해서 고립되게 될 것이다.

* 인천항

[ 인천 상륙작전을 위한 항공작전도, 인천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에 광범위한 공습을 시행하여 인천으로 공산군의 전력이 보강되는 것을 차단하려 했다. ]

그러나 한국의 서해안은 조수간만의 차가 매우 심해서 썰물이 되면 해안으로부터 수km까지 바다물이 빠지는 곳이었으며 인천항은 심한 경우 4m가 넘는 수심의 변화를 보였고 해안선도 수km까지 후퇴한다. 더구나 물이 빠진 갯벌은 차량이나 병력의 이동이 용이하지 않은 뻘로 되어 있어서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는 상륙작전을 결행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참모진의 지적이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어느 작전에나 위험요소는 있게 마련이라면서 인천에 상륙작전을 결행할 것을 명령했고 작전에 반대하던 연합 사령부도 결국에는 맥아더의 설득에 넘어갔다.

미군으로부터 크로미티 작전이라 명명된 인천 상륙작전의 개요는 다음과 같았다. 우선 정찰기들의 사진을 분석한 결과 북한군의 주요 포대가 포진중인 것으로 보이는 월미도를 선제 공격하여 점령하고, 이후에는 인천에 본격적으로 상륙하여 시가로 신속하게 진입한 후 3일이내에 곧장 서울로 향해 진격하며 무엇보다 김포 비행장을 우선적으로 탈환하여 항공작전의 교두보로 삼는 것이었다. 이런 목적이 달성되면 즉시 서울로 입성하여 북한군을 몰아내고 낙동강 지역에서 발이 묶인 북한군의 배후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이었다.

[ 인천을 향해 항진중인 항모의 갑판에 F4U 콜세어 전폭기들이 도열해 있다. 제트시대가 도래했음에도 콜세어는 여전히 해군항공전력의 중핵을 이루고 있었다. ]

만일 상륙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낙동강 방어선에서 반격의 기회를 노리면서 포진중인 UN군과 국군이 즉시 낙동강을 건너 배후가 끊긴 북한군을 남쪽으로부터 공격하기로 했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인천 앞바다에서 상륙 작전을 결행하려면 밀물이 해안으로 가장 많이 밀려드는 9월 15일과 10월 11일이 최적기였다. 이때는 상륙정들이 인천의 내항까지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조시부터 3-4시간이 지나면 다시 물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작전은 최소한 3시간 이내에 신속하게 수행되어야 했다. 맥아더는 9월 15일을 공격 시점으로 정했고 인천 상륙작전은 완전한 기습으로 수행되어야 하며 모든 작전은 공군과 해군의 항공기들로부터 완벽한 지원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다.

* 인천의 하늘

작전일이 9월 15일로 정해지자 미군정찰기들이 쉴새없이 서울과 인천 상공을 날아다니면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서울과 인천사이에 배치된 북한군의 병력 상황을 파악한 미공군은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북한군이 인천쪽으로 보강되지 못하도록 서울과 인천사이의 도로와 철로에 대한 맹렬한 폭격을 시작했다. 9월 9일부터 13일 사이에 B-29 편대가 이 지역을 연일 맹폭했으며 모든 철로나 도로는 완전히 기능을 상실했다.

[ 인천으로 항진하는 함대 상공을 순찰중인 F4U 콜세어 ]

그러나 모든 것이 순조롭지는 못했다. 상륙함대가 일본을 떠나 서해안으로 향해 접어들고 있을 때 늦여름의 불청객인 태풍이 찾아온 것이다. 만일 이 태풍의 위력이 약해지지 않고 한국과 일본을 향해온다면 상륙함대가 발이 묶일 것이고 이렇게 되서 날짜를 놓친다면 상륙작전 전체가 위협받을 상황이었다. 미군은 기상정보에 촉각을 기울이고 조심스럽게 상륙함대를 서해로 전진시켰다. 상륙함대의 260여척의 함선들과 7만여 병력이 태풍 하나 때문에 온통 조바심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태풍은 하루만에 세력이 약해진 상태로 남쪽으로 멀어져 갔으며 작전 결행 36시간 전에는 모든 기상상태가 평온을 되찾았다.

[ B-29로부터 폭격을 받은 공산군 숙영지, 소이탄으로 인해서 불길이 번지고 있다. 공습은 대단한 피해를 주었지만 필연적으로 민간인의 피해도 상당했다. ]

상륙부대의 엄호는 미해군의 4척의 항모 (밸리포지, 박서, 시실리, 바동 스트레이트)군에서 발진하는 미해군과 해병대의 함재기들이 맡게될 것이며 영국 항모 HMS 트라이엄프도 가세하기로 되어 있었다. 물론 남쪽에서부터도 미공군기들이 가세할 예정이었다. 어차피 북한 공군은 이 시점에서 거의 활동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이들의 임무는 상륙부대의 안전을 위한 근접엄호였다.

* D-day

인천 근해에 포진한 상륙함대는 모든 준비를 완료한 후 공격개시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9월 15일 오전 6시 33분 새벽의 여명과 함께 공격명령이 떨어졌으며 순양함과 구축함에서 함포사격이 시작되었다. 하늘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새벽 하늘을 가르는 불덩어리들이 하늘을 대낮같이 밝히면서 인천 해안으로 날아갔으며 곧 지축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붉은 섬광과 검은 연기가 마치 인천 전체를 불태워 버리려는 듯한 기세로 퍼져나갔다. 최우선 공격목표였던 월미도의 북한군 포대는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잠들어 버렸고 미해병대가 월미도에 상륙하여 별 저항도 받지않고 순조롭게 점령했다.

[ 포격을 받고 연기에 휩쌓인 월미도 ]

하늘에는 항모에서 발진한 함재기들이 쉴새없이 날아다니면서 인천 해안을 청소하고 있었다. 비오듯이 쏟아지는 함포사격과 함재기들의 기관포 사격으로 인천에 있던 북한군은 엄폐호 밖으로 얼굴을 내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사실 그들은 인천으로 UN군이 상륙해 오리라는 것을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다.

오후 5시가 되면서 밀물이 절정에 달하자 본격적인 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던 한국군 해병대와 미 해병대 병력을 실은 상륙정들이 선봉에 서서 벌떼처럼 해안으로 쏟아져 들어갔으며, 해안에 도달한 해병대원들은 산발적인 북한군의 저항을 쉽게 제압하고 목표로 했던 교두보를 속속 점령하기 시작했다. 맥아더의 도박이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이날 하루에 예상보다 훨씬 적은 19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전사자는 20명에 불과했다.

[ 목표는 인천! 예비 포격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인천항으로 맹렬하게 전진하는 상륙정들 ]

상륙작전이 결행된 다음날 인천시내의 북한군 잔존병력을 완전하게 소탕한 UN군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서울을 향해서 전진했다. 이중 김포 비행장 탈환을 목적으로 전진하기 시작한 미해병대는 북한군의 잔존 병력을 소탕하면서 순조롭게 전진하여 9월 17일 김포비행장을 근처까지 전진했다. 그러나 북한공군은 완전히 전멸한 것이 아니라는 듯이 이날 김포 비행장에서 2대의 야크-9 전투기를 출격시켜 인천항의 연합군 함선을 공격하려 했으나 거센 대공포화에 걸려 1기가 순시간에 격추되었으며 나머지 1기는 북쪽으로 도주해 버렸다. 이것이 인천하늘에서의 북한공군이 시행한 유일한 반격이었다.

[ 교두보가 확보되자 해안으로 다가선 지원함에서 물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

다음날인 9월 18일 미 해병대가 김포비행장을 공격했고 북한군은 저항다운 저항도 없이 김포 비행장을 방치하고 후퇴했다. 김포 비행장을 쉽게 포기한 북한군 덕분에 비행장을 점령하려는 계획이 달성되자 미 해병대는 항공기들을 불러들이기 위해서 김포 비행장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활주로는 크게 파손되지 않아서 쉽게 복구될 것으로 보였으며 비행장에는 파괴된 건물과 항공기들의 잔해가 깔려있는 가운데 북한군이 방치한 2기의 IL-10과 1기의 야크-9이 거의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미군은 이들 기체를 곧장 미본토로 보내어 테스트를 실시했다.

[ 파괴된 T-34옆으로 생포된 북한군 병사들이 끌려가고 있다. ]

 상륙작전 전에 촬영된 정찰사진에서는 김포에 더 많은 북한공군의 항공기들이 있었으나 나머지 기체들은 인천 상륙작전이 시작되었을 때 황급히 북쪽으로 후퇴한 것으로 보였다.

9월 19일 활주로가 복구되자 곧 미해병대의 항공기들이 김포 비행장으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미해병대의 F7F-3 타이거캣 전폭기들이 야간 방공임무를 맡고 일본을 출발한 후 가장 먼저 김포 비행장에 진입했고 미해병대 소속의 F4U 콜세어 전폭기들이 서울 탈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서 김포로 날아들었으며 김포 비행장은 곧 UN군의 항공기지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김포가 수중에 떨어지자 곧장 모든 전력을 남한의 수도인 서울로 집중한 UN군은 공황상태에 빠진 북한군이 저항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퇴각함에 따라서 격렬한 저항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서울도 손쉽게 탈환할 수 있었다.

* 낙동강을 넘어서

한편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과 대치하면서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리에 수행되었다는 소식이 날아오기만을 기다리던 UN군과 국군은 사기가 충천했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 UN군 사령부는 9월 17일을 기해서 대대적인 반격을 결행하기로 했다.

[ 공습중인 B-26, 한국전쟁에서 매우 광범이한 활약을 한 기체로서 2차대전의 쌍발 폭격기인 B-26 머로더와는 다른 기체이다. ]

그러나 하늘에 낮게 깔린 비구름이 몰려오면서 갑자기 악화된 기상으로 인해서 9월 17일로 예정된 대반격을 미루어야 했다. 그러나 인천에 UN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은 낙동강 전선에서 큰 손실을 입어가면서 공격해오던 북한군의 사기를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더구나 B-29 폭격기들은 구름위를 비행하면서 낙동강 이북의 북한군 진영에 연일 폭탄의 비를 퍼부어 대고 있어서 북한군은 와해되기 직전의 상황까지 몰리고 있었다.

9월 18일 드디어 날씨가 맑아지면서 미공군의 F-80, F-51 전폭기들이 벌떼같이 낙동강 방어선으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움직이는 것이 발견되면 즉시 네이팜탄과 기관포탄이 퍼부어졌다. 북한군은 제자리에 바짝 업드려 공습이 끝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이날의 공습은 대반격의 예비단계로서 시행된 것이었다.

[ 낙동강 전선의 대표적인 격전지인 왜관 근처의 교량, UN군이 후퇴하면서 폭파시켜 끊어져 있다. ]

그리고 그 다음날 방어작전의 주공으로 대기하고 있던 미 제 8군 24사단이 전차를 앞세우고 왜관근처의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해서 북상하기 시작했으며 낙동강 전선의 모든 지역에서 국군과 UN군의 공세가 이어졌다. 이때까지 공격만 알았던 북한군은 큰 충격을 받아 지리멸렬했으며 변변한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뿔뿔히 흩어져 북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불과 한달전까지만해도 기세등등하게 남하해오던 정예군이 싸울 의지를 잃고 흩어져 도주하는 오합지졸로 돌변한 것이다.

물론 격렬한 저항을 해오는 북한군 부대도 있었지만 제공권이 넘어간 상황에서 제대로된 방어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었다. 전선을 날아다니면서 지상의 상황을 수시로 보고하는 관측기들로부터 북한군 저항거점이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면 곧장 F-80, F-51, B-26과 같은 전폭기들이 날아들어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곧장 지상군이 돌입하여 점령해 버렸던 것이다.

[ 낙동강 지구의 북한군 진영에 폭탄을 투하하는 B-29, 대대적인 반격의 신호탄이었다. ]

이런 상황을 보여주는 좋은 예는 9월 21일의 전투로서 이날 북한군의 T-34 전차 30대가 미 24사단의 돌출부를 측면으로부터 공격하기 위해서 매복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공격을 위해서 시동을 걸자마자 T-6 전선통제기에게 발견되어버렸던 것이다. T-6가 사라지자마자 24 사단을 지원하고 있던 F-51 전폭기들이 날아들어 로켓탄을 퍼붓기 시작했으며 F-80 전폭기들도 네이팜탄을 투하하면서 T-34들을 조직적으로 파괴했다. 결국 북한군 전차대는 전차포 한방 쏴보지 못하고 15대의 전차가 격파된 채로 도주해야 했다.

그러나 북한군이 너무 뿔뿔히 흩어져 북쪽으로 후퇴했고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한 UN군 부대의 진격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서 미군 전폭기들이 우군을 폭격하는 일이 속출했다. 결국 9월 23일 북상하던 영국군이 이들을 퇴각중인 북한군으로 오인한 미군 F-51 전폭기들의 공습을 받아 큰 피해가 발생하면서 패트리지 사령관은 이때까지 허용되던 무차별 공습을 전면적으로 중지할 것을 명령했으며 모든 공습은 반드시 확인 절차를 거친 후에 실시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것은 북한군의 전면적인 붕괴로 인한 UN군의 빠른 전진 속도를 반영하는 예이기도 했다. 이제 보급이 끊긴 상태로 북쪽과 남쪽으로부터 협공을 받게된 북한군은 포위망을 뚫고 북쪽으로 빠져나가거나 지리산과 같은 남한이 산악지대로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펴는 수밖에는 없었다.

[ 김포 근처에서 파괴된채 방치된 Il-10 슈트로모빅, 녹색의 기체에 북한공군의 마크가 선명하다. ]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시작된지 3달만에 전세는 드디어 역전되었으며 이제는 백두산과 압록강을 향한 국군과 UN군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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