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Act 3. 부산 방어전

구름위 2012. 12. 3.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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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 눈물의 한반도

◇ Act 3. 부산 방어전

(Battle for Pusan)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2. 3. 27

* 붕괴되는 전선

6월 29일 전선이 급격하게 무너지면서 FEAF의 활동도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B-26 폭격기들이 편대단위로 전선의 북한군 차량이나 보급선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F-80 전폭기들도 한강 상공에서 폭탄과 로켓탄을 사용하여 북한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일본에서부터 날아와 단시간의 작전 후에 돌아가는 미군기들의 수가 적어 북한군의 진격에는 별 장애가 되지 않았다.

[ 미군기들의 폭격으로 파되된 교량 ]

아직 미군은 남한지역의 전황이 얼마나 다급하지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맥아더는 북한군의 침공 사실을 보고 받았을 때, 미군이 개입하면 이를 한강에서 충분히 저지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바로 그때 이미 북한군은 한강을 건너고 있었던 것이다.

미군의 군사고문단이 전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수원에 도착한 것은 6월 28일 밤이었으며 이들은 한국군의 지휘관들로부터 전황을 보고 받았다. 이들로부터 북한군의 군사력이 예상보다 강력하며 현재의 전황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받은 맥아더는 6월 29일 오후 패트리지 대장과 함께 직접 일본을 떠나 수원으로 날아갔다. 수원 비행장에 도착한 맥아더는 자신이 한국땅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북한군에게 큰 충격이 될 것이라며 자신있는 표정으로 한국땅에 첫발을 내딛었다.

[ 미군기들의 공습으로 한강의 교량들이 파괴되자 바지선을 이용해서 도하하고 있는 북한군 차량 ]

수원에 도착한 맥아더는 이승만 대통령의 환영을 받은 후 한국군과 미군 지휘관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주재했다. 그때 수원 비행장 상공으로 폭음과 함께 4기의 야크-9 전투기들이 돌입해왔다. 마침 수원 비행장에는 맥아더를 호위하기 위해서 따라온 F-51 머스탱 4기가 발진 대기 상태로 주기하고 있었는데 미군 조종사들은 경보를 받자마자 즉시 이륙하여 야크 전투기들을 요격했다. 맥아더가 보는 앞에서 공중전이 벌어진 것이다.

미군 전투기의 요격을 받은 야크 조종사들은 예상과 달리 도주하지 않고 도전적으로 덤벼들었다. 그리고 양측의 전투기들이 선회를 하면서 서로 후미를 잡기 위한 격렬하게 선회하기 시작했다. 북한공군의 야크 전투기들은 얼마간 F-51과 접전을 벌이는 듯 하였으나 얼마안가 한 대씩 명중탄을 맞고 격추되었으며 마지막 기체도 검은 연기를 끌고 지상에 격돌했다. 북한 조종사들은 공중전을 수행할만한 기량이 부족하다는 것이 증명된 사건이었다. (일부 기록에는 이날 공습을 감행한 기체가 IL-10이었다고 되어있음) 야크 전투기들을 격파한 F-51D 머스탱 편대가 수원 비행장에서 승리의 빅토리롤을 실시하는 가운데 이를 지켜보던 맥아더는 만족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패트리지 대장에게 명령했다.

"지금부터 38선 이북의 모든 북한공군 비행장을 공격해서 파괴하도록 하시오."

* 한반도에 나타난 항공모함

한편 미해군도 한국해역으로 신속하게 전력을 배치하고 있었다. 오끼나와의 해군기지에는 미해군의 항모 밸리포지가 선발대로서 출항했으며 UN의 참전 결정이 내려지면서 일본근해에 있던 영국 항모 HMS 트라이엄프도 한국을 향해 닻을 올렸다. 그리고 한국 해역으로 접어든 이 두 항모는 북한공군의 근거지인 해주와 평양 비행장을 공격 목표로 설정했다.

[ 영국 해군 항모의 갑판 모습, 영국도 한국전쟁에 항모 기동부대를 파견했다. 파이어플라이 공격기가 이륙대기 중이고 갑판 바깥쪽에는 씨퓨리 전투기들이 시동을 걸고 있다. ]

7월 3일 서해안으로 북상한 HMS 트라이엄프에서 최초로 항모 작전이 시작되었다. 영국해군의 패어리 파이어플라이 공격기 12기가 슈퍼마린 씨파이어 전투기 9기의 엄호를 받으며 해주의 북한공군 비행장으로 날아갔으며 이곳까지 UN기들이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예상하고 있지 않았던 해주 비행장은 완전한 기습을 받았고 지상 시설과 비행장의 항공기들은 지상에 앉아있는 상태에서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리고 잠시후 미항모 밸리포지에서는 AD 스카이레이더 전폭기들과 F4U 콜세어 전폭기들이 미해군의 최신예 F9F 제트전투기들의 엄호하에 평양을 공습하기 위해 발진했다. 속도가 빠른 F9F 팬더 전투기들은 공격팀이 도착하기 전에 평양 비행장 상공으로 진입하여 적기들을 제압하라는 임무를 받은 상태였다. 이들이 폭음을 울리며 평양 상공에 나타나자 야크 전투기 10여기가 이들을 막기위해 긴급 발진했다. 그러나 속도에서 우세한 F9F 전투기들이 신속하게 우세를 점했으며 전투가 벌어지자마자 2기의 야크 전투기가 20mm 기관포 세례를 받고 불덩어리로 변했다. 이후 다른 야크 전투기들은 사기가 떨어진 듯이 이리저리 흩어져 도주했고 공중전이 싱겁게 끝나버리자 F9F 전투기들이 지상의 북한공군기들을 공격하여 3기의 항공기를 지상에서 격파했다. 그리고 연이어 들이닥친 F4U와 AD 스카이레이더 공격기들이 평양 비행장을 조직적으로 파괴하기 시작했다. 이날의 공습이 끝난 후 북한군은 평양 비행장의 피해가 매우 큰 것에 놀랐다. 특히 연합군의 항모들이 북한의 수도를 공습했다는 사실에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이때까지도 북한군은 이들 항공기가 어디에서 날아온 것인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평양 비행장은 잔존기를 중심으로 다시 복구되었으나 북한공군의 상황이 매우 열악한 상태였으므로 평양 비행장은 UN군의 항공작전에 큰 위협이 되지 않았고 그나마 얼마 뒤에 B-29 폭격기들의 집중공격을 받아 대부분의 전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날의 항모 항공작전은 이후 한국해역에 지속적으로 전개되는 미군과 영국의 항모들의 대규모 항공작전의 시작이었다. 

* 무너지는 미군

공군과 해군이 항공작전에서는 어느정도 성과를 올리고 있었지만 지상의 전세는 미군의 생각처럼 만만치 않았다.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서 미군의 스미스 파견부대가 최초로 한국전에 투입되었는데 그들은 북한군을 지나치게 얕보고 있었다. 스미스 부대의 병사들은 2차대전을 경험한 백전노장들이 아니라 전후에 새로 양성된 젊은 병사들로서 전투 경험이 대부분 없었다. 그들은 천하무적의 미군이 나타났으니 아시아의 작은 나라의 군대 따위는 자신들을 보면 놀라서 도망갈 것이라며 자신감에 넘쳐 있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오산을 방어하라는 임무를 받고 전투에 투입된 스미스 부대 (일개 중대 규모였다.)는 곧 T-34 전차를 앞세우고 돌진해오는 북한군의 기세에 압도당했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자 얼마 싸워보지도 못하고 많은 손실을 입고 퇴각해야 했다. 미군으로서는 참으로 치욕적인 순간이었다.

[ 7월 26일까지 미군이 설정한 공격 목표들, 이미 경상북도 이북의 지역에 대해서 무차별 항공작전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

그후 이번에는 신속하게 북진하여 한강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겠다고 큰소리를 쳐대던 딘 소장 휘하의 제 24 보병사단이 대전을 방어하기 위해서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24 보병사단도 너무 급히 한국으로 공수되어 제대로 준비되지 못한 상태로 전투에 투입되었고, 결정적으로 북한군의 T-34 전차부대를 물리칠만한 화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수적으로도 북한군이 미군을 압도하고 있었으며 병사들의 사기도 높아 대전에서 벌어진 격렬한 전투에서도 미군이 상당한 타격을 입고 후퇴하였으며 이 혼란의 와중에 사단장 딘 소장까지 북한군의 포로가 되는 수난을 겪었다. 결국 7월 20일 미군이 방어롤 호언장담하던 대전마저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졌으며 이것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건으로 이로인해서 북한군은 미군을 물리친 강한 군대라는 이미지를 얻게되었다고 한다. 

*제공권을 장악하라.

하지만 북한 지상군도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북한 공군기들의 엄호를 거의 받고 있지 않았으므로 미군의 항공 공격에 거의 무방비였다는 것이다. 점차로 미군기들의 활동이 활발해 지면서 대낮에 일렬로 행군하는 북한군 부대는 미군기 1-2대의 공격에도 큰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북한군 병사들도 항공 공격에 대처하는 것을 제대로 훈련받지 못해서 미군기들이 바로 머리위에 날아올 때까지도 전차나 차량을 피신시키지 않기 일쑤였다. 특히 전차병들은 미공군기들의 공격을 받더라도 전차속에만 있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이들은 로켓탄이나 네이팜탄의 공격을 받고 그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한 전차안에서 불에 타 죽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미군기들의 공습이 더욱 활발해지면서 북한군의 진격속도는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 대지공격을 위해 급강하중인 F-80, 이미 발사된 2발의 로켓탄 연기가 보인다. ]

7월 1일부터 한강 철교 및 수원 이북의 교량들과 북한 보급선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이 시작되었고 북한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지상에서는 북한군이 계속 밀고 내려왔지만 하늘에서는 미군이 상공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때 북한군을 저지하는 임무에서 선봉에 선 기체는 만능 지상공격기인 B-26 인베이더와 오끼나와에서 출동하는 B-29 중폭격기들이었다. 7월 6일에는 대구를 향해서 밀려오는 북한 지상군의 행렬을 발견한 B-26 6기가 즉시 공습을 개시해 전차 20여대와 수십여대의 트럭을 격파하고 수많은 북한병사들을 살상했다. 비록 B-26 1기가 지상포화에 맞아 격추되었으나 이날의 공습에서도 북한군은 항공공격에 거의 무기력함을 노출했다. 이에 더해서 B-29는 계속 고공으로 날아들어 북한 지상군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표에 대해서 폭탄의 비를 퍼부었다. 

[ 저공으로 접근중인 B-29, 오끼나와에서 출발하여 북한군 진영을 강타했다. ]

그러나 북한 공군이 전혀 활동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며 야크 전투기를 사용해서 미군에게 도전적으로 대항했다. 7월 10일 4기의 야크-9 전투기가 청주 근처의 미군부대를 공습해서 피해를 입혔으며 다음날엔 7월 11일에는 지상 공격을 마치고 귀환하던 F-80 전폭기들이 야크 전투기 2기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때 F-80 전폭기들은 연료가 거의 없어 공중전은 엄두도 못내고 속도를 이용하여 이탈해야 했는데 다행히도 모든 기체가 야크기들의 공격을 피해 무사히 일본으로 귀환했다. 하지만 7월 12일에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는데 그것은 오끼나와에서 출동한 제19 폭격기대의 B-29 폭격기 1기가 조치원 근방에서 야크-9 전투기 3기의 요격을 받아 격추된 사건이었다. 북한 공군을 얕보고 전투기의 엄호도 붙이지 않은 채 단독으로 작전하던 B-29였다고 해도 북한 전투기들에게 격추 당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B-26 1기가 야크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대파된 후 간신히 돌아오는 일까지 있었다. 

지금까지 북한공군에는 이런 기량을 가진 조종사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던 미공군 정보부에서는 소련 조종사가 탑승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결국 우선적으로 북한 공군을 괴멸시켜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즉시 대대적인 정찰작전이 실시되었다.

[ 출격 준비중인 F-80 편대, 일본에서 출발하여 한국까지 비행하기 위해서 주익 끝단에 연료탱크를 장비했다. ]

미군 정찰기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북한군이 점령한 김포 비행장에 20여기의 야크 전투기가 주기하고 있으며 아마도 이곳에서 출동한 야크 전투기들이 미군을 공격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맥아더는 즉시 이곳을 공습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7월 15일 8기의 F-80 전폭기들이 김포 비행장을 급습해서 10여기의 야크 전투기를 파괴하였으며 지상시설에도 큰 피해를 입혔다. 그리고 이들이 사라지자마자 3기의 B-29가 상공으로 날아들어 김포 비행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나머지 북한공군의 잔존세력은 평양비행장과 연포, 옹진리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 역시 항공정찰에 발각되어 7월 18일과 19일에 걸쳐서 B-29의 대대적인 폭격을 받았으며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 북한공군은 산발적으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별 성과를 올리지 못했고 대부분의 항공전력이 손실되었다. 결국 이런 항공작전의 성과로 북한공군은 모든 전력의 80% 이상을 상실했고 7월 중순부터는 작전에 거의 투입되지 못하게 되었다. 

[ 기차 지붕에까지 몸을 싣고 남으로 향하는 피난민들, 그러나 이런 기차도 미군기들에게 발견되면 무차별로 공격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전쟁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

그러나 미군의 항공 작전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우선 전선이 너무 급속하게 무너지고 있어서 한국내에 항공기지를 운용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피아 식별의 곤란으로 지상의 한국군부대나 민간인 피난행렬을 북한군으로 오인하고 공격하는 경우가 많이 벌어졌다. 예를 들어 7월 3일에는 정찰기로부터 북한군 부대의 위치를 보고받은 F-51D 머스탱들이 지정 장소에 도착하여 맹렬하게 공습한 후에 기지로 돌아갔는데 실제로 이곳에는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한국군 보병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개전 후 7월 15일까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F-80 슈팅스타 전폭기의 항속거리가 짧아서 전선상공에서 20분 이상을 비행할 수가 없었다. 이로 인해서 북한군은 미군기들이 나타나면 20분 정도만 몸을 숨기면 안전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 대구 비행장의 머스탱

한편, 고전하고 있는 미 지상군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한국내에 항공기지를 구축하려는 움직임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에 패트리지 대장은 참모들의 의견대로 대구 비행장에 공군기들을 파견하여 작전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이 대구 비행장은 활주로의 상태가 매우 나빴기 때문에 제트 전투기인 F-80은 도저히 작전할 수 없었다. 활주로의 상태가 불량해서 크고 작은 구멍들이 나있었고 비가 한번 오고 나면 온통 진창으로 변해버리기 일쑤였으며 주위에 건물이라고는 낡은 목조건물 2채뿐이었던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작전이 가능한 기체는 프로펠러기인 F-51 머스탱 뿐이었다.

[ 빗물로 잠긴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오르는 F-51D, 한국전쟁에서는 매우 효과적인 지상공격기로 맹활약했다. ]

어차피 지상군의 지원에는 제트전투기들보다 F-51D가 더 효과적이라는 의견이 나오면서 6월 30일부터 급히 10기의 F-51과 100여명의 정비요원들이 탄약과 연료를 싣고 따라오는 수송기들과 함께 대구로 날아가 항공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군으로부터 K-2라고 명명된 대구 비행장이 공군기지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이때 이 F-51D 부대를 지휘한 사람은 딘 헤스 대령이었으며 그에게는 지상군의 근접지원에 더해서 한국 공군의 조종사들을 교육시켜 F-51을 능숙하게 조종하도록 만들라는 또 하나의 임무가 주어졌다. 드디어 미군이 한국군에 자체 전력을 가진 공군을 양성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이 계획은 '바우트 원 (Bout one)'이라는 작전명이 붙여져 있었다. 일본의 이타즈께 공군기지에서 딘 헤스 대령과 교관들은 한국공군의 조종사 10명과 함께 직접 F-51을 몰고 대구로 날아왔으며 도착하자마자 최대한 빨리 한국 조종사들이 전투에 참가할 수 있도록 전투비행 교육이 실시되었다.

미군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이런 필요성이외에도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한국 정부가 F-51 10기로 이루어진 자체 공군을 양성하도록 도와달라는 요구를 거절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과 한국군에게도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공군을 만들어야 한다는 한국측의 요구에 대한 대안이었다. 사실 F-51은 미공군에서는 폐기되고 있는 구시대의 유물이었지만 한국 전장의 환경에서는 쓰임새가 높을 것으로 다시 재평가 되고 있어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급히 미국 본토에서는 주방위군이나 훈련부대로 넘겨졌던 F-51D 전투기들이 모아져 한국 전선으로 보내기 위해 배에 탑재되고 있었고, 실제 한국상공의 지상공격 임무에서는 F-80보다 F-51이 더 효율이 높았다.

[ 대구비행장을 날아오르는 F-51D, 기수에 신념의 조인이라는 노즈아트를 가진 딘 헤스 대령의 기체이다. ]

딘 헤스 대령은 F-51부대를 이용하여 미군 지상군의 근접지원과 한국공군의 교육을 동시에 시행하다가 어느 정도의 수준이 되면 모든 기체를 한국측에 이양하고 독자적인 공군력을 가질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이런 계획을 반영하듯이 모든 기체의 미국적 마크가 지워지고 한국공군의 태극마크가 그려졌다. 특히 딘 헤스 대령의 기체에는 한 한국인이 고마움의 표시로 '신념의 조인 (信念의 鳥人)'이라는 노즈아트를 그려 넣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머스탱을 탑승하기위한 훈련을 받기 위해 대구로 모인 10명의 한국 조종사들은 침략자들을 물리치겠다는 의욕은 넘치고 있었지만 비행 경험이 부족해서 F-51을 능숙하게 다루지 못했다.

애초에 미군의 교관 조종사들은 전투에는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않고 한국 공군 조종사들을 훈련시키기로 했었지만 이런 규칙은 계속 어겨졌으며 한동안 이 F-51은 미군 교관 조종사들이 조종하여 지상지원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 조종사들은 미군의 교관 조종사들과 함께 실전에 참가할 수 있었다. 특히 딘 헤스 대령의 한국 조종사들에 대한 배려는 매우 세심해서 모든 조종사들이 실전에 참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때까지 같이 비행하면서 훈련을 시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활동도 점점 전선이 붕괴되면서 위축되었고 대구 비행장이 북한군의 위협을 받게되자 딘 헤스 대령 휘하의 교관들과 한국공군 조종사들은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 전투비행 훈련을 계속 했다.

[ 머스탱의 로켓탄 공격을 받는 수송기차, 갈수록 미군기들의 활동이 더 활발해지면서 북한군의 보급에 상당한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

물론 이런 수련의 기간이 끝난 후에는 모든 기체가 한국공군에 넘겨졌으며 이후 전쟁이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한국공군은 전투기의 조종과 정비까지 모두 한국 공군이 해결할 수 있는 독자적인 공군부대를 이루게되고 미군의 F-51 부대가 참가하는 모든 작전에 동등하게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2년 6월 무렵에는 한국공군의 F-51부대는 강릉비행장을 모기지로 활동하는 비행단의 규모로까지 성장하게 된다. (한국 공군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별도의 챕터로 구성해볼 예정입니다.) 

* 부산 방어전

7월 내내 북한군은 계속 기세 등등하게 남하하고 있었다. 대전이 함락된 후 군산, 영덕, 광주등 주요 도시들이 속속 떨어졌고 이러다가는 전국토가 공산군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이 얼마남지 않은 듯 했다.  결국 8월이 되면서 국군과 UN군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설정하고 일단 모든 전력을 낙동강 이남으로 후퇴시켜 전열을 정비하고 이 지역에 모든 전력을 집중하여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기로 결정했다. 만일 여기서 북한군을 저지할 수 있다면 제공권을 장악한 UN의 항공전력이 북한군에게 커다란 손실을 줄 시간을 벌 수 있게되고 부산항으로 계속 쏟아져 들어오는 전쟁물자가 비축되면 전황의 역전까지도 기대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낙동강 방어전의 근간이었다. 결국 1950년의 뜨거운 8월과 함께 낙동강 주위를 온통 피로 물들이게되는 최대 규모의 전투가 연일 계속되게 되는데 이것이 부산 방어전이다. 미군의 작전입안자들에게 있어서 낙동강 방어선은 북한군의 발목을 잡은후 모든 전력을 소모시키기 위한 덫이었던 것이다.

[ 최후의 방어선으로 설정된 부산 방어지구를 보여주는 일러스트, 낙동강을 거점으로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항공전력으로 대타격을 주겠다는 것이 부산 방어작전의 개요였다. ]

연일 계속된 항공정찰의 결과 부산을 공격하려는 북한군의 주공은 북한 제 6사단인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이 부대는 금강을 지나 전주를 점령하고 하루에 20km가 넘는 속도로 서쪽에서부터 부산쪽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그외에 나머지 북한군 부대들도 북쪽과 동쪽에서 부산을 향해 속속 남하하고 있었다. 이미 국군과 미군이 낙동강이남으로 철수하고 있었으므로 이때까지는 북한군도 별 저항이 없이 부산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낙동강으로 접근하면서는 북한군의 기세가 꺽이기 시작했다. 배수의 진을 치고 절대 후퇴하지 않으리라는 각오로 방어선을 구축한 국군과 UN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낙동강을 건너는 것이 매우 어렵게 된데다가 UN군의 항공작전으로 인해서 북한 지상군의 피해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제공권을 빼았긴 상태에서 빨리 부산을 점령하지 못한다면 상당히 여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리라는 것은 북한군측으로서도 충분히 예견하고 있었던 상태였다.

이미 낙동강 이북의 모든 교량과 건물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은 미군의 F-80, F-51, B-26 기들이 쉴새없이 날아다니면서 북한군의 진격루트를 파괴하면서 괴롭히고 있었으며 북한군이 점점 남쪽으로 내려오면서는 미군의 전폭기들에게는 상황이 더 유리해졌다. 이제는 일본에서 날아오더라도 항속거리에 별다른 구애를 받지 않고 충분한 시간을 체공하면서 공격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병력이 집결하고 있는 곳이 정찰기에게 발견되면 상공에 B-29 폭격기들이 날아들어 융단폭격을 퍼부었으며 이로 인해서 북한군의 인명 손실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 네이팜탄이 투하된후 불길이 T-34 전차쪽으로 번지고 있다. 잠시후 아래의 사진처럼 T-34는 불길에 휩쌓이게 된다. ]

당시 미군의 전폭기들은 낙동강 근처에서 움직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공격하라는 무차별 공격명령을 받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서 북한군은 대낮에는 단 한 대의 차량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었으며 병력의 이동은 야간에만 가능했다. (물론 무차별 공습에는 예외가 없어서 피난민들의 희생도 상당했다고 한다.) 낙동강 방어선을 둘러싼 전투가 가열되면서 북한군은 길어진 보급선이 자꾸 차단되면서 손실된 물자의 보급과 병력의 보충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북한군의 T-34 전차 부대는 침공 초기의 엄청난 기세는 온데 간데 없이 미군의 항공기들로부터 속수무책으로 파괴당하기 시작했다. 6월 25일 230여대의 T-34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던 북한군의 기갑전력은 부산 방어선까지 내려오는 동안 계속된 손실로 인해서 1/3 이하로 줄어든 상태였으며 이들 대부분은 미공군기들의 항공공격으로 파괴 당했다. 반면 부산쪽으로 계속 밀려드는 UN군의 병력과 군수물자 보급작전으로 미군 전차들이 계속 늘어나 8월 말이 되면서는 오히려 미군의 기갑전력이 더 우세해지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다급해진 북한군은 8월 한달 동안 낙동강 전선에서 계속적인 공세를 취했다. 그리고 국군과 미군은 공세적으로 나오는 북한군의 기세를 저지하기 위해서 방어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대로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간다면 북한군이 점점 불리해 지리라는 것은 점점 분명해 지는 듯 했다.

[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서 돌격을 시도하다가 파괴된 T-34 전차들, 대부분은 항공 공격으로 파괴되었다. ]

승승장구하면서 계속 남하하다가 최종적인 승리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전진을 하지 못하고 발목이 잡힌 북한군은 점점 더 다급해졌으며 방어선을 뚫기 위해서 계속적인 무모할 정도의 공세를 폈으나 낙동강 방어선은 매우 견고했다. 결국 무모한 돌격을 계속하는 북한군의 손실이 계속 증가하면서 전선은 소강 상태를 보이기 시작했고 이러는 사이에 UN군의 항공기들은 계속 북한군의 머리위로 날아들면서 쉴새 없이 폭탄과 기관포를 퍼부었다. 결국 9월이 되면서 북한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리라는 것이 기정 사실화되는 것으로 보였다. 한반도를 적화통일하기위해 기습남침을 감행한 북한군의 운은 여기까지였던 것이다.

그리고 맥아더는 이제 반격의 시점이 다가왔다고 생각했다. 그가 구상한 대반격의 장소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서해안의 항구도시 인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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