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Act 5. 38선을 넘어서

구름위 2012. 12. 3.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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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 눈물의 한반도

◇ Act 5. 38선을 넘어서

(the progress)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2. 4. 29

* 내몰리는 북한군

[ 낙동강을 건넌후 38선을 넘어서... 인천 상륙작전이후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한 국군과 UN군의 진격루트를 보여주는 일러스트 ]

인천 상륙작전의 대성공과 낙동강에서의 UN군의 공세로 인해서 남한으로 침공했던 북한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이미 보급로가 완전히 차단되었으며 이제는 낙동강을 건너 밀고 올라오는 미군과 한국군의 공세를 막아내야 했다. 더구나 하늘에서는 UN군의 전폭기들이 쉴새없이 날아들어 머리를 들지도 못할 정도로 맹렬하게 공습을 계속하고 있었다. 결국 남쪽으로 치고 내려왔던 북한군의 주력은 완전히 와해되었으며 대부분 변변히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UN군의 포위망을 피해서 북으로 후퇴하거나 지리산과 같은 남한의 산악지대로 숨어야 했다. 

인천에 상륙한 병력이 서울로 진입하고 교두보를 확고히 하는 사이에 낙동강에서부터 치고 올라온 국군과 미군은 9월 26일 오산에서 기다리고 있던 우군과 합류하였으며 미 해병대는 F4U 콜세어 전폭기들의 강력한 화력지원을 받으면서 9월 27일 서울의 북쪽에서 북한군의 잔존 병력을 일소하고 남한의 수도에서 북한군을 완전히 내몰았다.

[ 김포비행장에서 이륙하는 F4U-5 콜세어, 야간 요격임무를 위한 레이더 유니트가 보인다. ]

이렇게 상황이 매우 좋아지면서 주일 미 제 5 공군은 효과적인 항공작전을 위해서 사령부를 남한으로 옮기기로 하고  본격적으로 항공기와 병력을 남한으로 이동했다. 9월 25일, 대구 비행장 (K-2)이 제 5 공군의 임시 사령부가 되었으며 제트기들의 작전이 가능하도록 활주로가 빠른 속도로 보수되었다. 이후 F-80, B-26과 같은 주력 기체들이 속속 날아들면서 프로펠러기 한 대가 간신히 이착륙 할 수 있었을 정도로 보잘것 없던 대구 비행장은 대규모 군용 항공기지로 빠른 속도로 변모하고 있었다. 한편 포항 (K-3)에도 항공작전을 위한 기지가 건설되었으며, 여기에는 F-51D 머스탱을 장비한 미공군의 39, 40 전투비행중대와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호주공군의 77 전투비행중대가 속속 날아들어 동쪽에서 퇴각하는 북한군을 공격하기 위한 항공작전을 시작했다.

[ 김포 비행장으로 날아온 미해병대의 항공기들, A3D 스카이레이더와 F7F 타이거캣의 모습이 보인다. 활주로 주위의 가건물이 당시 김포 비행장의 열악한 상황을 보여준다. ]

그러나 북한군이 변변히 저항도 못하고 붕괴되면서 UN군의 진격속도가 예상 밖으로 너무 빨라지자 항공지원을 위해서는 수원에도 비행장이 필요했다. 그러나 수원 비행장은 전쟁 초기에 미군의 집중 폭격을 받아 사용불능이 된 상태였으므로 미군은 즉시 공병대를 투입해서 비행장을 복구했으며 결국 10월 6일경, 파괴된 수원 비행장이 복구되었고 부산에 주둔하고 있던 제 35 전투폭격기중대의 F-51D 머스탱 전폭기들이 대거 북쪽으로 이동했고 수원 비행장은 미 공군의 정식 항공기지 (K-13)가 되었다. 그러나 수원 비행장이 사정은 아직 열악해서 대부분의 항공작전은 비교적 사정이 나았던 김포 비행장에서 수행되었다. 이 무렵 미군이 사용한 가장 큰 항공기지였던 김포에는 미 공군의 제 51 전투요격기 대대가 전개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제 16, 25 전투요격중대와 제80 전투폭격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 남한 지역의 미공군 비행장들을 보여주는 일러스트, K-1부터 k-47까지의 호출부호가 붙여져 있으며 이중 강릉(K-18)기지는 후에 한국공군의 작전기지가 된다. ]

* 전략 폭격

한편, 북한 지역에 대한 전략 폭격은 8월중순부터 상당한 수준으로 실시되고 있었다. 오끼나와의 가데나 기지에서 출동하는 B-29 폭격기들은 일부는 낙동강 전선의 아군을 지원하고 나머지들은 북한으로 날아가 산업시설을 연일 맹폭했다. B-29가 침투하는 고공으로까지 올라와서 저항해오는 북한 전투기들이 없었으므로 이런 임무 수행은 매우 쉬운 것이었다. 당시 남한 지역은 주로 농업위주로 북한 지역은 공업시설 위주로 발달이 되어 있었는데 이런 공업시설들이 목표가 되었다. 북한의 제철소, 철도조차장, 유류저장소, 항만시설등이 일제히 목표물 리스트에 올랐으며 연일 B-29 폭격기들의 융단 폭격을 받았다. 결국 8월말이 되자 북한 산업시설의 90%가 지도상에서 사라져 폐허가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B-29 폭격기들은 북폭을 중단하고 다시 낙동강 지역으로 몰려와 북한군을 다시 맹폭했던 것이다.

[ 북한지역으로 출격중인 B-29 편대, 낙동강에서 한창 교전이 벌어지는 동안 북한의 주요 산업시설들을 맹폭했다. ]

북한전투기들의 출현이 완전히 중단되면서는 아예 목표지역을 단기로 날아가서 기회목표에 대한 공격을 시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어떤 B-29는 낙동강 전선 부근의 북한군 열차를 발견한후 초저공으로 추격해서 방어총좌의 기관총으로 열차를 공격하기도 했으며, 어떤 B-29 조종사들은 자전거를 타고가는 북한군 몇 명을 추격해서 폭탄을 퍼붓기도 했다.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낙동강 전선이 돌파되면서 전쟁의 양상이 낙관적으로 보이자 미공군은 오끼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5개의 B-29 폭격기전대 중에서 2개 전대를 미 본토로 귀환시키기도 했다. 나머지 B-29 전대로도 작전 수행능력은 남아도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 북진 

[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국군 화랑부대의 용사들 ]

한편, 북한군이 예상외로 속절없이 무너지면서 북쪽으로 후퇴하자 UN군에게는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다. 그것은 이대로 북한군을 추격해서 38선을 돌파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서 미 정부는 만일 미군이 38선을 넘어서 북진해 들어갈 경우 중국이나 소련을 자극해서 확전이 될 수도 있다는 의견들이 나오자 잠시 결정을 망설였다. 그러나 맥아더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한국을 통일하자는 의견을 강력히 제기했고, 지금의 추세라면 중국이나 소련이 개입을 결정하기도 전에 완전히 북한을 점령해서 한국을 통일할 자신이 있다는 주장을 했다. 그리고 미 정부는 UN군의 북진을 승인했다. 

[ 파괴된 T-34 옆을 지나 북진하는 M4 셔면전차의 모습, 북한 기갑전력의 괴멸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

결국 9월 27일 맥아더는 UN군의 모든 병력을 동원해서 즉각 38선을 넘어 북한군을 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단, 중국이나 소련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가장 먼저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것은 한국군 부대여야 하며 중국과 소련과의 국경지대로는 오직 한국군만이 전개하도록 하라는 단서가 붙었다. 그러나 중국은 미군이 38선을 넘어설 움직임을 보이자 즉각적으로 외교경로를 통해서 미군이 38선을 넘어올 경우 중국군이 이 전쟁에 개입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중국군을 얕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위협에 대해서 다분히 말뿐인 위협정도로만 여기고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 김포 비행장에서 노획된 2기의 IL-10 슈트로모빅 공격기, 거의 완전한 상태로 노획되어 즉시 미본토로 공수되어 테스트를 받게 된다. ]

맥아더의 북진 명령이 떨어지자 곧장 대대적인 예비 폭격이 시작되었다. 정찰기들이 쉴새없이 북한 상공을 날아다녔으며 북한군 부대나 진격에 방해가 될 것으로 추정되는 목표물들이 발견되면 얼마 뒤에 B-29 폭격기들이 날아들어 융단 폭격을 퍼부었고, 이후에는 F-80이나 F-51D 같은 전폭기들이 또다시 날아들어 쑥대밭을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군은 대낮에는 퇴각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으며 야음을 틈타 계속 북쪽으로 도주해야 했다.

[ 1950년 10월말경의 사진으로 평양 비행장에 날아든 F-51D와 눈이내린 활주로를 정비하는 한국인 노무자들의 모습이다. ]

10월 9일 개성이 미군이 개성에 입성했으며 1 기갑사단이 북한의 수도인 평양쪽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한국군과 UN군이 빠른 속도로 북쪽으로 밀고 올라오면서 김일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는 자신의 꿈이 속절없이 날아가 버린 것을 실감해야 했다. 더구나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고, 남아있는 북한군에게 최대한 전력을 보존하면서 신속하게 중국으로 후퇴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자신도 부하들과 함께 황급히 중국으로 도망길에 올랐다.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을 전쟁에 끌어들이는 수밖에는 없다고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으로 들어간 김일성은 즉시 모택동을 찾아가 북한군을 도와달라고 애원했고, 모택동이 참전을 망설이자 스탈린을 설득하기 위해서 소련으로 건너갔다.

[ 출격대기중인 B-26 인베이더, 한국전쟁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활약한 지상 공격기였다. ]

한편, 이때 맥아더는 또하나의 상륙작전을 계획했는데, 그 곳은 원산이었다. 맥아더는 이 지역에 다시 기습적인 상륙작전을 감행해서 북한군을 또 한번 고립시키고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원산에 대한 상륙작전이 입안되고 실행되기 직전에 원산 지역에 대규모로 기뢰가 부설되어있고 해안에 지뢰밭이 매설되어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지상군의 진격속도가 예상외로 빨라서 굳이 위험한 상륙작전을 감행하지 말자는 의견들이 많아졌다. 결국 기뢰 제거를 위해서 시간이 너무 많이 소모되었으며 따라서 상륙은 전격적인 기습이라는 의미를 상실해 버렸다. 미 해병대가 원산이 해안으로 상륙했을 때는 이미 한국군이 원산을 점령한 뒤였던 것이다. 결국 맥아더의 또 한번의 과감한 전략은 별 소득이 없었다.

* 전쟁은 끝나는가...

이 시점에서 북한공군은 허울뿐인 존재가 되어있었다. 9월 중순까지도 가끔씩 출현해서 신경을 건드리던 북한공군의 야크 전투기들은 10월이 되면서는 아예 한 대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북한공군의 잔존 세력도 김일성의 명령에 따라 10월 13일경에는 모두 압록강을 건너 중국진영으로 도주했던 것이다.

[ 진해 비행장에서 작전중인 F-51D, 기수의 샤크마우스가 특징적인 기체이다. 주익하면에는 지상공격용 로켓탄이 보인다. ]

10월 13일, 원산이 UN군에게 점령되었고 원산 비행장에는 미 해병대의 F4U 콜세어와 F7F 타이거캣 공격기들이 날아들어 북진을 위한 비행기지로 활용했다. 그리고 1주일이 지나자 북한의 수도인 평양도 점령되었다. 북한공군의 주요 비행장이던 평양 비행장은 북한공군이 황급히 퇴각하면서 활주로나 시설물에 대해서 제대로 폭파작업을 하지 않아 파손상태가 양호했다. 따라서 대부분 쉽게 F-51D와 같은 미 공군기들의 작전 기지로 변했고, 여기서 날아오른 F-51D 전폭기들은 압록강 상공까지 진출하여 퇴각 중인 북한군을 공격했다. 이 무렵 미 공군은 중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조종사들에게 절대로 압록강을 건너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는데 이것은 종종 조종사들의 비행착오나 항법 실수에 의해서 무시되었다. 몇몇 F-51D 조종사들이 압록강 이북의 중국지역으로 날아가서 공습을 가하고 돌아왔던 것이다. 심지어는 신의주를 폭격하러 출격했던 B-29 몇대가 항법착오로 압록강 접경의 중국 안뚱의 철도역을 폭격한 일까지 있었다. 물론 모든 것은 조종사들의 과실로 드러났지만 중국군이 움직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높아졌다.

[ 항모 박서에서 이륙 준비인 미해군의 F9F 팬써 전폭기, 공군에 F-80이 있었다면 해군에는 F9F가 있었다. 미해군의 항공전력을 크게 강화시켜준 기체이다. ]

한편 한국해역에 전개하는 UN군의 항공세력도 점점 강화되었다. 미해군의 항모 레이테가 한국해역으로 이동하여 항모군에 가세했고, 영국해군도 서해에서 작전중이던 트라이엄프를 지원하기위해서 신형 항모 시서스를 추가로 파견했다. 미 항모에서는 F9F 팬써를 주축으로 F4U 콜세어 전폭기들이 압록강 상공까지 진출하여 지상군의 작전을 지원했다. 영국 해군도 항모 시서스에서는 신형 씨퓨리 전폭기를 대량으로 작전에 투입했는데 이 기체는 이전의 주력기체였던 씨파이어보다 훨씬 향상된 작전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영국해군의 항공작전 능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었다.

[ 영국항모 시서스에 탑재중인 파이어플라이 공격기, 뒤에는 신형함재기 씨퓨리가 보인다. 이들 기체들로 영국해군의 항공전력은 크게 강화되었다. ]

10월 29일경, 드디어 선봉의 한국군 부대가 드디어 압록강 근처까지 이르렀으며 UN군의 항공작전도 점점 강도가 약해졌다. 이미 10일전부터 B-29 부대는 폭격 목표가 없어져버려 폭격임무를 대폭 줄인 상태로 날개를 쉬고 있었으며 다른 전폭기들도 압록강 근처에서 순찰 비행정도만 시행했다. 미군 병사들 사이에 이제 전쟁은 크리스마스 이전에는 끝날 것이고 곧 집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낙관론이 흐르고 있었으며 한국민들도 연일 계속되는 승전보를 접하면서 이제 조국이 통일되리라는 것에 대해서 들떠있었다. 이제 통일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 뒤 몰아칠 엄청난 폭풍전의 작은 고요에 불과했다.

점점 차가워지는 10월말의 날씨와 함께 한국전의 양상을 조심스럽게 살피던 중국군이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였다. 사실 이무렵 중국군은 이미 압록강을 건너 군대를 파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

[ 평양 비행장에 파괴된채로 방치된 야크-9의 조종석에서 미군 조종사가 기체를 점검하고 있다. 한국전쟁의 초기에 제대로만 운용되었다면 북한군의 전력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었던 기체였으나 북한공군의 전력운용상의 미비점으로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다. 개전후 2달이 지나면서는 이미 제트시대에는 한물간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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