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Act 2. 피의 일요일

구름위 2012. 12. 3.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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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 눈물의 한반도

◇ Act 2. 피의 일요일

(Bloody Sunday)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2. 3. 13

* 침공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8선에 포진한 북한진영의 대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귀청을 찢는 대포소리가 전역에서 울려 퍼지고 동시에 수많은 붉은 섬광이 38선 남쪽을 강타했다.  그리고 격렬한 포격이 멈추자 지축을 울리는 캐터필러의 굉음과 함께 T-34 전차를 앞세운 북한보병들이 38선을 돌파하여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완전한 기습으로 그때까지의 산발적인 군사도발이 아닌 본격적인 침공이었으며 이것은 이후 3년간 온 국토를 잿더미로 만들고 피로 물들이게되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일제히 남침을 결행한 북한군의 칭공방향을 표시한 지도이다. ]

소련군으로부터 전술을 교육받은 북한군답게 우선 대대적인 대포사격으로 상대방의 혼을 빼놓은 상태에서 전차를 앞세우고 밀어붙이는 러시아식의 대대적인 기습적인 공격으로 38선의 남측 수비라인은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무엇보다 기습을 당한 국군에게는 북한군의 T-34 전차를 막을 수 있는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수류탄을 들고 전차로 돌진하는 육탄공격과 같은 장렬한 희생으로도 북한군의 공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오전 9시가 되자 개성이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졌으며 강릉에는 북한군이 상륙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전선의 전면적인 붕괴가 시작되었다. 이런 한국전쟁 초반의 지상전 양상에 대해서야 대부분의 방문객들께서도 어렸을 때부터 학교에서 수없이 배우고 TV에서 보고 들었을 것이므로 본 연재에서는 항공전을 중심으로 진행해 보도록 하자.

[ 침공의 선봉에선 북한군의 전차부대, 소련의 걸작품 T-34 전차는 산악지형인 한국에서도 맹위를 떨쳤다. ]

침공 첫날, 북한 지상군의 맹렬한 진격과 달리 항공전의 측면에서는 북한군이 효과적인 항공작전을 거의 시행하지 못했다. 북한공군은 160기가 넘는 작전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면서도 이를 지상군의 전진을 돕는 근접지원에는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북한공군의 훈련상태가 부족하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서 사실상 이 시점에서는 공군의 지원이라는 것이 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남한군의 전력과 북한군의 전력의 차이가 컸으며,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진격이 빨랐고, 화력과 병력에서 절대열세였던 국군의 방어선은 북한 지상군의 공격 앞에 속수무책으로 붕괴되고 있었지만, 만일 제대로 훈련된 조종사들이 IL-10과 같은 우수한 지상공격기를 이용하여 효과적으로 지상군을 지원했다면 북한군의 진격 속도는 더욱 빨랐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공군이 전혀 활동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니, 6월 25일 오후 1시경 38선을 넘어서 남쪽으로 진출한 야크-9 전투기 4기가 김포공항 상공에 나타나 지상시설에 대해서 기총소사를 실시한 것을 시작으로 비슷한 시각에 서울비행장에도 야크 전투기들이 나타나 아무런 대비도 없이 지상에 주기중인 한국공군의 L-4/5 관측기 7기를 격파했다. 그리고 오후 7시경 다시 6기의 야크 전투기들이 김포비행장에 나타나 기총소사를 퍼부었는데 이때 미군 소속의 C-54 수송기 1기가 파괴되었다. 이 기체는 미군이 자국민의 철수를 위해서 대기시켜 놓았던 기체로서 이 기체의 손실은 자국민의 안전에 촉각을 기울이던 미군을 자극하게 된다.

1950년 6월 북한공군의 도색을한 IL-10이다. 북한공군에 약 60여대 이상이 공급되어 있었는데 상당히 우수한 지상공격기였음에도 실전에서는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개전 며칠만에 대부분 지상에서 격파당하게 된다.

여하간 160여기의 작전기를 보유하고 있었던 북한공군이 침공 첫날 겨우 몇 대의 야크 전투기만을 사용해 공습에 나섰다는 것은 북한공군내에 지상공격을 수행할 만한 역량을 가진 조종사들이 많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공습에 나선 기체들이 우수한 지상공격기인 IL-10이 아니라 야크 전투기들이었다는 것은 북한공군이 제대로 전쟁에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전에 돌입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사실상 남한공군에는 북한공군의 작전을 저지할만한 항공전력이 없었으므로 만일 북한 공군기들이 대규모 공습으로 김포 비행장과 같은 주요 목표물을 강타했었다면 커다란 성과를 올렸을 것이다. 

[ 최선을 다했건만....  한국공군의 L-4 관측기가 침공해오는 북한군 전차를 향햐 수류탄 공격을 하려는 장면을 담은 전쟁화이다. (공군사관학교 박물관 소재) ]

한편 전면적인 기습을 당한 한국공군은 전쟁이 시작된지 몇 시간만에 북한 전투기들의 공습으로 대부분의 기체를 상실했으며 불과 2-3대의 생존기들이 다급한 상황에서 급히 이륙하여 전선으로 출동을 했다. 이 용감한 조종사들은 전투용 기체라고는 볼 수 없는 L-4 관측기에 박격포탄이나 수류탄을 싣고 북한군의 상공으로 날아가 손으로 폭탄을 떨어뜨리는 용전분투를 했다. 비록 밀려오는 파도를 맨손으로 막는 것과 같이 무모한 것이었으나 이런 용기는 훗날 한국공군의 정신적인 모태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용감한 출격도 북한군이 계속 남으로 밀려오면서 출동 근거지를 상실함에 따라 곧 중단되게 된다. 물론 침공 첫날 북한공군은 지상군의 엄호를 거의 실시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이날 남과 북의 항공기들이 하늘에서 마주치지는 않았다. 

* 미 극동공군

[ 1950년 6월 주일 미공군의 기지를 표기한 지도이다. 대부분의 항공작전은 이타즈께와 같이 한국에서 가까운 기지에서 수행되었다. ]

한국이 전면적인 침공을 받았다는 소식이 주일미군에게 전달되자 미군은 크게 놀랐다. 특히 주일 미군 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는 이날 크게 공산군의 침공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했다고 하며 남한내의 미수송기가 북한전투기의 공격에 파괴되었다는 보고를 받고는 더욱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미군이 참전을 주저할 것이라는 김일성의 예측과 달리 맥아더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즉시 미군을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그는 백악관의 눈치를 보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미군을 즉시 움직일 태세였다.

이때까지 주일미군은 북한군의 군사력을 게릴라전을 수행하는데 적합한 정도로 과소 평가했으며, 북한군이 이처럼 전면적인 침공을 감행하리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6월 25일 북한군의 침공사실이 알려지자 맥아더는 즉시 미군의 힘으로 공산군을 저지하고 전력을 다해 반격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당시 미군은 일본을 발판으로 하는 극동공군 (Far East Air Force; 이하 FEAF)을 편성해놓았었는데 비록 이와 같은 본격적인 전쟁에는 대비를 하고있지 않았지만 이 FEAF의 전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FEAF의 주력은 약 360기가 배치된 제트기 F-80 슈팅스타였으며 장거리 호위기 F-82 트윈 머스탱이 32기, A-26 공격기가 26기 배치되어 있었다. 그외에 30기 정도의 B-29 폭격기들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C-47, 54와 같은 수송기가 50여대 활동하고 있었다.

[ 이타즈께 공군기지에서 출격대기중인 F-82G 트윈머스탱, 장거리 호위전투기로 설계되어 P-38을 대체하였다. ]

FEAF의 사령관이었던 패트리지 중장은 6월 25일 전쟁 발발 소식을 듣자마자 전군에 비상대기 명령을 내렸으며, 맥아더의 지시에 따라 침공 다음날인 6월 26일부터 한국내의 미국인들을 구출하기 위한 항공작전을 시행할 것을 명령했다.  이처럼 한국전쟁에서 최초로 시행된 미공군의 항공작전은 북한군의 침공을 저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국민의 철수를 위한 것이었으며, 미군의 수송기 C-54가 야크기의 공격으로 대파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지자 북한공군기의 위협으로부터 철수작전을 엄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날 한국상공으로 출동한 기체는 제트기인 F-80이 아니라 장거리 호위에 적합한 쌍발 프로펠러기인 F-82G 트윈머스탱이었다. 이 F-82G는 전천후 작전이 가능한 장거리 전투기로서 일본의 이타즈께 공군기지에서 출발하여 김포까지 날아가 철수를 엄호한 후 다시 돌아오는 장거리 호위 임무를 수행했다. 

* 공격적인 야크 

[ 드디어 한국상공에 모습을 나타낸 제트전투기, F-80 슈팅스타는 한국전쟁 전기간동안 고르게 활동한 기종이었다. ]

6월 26일 김포와 서울비행장 그리고 인천항에서 미국인들을 안전하게 철수시키기 위한 작전이 시행되었다. C-47 수송기들이 김포로 날아왔으며 이들의 상공에는 일본에서 날아온 F-82G 편대가 초계비행을 하면서 북한 전투기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철수작전은 아무런 방해없이 진행되는 듯 하였으나 오후 1시경 김포상공에 갑자기 나타난 야크-9 전투기 1기가 초계중이던 2기의 F-82G와 마주쳤다. 미군 조종사들은 북한기가 먼저 사격하기 전에는 공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으므로 선회하면서 야크-9을 몰아내려 하였으나 이 야크 전투기는 일직선으로 날아오면서 한차례 기총사격을 하고는 F-82들 회피하면서 선회를 시작하자 그대로 북쪽으로 도주해 버렸다. FEAF는 이날 야크 전투기가 선제 공격을 한 이상 미군의 철수작전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명백하다고 판단하고 이후에는 모든 조종사들이 북한기와 마주치면 즉시 반격에 나서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

[ 한국전쟁 최초의 공중전 승리는 F-82G의 몫이었다. 야크-9에게는 순수한 공중전 능력에서 떨어졌으나 북한 조종사의 수준이 낮아 손쉬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

6월 27일, 북한군의 진격속도가 매우 빨라 벌써 남한의 수도인 서울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에 놀란 미군은 철수작전을 신속하게 마무리하려고 하였다. 11기의 C-47 수송기들이 F-82의 엄호를 받으면서 김포로 날아갔고 이날은 드디어 제트전투기인 F-80 슈팅스타 2개 비행대가 고공에서 엄호를 했다. 이것은 저공의 위협은 F-82가 맡고 고공은 F-80이 맡는다는 하이-로우 믹스의 개념이었다. 

이날의 철수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정오를 넘기면서 다시 북한공군의 야크 전투기들이 나타났으며 5기의 야크-9 전투기들은 전날과 달리 상당히 도전적으로 비행장의 미군 수송기들을 공격해왔다. 이에 대해서 근접엄호를 하던 F-82 전투기 5기가 요격에 나서면서 한국전쟁에서 최초의 공중전이 벌어졌다. 약 5분간의 공중전이 펼쳐졌으며 결과는 북한공군의 완패였다. 3기의 야크전투기가 F-82에게 차례로 격추당했으며 나머지 2기는 도주했다. 사실 공중전만을 위한 성능에서는 야크-9쪽이 더 우세했지만 이날이 공중전이 말해주듯이 북한공군 조종사들은 공중전을 위한 훈련을 거의 받지 못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몇 시간 뒤, 드디어 북한공군의 IL-10 슈트로모빅 공격기 8기가 전투기의 엄호도 없이 서울을 향해 남하해왔다. 그러나 이 공격기들이 서울 상공에 이르렀을 때, 마침 철수작전을 엄호하기 위해서 한강 상공을 초계 중이던 미공군의 F-80 슈팅스타 전투기들과 마주쳤다. 북한기들이 미군의 철수작전을 방해하려한다고 판단한 미군 조종사들이 즉시 공격을 시작했으며 이내 2기의 IL-10이 명중탄을 맞고 추락했고 나머지 IL-10은 전의를 상실한 듯이 일제히 흩어지면서 북쪽으로 도주했다. 이때 F-80 조종사들은 느린 IL-10을 따라잡아 2기를 더 격추시켰으나 철수작전을 지원하는 목적이외에 적기를 북쪽으로까지 추격해서 격추시키지는 말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으므로 서울상공을 떠나지 않고 잔존기들을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이날의 북한기들은 평양의 비행장에서 출동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마도 미군기들이 이렇게 신속하게 한국상공에 나타나리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 북한공군의 IL-10을 공격하는 F-80 슈팅스타, 전투기의 엄호가 없어 손쉬운 먹이감이 되었다. ]

6월 27일 소련의 불참속에 진행된 UN의 긴급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한의 침공으로부터 남한을 보호한다는 결정이 내려짐에 따라 명분을 얻게된 맥아더는 FEAF의 전력을 총 동원하여 북한군의 침공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패트리지 중장은 일단 F-80, F-82와 같은 전폭기이외에 우수한 지상공격기인 B-26을 사용하여 지상공격을 수행하기로 했다.

이날 미공군 조종사들은 일본에서 출발하여 남한상공으로 날아가 지상의 목표물 중 북한군의 것이라고 판단되는 것은 무차별로 공격해도 좋다는 명령을 받았다. 단, 작전 지역은 38선 이남으로 제한 되었다. 그리고 개전 3일째부터 미공군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북한전투기가 나타날 위협은 있었지만 크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판단에 따라 미군기들은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의 상공에 출현하여 그 북쪽에서 움직이는 목표물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 퇴각중인 국군병사들이 지친 몸을 쉬고 있다.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정신력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

특히 북한군의 전차들이 가장 중요한 목표물이었으나 전선으로 향하는 차량이나 기차, 교량 그리고 병력들도 시야에 나타나기만 하면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아직 미군기들의 수가 적었지만 이런 항공공격에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북한군의 손실도 상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군기들의 공격을 받은 목표물중에 피난민이 탑승한 차량이나 기차, 그리고 피난민 행렬과 같은 경우도 포함되어 있어서 민간인들의 피해도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이 또한 전쟁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미공군이 상공에 나타났다고 해도 지상의 전황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침공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었고 북한군은 거칠 것 없는 기세로 남하할 것으로 보였다. 김포 비행장은 6월 28일 오전 북한군의 수중으로 떨어졌으며 따라서 작전이 가능한 전선에 가장 가까운 비행장은 수원 비행장뿐이었다. 

[ 북한 전투기의 기총 공격을 받고 불타고 있는 C-54 수송기 ]

침공 3일째인 6월 28일은 북한공군의 활동이 가장 활발한 날이었다. 전날의 손실에도 불구하고 북한 조종사들의 싸우고자하는 전의는 높아서 이날 오후 1시경 4기의 야크-9 전투기가 수원 비행장으로 침투하여 주기하고 있던 미군기들을 공격했다. 이 공습은 거의 기습에 가깝게 진행되어 미처 준비하고 있지 못하고 지상에 주기중이던 F-82G 1기와 B-26 1기가 기총사격을 받고 대파되었다. 그리고 북한 지상군이 전차를 앞세우고 거침없이 서울로 몰려오는 사이에 오후 6시경이되면서 이번에는 6기의 야크 전투기들이 다시 날아와 지상에서 철수작전을 진행중이던 C-54 수송기 2대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것은 북한 전투기들이 이처럼 적극적으로 공격해오리라고 예상치 않았던 미공군이 잠시 상공의 엄호를 소흘하게 한 결과로서 이날의 피해로 인해서 미공군은 전투기의 엄호가 없이는 절대로 수송기를 한국 상공에 투입하지 말 것을 결정했다. 한편, 6월 28일은 미공군도 적극적으로 북한을 공격하기로 결정한 날이어서 B-26 인베이더 공격기들이 한강상공까지 진출하여 북한군에게 점령된 교량이나 철도역과 같은 주요 목표물들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 격추된 북한공군의 IL-10, 북한공군의 마크가 선명하다. ]

그러나 지상의 전황이 워낙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었으며 북한공군기들의 위협이 불길할정도로 증가하면서 6월 29일부터 미공군이 무엇을 해야 할것인지는 분명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미공군의 작전에 방해가 되는 북한공군을 빠른 시간내에 섬멸하고 동시에 북한 지상군에 대한 공중공격을 강화하여 진격속도를 늦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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