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Act 1. 비극의 씨앗

구름위 2012. 12. 3.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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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 눈물의 한반도

◇ Act 1. 비극의 씨앗

(Seed of tragedy)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2. 3. 1

* 한국전쟁의 항공전을 시작하면서... 

불타는 하늘이 개장한지 만으로는 2년 5개월, 햇수로는 4년으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동안 역사속의 항공전이라는 소재로 미흡하지만 1차대전과 중동전, 포클랜드 전쟁, 베트남전쟁 그리고 가장 광대한 소재인 2차대전의 항공전에 대해서 정리해보았습니다. 애초의 계획은 2차대전을 마무리하고 연이어서 벌어진 한국전쟁의 항공전으로 넘어가려고 했습니다만... 2차대전의 항공전이라는 것이 너무나 많은 내용을 담고있어 아무리 정리를 열심히 하더라도 2-3년은 족히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에 더해서 그동안 불타는 하늘에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던 항공전에 대한 내용이 비어있다는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한국전쟁의 항공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알아보는 기회를 가지고자 합니다. 우리민족에게는 커다란 비극이었지만 1차대전과 2차대전에 이어 본격적인 제트시대의 문을 열어 항공전사에 길이 남을 이정표를 가지고 있는 한국전쟁의 항공전에 대해 연재를 준비하면서 이런 기회가 온 것에 새삼 가슴이 벅차기는 하지만 한국전쟁의 항공전에 대해서 그 동안 내가 너무 모르는 것이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부디 앞으로도 여러분들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기를 기도하며 한국전쟁의 항공전 1회를 시작합니다.

* 비극의 씨앗 

1945년 8월 15일 끝까지 미국과 싸우겠다고 맹세하던 일본은 원자폭탄 2발을 얻어맞고 나서야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했다. 영국이 어느 정도 관련이 되어 있었지만 미국에게 있어서 태평양전쟁은 어디까지나 미국만의 전쟁이었다. 따라서 일본 본토와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도 당연히 미국의 관할 하에 들어와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이것은 전쟁이 끝나갈 때까지만 해도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끝나기 몇 일전, 미국은 대독전선의 동맹국인 소련으로부터 전혀 달갑지 않은 제안을 받았다. 그것은 소련이 미국을 도와 일본군에게 선전포고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지만 손쉽게 한반도라는 먹음직스런 전리품을 챙길 기회를 노렸던 소련은 동맹국인 미국을 돕겠다면서 갑자기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의 북쪽으로부터 T-34 전차부대를 앞세워 밀고 내려왔다. 1945년 8월 8일 소련은 공식적으로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했으며 나음날이 8월 9일 소련 극동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장군이 지휘하는 제 25군은 순식간에 한국의 북쪽으로부터 진격해왔으며 주요 요충지를 신속하게 점령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미 모든 전력을 소진한 일본군은 싸울의사도 없었고 대부분 지리멸렬해서 도주하기 바빴다. 저항다운 저항은 거의 없었으며 소련군은 신속하게 북한지역의 주요 기간시설과 비행장, 도시에 입성했다.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게 전개되자 마음이 급해진 것은 미군쪽이었다. 이대로 놔둔다면 미국으로서는 4 년간 수많은 병사들을 희생시켜가면서 거둔 태평양전쟁의 승리에 대한 전리품을 나누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 그냥 내주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 무렵 미국이 가장 중요시 여긴 것은 일본에 대한 지배권이었다. 만일 소련군이 북쪽에서 일본에 상륙해서 남진한다면 일본 본토를 소련과 나누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해졌다. 이것은 태평양전쟁을 진두 지휘하며 최후의 승리를 눈앞에 두었던 미국의 맥아더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태평양전쟁은 분명히 미국의 전쟁이었으며 일본본토를 점령할 권한은 오직 미군에게만 있다는 것을 강경한 입장으로 천명했다. 하지만 동맹국인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염려한 미 정부는 일본은 미군의 관할 하에 두되 동맹국인 소련의 체면을 고려해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는 소련과 분할하여 점령한다는 것에는 합의를 했다. 단 몇 일간의 참전으로 손쉽게 이런 전리품을 얻게된 소련도 이 제안에 별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미 정부는 일본의 지배를 받던 아시아의 소국 한국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소련과의 마찰만은 피하고 싶었으므로 양측은 지도상에서 대략 남과 북을 절반으로 나누는 북위 38도 선을 그어 그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군이 군정을 실시하며 이는 한국민들이 독립적인 정부를 구성할 능력을 가질 때까지라는 것에 합의했다. 36년간 일본의 가혹한 식민지배를 받아오던 한국민들의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은 일본이 패망했음에도 이렇게 깨어졌다. 강대국들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지도에 금을 그어 두동강을 내버린 한반도는 이제 커다란 비극의 씨앗을 잉태하게 된 것이다.

[ 비극의 씨았이 남긴 잔재... 한국전쟁전의 38선은 휴전선으로 바뀌어 아직도 한반도를 둘로 나누어 놓고 있다. ]

한국이 스스로 자주정부를 구성하도록 돕겠다던 양측은 전혀 양보할 의사가 없었고, 결국 2년간의 혼란스런 시간이 흐르자 북쪽에서는 김일성을 앞세운 공산정부가 탄생했고, 남쪽에서는 미군의 지지를 받는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각기 정부를 이끌었다. 하지만 이들은 말로는 통일이야말로 지상과제라는 것을 외치고 있었지만 서로간에 전혀 상대방을 인정하려들지 않고 있었다.

* 야심가 김일성 

만주지역에서의 항일운동 경력을 내세우고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없어 북한의 지배자가 된 김일성은 권모술수에 밝고 야망에 불타는 인물이었다. 그는 신속하게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친일파들을 색출해 민중 앞에서 숙청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북한민들의 지지도 얻을 수 있었다.

[ 소련 군사고문단의 지원하에 정권을 잡은 김일성, 그의 잘못된 선택으로 한민족 최대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

그는 곧 모든 권력을 혼자서 독식하는 스탈린 식의 독재체제를 이룩했다. 그는 스탈린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북한이 제대로 된 군대를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해 달라고 부탁하여 10000여명의 젊은이를 뽑아 소련의 군사학교에 위탁교육 시켜 미래의 장교들을 양성했으며, 병사들을 징집했다. 소련은 2차대전을 통해 생산한 막대한 전쟁 물자의 일부를 북한에 공급했다. 대독전에서 맹위를 떨친 T-34 전차와 야크 전투기들이 공급되었고 이를 조종할 조종요원들이 소련군사 고문관들에 의해서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1948년 2월 8일 6만명의 정규군 병력으로 이루어진 북한군이 정식으로 발족했으며 김일성은 1948년 9월 정식으로 북조선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의 출범을 선포했다. 

* 혼란에 빠진 남한 

한편, 남쪽의 상황은 북쪽에 비해서 혼란스러웠다. 미군의 군정하에서 많은 정당들이 난립했고 각기 정권을 잡고자 목소리를 높이고 서로를 비방했다. 결국 선거를 통해서 이승만 정권이 탄생하기는 했으나 정부는 나라를 이끌어가기 위해서 미국의 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다. 하지만 미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던 남한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최소한의 경제적인 원조이외에 군사적인 지원은 거의 없었다. 소련이 북한에 대해서 막대한 군사물자를 원조하고 북한군을 양성하고 있다는 사실도 미군의 정보부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무렵, 미군의 관심은 태평양전쟁의 파트너였던 일본에 대한 군정에 집중되어 있었다.

특히 남한 정부에게 있어서 가장 한심한 상황은 친일파를 숙청하지 못하고 오히려 친일파들이 정부의 요직에 자리잡고 큰소리치게 된 것이었다. 미군과 소련군의 진주로 인해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이념의 대립상황이 전개되면서, 위기에 몰린 친일파들이 느닷없이 반공을 외치면서 미군에 잘 보이는 방법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일제치하에서 일본 경찰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사람들이 경찰 간부가 되어 치안을 담당하는가하면 심지어는 북한에서 숙청 당할 위기를 넘긴 친일파들이 남쪽으로 도망쳐 내려온 후 반공투사 행세를 했다. 이들은 만주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귀국한 독립투사들을 온갖 구실을 붙여 괴롭혔으며 자신들에게 위협이 된다 싶으면 공산당으로 몰아붙여 내몰았다. 이런 어이없는 행태에 허탈감을 느낀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북한으로 넘어가는 일까지 있었다. 친일행각을 일삼았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반공을 목청 높여 외치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도피처였던 것이다.

한편, 미군은 남한의 이런 혼란 상황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미국은 4년의 세월동안 빠져들었던 2차대전에서 승전했지만 국민들은 전쟁에 지쳐있었고 더 이상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미국은 유럽에 대한 공산주의의 확장 위협을 저지하기 위한 대책에는 상당히 심혈을 기울였지만 아시아에서는 가장 강력했던 일본을 미국의 영향하에 둔 이상 미국의 안보에는 별로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때까지도 한국은 미국에게는 변방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고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미국의 딘 애치슨 장관은 공산주의의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서 미국이 방어해야할 나라들을 분류하면서 한국을 제외하는 리스트를 작성해서 보고하기까지 했다.

미국의 기록에 의하면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한국정부로부터 북한을 견제하기 위해서 F-51 머스탱 전투기 10대와 전차의 원조를 요청 받았으나 이런 무기들을 제공하면 오히려 소련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미국은 북한과의 경계선에는 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소규모의 병력만이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 폭풍전야 

1949년,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하여 군사물자를 더 지원해 준다면 손쉽게 남한을 무력으로 점령할 수 있다면서 스탈린을 설득했다. 김일성은 스탈린을 대면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적극적으로 전쟁에 대한 지원을 요구했다.

"만일 소련이 전차와 항공기를 지원해 준다면 우리는 한 달 이내에 한국을 완전히 공산화  시킬 수 있으며 전쟁에 지쳐있는 미국은 이 작은 나라의 분쟁에 끼어 들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조심스럽던 스탈린도 미군은 오직 유럽과 일본에만 관심이 있으므로 빠른 전격적인 군사행동으로 미국이 관심을 보이기전에 남한을 점령하면 미군과 마찰을 피할 수 있다는 김일성의 설득에 넘어가 김일성의 군사행동을 승인했다. 사실상 한반도만 공산화시킨다면 섬나라인 일본을 제외한 극동 아시아 전체가 소련의 영향하에 들어오게 될 것이므로 소련에게는 김일성의 주장이 상당히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곧 북한을 적극 지원하라는 스탈린의 명령으로 2차대전에서 맹활약을 했던 수백대의 T-34 전차들과 야포, 항공기들이 비밀리에 북한으로 넘겨졌다. 그리고 이런 장비들로 무장한 북한군 8개사단이 38선으로 포진하여 침공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남한정부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위기를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정부관리들은 북한의 동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대부분 권력과 권모술수에만 관심이 있었다. 심지어는 사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북한을 침공해서 통일하자는 말도 안 되는 호언까지 늘어놓기 일쑤였다. 남한정부는 전혀 북한의 침공징후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드디어 1950년의 여름이 시작되었고, 태양이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6월이 되었다.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김일성은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이루어졌다고 판단하고 남침을 결행할 시간표를 완성했다. 김일성과 소련군사 고문단은 미군의 반응을 최대한 늦추려면 주말을 이용해 공격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10년 전에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던 시간대와 비슷한 것으로 미군의 장성들과 장교들이 대부분 일요일에는 자리를 비우게 마련이므로 미군의 반응을 최소한 24시간 이상 지연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김일성은 최대한 빨리 침공을 결행하기로 했으며 전군에 비상대기 명령을 내렸다. 이로서 한국의 산과 강, 그리고 하늘을 온통 피로 물들일 한국전쟁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가 정한 침공시점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였다.

* 베일에 숨겨진 북한 공군

한국전쟁이 발발 하기 전부터 김일성이 주도한 전쟁 준비에 따라서 북한 정규군이외에 북한 공군이 탄생하게 되었다. 북한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서 소련이 설립한 군사학교인 '슈꼴르이 르스꼬워 야즈이까 (북한측 명칭은 제 1종합군관학교)'에서는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장교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는데 1946년 이 학교에 편입된 신의주 항공대가 북한공군의 모체가 되었다. 1947년 8월 20일 신의주 항공대는 독립적인 비행대로 창설되었으며 이날이 공식적인 북한공군의 창설일로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북한 정부가 공식적으로 조종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지원자들을 모집했지만 이것이 여의치 않았다. 북한지역에서 항공기 조종 경험이 있는 한국인들은 대부분 일본군에서 군용기를 조종했던 조종사였거나 일본 민간기를 조종했던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이 사실이 알려져 친일파로 몰릴 경우 숙청될 것을 두려워하여 북한 공군의 모집에 전혀 자원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지식인들과 부르조아들을 배척하는 북한정부의 정책으로 인해서 조종사로 훈련시킬만한 교육수준을 가진 우수한 인적자원들은 대부분 숨어 지내거나 남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 북한공군의 마크가 선명한 IL-10 슈트로모빅 공격기 ]

한국전쟁이 시작된 후 북한 공군이 단시간만에 전멸했으므로 전쟁 개시 시점을 기준으로한 북한공군의 전력 대해서는 정확한 자료가 남아있지는 않으나 전후에 미군이 여러 가지 정보를 바탕으로 완성한 자료와 최근 공개된 러시아의 자료를 종합해보면 북한 공군은 육군과 달리 완전한 전쟁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개전을 맞이한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 공군의 전체 병력은 약 2000여명이었다고 하며 이중 조종사들은 150명 미만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특히 전투에 참가할만한 기량을 가진 조종사들은 이들 중 과반수를 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훈련시간의 대부분을 지상공격 위주로 교육 받았기 때문에 전투기간의 공중전을 수행할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공군의 조종사들이 충분히 확보되지 못한 것은 위에 전술한 이유에 더해서 단기간에 양성이 가능한 육군과 달리 공군 조종사를 양성하는데 필요한 훈련체제나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을 서둘렀던데 따른 결과로 생각되고 있다.

1950년 북한에 대량으로 공여된 야크-9P 전투기의 일러스트이다. 북한 공군 야크의 도색에 대해서는 몇가지 설이있는데 위의 그림처럼 은빛으로 도장된 기체와 전체가 녹색인 기체, 그리고 회색으로 도색된 기체들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이무렵 북한 공군이 가지고 있던 항공기들은 대부분 소련이 대독전선에서 사용한 2차대전의 잔여기들로서 주력은 2차대전의 명전투기였던 야크-9 전투기들이었다. 미군의 자료에 따르면 북한은 전쟁전에 소련으로부터 총 132기의 항공기를 제공받았으며 여기에는 전투기 70기 (야크-3, 7B, 9 전투기와 La-7)와 지상공격기 62기 (Il-10 슈트로모빅)였다고 하는데, 최근 공개된 러시아의 기록에 의하면 북한공군은 93기의 Il-10으로 이루어진 제1 강습 항공연대와 79기의 야크-9으로 이루어진 제1 전투 비행연대가 주축이었다고 하며 67기의 훈련기와 정찰기, 수송기를 보유했던 제1 훈련 항공연대가 이들을 보조하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러시아측의 자료가 가장 신빙성이 있으나 전쟁 중에 UN군 조종사들이 보고한 자료들에는 그들이 마주친 적기 중에 La-5, Pe-2, 야크-3, 야크-7, Il-2와 같은 다양한 항공기들이 있었으며 심지어는 미국산의 P-39 에어라코브라나 영국산 스핏화이어까지도 있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물론 소련이 2차대전중 상기 기체들을 사용했으므로 이런 기체들이 북한에 공여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으나 이런 목격담을 뒷받침 할만한 사진자료나 신빙성있는 자료가 없어서 사실여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북한 공군의 상황은 육군을 완벽하게 지원할 만한 본격적인 전력을 갖추지는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항공전력에 비해서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월등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 미약했던 한국 공군

한국전쟁이 발발하기전 한국군의 상황은 북한군에 비해서 비교가 안될 정도였다. 물론 육군의 상황도 매우 빈약했지만, 항공전력은 특히 그 정도가 심각했다. 1949년 미국으로부터 원조 받은 20기의 L-4 / L-5 연락기와 미군이 한국정부의 고성능 전투기의 원조요청을 거부하면서 국민성금을 모아 캐나다로부터 구입한 10기의 T-6 Texan 훈련기의 항공기들로서 출발하게된 한국공군은 전쟁에 전혀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으며 이런 항공기들은 전투를 위한 무장을 갖춘 기체들이 아니었으므로 아직 진정하게 공군이라고 불릴만한 전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북한군이 많은 항공기들을 원조받고도 충분한 조종사를 확보하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은 것과 달리 남한에서는 조종사가 조종할 비행기조차 태부족인 상황이었다.

[ 한국군이 도입한 최초의 근대적 항공기인 T-6 택산 훈련기, 본기체는 국민성금으로 도입된 기체로서 초기의 국적 마크를 잘 볼 수 있는 사진이다. ]

더욱이 남한에서 가장 큰 비행장이었던 김포 비행장조차 아직도 미완성의 상태였으며 이 열악한 환경에서 민간 항공기들을 이착륙시키고 있었다. 1949년 7월에 설립된 항공 학교에서는 군용 항공기를 조종할 조종사들을 훈련시키려 했으나 이것 역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소련이 북한에 적극적인 전쟁물자 원조를 했던 것과는 달리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사적인 지원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전체적인 남한군의 전력은 소총과 박격포정도로 빈약하게 무장한 상태였으며 이는 국가방위보다는 치안유지에 적합한 수준이었다. 특히 이는 항공분야에서 매우 심각했다. 전후 기록에 따르면 한국전쟁의 개전 당시 한국 공군의 병력은 50여명이하의 조종사요원을 포함한 1899명이었다고 집게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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