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후퇴 또 후퇴

구름위 2012. 12. 3.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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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 미그 앨리

◇ Act 4. 후퇴 또 후퇴

(Covering the retreat)

* 1.4 후퇴

1951년의 새해가 밝아왔지만 전황은 여전히 불길했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중국군은 7개월전의 북한군보다도 더 빨리 진격해 오는 것 같았다. 12월 24일의 흥남 철수 작전이 성공리에 전개되었을 무렵, 이미 중국군은 서부전선에서 UN군을 거의 38선까지 밀어붙였던 것이다. 이대로라면 서울이 곧 함락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얼마전까지도 곧 통일이 될것이라는 소문에 들떠있었던 시민들은 공포에 질려 대부분 다시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1950년 6월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된후 자행된 끔찍한 대량 학살과 잔학행위를 경험한 서울시민들은 너도나도 필사적으로 보따리를 짊어지고 다시 집을 떠나 얼어붙은 한강물을 건넜으며 뼈속까지 사무치는 추위속에 민족의 대이동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결국 1951년 1월 4일 리지웨이 사령관은 일단 금강지역까지 후퇴하여 전열을 재정비하고 중국군의 보급로를 길게 만든 후 항공전력으로 중국군의 보급로를 차단한 후 대규모 반격을 결행해서 북쪽으로 다시 밀어낸다는 작전을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 F-80의 무장 능력을 보여주는 사진, 이무렵에도 F-80은 여전히 지상군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

지상의 상황이 이처럼 어렵게 되자 미공군은 중국군의 위협에 직면한 김포 비행장에서 작전 중이던 F-86A 세이버들의 미그 앨리로의 출격을 중단하도록 하고 모든 기체를 일본의 지도세 공군기지로 이동하도록 했는데 전황이 어려웠음에도 이런 결정이 내려진 것은 후방에 F-86의 작전이 가능한 비행장이 확보되기 어려웠으며 어차피 김포 비행장을 포기하게 된 이상 더 남쪽의 비행장에서 F-86의 행동반경으로는 미그앨리까지 날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미그-15를 잡는 것이 목적인 이 최신예기를 한국에서 유지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미공군은 혹시라도 자국의 최신예 전투기 F-86이 적에게 포획될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남겨두지 않으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 비행장을 폭격하라!

이 무렵 미공군은 중국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미그-15의 전진배치를 막기 위해서 북한내의 비행기지들을 연일 공습하고 있었다. 만일 북한내에 미그-15의 작전기지가 생긴다면 이는 매우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중국군의 수중에 떨어진 북한내의 모든 비행장들이 공격 리스트에 다시 올라 연일 맹폭을 받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소련공군은 미그-15의 전진배치를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미그-15의 작전기지는 중국의 비행장으로 국한한다는 스탈린의 단호한 명령에 더해서 남쪽으로 전진배치를 하는 경우 미공군의 야간공습으로 커다란 피해를 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만일 소련공군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적극적으로 미그-15를 남진배치 시켰다면 항공전의 양상은 큰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 1951년 미그 앨리를 둘러싼 항공전의 상황도, 안뚱과 신의주 지역에서 미그기들이 출몰했으며 남쪽의 항공기지들이 중국군의 수중에 떨어지면서 미그기들이 전진배치 될 가능성이 보이자 UN군은 이들 비행장에 대해 연일 대규모 폭격을 실시했다. 하지만 미그-15들은 압록강 이남의 비행장으로 진출하지 않았다. ]

이렇게 미그-15는 압록강상공에서는 여전히 위협적이었지만 그 이남 지역으로 거의 내려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남하하는 중국군에게 소련이나 중국군의 공중지원은 거의 없는 상태였고 따라서 전선 상공의 제공권은 여전히 UN군의 수중에 있었다. 결국 남진하는 중국군은 비록 전진을 계속하고는 있었지만 끊임없는 공습에 시달려야 했으며 대낮에는 행동이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런 공습작전의 주역은 주력 전폭기였던 F-51, F-80과 새롭게 투입된 F-84가 담당하고 있었고 B-26과 B-29같은 폭격기들도 여전히 지상군의 지원에나서 맹위를 떨쳤다.

[ B-29 폭격기들의 융단폭격을 받은 후 정찰기의 사진에 잡힌 삼참 비행장, 수백개의 폭탄공이 비행장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보인다. 비행장은 사용불능이 되어 공산군 기체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

그러나 세이버들이 일본으로 물러서자 미그-15의 활동이 점차로 과감해지기 시작했다. 미그-15기들은 F-84나 F-80에 대해서는 확실히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더욱 활발하게 날아올라 미공군의 항공작전을 방해해왔던 것이다. 때로는 소수의 미그-15기들이 외부연료탱크를 장착하고 그들만의 성역이던 미그 앨리를 벗어나 상당히 남쪽인 평양 근교까지 진출해 내려와서 미공군기들을 공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B-29같은 폭격기들의 안전이 큰 위협에 처했으며 F-84와 F-80 전폭기들이 B-29의 호위 임무를 맡아 필사적으로 미그-15에게 저항하여 몇 기의 미그를 격추시키는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연일 미그-15에 의한 피해가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미그-15의 과감한 활동은 소련 조종사가 피격되어 UN군의 포로가 되는 것을 크게 우려했던 소련공군 수뇌부의 결정으로 얼마후에 미그앨리 지역으로 다시 축소되었다. 따라서 남쪽으로 밀고 내려온 중국군은 미그-15의 지원을 전혀 기대할 수가 없게 돼버렸고, 대부분의 경우 UN군의 항공공격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비록 UN군이 지상에서는 중국군에게 쫒기는 신세였지만 전선의 상공에서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미공군의 F-80, F-84, F-51과 같은 전폭기들이 쉴새없이 날아올라 전선의 중국군을 공격하고 보급로를 차단하는 임무에 투입되었으며 이런 맹렬한 공중공격의 성과가 점차로 가시화되면서 항공공격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중국군의 공세는 서서히 둔화되었다. 결국 1951년 2월이 되자 전열을 완전히 정비한 UN군도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준비했으며 이 반격이 성과를 거두어 2월 10일에는 김포와 수원이 다시 UN군에게 다시 탈환되었으며 전선은 38선을 따라서 밀고 밀리는 양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 폭탄을 장착하고 로켓보조장치를 이용해서 이륙중인 F-84, 이 방법은 활주로의 상태가 않좋을 때 이륙을 용이하게 하기위해서 사용한 방법으로 JATO라고 불린다. ]

이제 미공군은 하루라도 빨리 세이버들을 다시 한국으로 파견해야했지만 아직 김포 비행장의 안전에는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여 미공군은 제4 전투요격비행단 예하의 제334 전투요격기대대의 F-86A 전투기들을 대구비행장 (K-2)으로 보냈다. 사실 미공군에게는 수원 비행장 (K-13)과 서울 비행장 (K-15)과 같은 보다 전방에 가까운 비행장들이 확보되어 있었으나 이곳의 활주로의 상태가 나빠서 F-51과 같은 프로펠러기들만이 작전이 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그러나 대구에서는 F-86 세이버들의 작전 반경이 평양 부근으로 제한되므로 압록강 근교의 목표를 향해 북폭에 나서는 B-29의 호위는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것은 미공군에게는 커다란 재앙으로 나타났다.

[ 미그-15의 건카메라에 잡힌 F-84의 격추 순간, 아래 사진에서 연기를 뿜으면서 추락하는 장면이 보인다. ]

3월이 가까워 오면서 봄이 찾아오자 얼어붙었던 압록강이 녹아내리기 시작했고, 이제는 걸어서 강을 건널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압록강변의 교량들이 다시 미공군의 주요 표적으로 설정되었다. 중국군의 보급선은 필연적으로 압록강의 교량들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이 교량은 중국군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물론 미공군은 이 교량을 간과하고 있지 않았으며 반드시 압록강의 교량들을 폭파하라는 임무를 받은 B-29 폭격기 편대가 F-80, F-84의 엄호를 받으면서 연일 출격을 계속했다. 물론 B-29 폭격기들은 대부분 임무를 완수하여 압록강의 교량의 대다수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미그-15의 요격이 연일 계속되면서 무사히 돌아오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피해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1951년 3월 1일은 B-29 폭격기부대에게 있어서는 충격적인 날이었다.

B-29의 편대가 F-80기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압록강을 향해서 북한지역 깊숙이 날아가고 있을 때 갑자기 십여기의 미그-15기들이 나타나 F-80기들을 간단히 뿌리치고 B-29 폭격기들에게 맹공을 가한 것이다. 기습에 당황한 B-29 편대는 완전히 와해되어 폭격작전은 실패했으며 많은 기체들이 피탄되었다. 다행히 미그기들이 단시간의 공격후 사라짐이 따라서 적진에 추락한 B-29는 없었지만 10기의 B-29가 미그-15의 기관포탄에 맞아 크고 작은 손상을 입고 검은 연기를 끌면서 간신히 기지로 돌아왔다. 이 기체들 중 3기는 살아서 돌아온 것이 기적으로 보일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다수의 승무원들이 기상에서 전사하거나 부상당했고, 이런 상황에서는 더 이상 B-29를 출동시킬 수가 없었다. B-29의 호위에는 미그-15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기종 F-86A 세이버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 다시 한국의 하늘로 돌아온 세이버, F-86A 편대가 수원 비행장 상공에서 분열하는 장면이다. ]

결국 미공군은 다급히 F-86을 북쪽으로 전진 배치할 것을 결정해야 했다. 수원 비행장의 활주로가 긴급하게 보강되었으며 대구 비행장의 F-86A 전투기들은 급거 수원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즉시 미그앨리에서 미그기들을 소탕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이로서 한동안 이루어지지 못했던 세이버와 미그-15의 본격적인 대결이 다시 시작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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