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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 미그 앨리 (First Jet Ace) |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2. 9. 21 * 맥아더 해임 1951년 4월초 이미 전쟁이 시작 된지 10개월이 되면서 미국과 다른 UN 참전국들은 이 전쟁을 어떻게든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전세는 다시 수도 서울을 탈환한 UN군쪽이 유리해지는 듯 했지만 다시 반격을 준비하는 중국군의 군세도 강력했기 때문에 이제 또 다시 전진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중국은 무려 36개 사단의 70만 대군을 전선에 배치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임진강을 따라 형성된 서부전선에서 28만의 UN군과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중국군의 참전이후 계속되는 후퇴의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미국 내에서도 이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벌어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에 더 이상 미국의 젊은이들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반전 여론이 거세게 일고 있었다. 그러나 UN군 총사령관 맥아더와 남한의 이승만 대통령은 중국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 낼 때까지 전쟁을 중단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특히 맥아더는 전쟁을 어떻게는 끝내려는 미정부의 소극적인 정책을 강력하게 비난하면서 독자적으로 중국에 대해서 강력한 경고 성명을 발표했다. 사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의 눈부신 성공으로 칭송을 받았지만 중국군의 침공징후를 너무 얕보고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 점과 중국군의 침공이 시작된후 변변하게 반격도 하지 못하고 38선 이남으로 무작정 후퇴한 점 때문에 미군부 내에서도 비난을 받고 있었으며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도 신뢰를 잃고 있었다. 때마침 맥아더가 이런 독단적인 행동을 하자, 이에 격분한 트루먼 대통령은 1951년 4월 11일자로 맥아더를 해임시키고 미국으로 귀국하도록 했다. 결국 일본과 한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던 통치자, 아시아의 정복자, 태평양의 씨저 등 전설적인 명성을 가졌던 역전의 노장군 맥아더는 이렇게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한국전쟁은 더 이상 어느 쪽도 강력한 공격의지가 없는 소강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물론 이후에도 격렬한 전투가 많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전면적인 전진을 하기 위한 전투가 아닌 휴전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전투가 되어가고 있었다.
더구나 이런 상황은 4월 22일부터 1주일간 계속된 중국군의 춘계공세로 인해서 UN군이 큰 위기에 몰리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중국군은 휴전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 서울을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또다시 인해전술로 UN군을 밀어붙이려 했다. 다행히 끊임없는 항공지원과 전선에서 끈질기게 싸운 병사들의 활약으로 서울을 또다시 빼았길 뻔한 위기를 넘겼고 무려 7만명이 넘는 전사자를 낸 중국군이 전의를 상실한후 결국 공세를 멈추고 후퇴하면서 전선은 다시 양군의 대치 국면으로 들어갔다. 이제 병사들도 참혹한 전쟁에 지쳐가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병사들이 이 끝이 안보이는 전쟁이 어떤식으로든 빨리 끝나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반면 통일을 염원하고 있었던 한국군과 국민들은 반드시 이번 기회에 조국이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으며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남의 나라에서 전쟁을 하고 있었던 미군과 UN군은 중국군과 협상을 통해서 이 전쟁을 어떻게든지 마무리 하고자 했다. 물론 이에대해서는 중국군의 입장도 비슷했다. 미국과 중국은 이제는 어떻게 하면 모양새가 좋게 이 전쟁에서 발을 뺄 수 있을 것인가를 연구하고 있었다. 결국 한반도가 통일조국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약소국 한국민의 믿음과 희망은 점차로 멀어지고 있었다. 물론 이 휴전 협상에서 UN군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공산군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항공전력이었다. 미공군은 미군의 항공전력을 총 동원하여 북한지역을 초토화시키면 공산군측이 UN의 휴전조건을 받아들이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항공작전이 안전하게 결행되기 위해서는 미공군의 F-86 전투기 부대가 압록강 상공에서 공산군의 미그-15를 제압해서 미군의 항공작전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했다. 결국 제4 전투요격 비행단의 세이버 조종사들이 얼마나 잘 싸워 주느냐가 관건이었다. [ 미그 앨리로 출격하는 제334 전투비행대 소속의 세이버 조종사들, 소련조종사들의 저항이 거세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사기는 여전히 높았다. ]
* 최초의 제트 에이스 1951년 5월, 미그앨리의 공중전은 계속 치열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전황속에서 드디어 최초의 제트에이스가 탄생하게 되었다. 물론 이미 2차 대전에서 제트전투기 Me 262를 몰고 연합군기를 상대로 에이스에 이름을 올렸던 22명의 독일 조종사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프로펠러기들을 상대로 전과를 올린 것이기 때문에 순수하게 제트기간의 공중전에서 적기 5기를 잡아낸 에이스는 아직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세이버가 한국에 도착한 후부터 1951년 5월 1일까지 미공군은 미그앨리에서 벌어진 격렬한 공중전에서 적어도 20기의 미그-15를 격추한 반면 단 1기의 F-86A만을 상실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러시아측의 반론이 적지 않지만 양측의 주장을 감안하더라도 분명히 미공군의 제4 전투항공단의 세이버 부대가 소련공군을 압도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상황이었다.
4월의 격렬했던 전투이후 주간 폭격작전에서 미그의 요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B-29 폭격기들은 압록강의 교량에 대한 주간 폭격 임무를 중단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5월 중순까지는 미그앨리의 교전 상황은 비교적 소강상태였다. 그러나 미공군의 F-86A전투기들이 계속 압록강으로 진출하여 공산군을 자극하면서 다시 공중전이 재개되었다. 미공군은 세이버 전투기들이 지속적으로 압록강 상공에 전개함으로서 제공권의 우세를 확보하려고 했으며 이들이 미그를 견제하는 동안 다른 전술기들의 북한 지역의 주요 도시와 공업시설에 대한 맹폭격을 동시에 시행하는 작전을 시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공군도 이를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가장 중요한 목표였던 B-29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압록강 상공에서 미공군의 전투기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것만은 용납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결국 1951년 5월 20일, 양측의 전투기 수십 기가 맞붙은 대규모의 공중전이 벌어졌는데 이 전투에서는 양측이 자랑하는 최정예 전투비행대의 공중 충돌이 발생했다. 미공군 제4 전투항공단의 제334 전투요격기대대 소속의 F-86A 세이버들과 소련공군 제196 연대 소속의 미그-15기들이 수 십기 이상의 규모로 대규모 접전을 벌였던 것이다. 이날의 공중전에는 이때까지 총 4기의 미그킬을 기록중이던 제임스 자바라 대위가 참가하고 있었다. 이 무렵 미공군은 한국에 파견된 조종사들이 100회의 출격을 마치면 후방으로 돌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고, 자바라는 4회째의 격추를 기록한 이후 거의 한달이 넘도록 아무런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에게도 돌아가야 할 100회째의 출격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에이스가 되는 것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었던 자바라는 점점 초조해졌지만 교전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으나 마침내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자바라의 편대가 김포에서 발진 대기 중이었을 때 먼저 출격한 세이버 14기가 수많은 적기들과 조우했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즉시 자바라는 13명의 동료조종사들과 함께 세이버의 조종석에 뛰어올라 미그앨리를 향해 전속력으로 날았다. 미그앨리로 날아가는 동안 그들은 교전지역의 세이버 조종사들은 빨리와서 도와달라고 다급하게 외치는 무선교신음을 애타게 듣고 있었다. 드디어 자바라가 소속된 세이버 편대가 미그앨리로 접근했을 때 자바라는 시야에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전투기들이 서로 뒤섞여 싸우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전투상황을 목격한 세이버 조종사들은 전투에 돌입하기 위해서 일제히 외부 연료탱크를 투하했는데, 공교롭게도 자바라의 기체에서만이 우측의 연료탱크가 분리되지 않았다. 만일 이런 경우가 발생하면 즉시 교전지역을 이탈하여 기지로 귀환하라는 지침이 내려져 있었지만 공중전에 굶주려있던 자바라는 이를 무시하기로 했으며 그의 윙맨에게 전투를 시작하겠다고 알렸다.
한쪽에만 연료탱크가 달려있던 그의 세이버는 자꾸만 한쪽으로 조금씩 기울었지만 그는 러더를 이용해서 균형을 잡으면서 교전에 들어갔다. 마침 정면에서 접근해오는 6기의 미그-15기들과 교차하면서 이들이 둘로 갈라지자 자바라는 즉시 선회에 들어가 3기의 미그를 추격했다. 두 번째 교차의 순간 미그기들이 발사한 기관포탄이 세이버의 조종석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자바라는 적극적으로 다시 미그기들을 추격했다. 이 때 미그기 2기가 급선회하면서 자바라의 시야에서 이탈해버렸으며 나머지 1기는 엄호기가 없는 상태에서 편대에서 떨어져 나왔다. 자바라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홀로 떨어져 버린 미그-15의 6시 방향으로 접근했다. 당황한 미그기 조종사는 급선회와 상승, 강하를 반복하면서 자바라의 세이버를 떨쳐버리려고 했지만 침착하게 따라붙는 자바라의 총구를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자바라는 3번의 사격을 가한끝에 미그를 명중시켰으며 그 미그-15에서 불길이 솟아오르더니 곧 검은 연기를 뿜으면서 추락하기 시작했다. 조종사는 미그기가 폭발하기 직전에 낙하산으로 탈출했다. 이 장면은 자바라의 건카메라에 고스란히 잡혔으며 그는 드디어 5기째의 적기를 격추시켜 사상최초로 제트시대의 에이스가 된 것이다. 하지만 상공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으며 자바라가 2만피트로 다시 상승하자 눈앞에 다시 나타난 6기의 미그-15 전투기들이 다른 세이버들과 교전에 들어가기 위해서 산개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기세가 오른 자바라는 눈에 보이는 첫 번째 적기를 추격하기 시작했으며 다시 사격을 시작해서 두 차례의 명중탄을 날렸다. 그러자 미그-15의 동체에서 노란 불꽃과 함께 연기가 나기 시작했으며 적기는 강하하기 시작했다. 짜릿한 공중전의 승리감에 도취된 자바라는 적기의 추락 장면을 확인하기 위해서 출력을 내리고 에어 브레이크를 열어 속도를 줄이면서 조종성을 상실하고 추락해가는 적기를 따라 6500피트까지 강하해 내려가면서 승자의 여유를 만끽했다. [ 6번째 격추를 성공시킨후 미그-15를 따라서 저공으로 내려가면서 승자의 여유를 보이고 있는 자바라, 이순간 그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된다. ] 그러나 이 순간 미그기 2기가 그의 후방에서 자바라의 세이버를 노리고 공격해 들어왔다. 이 때 자바라는 순간적으로 승리감에 도취되어 전투기 조종사에게 가장 치명적인 자만심에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적기가 사격을 시작하자 당황한 자바라는 황급하게 엔진출력을 최대로 올리면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기동들 - 선회와 급상승, 급강하를 반복하며 미그-15기들을 털어 내려고 했지만 그 미그기들은 계속 집요하게 따라붙으면서 사격을 계속했다. 더구나 격추되는 적기를 따라서 속도를 감속한 상태였기 때문에 가속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상황은 점점 절망적으로 되어갔고 그의 머리속에 그가 방금 격추시킨 적기들이 추락하는 모습에 자신의 얼굴이 투영되어 떠올랐다. 하지만 자바라에게는 운이 따라주었다. 마침 상공에서 이 장면을 목격한 F-86A 2기가 즉시 구원에 나서 후미에 따라붙은 미그기들을 몰아내주었던 것이다. 이 절대절명의 위기를 벗어나자 자바라의 얼굴은 흐르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그의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를 자신의 귀로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훗날 그 순간에 대해서 자신이 정말 큰 곤경에 처해있었으며 고마운 동료기들이 없었다면 자신은 아마도 불귀의 객이 되었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 기지로 귀환후 동료들의 축하를 받고 있는 자바라 ] 이 날 세이버 조종사들은 자바라의 2기 격추를 포함해 총 4기의 격추를 기록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미그기의 사격에 피탄된 기체가 몇 기 있었지만 세이버의 손실은 없었다고 한다. 반면 소련측은 이날의 공중전에서 미그-15는 1기가 손실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최소한 3기의 세이버가 격추되었다고 주장했지만 비교적 정확한 미공군의 손실 기록과는 일치하지 않아 이날 공중에서 벌어진 최정예 부대간의 대결에서는 미공군의 제334 전투요격기대대가 승리한 셈이었다. 이는 미공군에게는 상당히 고무적인 것으로서 폭격기의 호위가 아닌 순수한 전투기끼리의 제공권 다툼에 있어서는 소련의 최고 조종사들과의 전투에서도 미공군 조종사들이 여전히 우위에 있음을 과시한 것이었다. 이 전투에서 충격을 받은 듯 미그기들은 이후 10여일 동안 상공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자바라는 2주 뒤 한국에서의 복무를 마무리하고 귀국했다. 그에게는 역사상 최초의 제트에이스라는 영광이 있었다. 그러나 자바라는 동료들과 함께 싸운 한국하늘을 잊지 못했으며 1년 반이 지난 1951년 3월 다시 한국으로 복귀해서 미그앨리로 날아올랐다. 그의 최종 격추기록은 15기로서 이는 한국전쟁 최고의 미군 에이스 제임스 맥코넬의 16기에 이은 2위의 위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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