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검은 화요일의 전주곡

구름위 2012. 12. 3.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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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 미그 앨리

◇ Act 9. 검은 화요일의 전주곡

(Prelude to Black Tuesday)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3. 3. 27

* 남진하는 미그기들 

유능한 소련 조종사들이 대거 출몰하기 시작한 1951년 가을은 양측의 정예 조종사들이 한치의 양보도 없이 대치하고 있었고, 한국전쟁 전기간을 통털어 가장 치열한 격전이 하루도 빠짐없이 압록강 상공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 1951년까지 미그기들이 활동하던 미그앨리의 상황도이다. 가끔씩 외부연료탱크를 장착한 미그기들이 화살표로 표시된 지역까지 진출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안뚱에서 이륙한 미그기들이 전선 상공까지 날아오지는 못했다. ]

이무렵 대폭으로 증가된 미그기의 세력에 더해서 또 하나의 불길한 징후가 나타나고 있었다.  1951년 9월 25일 북한지역을 정찰하던 미공군 정찰기들이 촬영한 몇 장의 사진으로 인해서 미공군 사령부는 큰 위기를 느끼게 된 것이다. 그 사진들은 압록강 이남 지역에 위치한 태천, 남시 그리고 삼참 지역에 건설중인 3개 비행장의 사진으로 몇 개월 전 미공군의 공습으로 대파되었던 비행장들이 다시 빠른 속도로 복구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사진을 정밀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대규모로 설치된 대공포 진지들과 수많은 트럭들이 진입하는 광경이 포착되었으며 2km에 달하는 직선의 활주로에는 많은 노동자들이 있어 포장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미공군 정보당국자들이 이 사진을 분석해서 내려진 결론은 매우 우려되는 것이었다. 공산군이 압록강 이북의 미그기들을 북한지역으로 대거 진출시키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볼 수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 북한지역의 비행장을 나타낸 전개도로서 여기서 붉게 표시된 남시, 태천, 삼참 지역의 비행장들이 미그기를 운용할 목적으로 건설되는 것으로 보였다. 여기서 이륙하게되면 미그-15는 지상전이 벌어지는 전선 상공까지 날아올 수가 있었다. ]

즉시 정밀 정찰비행이 하루에도 여러 번씩 시행되었으며 정찰기들이 촬영한 사진들은 이 비행장들의 활주로가 분명히 제트전투기의 이륙이 가능한 것임을 확인시켜 주었으며 이것은 미군에게는 정말로 심각한 위협이었다. 만일 공산군이 미그기들을 압록강 이남의 이들 비행장으로 진출시켜 출격에 나선다면 미그기들의 행동반경은 평양 이남으로까지 확장될 것이고 이렇게 되면 북한상공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면서 공산군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전선을 지원하던 UN군의 항공기들이 미그의 위협에 노출되므로 항공작전이 크게 위축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상전에서 수적으로 공산군에 열세였던 UN군에게 미그기의 위협으로 인해서 항공지원이 줄어든다면 최악의 경우 전선의 붕괴까지도 우려될 만한 상황이었다.

사실 미군의 이런 우려와 달리 소련공군은 압록강 이남의 비행장까지 소련 조종사들을 진출시킬 계획이 없었다고 한다. 제303, 324 항공사단으로 이루어져있던 소련공군의 파견부대는 안뚱과 묵덴, 타퉁코 등지의 중국영내에서만 작전을 계속하도록 명령받았으며 지금까지처럼 평양과 원산을 있는 라인의 남쪽으로는 진출하는 금지했고, 서해바다와 동쪽으로의 비행도 금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북한지역에 건설되는 비행장에 진출할 예정이었던 미그기들에는 중국공군의 조종사들을 주축으로 소수의 북한 조종사들이 탑승할 예정이었다. 중국공군은 전선에서의 UN군의 항공전력으로 인해서 자국군이 큰 손실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전선상공으로 미그기를 날려보내기를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중국과 북한의 조종사들은 미공군의 세이버 조종사들과 공중전을 벌이기에는 역부족이었으므로 만일 이들 비행장이 미공군의 공격을 받는 경우에는 북쪽에서 날아온 소련 조종사들이 기지상공의 방어를 맡아주기로 되어 있었다.

비행장을 쑥대밭으로!

하지만 미극동공군 사령관이었던 웨이랜드 장군은 소련공군이 남쪽으로 진출하려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에게 북한지역에 건설중인 이들 비행장은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고 그는 이 비행장들이 가동에 들어가기전에 막강한 미군의 항공전력을 동원해서 쑥대밭을 만들어 놓기로 결정했다. 사실 몇 개월전에도 이 지역의 비행장을 B-29 폭격기들이 폭격해서 대파시킨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번에도 순조롭게 작전이 진행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당시와는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그 무렵에는 아직 소련공군의 미그기들이 압록강 상공에만 국한해서 출현하고 있었으므로 B-29들이 저항을 만나지 않았지만 이제는 이지역도 미그기들의 사정권 안에 들어있었기 때문에 만일 미그기들이 대거 출현한다면 B-29 폭격기들에게 큰 피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었다.

[ 가데나 기지에서 촬영된 B-29의 노즈아트, 기체의 하부가 검게 도색된 것은 야간 작전을 위한 것이다. ]

미공군도 이점을 고려해서 F-84나 F-80과 같은 고속 전폭기들을 동원해서 몇 차례의 공격을 감행했지만 폭탄의 양이 적어 비행장들에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으며 그때마다 공산군은 하루밤이면 피해를 복구했다. 게다가 저공비행시에 비행장에 배치된 무수한 대공포화의 저항으로 공격기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고 이 경우에는 활주로나 시설물에대한 정밀 공격이 매우 힘들었다. 결국 이 비행장들에 큰 타격을 입힐 방법은 B-29 폭격기들을 대량으로 출격시켜 대공포화의 위험이 적은 고공에서 많은 폭탄을 쏟아 붓는 방법이 유일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한편, 웨이랜드 장군으로부터 비행장 공격을 명받은 폭격기 부대장 죠셉 켈리 준장은 몇 개월 전에 시행되었던 압록강 지역의 주간폭격에서 미그기들의 요격을 받아 쓰라린 경험을 한적이 있었으므로 그의 부하들을 대낮에 북한 지역으로 출격시키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는 아직 미그기들이 야간에는 출격을 하지 못한다는 것에 주목하고 우선 야간공습을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작전은 즉시 결행되었으며 1951년 10월 13일 밤의 어둠속에서 제307 폭격전대의 B-29 폭격기들이 일본의 가데나 공군기지를 출발해서 삼참 비행장을 공습했다. 100파운드 폭탄이 총 280발 투하되었고 지상에 퍼지는 붉은 섬광에 만족한 조종사들은 기수를 돌려 귀환했다. 그러나 다음날 정찰기가 촬영한 사진은 매우 실망스러워서 겨우 24발의 폭탄이 활주로 근처에 떨어졌을 뿐이며 그나마 치명적인 손상을 가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다음의 몇 일간에도 B-29의 야간공습은 계속되었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더구나 정찰기들이 촬영한 사진에서는 비행장은 폭격의 피해에서 금새 복구되었으며 그 동안 비어있었던 비행장에 몇 기의 미그-15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제 몇 일 이내에 이 비행장들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지 않는다면 이 비행장들의 미그-15 전투기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것으로 보였다.

[ 기총 조준선 점검중인 F-84E ]

마음이 급해진 켈리 준장은 그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절감했다. 결국 그는 다소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B-29 폭격기들을 주간 공습에 투입해서 단숨에 비행장을 파괴하기로 결정했다. 질질 끌지말고 단숨에 끝장내버리자는 켈리 준장의 명령으로 이번 주간 공습작전에는 미극동공군의 3개 B-29 폭격기전대가 모두 투입되었다. 우선 제98 전대는 태천 비행장을 담당하고 제307 전대는 남시의 비행장을 그리고 삼참 비행장은 제19 전대가 각각 맡기로 했다. 이번 공습에는 총 27기의 B-29 폭격기들이 투입될 예정으로 공격은 한 비행장에 대해서 2회가 예정되어 오전 10시와 오후 3시에 결행될 것으로 하고 각 비행단은 9기의 폭격기를 공습에 투입하되 목표지역에서 3기씩으로 편대를 구성하여 3개 편대가 목표지역에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돌입해서 3연속으로 폭격을 가해 비행장을 박살내기로 했다.

켈리 준장은 웨이랜드 장군에게 이번 공습작전에는 반드시 대규모의 전투기들이 엄호를 위해 따라주어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웨이랜드도 이에 동의하여 제4 전투비행단의 동원 가능한 모든 F-86 세이버 전투기들이 호위를 위해 출동함과 동시에 F-84 썬더제트 전폭기들이 따라 나서기로 했다. 그러나 F-84가 이런 폭격기 호위 임무에 동원되는 것은 F-84가 우수했기 때문이 아니라 출격 가능한 F-86의 숫자가 불충분했기 때문이었다.

[ 항모에 탑재되어 태평양을 건너고 있는 F-86E 세이버, 해수에 의한 손상을 방지하기위한 포장이 되어있다. ]

사실 이 무렵 미공군은 세이버의 최신형인 F-86E를 생산되자마자 본토에서 실어와서 제4 전투비행단에 보급하고 있었는데 이 F-86E형은 수평미익 전체가 움직여서 기동성을 향상시키는 기술 (all flying tail)을 적용하고 있었으며 APG-5C 레이더를 적용한 신형 레이더 조준식 사격조준장치를 장비하고 있어서 미그-15와의 공중전에서 보다 나은 성능을 보일 것으로 기대되었다. 게다가 미그기들의 숫자가 너무나 불길할 정도로 증가된다는 정찰보고로 인해서 부족한 세이버의 숫자를 늘리기로 했으며 이에따라 1951년 9월에는 F-80C를 장비하고 지상공격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제51 전투비행단을 F-86E로 기종전환시켜 제4 전투비행단과 함께 제공임무에 투입하도록 했지만, 조종사들의 기종전환과 충분한 기체수의 확보는 1-2개월의 시간이 필요했으므로 아직까지는 제4 전투비행단의 F-86A/E 세이버들이 미그기들에 맞서 싸워야 했다.

[ 수원기지에서 이륙중인 제51 전투비행단의 F-86E 세이버, 이 부대의 가세로 한국전쟁에서는 제4 전투비행단과 제51 전투비행단의 2개 전투비행단이 미그기들에 맞서게 되었다. ]

미공군은 우선 34기의 F-86 전투기들이 압록강과 목표지역의 상공 사이로 먼저 출동하여 미그기들이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도록 하며 폭격기들의 전장정을 따라주는 근접 엄호는 F-84가 맡는다는 전술을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이번 작전에 동원된 F-84 썬더제트의 조종사들은 이전까지 교량폭파, 보급선차단, 근접 화력지원등의 지상공격 임무에만 투입되고 있었기 때문에 전투기끼리의 제공전투에는 대부분 경험이 없었고 공중전에 대비한 훈련도 부족한 상태였다. 이런 조종사들이 갑작스럽게 고공에서 미그-15와 전투를 벌이라는 임무에 동원된 것이다. F-84 전폭기들은 1951년 4월의 압록강 교량폭파 작전에서도 비슷한 임무에서 미그-15에게 크게 열세를 보인 적이 있었으며 객관적으로 볼 때도 직선익의 F-84가 후퇴익의 미그-15에 비해서 속도와 상승률에서 크게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종사들은 자신들을 사지로 몰아넣는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F-84가 미그-15를 잡으려면 B-29 편대를 따라가면서 미리 더 높은 고도를 확보하고 있다가 미그-15가 B-29에게 접근할 때 급강하하면서 공격하는 방법이 유일한 전술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미그-15가 이미 최고속도로 접근해오거나 비슷한 고도에서 공격해오면 속수무책일 수 밖에는 없었다.

검은 화요일의 전주곡

여하간 작전을 결행되기로 했으며 우선 10월 18일에 최초의 작전이 시작되었다. 우선 1개 비행단을 시험삼아 출격시키기로 했으며 F-84 썬더제트기들의 근접 엄호하에 제19 폭격전대의 B-29 폭격기들이 삼참 비행장을 공습했는데 이날 이상하게도 미그기들이 전혀 출현하지 않았다. 따라서 폭격은 성공리에 시행되었으며 일기도 양호하여 대낮의 탁트인 시계에서 정확하게 목표지역을 조준할 수 있었다. 첫 공습에서 총 306발의 폭탄이 투하되어 삼참 비행장의 활주로를 벌집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공습의 성공으로 켈리 준장과 부관들을 크게 고무되어 후속 작전을 계속 시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어진 오후 3시의 2차 공습은 실패였다. 제98 폭격전대의 B-29기들은 태천 비행장을 향해 비행하고 있었으나 호위기로 따라나올 예정이던 F-84 썬더제트기들이 시간착오를 일으켜 랑데뷰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만일 전투기들의 호위가 없으면 목표지역으로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있던 B-29 조종사들은 태천 비행장으로 접근하는 것을 포기하고 이런 경우 폭탄을 투하하기로 정해진 2차 목표에 폭탄을 투하한 후 기수를 남쪽으로 돌렸다.

[ 일본의 가데나 기지에서 출격 대기중인 미극동공군의 B-29 전대 ]

결국 태천 비행장에 대한 공습은 3일후인 10월 21일 다시 시행되었다. 그러나 오전 10시의 1차공습에서 이번에도 F-84 기들과 B-29기들이 예정지점에서 조우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B-29 조종사들은 전투기의 호위가 없는 상태에서 위험한 미그앨리 내로 접근하는 것을 포기하고 기수를 돌려야 했다. 오후 3시가 되자 2차 공습이 시작되었으며 이번에는 총 24시의 F-84 전폭기들이 성공적으로 합류하여 태천 비행장 공습작전이 예정대로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목표지역의 상공에 도달할 때까지는 미그의 출몰이 없었다.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다. 그러나 폭격기들이 비행장을 포착하고 폭탄을 떨어뜨리기 시작할 때 갑자기 30기가 넘는 검은점이 북쪽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B-29 승무원들이 미그가 나타났다고 소리지르기 시작했고 F-84 전폭기들은 즉시 산개하면서 돌진해 들어오는 미그기들을 향해 기수를 돌렸다. 그들은 어떻게든지 미그-15기들을 물고 늘어져 B-29 폭격기들로부터 떨어뜨려 놓고자 했다. 그러나 미그-15기들은 이미 속도가 붙은 상태였으므로 선회해 들어오는 F-84를 쉽게 따돌릴 수 있었다. F-84가 후미에 붙으면 미그-15기들은 급각도의 상승코스로 들어가 F-84를 털어냈고 F-84를 따돌린후에는 다시 고속으로 급강하해서 공격각도를 잡았다.

B-29기들은 허둥지둥 기수를 돌려 도주하고자 했지만 이미 미그기들이 상공에서 집요하게 공격해왔다. 9기의 폭격기 중에서 대공포화에 손상을 입었던 후미의 기체에 3기의 미그기들이 달려들어 가공할 기관포를 계속 명중시켰다. 결국 이 B-29는 화염에 휩쌓여 서쪽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승무원들은 기체를 어떻게든지 컨트롤하고자 했지만 기장이 기체를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려 전원 낙하산으로 탈출했으며 다행히 해안선 가까이에 낙하하여 미해군에 의해 모두 무사히 구출되었다.

[ 위세도 당당하게 북한으로 날아가는 제19 폭격전대 소속의 B-29 폭격기들, 그러나 속도가 느린 B-29는 고속 제트기인 미그-15의 거센 요격에 직면하여 큰 손실을 입게된다. ]

약 15분여의 전투후에 미그기들이 갑자기 구름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고 전투는 끝났다. F-84 조종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3기의 B-29가 심하게 피탄되어 검은 연기를 뿜으면서 간신히 비행하는 모습을 보았다. F-84의 호위하에 이들은 간신히 돌아올 수 있었으나 기체의 손상이 심해 폐기처분을 해야했다.

소련공군은 3일전의 1차공습에서는 전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이날의 미군작전을 분석해서 미공군이 똑같은 패턴으로 다시 비행장을 공습해올 것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으며 전투기들을 크게 2파로 나누어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레이더에 미공군의 접근이 포착되면 1파는 먼저 출격하여 F-86 세이버들의 발목을 붙잡아 놓고 2파가 교전지역을 우회해서 비행장상공으로 날아가 B-29를 공격한다는 전술을 미리 준비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 외부연료 탱크를 장착하고 출격준비중인 F-84E, 지상공격에는 매우 훌륭한 성과를 나타냈지만 제공전투에서는 미그-15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

수많은 미그기들이 요격에 나섰음에도 F-84는 격추된 기체가 없었는데 이것은 소련조종사들이 의도적으로 F-84와의 교전은 피하고 B-29만을 적극적으로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F-84를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의 전투에서 F-84 조종사들은 자신들의 무력함에 허탈해했으며 미그-15를 방어함에 있어서 F-84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그들은 미그기를 잡아주어야 할 F-86 조종사들이 나타나지 않은 것에 분개했지만 이때 원거리 방어임무를 맡았던 F-86 전투기들도 압록강 근처에서 미그기들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B-29 폭격기에까지 신경을 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날의 실패는 대재앙의 전주곡에 불과했다. 연이어 결행될 다음 공습에서 미공군은 개전이래 최악의 손실을 입게되는데 이것이 미공군의 전사에 '검은 화요일'이라고 기록된 10월 23일의 전투였다.


   

 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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